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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목성동 연가
-목성교가 있던 목성동-개천에서 잡은 메기-목성동의 오래된 가게 천리사, 동양방송설비, 화산인쇄사 2019년 안동예천 근대기행은 생생한 르포취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다룬 <구술생애사>와 안동과 예천 두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사의 근간이 되는 '마을'을 테마로 한 <우리 마을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마지막 <우리 마을 이야기>는 목성교가 있던 안동시 목성동 이야기를 펼쳐내 본다. 내려다본 목성동 ⓒ구자을 목성교가 있던 목성동 사라진 지명을 부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라진 지명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 장소가 갖는 의미는 또 무엇일까. 하이마, 나이야가라식당, 진모래, 농고 사거리, 36사단, 마뜰비행장, 제일은행 사거리, 태화 삼거리 그리고 목성교. 지금은 사라진 목성교지만 안동사람들은 여전히 목성교를 습관처럼 얘기한다. 목성교 사거리에 '푸쉬쉭'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정차하던 2번, 11번 시내버스, 가을이면 안동시산림조합 골목에서 열리던 송이시장, 돈까스로 유명했던 코끼리분식 그리고 내 인생에 커다란 아랫목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사무실이 있던 권방사선과 건물 4층. 안동시 목성동 지도. 2019년 12월 5일 카카오맵 목성교 사거리는 동쪽으로 보건소, 서쪽으로 안동교회를 잇는 서동문로, 동북쪽 시청과 서남쪽 천리동을 비스듬히 연결하는 퇴계로가 지나는 곳이다. 목성교 사거리에서 목성동성당까지를 직선으로 이어 그곳을 꼭짓점으로 한다면 삼각형 모양을 이루는 동네가 목성동에 해당한다. 하지만 '목성교'의 상징성은 그 이상이어서 일대의 서부동과 화성동, 천리동까지 언급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안막동에서 흘러내려 안동시청 앞을 지나 낙동강으로 흐르던 천리천은 목성동을 도심 속 낭만의 공간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장뚝에 즐비하던 포장마차촌에서 시인묵객들은 천리천을 '세느강'이라 명명하고 실제로 세느강, 행운집 등의 실내포차가 즐비한 거리엔 술 취한 청춘들이 자주 목도되곤 했으니까. 1989년 도시개발사업으로 천리천 복개공사가 시작되면서 목성교와 천리천, 사장뚝이라 불린 천리천 제방 등은 모습을 달리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59년 여름, 목성동에서 ⓒ조창희 조창희 목사가 기억하는 목성동 전 의성감리교회 조창희 목사는 지금으로 치면 천리사 맞은편 영창피아노(현재는 화장품도매창고) 앞이 생가다. 사진은 남동생(조덕희, 1957년생)이 집 앞에서 목마를 타고 놀고 있는 모습이다. 옆에는 주철로 만든 우체통이 있고 맞은편엔 기와집이 있다. 조창희 목사에 의하면 6.25전쟁 때 안동에서는 포탄이 떨어진 곳이 3~4군데 정도였다고 한다. 그중 안동기차역과 지금의 안동시청에 각각 포탄이 떨어졌다. 나머지는 공중에서 기름을 살포했는지 화마로 뒤덮여 시내의 70% 이상이 잿더미로 소실된 것이라 한다. 포탄이 떨어진 기차역 웅덩이에서 아이들은 메기를 잡기도 했다고. 지금의 경북유교문화회관은 옛날의 화산학원이 있던 터다. 이곳은 지역에서도 역사적 상징성이 있는 중요한 장소이다. 화산학원은 안동지역에서 처음으로 신학문을 가르쳤던 교육기관으로 일제강점기에 세워졌다. 이후 안동교육청이 들어섰고 후에 그 터에 경북상호신용금고가 새로 지어진 후 권택근 성형외과가 들어섰다가 지금은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경북유교문화회관으로 바뀌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안동을 거쳐 북진해 올라갈 때에는 경북유교문화회관 건물에 미군사령부와 국군부대가 임시 사령부 거처로 삼아 이용을 했다고 한다. ""안동중앙국민학교(안동초등학교)는 허허벌판이니까 포탄 투하 시 그대로 날아가 버리거든요? 산 밑에 있으면 포탄을 쏟아 부어도 명중시키기 힘드니까 위치적으로도 아마 임시사령부로 제격이었지 싶어요."" 북쪽으로는 천주교성당이 울타리 쳤고 뒤로 언덕 산이 막아주는 형국이라 군사학적으로 유교회관 건물은 안전한 요새와 같았다. 그런데 사령부로는 삼긴 삼았는데 정작 마실 물이 없었다고 한다. 학교 건물임에도 펌프가 없어 물이 안 나와 애를 먹던 중 근처 조창희 목사의 집에서 물을 길러다 썼다. ""우리 집에는 뿜뿌가 나와서 한국군 특무상사가 졸병들을 인솔해서 바게쓰에 쌀을 담아 와서 우리 집 마당에서 쌀을 씻어 가곤 했어요. 그렇게 부대에서 밥을 지어먹고 하니 군인아저씨들이 공짜로 물 받아먹는 게 미안했는지 쌀을 바가지로 퍼다 줘서 우리가 그때 다행히 쌀 걱정은 안하고 밥을 해먹었다는 거 아닙니까."" 