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청원루(淸遠樓)-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99호(1985.10.15) 소재지 : 경북 안동시 풍산읍 소산리 87
서수용/한국고문헌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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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원루(55.0×38.0cm) Oil on Canson Paper |
권준 화백의 화실에서 10호 크기의 청원루 작품을 보았다. 익숙한 구도에 친숙한 청원루 그림이었다. 그런데 평소와는 달리 그 작품은 강한 흡인력이 있다고 느껴졌다. 이는 아마도 그 건물에 켜켜이 쌓여 있을 충효절의(忠孝節義) 정신과 그와 관련된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당당한 그 모습은 마치 척화(斥和) 대신(大臣)으로서의 면모를 보는 듯했다. 희미하게 처리한 현판은 평소 청음 선생이 가장 존경했던 학자인 주자(朱子)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다. 회옹(晦翁)이라는 기록이 그를 증명한다.
세상에서 안내되고 있는 청원루에 대한 설명은 대략 다음과 같다.
중종(1506∼1544) 때 김번(1479∼1544)이 여생을 보내기 위해 지은 집이다. 그 후 100여 년이 지난 인조23년(1645)에 청음 김상헌이 누각 형식으로 다시 지었다. 김상헌은 1636년 병자호란 때 인조가 굴욕적으로 굴복하는 것을 매우 반대한 척화주전론의 우두머리로, 청군의 지원병 요청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청나라 심양으로 압송되었다. 그곳에서 풀려난 뒤 이 누각을 지었는데, 이름도 청나라를 멀리한다는 뜻으로 '청원루'라 했다.
원래 2채의 건물로 41칸이나 되었으나 1934년 한 채가 홍수로 허물어져 현재 앞면 7칸짜리의 건물만 남아 있다. '안동(安東) 김씨(金氏) 소산종회(素山宗會)'라는 현판이 붙어있다.
위의 글은 기본 정보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미흡한 그 무엇이 있다.
청음 김상헌 선생의 제택(第宅)이었던 안동 소산마을의 청원루(淸遠樓)보다 앞선 시기에 역사상 그 이름을 드날린 곳이 있었다. 부안 읍성의 동문이 청원루였는데, 점필재 김종직이 읊은 시도 남아 있다.
청원루에서 밤에 읊다(淸遠樓夜吟)
百重堆案困炎蒸
淸遠樓中夜景澄
一臂雪袍仍倚柱
家家人語績麻燈
문서는 백 겹이나 쌓였고 더위는 찌는 듯
청원루 위에는 밤경치가 맑기도 하다네
흰 도포 한쪽 팔을 기둥에 기대고 섰노라니
집집마다 등잔 아래 길쌈하는 말소리 들리네.
전라북도 부안 고을을 찾고 한밤중에 동문(東門) 문루(門樓)에 올라 본 경치와 느낌을 담담하게 그려낸 작품이다. 점필재는 안동 소산 출신의 깨끗한 벗 한사람과 깊은 우정을 나누었는데 그 분이 바로 청음의 종5대조인 보백당 김계행이다.
이 시의 내용만 보면 청음의 제택인 안동의 청원루를 노래한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청음에게 점필재는 139년 선배이다. 청원루의 원래 주인인 서윤공 김번을 기준으로 본다 해도 점필재는 종조부의 친구에 해당된다.
다시 정리하면, 청음을 기준으로, 청음 증조부의 종조부인 보백당의 친구가 점필재다. 따라서 점필재는 그 후대에 건립된 안동 소산의 '청원루'를 볼 수 없었다는 결론이다.
제택의 명칭인 '청원(淸遠)'이란 단어는 '맑고 아득한 모양'을 뜻한다. 문루에 올라 조망했을 때 그 상쾌한 느낌을 그렇게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청음의 제택인 청원루에 이르면 그러한 평화적 의미는 일순간 사라지고 저 비분강개하고 전의에 불타는 듯한 절규가 메아리친다. 몇 해 전 후손들에 의해 앞마당에 조성된 청음 선생이 남긴 유일한 시조비에 시선이 머물기라도 하면 더욱 그러한 감정이 복받친다. 문화재 안내는 '청나라를 멀리하라'는 의미를 드러내 적고 있다. 그러나 그에 더해서 '청나라에게 당한 치욕을 한시라도 잊지 말아라' 라고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필자는 청원루 솟을대문 오른편에 게판되어 있는 '안동 김씨 소산종회'라는 현판을 눈여겨 본 적이 있다. 소산은 저 현달했던 서윤공 이후의 경파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진했던 것도 사실이다.
