국가보훈처(처장 김 양)는 광복회·독립기념관과 공동으로 박동완 지사를 12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
선생은 1885 12월 27일 경기도 양평군에서 박형순(朴馨淳)의 막내아들로 태어나 비교적 여유있는 가정 환경 속에서 다섯살 때부터 한문을 배우다가, 소학교에 입학하여 신교육을 받기 시작하였으며 10대 후반에 한성중학교를 거쳐 한성외국어학교에 진학, 영어를 전공하였고 1911년 학교가 폐쇄되자 배재학당 대학부로 전입하였다.
선생은 1915년 창간된 《기독신보》에 편집위원으로 참여하면서부터 기독교계를 배경으로 사회활동을 시작하여 정동제일교회에 전도사 및 조선중앙ymca 위원 등으로 활동을 하였다.
1919년 2월, 박희도의 권유로 3·1 만세운동에 합류한 선생은 2월 27일 낮 정동제일교회에서 열린 기독교계 대표자회의에 참석하여 민족대표 33인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고, 3월 1일 오후 2시 종로 인사동의 태화관에서 열린 역사적인 독립선언식에 참석하여 독립선언서를 회람하고 만세 삼창을 외친 뒤,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보안법 및 출판법 위반으로 2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기독신보》,《신생명》등 기독교계 언론을 통해 언론 계몽활동에 전념하다가, 1925년 4월《신생명》이 폐간되자 흥업구락부 조직에 참여하였고, 1927년 1월 이상재, 안재홍과 함께 신간회의 발기인으로 참여, 본부 상임간사를 맡아 회의 실무를 관장하였다.
1927년 12월, 중국 동삼성에 거주하는 백만여명의 동포들이 중국관헌으로부터 귀화를 강요당하며 박해를 당하자, 각 사회단체의 주요 인사들이 상설기관으로 『재만동포옹호동맹』을 창립하였는데, 선생은 중앙상무집행위원으로 1928년 1월 만주의 봉천성(현 요녕성)과 길림성 일대를 돌며 동포들의 상황을 조사하고 돌아왔다.
1928년 중반 호놀룰루가 있는 오아후 섬의 한인기독교회의 초청으로 초대 담임목사로 부임하여 목회에 힘쓰는 한편으로, 교회 부설 한글학교를 확장하여 한국의 역사와 문화까지 두루 가르치며 교포 2세들의 민족의식을 일깨웠다.
이렇게 만리타향에서 민중의 목자로 활동하던 선생은 1941년 초 병을 얻어 그해 2월 23일 이국 땅 하와이에서 숨을 거두었다. 선생의 유해는 한 달 뒤 가족과 친지가 있는 국내로 돌아와 3·1운동 당시 고락을 함께 했던 동지 함태영 목사의 집례로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가 1966년도 현재의 국립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이장되어 잠들어 계시다...
<자료출처 : 안동 보훈지청>
2008-12-10 10:23:34 /
신윤미 기자(yoonmi@ugn.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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