한번은 부대 안으로 들어가 본 적도 있었다. ""미군들이 나를 귀엽게 봤는지 달랑 안고 부대 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온 식구가 걱정을 했어요. 씨레이션(전시에 먹는 식량) 박스, 식빵, 초콜렛, 껌 등을 안겨줘서 내보내는 바람에 부대 구경도 잘했고 온 집안 식구들이 덕분에 잘 먹었죠. 부대 안에서 나대로 이런 것 저런 것 구경을 해보니 신기했죠. 아마도 필요할 때는 땅굴을 파기도 한 모양인데 그런 흔적도 있었어요."" 화산학원이 화산국민학교로 다시 사범학교 부속 화산국민학교로 통폐합 후 폐지가 되면서 학생들은 흩어지게 된다. ""안동사범고등학교를 폐지하고 교육초급대학으로 승격시켰거든요. 내 생각에는요, 화산학교가 부설 초등학교여서 사범고등학교가 폐지되니까 안동사범학교 병설중학교도 함께 폐지되고 연쇄적으로 다 폐지가 됐지 싶어요."" 학교가 폐지되면서 동쪽에 있는 학생들은 동부초등학교로, 서쪽에 살고 있는 학생들은 안동초등학교로 분산·편입시켰다. 목성동에 살았던 조창희 목사는, 입학은 화산국민학교에서 하고 2학년 가을학기에 안동초등학교로 편입했다. 한 학년이 60명씩 두 반이었던 규모에서 한 클라스 당 60명씩 6~7반씩, 전교생이 2천명을 훌쩍 넘긴 규모로 가게 된 것이다. 1974년 목성교에서 ⓒ조창희 개천에서 잡은 메기 목성교 다리는 그다지 크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복개 전 여름 장마철에는 이 집 저 집 분뇨를 퍼서 장마로 흘러가는 황톳물에 퍼부어 버리곤 했다고. 장마가 멎어 물살이 약해지면 그 다음부터는 초등학생 애들부터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밴드(그물망)를 가지고 풀숲에 놓고 발로 꾹꾹 눌러가면서 메기며 장어 등 저녁 반찬거리를 마련했다. ""목성교 다리는 완전한 다리로 건재했었고 지금 시청 앞에는 다리가 없다보니까 전봇대 같은 통나무를 두세 개 엮어서 외나무다리를 임시방편으로 만들어 사용했지요. 명륜동 쪽에도 안막동 가는 길 쪽에 목성교처럼 옳은 다리가 있었어요."" 도로 포장도 안 되었던 그 시절 목성교 동쪽 서부동과 삼산동에는 전봇대가 세워져서 전기가 들어왔지만 반대편 안동교회 가는 쪽은 전기가 안 들어왔다. ""우리 집도 전기가 안 들어와서 남포등, 석유 등잔을 키고 살았어요. 당시에 전봇대만 세우면 전기를 가설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 목성교에서 우리 집 있던 피아노대리점까지 기껏해야 7~80m 되나? 전봇대를 세우자고 하니 사람들이 우리는 지금까지 전기 없이 남포등으로 잘 살았다고 필요 없다고 해요. 그러니 어째요 방법이 있나, 우리 집 혼자 전봇대 2~3개 세우는 값을 다 물어서 전기를 넣었지요. 그런데 전봇대를 세우니 막상 전기는 또 다 땡겨 쓰더라구요."" 옆에는 금은방과 국화빵집, 그 옆에는 호떡집, 또 그 옆에는 제재소가 있었다. 제재소는 개천까지 넓게 톱날이 돌면서 규모가 컸던 모양이다. 이후 군장마크, 학교 명찰, 체육용품을 판매했던 천리사가 들어서고 옆에 미장원, 2층에 사진관, 또 그 옆에 시계점포, 이발관, 쌀가게, 솜 트는 집, 그 다음이 삼일약방(지금의 목성교 바로 가기 전), 철물점, 인쇄소 마지막에 목성교가 있었다 한다. 그리고 너머에 안동문화사와 보건소 맞은편 경북인쇄소 등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목성동 성당 ⓒ백소애 목성동성당과 종교타운 목성동성당은 안동의 랜드마크 중 하나다. 이제 목성동성당 일대를 종교타운이라 부른다. 성당 입구 바로 옆으로는 목성공원을 조성해놓았다. 안동 종교타운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개신교, 유교, 원불교, 민간신앙 등을 하나로 아울러 소통과 화합, 봉사를 구현하기 위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동쪽에서부터 유·불·선을 합친 신흥종교 성덕도 안동교화원, 1927년 설립된 천주교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 1770년에 건립된 안동김씨 종회소,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고운사 안동포교당 대원사, 경상북도유교문화회관, 1909년 설립된 개신교 안동교회 등의 시설이 밀집되어 있다. 1987년 목성동성당. 각종 시국사건 관련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천주교 안동교구청 안상학 시인은 2018년 겨울에 발간된 <기록창고> 1호(경북기록문화연구원 발간)에 실린 '안동민주화운동의 성지, 목성동성당'이라는 글을 통해 ""옛 천주교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경북 안동시 목성동 산1번지, 이하 목성동성당)은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안동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로서 한 시대를 누렸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붉은 벽돌과 높은 첨탑이 인상적인 고딕양식에 가까운 건축물이었다. 풍수지리로 살펴보면 잠두혈 자리다. 명당 중에 명당이다. 