한성판관 김계권의 다섯 아들 가운데 다섯째 아들이었던 장령공 김영수의 삼형제 가운데 평양서윤을 지냈던 둘째인 김번의 후손을 중심으로 내려온 경파는 김생해와 김대효, 김극효를 거쳐 선원 김상용, 청음 김상헌 형제가 나면서 일대 전기가 마련되었다. 그리고 청음의 손자 대에 이르러 소위 창자 항렬에 세상에 널리 드러난 여섯 사람이라는 의미로 '육창(六昌)'이 나와 한 시대를 풍미했다.
향파(鄕派)라는 개념은 경파에 대한 상대적인 의미이지만 이들은 안동 김씨의 본향을 굳건히 지킨 공로자였다. 더구나 경파가 장동화주(壯洞華?, 서울 장동을 중심으로 드날린 명문 씨족) 또는 경화사족(京華士族)으로 흐를 때에도 향파는 선비가의 청백 정신을 굳건하게 지키며 그 초심을 잃지 않았다.
향파는 보백당 김계행의 후손으로 길안 묵계에 세거하고 있는 씨족(居默派)과 삼당 김영의 후손으로 본향인 풍산 소산을 굳건하게 지키고 있는 소산파(素山派), 김영의 삼형제 가운데 셋째인 진사공 김순을 중심으로 한 서촌파(西村派)가 있다. 그 중심에 소산파가 있다. 그래서 이 현판이 청원루 대문에 걸린 의미가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청음 김상헌은 서윤공 김번의 맏손자집 가통을 이은 분이다. 그런데 그 자신은 서윤공 손자 대에 이르러 삼형제 가운데 셋째집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맏이가 선원 김상용이다. 그런데 그는 맏집으로 양가를 가게 된다. 그래서 자신은 서윤공의 맏집 가통을 이었다.
청음은 국가의 원로였을 뿐 아니라 문중의 큰 어른으로서 길이 계승해야할 종사(宗事)의 기틀을 다진 인물이기도 했다.
麗代論功在史編
煌煌吾祖冠張權
一時帶礪還餘事
淸白傳家八百年
고려 인물 공 논한 게 역사에 있거니와
찬란해라 우리 선조 장씨 권씨 위에 있네
한 시대에 공신이 되신 거야 되레 일부니
청백함을 전해 온 지 팔백 년이 되었는 걸.
시조(始祖)이신 태사공(太師公)의 일을 읊어서 동종(同宗)의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다(詠始祖太師事 示同宗諸君)는 제목으로 청음집 권3에 실려 있는 이 시는 안동 김씨들에게는 가훈과도 같이 사랑을 받는 작품이다.
제목에 드러난 바와 같이 청음은 조상을 극진하게 모셨으며 후손들이 조상의 훌륭한 얼을 잘 계승시키려는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한성판관을 지낸 5대조(金係權)의 묘소가 있는 역동묘소에 대한 회전입의(會奠立議)도 청음이 1637년에 안동으로 낙향했을 때 수립했다.
안동 김씨의 시조인 태사 김선평은 고려 개국의 일등공신이었다. 그래서 조선 후기까지 결론이 없이 지속적으로 논쟁을 야기했던 세 분의 태사에 대한 위차(位次) 문제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김태사의 공이 으뜸이라는 의미로 '관장권(冠張權)', 즉 장태사나 권태사보다 우위라는 표현을 적극적으로 시에다 담았다. 그런데 시는 전구에 이르러 극적인 반전이 이루어진다. 그러한 크나큰 공적도 결국은 '환여사(還餘事)' 즉 '도리어 여사'라는 것이다. 여사란 '그다지 요긴(要緊)하지 않은 일'이란 의미다. 즉 신민(臣民)으로서 당연히 해야 했을 일이라는 겸사(謙辭)다.
그렇다면 그에 더해서 더욱 중요한 일은 무엇이란 말인가? 결구에 그 해답이 이어진다. '청백전가팔백년(淸白傳家八百年)'이다. 고려 개국으로부터 청음 당시까지 왕조가 바뀜은 물론 800여년의 세월까지 흘렀다.
청음은 그러한 시점에서 시조의 그 혁혁했던 개국공적을 자랑하는 것에 우선해서 시조 이래 선조들이 끼쳐왔던 청백(淸白)한 정신을 기려서 실천하고 이를 후대에 물려줄 것을 희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를 지은 상황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100여년이 흐른 지금도 가을이면 시조묘단에서 경건하게 향화가 이어지고 있다. 300여년 전인 청음 당시에도 안동의 김태사 묘단에서는 그렇게 시조의 얼을 기리는 의식이 거행되었을 것이다. 그 자리에는 향파는 물론 평소에는 한시대를 풍미했을 나라의 원로들, 국사에 바빴을 조정의 벼슬아치들 그리고 각 지방 고을의 수령 방백들이 한결같이 세속적인 계급을 잊고 문중의 항렬과 연치(年齒)에 따라 질서정연하게 유사(有司) 분정(分定)에 따라 자리에 나아가 행사에 참여했을 것이다.