안동시가지가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목성산 이마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안동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자리라면 어디서라도 높은 산 위에 올라앉은 성당 건물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외부 사람들이 안동을 둘러보고 이미지를 새긴다면 몇 손가락 안에 들기에 모자람이 없는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얘기했다. 또 ""신자들에게는 참으로 신성한 공간이지만 일반 시민들에게는 훌륭한 공원이나 다름없었다. 가난한 연인들에게는 더없이 아늑한 데이트 장소였다. 안동시민들에게는 소중한 추억이 서려있는 정서적 공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는 한편 목성동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성지이자 각종 시국사건이 있을 때마다 저항과 투쟁이 있었던 역사적인 공간이었다. 농민도, 학생도, 사제도, 수녀도, 시민도 함께 나섰다. 그러한 상징적인 공간이었던 목성동성당은 2004년 지금의 건물로 새롭게 지어졌다. 아도니스 레스토랑 광고 ⓒ백소애 안동교회의 로뎀나무, 목성동성당의 에스포와처럼 대원사에도 커피숍이 들어섰다. 이름은 '무심코無心co'다. 지금의 대원사가 지어지기 전 1980년대 반변천 문학회 문청들이 대원사 지하예향다방에서 시낭송회를 갖는 등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곤 했다. 그전에는 심지다방이었다고 한다. 후에 예향다방이 사라지고 아도니스라는 레스토랑이 생겼다. 그곳에서도 안개 시낭송회 등이 열렸다. 문청들의 문화공간으로 사랑받던 그곳은 1990년대 들어서며 없어지게 된다. 목성동의 터줏대감 천리사 ⓒ백소애 천리만큼 길고 오래 가라, 천리사 목성동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는 단연 천리사다. 스포츠용품 전문점 천리사는 1958년 문을 열었다. 당시 28세의 창업주 홍영표 씨가 운동구점을 하고 있던 숙부의 도움으로 시작한 가게로 상호도 숙부가 '천리만큼 길고 오래가라'고 지어준 것이다. 그 덕일까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천리천이 흐르고 있어 천리사라 불렀을 거라 유추한 생각과는 달랐다. ""안동사범학교 1회 졸업생이셨는데 교직으로 안가고 장사를 시작하셨어요. 처음엔 천리체육당이라고도 했답니다."" 30년 전 가게를 물려받은 2대 사장 홍웅기(63) 씨의 말이다. 홍웅기 사장은 창업주의 재종손자 된다. 은퇴 후 천리사 2층 건물에 거주했던 홍영표 사장은 89세의 일기로 작년에 작고했다. 천리사는 처음부터 지금 자리 있었던 건 아니다. 서부동에서 문을 열었다가 지금의 목성동 자리로 옮긴 것이 1967년쯤이고 10년 후 지금의 2층 건물로 지었다 한다. 홍웅기 사장이 맡아서 시작할 때는 바로 옆에 있던 사진현상소 백광사를 터 가게를 넓혔다. ""주소가 목성동 62번지입니다. 그래서 전화번호도 6200번이에요. 처음엔 국번 없는 62번이었다가 620번, 그러다 6200번이 되었지요."" 한창 호시절에 시작한 가게였으나 요즘은 조용한 편이다. 천리사 홍웅기 사장 ⓒ백소애 ""요즘 애들은 운동, 특히 야외운동을 안하니까 예전 같지 않죠. 학교에 체육용품을 납품한다거나 행사할 때 단체로 체육복을 주문하거나 해요. 가게 소매를 한다거나 그런 건 거의 없다고 봐야죠. 우리뿐만 아니고 대부분 소매가 잘 안되고 그래요."" 2대째 이어오는 동양방송설비 ⓒ백소애 2대째 이어오는 동양방송설비 서른 둘 성덕기 씨는 1973년 서부동 안동문화사 옆에서 '동양소리사'를 열었다. 고향 진주에 살다가 금성사에 취직하게 되면서 대구에 발령을 받게 된다. 이후 금성사를 퇴직하면서 안동에 자리 잡아 창업을 하게 된다. 47년 전 안동에 왔을 때는 집이 낙후됐고 기와집이 많았다. 지금의 목성동으로 옮긴 게 1978년이다. 처음에 상호는 '동양티브이'였다. ""금성사 나와서는 바로 티브이로 이름을 졌어요. 근데 당시 한글순화운동을 한다고 해가지고 이름을 소리사로 바꿨지. 근데 자(아들)가 맡으면서 소리사는 챙피하다꼬 다시 바꿨지요."" 정보통신 자격증을 딴 아들 성동철(47세) 씨가 대를 이어 가게를 이어가고 있다. 올해 79세가 되는 성덕기 사장은 일선에서 물러나 아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다. 정보통신 공사업체이고 학교방송장비를 주로 취급한다. 초창기에는 TV, 전자제품, 부품 수리 등에 1988년 안동유선방송이 생길 때는 가장 호황을 누렸다. ""유선방송 시조랬지. 호시절이랬어요. 전두환 시절이었는데 그때 젊은 사람들은 전혀 모르지. 장사가 잘됐어요. 국내 수요가 폭발해서 그 당시 티브이가 대구 밑에 수성교에 있다가 팔공산 올라가면서 경북지역에 급진적으로 수요가 늘어났거든. 난리 났었지. 당시엔 동네에 티비 한 대 사면 동네 애들 친척들 바글바글해서 티비 사는 걸 싫어했어요. 요새는 꺼뜩하면 살 수 있으이 쉽잖아요. 지금은 현상유지나 겨우 해요."" 아무 연고도 없는 안동에 자리 잡아 1남 2녀 낳고 지금의 집을 장만했다. 가게와 붙어있는 집을 장만했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 못한다. 막둥이 장남 아들이 대를 이어가니 마음도 든든하다. 1대 성덕기 사장 ⓒ백소애 ""안동 와서 이 집을 샀을 때가 제일 기뻤어요. 가정집이 여기 붙어 있어요. 셋집을 댕기다 보니까 다른 사람 보기에는 별거 없어 보여도 내한테는 이만한 궁전이 없어요. 처음에사 회사서 대구 파견 나온 인연으로 여 안동에 주저앉았지, 뭐. 큰 변화 없이 안동시민들 덕분에 잘 살았고 처음엔 운이 좋아서 장사도 곧잘 됐어요. 유선방송을 안동 가구 수의 80%를 우리가 가입시켰어요. 나중엔 못하게 됐지만."" 1979년 가게 앞에서 ⓒ성덕기 목성동 길가를 지나가도 아는 사람만 알지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는 업종이라고 한다. 특수 기능이라 필요한 사람만 오는 곳이지 일반 소매업을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부심도 대단한데 안동에서 자격증 갖고 일하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라 한다. 성동철 2대 사장이 전기통신 자격증을 가진 덕이다. ""아들놈이 어려서부터 컴퓨터를 되게 만졌어요. 프로그램을 했는데 요새 젊은이들은 모르겠지만 오디오 신호를 풀어서 게임을 했어요. 그런 쪽으로 재주가 좀 있었어요. 아무도 안 가르쳐줬는데… 공부를 몬하니까 그런 쪽으로 트였겠죠? 하하. 아들놈이 일은 곧잘 합니다."" 동양소리사 시절. 오른쪽이 2대 사장 성동철 씨의 6살 무렵. 어려서부터 덩치가 컸다고 한다.ⓒ성덕기 번화가인 목성동도 예전만 못한 느낌이다. 일단 가게 앞을 오가는 사람이 확연히 줄었다. ""우리가 여 이사 올 때 요 사거리 다리 밑으로는 다 하천이랬어요. 비 오면 붕어가 올라왔지요. 요 밑에는 신시장 넘어가는 다리가 있었고. 복개되고 포장되면서 목성교가 없어졌지. 복개된 지 한 30년 안됐겠습니까."" 유선방송 하다 뺏기고 대리점 하다가 뺏기고 잘될라치면 손안에서 빠져나갔다. 지금은 방송장비 쪽으로 주력하고 있다. 국번도 없는 전화번호 시절부터 같은 번호를 부여받아 지금까지 쭉 쓰고 있다. ""0303. 요 전화번호 딸라꼬 정말 애 먹었어요. 추첨을 했는데 한 5~60대 1이었나, 그 정도로 경쟁이 심했지요. 흑색전화 백색전화 하던 시절 시청홀에서 공식적인 추첨을 했어요."" 1980년대 안동댐에서 열린 불교 행사에서 ⓒ성덕기 사진 한 장 찍자는 말에 서로 찍으라고 미루던 부자(父子)는 출장 나가버린 아드님의 승리로 끝나버렸다. ""뭐 이런 얼굴 찍어 뭐할라니껴."" 목성동 거리를, 목성동 동네를 한결같이 47년 지켜온 '이런 얼굴'이다. 화산학교를 기억하는 화산인쇄사 인근의 경북인쇄사, 목성인쇄사처럼 인쇄사 말고도 시청 부근에는 많은 인쇄사가 있다. 그중 화산인쇄사는 목성동에 자리 잡아 상호만으로도 이곳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옛날 화산학원이 있었던 때를 보지는 못했지만 교육청도 있었고 남다른 장소잖니껴. 그래서 화산이라 이름 졌지요. 인제는 연세 많은 분 아니면 화산을 잘 몰래요."" 와룡이 고향인 지창호(65세) 사장의 말이다. 1980년 10월에 경북유교문화회관 맞은편 자리에 6~7년 있다가 지금의 목성동성당 입구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그때는 명함 가격이 2천원, 2천 5백 원 하던 시절이었다. 초창기엔 관공서 서식, 학교 문집, 청첩장 등을 주로 만들었는데 청타(한문타자)를 주로 사용했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에는 활자 자판을 사용하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컴퓨터가 있는 세상엔 모든 게 빠르고 편해졌지만 일은 그만큼 줄었다고. 목성동성당 입구 건너에 있는 화산인쇄사 ⓒ백소애 ""요새도 서식 좀 하고 스티커, 명함, 팸플릿 뭐 그렇게 하죠."" 지창호 사장의 기억 속 목성교는 길이가 5m 정도나 됐을까 폭도 그렇게 넓지 않은 2차선 교량이었다. ""요 목성교 삼각지대에 방공호가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민방위 훈련하던."" 연말에 많이 바쁜 시기지만 요즘엔 예전만 같지 않고 별다른 일이 없을 때면 고향 와룡에서 쉬엄쉬엄 농사를 짓고 있다. 화산인쇄사 지창호 사장 ⓒ백소애 ""평생, 거진 인쇄 일을 했다고 봐야지요."" 함께 나이 먹어가는 마스터기와 제판기 앞에서 너털웃음을 짓는 그다. 그리고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은 주로 이렇게 불린다. 사랑방, <안동>지, 사랑방 안동. '안동사람의 삶과 생각을 담는 책'이라는 캐치플레이즈로 46배판 40쪽 분량의 계간 무가지로 내다가 80쪽 분량의 격월간지로 발행하게 되었다. 책 이름은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책을 내는 곳은 '문화모임 사랑방'이었다가 '문화모임 안동'으로 개명을 하게 되었다. 1988년 창간하여 2014년 11,12월 종간호를 내며 문을 닫았으나 2015년 5,6월부터 책을 내는 곳이 '문화모임 안동'이 아닌 '도서출판 한빛'으로 바뀌면서 복간호를 내게 되었다. 당시 함께 했던 편집위원, 운영위원들은 새로운 운영진으로 모두 바뀌었다. 목성교사거리에 있던 권방사선과 4층 사무실에서 올려다보면 우뚝 보였던 목성동성당과 내려다본 삼각지에 서 있던 광고탑. 