시 제목에는 '동종(同宗)의 여러 사람들에게 보이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는 이 시를 지은 분명한 목적인 셈이다. 단순한 자신만의 감회가 아니라 문중의 여러 사람들을 주지시키고 일깨우기 위한 의도에서 지은 것이다. 청음은 이처럼 사려 깊은 문중의 큰 어른이었다.
그렇다면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청원루를 그 막대한 경비와 노력을 경주해 중건한 의도 역시 간단치 않을 것이다.
청음에게는 이미 경기도 한강변에 있는 석실(石室) 지역이 익숙했다. 그에게 석실은 고향이었다. 그의 문집 연보를 보면, 1570년 6월 3일 와가인 동래 정씨 임당 정유길의 집에서 태어난 뒤 52세 봄에 '양주(楊州) 석실(石室)로 돌아오다'를 시작으로, 56세, 64세, 67세, 68세, 76세에 석실로 돌아온다. 그리고 83세에 석실에서 세상을 떠났고 그곳에 지금까지 잠들어 있다.
석실은 청음에게 어떤 곳이었을까? 청음의 심사를 엿볼 수 있는 편지 한 통이 문집에 올라 있다. 1640년(71세) 안동에 있을 때 쓴 편지다.
도미강(渡迷江) 연안에 새로 초당(草堂)을 지었다고 하시는데, 내 집 석실(石室)과의 거리가 몇 리밖에 안 될 정도로 가까운 곳이네. 그런데도 이내 몸은 영남에 유락되어 있으면서 멀리 고향 산을 바라보노라니, 마치 타국 땅에 와 있는 것만 같네. 늙어 병든 여생이 무슨 수로 다시금 낚시질하는 바위와 고기 잡는 배 사이에서 조용히 마주 대할 수 있겠는가. 단지 그리운 마음만 더 불어날 뿐이네.
聞新?草堂於渡迷江岸 此去弊廬不數里而近 此身流落嶺外 瞻望故山 若在異國 老病餘生 何由更得從容於漁磯釣艇之間也 只增耿耿
안동에 낙향해 있으면서 후배인 신익성(申翊聖, 1588~1644)에게 답한 편지다. 그는 상촌 신흠의 아들이며, 선조(宣祖)의 부마(駙馬)이기도 하다. 자는 군석(君奭), 호는 낙전당(樂全堂), 동회거사(東淮居士)이며,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평산(平山)이다. 척화오신(斥和五臣) 가운데 한 사람이다. 척화오신은 신익성(申翊聖)·신익전(申翊全)·허계(許啓)·이명한(李明漢)·이경여(李敬輿) 등 다섯 사람인데, 청음과 정치적으로 입장을 같이한 충신들이다.
이 편지에서 눈여겨 볼 대목은 "그런데도 이내 몸은 영남에 유락되어 있으면서 멀리 고향 산을 바라보노라니, 마치 타국 땅에 와 있는 것만 같네."이다. 원문을 보면 그 의미가 분명한데, '차신유락영외(此身流落嶺外) 첨망고산(瞻望故山) 약재이국(若在異國)'이라고 표현했다. 본향(本鄕, 안동 소산)으로 내려와 있으면서 고산(故山, 양주 석실)을 그리워하고 있으니, 역설(逆說)인 셈이다. '고산(故山)'이란 '고향 산천'을 의미하는 단어로 쓰인다.
인조 정축년(1637)은 병자호란이 일어난 이듬해다. 국왕은 오랑캐에게 항복을 했고 강화성을 지키던 형님은 그곳에서 항전(抗戰)하다 폭사(爆死)했다. 항복의 내용을 적은 국서(國書)를 찢고, 국왕을 청대(請對)해 고수(固守)의 계책을 극론하던 자신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예조판서의 직에서 물러났다. 당시 68세의 노 정객은 이처럼 극도로 고단한 심신을 내려놓고자 엄동설한에 본향을 찾았던 셈이다. 이 편지는 이러한 정황에서 지어진 것이다.
청원루는 서윤공 김번을 시작으로 김생해(金生海), 김대효(金大孝)를 거쳐 청음에게 전수되었다. 그리고 다시 이 청원루는 김광찬(金光燦)을 거쳐 김광찬의 셋째 아들인 문곡(文谷) 김수항(金壽恒)에게로 이어졌다. 석실에 남겨진 청음의 제택은 맏아들인 곡운(谷雲) 김수증(金壽增)이 계승되었다.