광고탑에는 주로 시민체전, 민속축제, 탈춤축제를 알리는 광고가 붙었고 복잡한 교통 흐름에 불법 주정차 단속 호루라기 소리는 4층까지 들리곤 했다. 내비게이션이 일상화되지 않던 시절에도 안동사람에겐 '목성교사거리 권방사선과 건물'이라고 하면 척하면 착 알아들었다. 간혹 타지에서 오는 사람들은 길을 몰라 헤매기 일쑤였다. 목성교 ⓒ백소애 사랑방 시절 '그의 원고가 도착하면 인쇄소에 넘겨도 된다'는 전설을 남겼던 안상학 시인의 시로 '목성동 연가'를 마무리한다. 이 시는 2014년 겨울 종간을 앞두고 그해 봄, 그에게 종간의 소회를 청탁한 시다. 청탁받은 사실을 까맣게 잊은 그가 전화로 다시 물어왔을 때는 마감일까지 채 일주일도 남지 않았을 때였다. 그러고 3일 후 그는 이 시를 보내왔는데,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상보다 너무 빨리 보내줘서 놀랐고 그 짧은 시간에 이토록 서정적인 시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시를 읽고 나는 잠시 먹먹해졌던 거 같다. 그건 종간 때까지 함께 한 편집장 김복영 방장님도 마찬가지였는데 좀체 칭찬에 인색한 분이 ""좋다.""고 하셨으니 그걸로 족했다. 2번 버스를 타고 내렸던 '목성동 연가'도 그렇게 끝이 났고 이제 새주소 이름 '퇴계로'가 자리한 동네가 되었다. 그러나 콘크리트 아래 어딘가에는 지금도 천리천, 세느강이 홀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글/ 백소애 sodoor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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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안동의 원도심 삼산동
# 시내서 보시더 ""집이 어디~껴?"" ""시내래요."" ""어디서 만나면 좋을리껴?"" ""시내서 보시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 사이에는 지금도 통용되는 안동 표준말이다. ""시내래요.""에서 시내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기 전 안동시 전체를 의미한다. ""시내서 보시더.""에서 시내는 주로 안동시에서도 삼산동 일대 원도심을 지칭한다. 삼산동 이야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접근했다. 먼저 기록으로 존재하는 근대 삼산동을 찾아보았다. 근대라 함은 일제 강점기에서 6.25 전쟁 이전까지다. 내가 만난 사람들이 기억하는 안동 삼산동은 대부분 1960년대부터였다. 오래 그곳을 지키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더 늦기 전에 우리 시대 이야기를 기록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그래서 삼산동 근현대 이야기로 폭을 넓혔다. 네이버 지도에 나타난 삼산동 구역 드론으로 본 삼산동 (제공 구자을) 삼뭇들, 삼뭇돌, 삼산동 삼산동은 안동시보건소 앞에서 동쪽으로 삼뭇들, 장거리들이 있어서 삼뭇돌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태사묘 앞에서 내려오며 이 지역에 망호루, 제남루, 문루 등 누각이 서 있었다. 망호루 옆에 객사가 있고, 객사 앞에 내삼문이 보인다. 안동부 당시 안동의 수령이 제남루 앞에 많은 백성들을 모아 놓고 죄인을 다스려 백성들에게 일벌백계一罰百戒의 교훈을 일깨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종루가 있는 거리라 하여 종로라 불렀다. 현재 신한은행 앞 차 없는 거리에서 중앙파출소에 이르는 통로를 말한다. 2019 광복절 삼산동 문화의 거리 (서미숙) 3.1 독립운동의 성지, 삼산동 신한은행 앞 일제 강점기에는 신한은행 앞에서 옛 스쿨서점 방향으로 난 도로를 본정통으로 불렀다. 본정은 일제가 잠식한 거리, 일제의 경제 수탈기구가 모여 있었던 곳이다. 금융조합, 대구은행안동지점, 식산은행 등이 있었다. 삼산동 신한은행 앞은 3.1운동의 성지다. 신한은행 앞은 이상동이 혼자 만세운동을 했던 곳이다. 이상동은 석주 이상룡 동생이다. 임청각은 태어나면서부터 유학을 공부했던 집안이지만 그는 1906년 기독교를 수용했다. 이상동은 영양 석보면 지경리에 가서 주로 포교활동을 했다. 남좌현 지사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바로 인근 소산동에서 포교를 하고 교회를 지었던 분이다. 1919년 3. 13. 안동에서는 처음으로 만세를 불렀다. ""너희들은 멸망할 것이다. 우리는 독립할 것이다.""외치며 단독으로 만세운동을 했다. 종이로 태극기를 만들어 흔들었다. 기독교인들이 논의를 하다가 검거되는 바람에 단독으로 하게 되었다. 태극기를 종이에 그려서 흔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 다음 장날 3. 18일에 그곳에서 다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안동교회에서 태극기를 준비해서 기독교 인사들이 서쪽에서 들어오고, 송천동에서 동쪽 유림들이 동문동을 지나 물밀 듯이 들어오고, 북쪽에서는 예안에서 밤 세워 전날부터 걸어왔다. 그 전날 예안에서는 안동지역 대규모 3.1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곳이다. 현재 도산면 서부리 선성산에서 만세를 시작한다. 교회 쪽에서 오고, 면사무소 직원, 유림들이 각각 세 갈래로 모여서 대규모 만세운동을 했다. 구금자를 석방하라며 관청들이 몰려있던 지금의 웅부공원으로 가서 시위를 하다가 40여명의 순국자가 나오기도 했다. 일제는 일본국경일 때마다 일장기 계양을 강요했다. (사진으로 보는 근대안동. 서문당) 안동읍성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서문당) 삼산동을 지키는 사람들 동인당 한의원 (서미숙) #2대에 걸쳐 운영하는 동인당 한의원 동인당은 2대에 걸쳐 한의원을 운영중이다. 작고한 부친 권오규 원장은 1918년생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태화오거리 근처에서 한약방을 하다가 삼산동 우체국 건너편으로 이사했다. 권기종 원장 (1956년생)이 병원에 딸린 집에서 살 때 광제병원에서 태어났으니 그 이전에 삼산동 시대를 맞이한 셈이다. 부친은 88세로 생의 마지막 날까지 일을 하다가 밤에 돌아가셨다. 복 많은 어른이다. 슬하에 13남매를 두셨다. 7남 6녀 중에 위에 형들은 약사, 유도선수, 건축가가 되었다. 동인당 한의원 권기종 원장 (서미숙) 부친의 권유로 넷째인 기종 씨가 한의학을 공부하여 가업을 잇게 되었다. 늘 한 곳에 갇혀서 진료하니 좀 답답하다고 한다. 편안한 인상에 조용조용 말하는 분위기가 한의사에 어울리는 분이다. 2004년 12월까지만 해도 동인당 한약방 1층은 부친이, 2층은 아들이 각각 진료를 봤다. 부친의 후광에 가려져 빛을 못 보던 시절도 있었지만, 침은 아들이 책임졌다. 지금은 경안약국 자리까지 매입하여 한의원을 확장 했지만, 찾는 환자 수는 예전 같지 않다. 요즘 비싼 인건비를 감안하면 환자가 많아도 감당하기 어렵고, 혼자 진료하기엔 적정수준이라니 다행이다. ""막상 공부해보니 한의학은 매력적인 학문이다. 다만 정부에서 뒷받침이 안 되고, 양의사들 파워가 세어서 기를 못 펴고 있는 실정이지요. 한방을 모르는 양방 의사들은 무시하고 미신화하니까. 심지어 젊은 사람들은 한약 먹으면 간이 나빠진다는 편견을 갖고 터부시한다. 옛날부터 한약을 먹어온 사람이 자식 데리고 꾸준히 찾는다."" 한약은 양약에 비해 비용부담이 크기에 의료보험제도 개선이 필요한 실정이다. 현실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삼산동 터줏대감 동인당이 오래 그 자리를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고한 부친 권오규 원장이 붓으로 쓴 처방전 ⓒ서미숙 작고한 부친 권오규 원장은 처방전을 붓으로 썼다. 지금도 부친이 쓴 처방전을 보관중이다. 부친이 사용하던 오래된 약장과 아들(현재 원장) 약장이 나란히 자리한다. 오래된 약장에 지금도 하수오 등 약재를 보관한다.슬하에 아들 형제를 두었지만 한의학을 하라고 권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며느리나 친척 중에서라도 가업을 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권기종 원장은 중학교 때까지 삼산동 동인당 한의원 1층에서 살았다. 고교와 대학시절은 서울로 갔지만 졸업 후에 다시 삼산동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용상동에 거주하지만 근무시간은 내내 삼산동에서 보낸다. 부친이 쓰던 약장 (서미숙) 동인당 한약방 앞이 예전엔 비포장 도로였다. 소달구지가 지나다니고, 소 지르메에 똥통을 싣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길에 소똥이 밟히기도 하고, 가끔 말도 다녔다. 지게에 솔잎을 지고 팔러 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갓 쓰고 한복 입은 어른들이 많이 지나다녔다. 길가에 리어카 짐꾼들이 햇볕을 쬐며 쭉 늘어서 있었다. 당시 짐 싣던 분이 요즘 동인당에 오기도 한다. 그는 1968년 5월 18일 밤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안동시 운흥동 <문화극장>에 수류탄 폭발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휴가 나온 육군 하사가 애인의 변심에 앙심을 품고 극장에 수류탄을 투척하여 수십 명의 사장자를 내었다. 즉사 5명 부상자 44명이나 되는 대형 사고였다. 동인당 바로 옆이 시내 유일한 외과였던 <광제병원>으로 가는 작은 골목이었다. 환자를 업고 바삐 가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경회루가 있던 자리는 현재 윤가네부대찌개 ⓒ서미숙동인당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경안약국>, <노라 양장점>, <창신당>,그리고 코너가 구멍가게였다. 구멍가게 옆에 당시 유명한 <8.15제과점>이었다. 조흥은행 옆 왼쪽코너에 <클레오파트라> 옷가게, 다음이 <스쿨서점>, 학용품을 팔던 <광문사>, 코너에 <영창피아노>가 있었다. 스쿨서점 맞은편에는 <수미사>란 양복점이 있었다. 동인당 오른쪽 코너엔 철물점 <대창사>가 있었다. 대창사 옆 골목 안에는 유명한 중국 요리집 <경회루>가 자리했다. 