청원루를 이어받은 청음의 손자 문곡 김수증은 조부가 그랬던 것처럼 청원루를 중수하고 그곳에다 자신의 당호인 '구사당(九四堂)'을 걸었다. 청원루의 주인이 된 문곡은 특히 안동 김씨 장동파 가운데서도 최고의 인물을 배출한 집으로 손꼽힌다. 그의 아들에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 노가재(老稼齋) 김창업(金昌業), 포음(圃陰) 김창집(金昌緝)이 배출되어 일세를 풍미했기 때문이다.
청원루를 중건했을 당시를 회상해보면, 이곳을 중심으로 안동 김씨의 큰 조상이 된 서윤공 형제와 이들의 후손인 청음과 그의 아들, 손자들이 서로 모여 학문을 익혔고, 국사를 논했음은 물론, 일시적으로 물러나 수양을 통해 가문의 청백 정신도 다졌을 것이다.
또한, 청음의 외조부인 임당 정유길과 같은 선현들도 이곳을 즐겨 찾았을 것이다. 임당은 안동 소산과 이웃한 예천 지보(知保)가 본향이었다. 소산과 가까운 안동 하회 마을의 입암 류중영과는 동료 관료였으며 동갑인 벗이기도 해 하회마을을 찾은 바도 있다. 입암은 겸암 서애 형제분의 부친이다.
청원루를 이야기하면서 갑작스럽게 구사당을 언급하게 된다. 우암 송시열이 지은 구사당기(九四堂記)가 있다. 다소 글이 길고 내용이 무겁지만, 그 전문을 읽어 보자.
청음 선생께서는 젊은 시절부터 소학(小學)을 통해 몸을 단속했는데, 그의 학문은 오로지 경(敬)을 주(主)로 하여 참으로 학문을 하는 요령을 깨쳤다. 그러므로 그 조존(操存, 잡아서 가짐)한 바가 날로 더욱 확고했고 확충(擴充)한 바가 날로 더욱 깊어졌다. 그리하여 그의 성취한 바가 마침내 천지처럼 광대하고 일월처럼 빛나서 무궁하기에 이르렀으니 아, 훌륭하다.
그런데 그 이른바 경(敬)이란 것이 따로 있는 한 물건이 아니다. 다만 몸가짐을 바르게 하고 말씀을 순하게 해서, 엄숙하고 단정(端正)한 사이에 있을 뿐이다. 대기(戴記, 예기)에 이른 구용(九容)과 논어에 이른 사물(四勿)이란 것이 곧 그 일인데, 선생의 일생 동안 수용(受用)한 바가 오로지 여기에 있었다.
일찍이 정축 호란(丁丑胡亂) 뒤에 풍산(豊山)에 피해 살면서, 그 조목을 적어서 셋째 손자인 지금 총재공(?宰公, 이조판서) 수항(壽恒, 文谷)에게 주었다. 총재공은 이를 감히 실추시키지 않고 드디어 당(堂)을 지어 구사(九四)라는 편액을 걸고서 아침저녁으로 주의해 보고 경계하고 반성하면서, "어찌 감히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 자지 않겠으며, 혹시라도 정성스럽지 않아서 선조(先祖)의 훈계를 더럽힐 수 있겠는가."라 했다. 아, 선생께서는 조상(祖上)이 되고 총재(?宰)는 손자가 되었으니, 그 학문의 요지를 서로 주고받았다고 이를 만하다.
아, 선비라면 성현의 글을 누군들 읽지 않았겠는가마는, 그 요점을 알아 요약해 이를 지키고 깊이 생각하여 힘껏 실천하는 이는 많지 않다. 대개 저 사물(四勿)이란 부자(夫子, 공자를 지칭함)가 사도(斯道, 儒道임)를 안자(顔子)에게 전수한 묘결(妙訣)이고 보면 이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없다.
그리고 구용(九容)이란 것은 회옹(晦翁, 朱子) 부자(夫子)가 특히 거론해서 ‘무슨 글을 읽을까요.’ 하는 물음에 답하고, 또 이것을 모르는 자는 크게 간특하게 되는 것임을 경계한 것이니, 성현의 심법(心法)도 이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제 이 두 가지를 하나로 합친바, 겉으로는 몸을 다스리고 안으로는 마음을 다스려서, 안팎을 모두 수양해 조금도 간단(間斷, 쉼)이 없게 하면 천리(天理, 하늘의 이치)가 날로 밝아지고 인욕(人慾, 인간의 욕심)이 날로 사라져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성현의 경지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더구나 선생께서는 병자호란 뒤에 안동(安東)에서 피란하셨고, 총재(곡운 김수항) 또한 겨우 11살의 나이로 원주(原州) 외제(外第)에 나가 있으면서도 이것으로써 서로 권면(勸勉)하였으니, 어찌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뜻을 확실하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 막중한 부탁을 유독 총재에게만 간절히 하였으니, 이는 또한 문인(門人)과 친구 중에는 이 훈계를 받을 만한 이가 없었음이 아니겠는가.