당시 외식이라면 <경회루>에 가서 짜장면을 먹거나 잔칫날 구 시장 <해동식당>에서 불고기를 먹었다. 동인당 바로 맞은 편에는 <안동우체국>이었다. 지금은 그 자리가 삼산동 우체국이다. 삼산동 우체국 옆 코너엔 일식요리점 <공주식당>이었다. 공주식당이 사라지고 교학사가 들어섰다가 최근 몇 년째 가게가 비어있다. -삼산동에 오래 살아보니 어떠신지요? ""예전에 구시장이 번화할 땐 시장 가깝고 편리했는데 요즘은 외곽지로 도시가 확장되면서 다소 불편해졌다."" 그에게 삼산동은 고향이자 안식처이다. 어릴 적 눈이 오면 눈 속에 연탄재 넣어 친구들과 눈싸움하던 추억이 서린 곳이다. 그는 삼산동을 떠나면 불안할 정도로 삼산동 토박이다. #일공공일 김옥현 ""그때만 해도 시계기술은 우주과학만큼이나 대단하게 생각했던 시절이었죠."" 김옥현 사장(69세)은 예천 보문이 고향이다. 열여덟에 시계기술을 배우러 안동시 삼산동 <남방상사>를 찾았다. 신한은행에서 서쪽 통로 당시 <광문사> 맞은편에 가게가 있었다. 당시엔 시계와 안경을 함께 취급했다. 안경과 인연이 되려고 그랬을까. 시계 배울 자리가 없어 안경을 익혔다. ""처음에 안경기술을 배운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시시하게 생각했다. 그런 걸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1968년 3월, 현재 일공안경 자리에 있던 남방상사에서 김옥현이 렌즈메터기로 안경도수를측정하는 중이다. 가게주인 아우는 신시장에 <남방시계점>을 열고, 형님인 민병필씨가 지금 일공안경점 자리로 옮겨서 <남방안경점>을 했다. 그때 남방안경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남방 안경점에서 일하던 시절의 김옥한 (제공 김옥한) 처음엔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월급 600원을 받았다. 6개월 후에 800원으로 인상되었다가 그 뒤에 1,300원을 받았다. 옷이 귀해서 주인이 입던 옷을 얻어 입었다. 명절이 되면 티셔츠를 선물 받기도 했다. 그렇게 경력이 쌓였다. 그간 모은 돈과 본가에서 논을 팔고 소를 팔아 지원을 해주었다. 당시 소 40마리 시세로 <남방안경점>을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스물다섯에 가게주인이 되었다. 전 주인이 <남방안경점> 상호를 못 쓰게 했다. 아우가 하던 <남방시계점>에서 안경을 취급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동방안경>으로 바꾸었다. 그 자리에서 묵묵히 외길을 걸어왔다. 정밀한 기기를 다루는 만큼 그는 세심하고 철저하다. 업무일지는 기본이고 개인 일기도 날마다 쓴다. 업무일지 여백에 안동 사투리 메모가 빼곡하다. 안경 맞추러 온 고객들이 일상으로 쓰던 말을 바쁜 일과 중에도 꼼꼼히 기록해놓았다. 개인정보가 담겨 일지 원본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재미있는 사투리 몇 개를 옮겨본다. ""안경 쓰면 첩에 집에 간 것 긋다."" ""내가 87이래. 나이 많은데 전좌 보고 잘 복키는거 ..."" ""안경이 작꾸 내리왓사"" ""호부레비 뒤따라 옥까봐 식겁했다"" ""옛날에 여무까시라고 백내장 비슷한거 있었는데 걷어내는 의원을 만나야 되는데..."" ""얄브제라? 했다 잘 안보이드라"" ""본방치기 한 동네 남자와 결혼"" ""마커 18금이껴"" 김사장은 사라져가는 것에 관심이 많다. 오래된 책과 사진도 수집한다. 지금까지 수집한 스크랩북이 수십 권이라 한다. 보여준 파일에는 안경 쓴 유명인들 사진이 많다. 정작 그는 사진 찍히는 걸 사양했다. 2019년 11월 현재 일공공일 안경점 (서미숙) 프랜차이즈 바람은 안경이라고 예외가 아닌가 보다. 2002년1월 9일 상호를 <일공공일>로 바꾸었다. 일공공일은 전주에 본부가 있으며 전국적으로 400개 이상 가맹점을 둔 업체다. 현재 가게 면적은 예전의 다섯 배 크기로 늘어났다. 김사장 외에 직원이 세 명이다. 43년째 함께 일하는 직원이 있는가 하면, 딸 김남씨도 안경학을 전공하고 합류했다. 넷째 아들도 안경학과 재학 중에 군에 입대했다니 얼마나 든든할까. 앞으로 자녀들이 가업을 이어갈 테니 <일공공일>은 삼산동에서 건재할 것이다. # 안동우체사-부산우편국 안동출장소-안동우편국-안동우체국-안동우체국 삼산동 분점-삼산동우체국 왼쪽 삼산동우체국ⓒ서미숙 휴대전화와 이메일과 택배가 없던 시절, 우체국은 우리 생활과 더 밀착되어 있었다. 군대에서도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요즘 청춘들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전화가 없는 집이 많았다. 시외전화를 하려면 우체국이나 전화국에서 시외전화를 신청하고 상대방과 연결시켜 주는 교환원이 있었다. 펜팔이 유행했던 그 시절, 잡지에는 펜팔을 원하는 주소가 즐비했다. 밤새 손편지를 써서 빨간우체통에 넣던 기억 하나쯤은 묻어둔 장년층이 많을 것이다. 우편 집배원이 빨간자전거를 타고 집집마다 배달을 다녔다. 편지를 부치고 답장을 기다리며 설렘 가득하던 그 시절이 그립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는 연말연시가 되면 성탄카드와 연하장을 부치러 오는 사람들로 우체국이 성시를 이루었다. 