선생의 은미(隱微, 깊은)한 뜻을 무언중에 알 수 있다. 아, 총재는 어찌 죽을 때까지 이를 마음에 새기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송자대전(宋子大全) 제142권에 실려 있는 이 글은 현종12년(1671) 6월에 지어졌다. 아마도 이를 전후로 청원루의 중수가 이루어졌을 것이다. 이 때 글을 쓴 우암 송시열은 다시 우의정이 되고 세자 사부라는 막중한 직책을 맡고 있었고, 문곡 김수항은 43세로 문병(文柄)을 주관한 대제학에 임명되었다.
여기서 현판으로 건 '구사당(九四堂)'의 본래 의미를 음미할 필요가 있다. 구사는 구용(九容)와 사물(四勿)로 나뉜다. 구용이란 소학(小學)의 가르침으로 '머리는 똑바르게[頭直]', '눈은 바르게[目端]', '입은 신중하게[口止]', '손은 공손하게[手恭]', '발은 무겁게[足重]', '숨소리는 고르게[氣肅]', '낯빛은 단정하게[色莊]', '설 때는 의젓하게[立德]', '말소리는 조용하게[聲靜]'를 말한다.
그리고 사물(四勿)이란 논어 안연편에 나올 뿐 아니라 사물잠이란 잠언도 있다. 그 내용은 "예(禮)가 아니면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움직이지도 말라고 한 공자(孔子)의 경계를 말한다."이다.
이러한 내용은 유가(儒家)의 기본적이면서 평생을 두고 이렇게 하려고 노력해야 이룰 수 있는 아주 힘든 경지이기도 하다. 즉 가장 기초적이면서 한편으로는 고차원적인 행동 준칙이라는 것이다.
당시 집 주인인 문곡은 청음의 손자요 23세에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했고 이 기문을 지을 당시에는 문필을 총괄한 대제학의 자리에 있었다. 또한 기문을 지은 이는 당시의 정계의 원로일 뿐 아니라 대학자며 임금까지 대로(大老)라고 해 최고의 예우를 받았던 우암 송시열이었다.
기문의 내용은 유자(儒者)로서 가장 기본적으로 실천해야할 덕목을 당호로 적고 그에 따른 의미를 부연한 것이다. 그 내용은 한 시대와 특정 개인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오늘날까지 청원루에 오른 이라면 누구나 이 집을 짓고 대대로 이를 보존하고 유지한 고결한 의미를 알게 하려는 의도에서 장치된 것이라고 본다.
그래서 청원루가 단순히 '청나라를 멀리 한다'는 청음 선생의 비분강개만을 담은 것이 아니라 이곳을 중심으로 문중 후진들을 양성했고 사람다운 삶을 위해 이렇게 실천해야 한다는 다짐을 한 유서 깊은 공간이라는 사실을 인지할 필요가 있다. 아마도 그러한 다짐을 위해 다시 건 것이 '안동 김씨 소산종회'가 아닐까 한다.
청원루는 그 전승 유래로 보면 경파의 소유다. 그러나 청음 선생의 정신이나 우암이 쓴 이 구사당 기문을 읽어보면 그것은 단순히 경파(京派) 향파(鄕派)를 떠나 김 태사 후손들 모두가 이곳을 거점으로 수양하고 서로 격려해가며 전래의 청백정신을 실추시키지 않게 하려고 이곳 본향에다 이 집을 짓고 중수를 거듭했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읽을 수 있다.
여러해 전에 이곳 청원루에 갈무리하고 있던 청음 선생 목판 등 수다한 전래의 소중한 문화유산들을 일거해 도난당한 일이 있었다. 그 일부를 천신만고 끝에 찾기는 했으나 아직 미완으로 남아 있다. 이 사건을 보면서 천 백여 년을 이어온 이 명문 씨족들의 얼을 엿볼 수 있는 유물전시관조차 마련하지 못한 점이 아쉽게 떠올랐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도 있지만, 소를 잃고 나서라도 외양간을 고쳐야 하지 않을까.
2011-08-10 18:56:4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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