요즘 우체국은 편지보다 택배와 금융기관으로 무게중심이 옮겨졌다. 추석과 음력 설날 무렵이면 택배 선물배달로 더 분주하다. 안동의 체신업무는 1895년 12월 07일 <안동우체사>로 출발했다. 1902년 6월 10일 <부산우편국 안동출장소>로 바뀌었고, 1907년 6월 12일 <안동우편국>으로 개칭했다가 1950년 1월 12일 <안동우체국>이 되었다. 과거엔 안동우체국이 지금의 삼산동 우체국 자리에 있었다. 1984년 안동우체국이 당북동으로 이전하고 안동우체국 삼산동 분점이 되었다가 이듬해 <삼산동 우체국>으로 개칭했다. # 대구은행 안동지점-조흥은행-신한은행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핵심 상권에 금융기관이 자리한다. 일찍이 삼산동엔 신한은행을 중심으로 무진회사(현재 삼산동 우체국 자리)란 일제의 고리대금업체가 있었다. 1916년 4월22일 안동군 부내면 동부동에서 주식회사 대구은행 안동지점으로 개점했다. 1941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동군 안동읍 본정 3정목 114로 주소가 변경되었다. 1943년 한성은행과 동일은행의 합병으로 인하여 주식회사 조흥은행 안동지점으로 되었다. 1947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동군 안동읍 삼산동 114로 주소가 변경되면서 삼산동이란 동명을 쓰게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안동 지역에 금융기관의 각 지점들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1973년 안동농업협동조합이 업무를 시작했다. 사진으로 보는 근대 한국, 서문당 조흥은행 1989년 안동법원 출장소 개점홍보 현수막을 내걸었다.(제공 조흥은행) 1950년 7월29일, 6.25 전쟁으로 일시 휴업을 했다. 1950년 11월 11일, 원점포는 소실되고 동문동 446-3 지점장 사택에서 영업을 재개했다. 1951년 삼산동 114로 신축이전한 건물이 오늘에 이른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1963년 경상북도 안동시 삼산동 114로 주소가 변경되었다. 도로명 주소 도입으로 안동시 중앙로 41이 현주소이다. 이렇듯 신한은행은 우리나라 근대사와 맥을 같이했다. 신한은행 안동지점 2019년 11월 20일 (서미숙) #삼산동 성결교회 성결교회는 2019년에 66주년을 맞이했다. 1953년 10월 20일 교단 십자군 제 3전도대에 의해 안동시 삼산동 136번지에서 천막을 치고 장기 부흥 중에 본부의 보조로 192평의 대지를 구입하고 설립한 교회이다. 설립유공자는 천세광목사, 이성봉 목사이다. (출처: 사진으로 보는 안동 성결교회 60년사) 안동성결교회 (출처 : 사진으로 보는 안동성결교회 60년사) 66주년 맞이한 안동성결교회 (서미숙) # 안동에 칼라사진 시대를 연 성광칼라 성광칼라는 삼산동의 아이콘이다. 만주에서 사진관을 하던 형 이인홍의 영향으로 이인호가 1963년 안동에서 처음으로 <성광사>란 사진관을 열었다. 초기에는 사진 재료도 팔았다. 이인호 사장은 자식이 없었다. 성광사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서대교 씨가 양자 들다시피 했다. 1970년대에 서대교 씨가 인수하여 <성광칼라>로 상호를 바꾸었다. 1980년부터 성광칼라 사진 기사이자 책임자로 근무했던 남성진 씨가 1999년에 인수하여 23년째 3대 대표이다. 현재 아들이 사진영상학과를 졸업하고 4대를 이을 준비를 하며 출근 중이다. 성광칼라는 경북 북부지역 처음으로 칼라 현상을 시작했다. 아날로그로 암실 작업을 하던 시절에는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 할 정도였다. 1990년대 후반 남대표가 인수받을 무렵이 성광칼라 전성기였다. 졸업시즌이면 필름 사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과자 사놓고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차츰 필름이 자취를 감추고 디지털시대로 바뀌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작품사진이나 특별한 용도가 아니면, 사진을 파일로 보관하고 모니터에서 보는 걸로 만족하는 추세이다. 서사장이 남사장 외가 쪽 친척이다. 칼라사진을 처음 현상한 성광사 (출처 : 사진으로 보는 20세기 안동의 모습) 3대를 이어가는 성광칼라 (제공 성광칼라) -삼산동에 살아보니 어떠신지요? ""옛날에는 삼산동이 최고 상권이었는데, 시내가 죽어가니 많이 처졌지요."" -앞으로 삼산동이 어떻게 되길 바라는지요? ""주거지역 지어주고, 주민이 있어야 장사가 되지, 외지 사람 상대로만 장사하면 상권에도 신경을 덜 쓰게 된다. 상권이 살아나려면 인구가 늘어나고 지속적으로 구도심을 살려줘야 한다."" 성광칼라는 점포와 주택이 안쪽으로 연결되어 있다. 상주하는 주민이다 보니 동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삼산동이 옛날의 영화를 다시 찾을 해법은 없는 걸까? 삼산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삼산동 고우네 의상실 권오걸 사장 #삼산동의 산 역사 권오걸 권오걸 씨는 이천동 출신이다. 석수암 앞에서 살았는데 농사가 힘들어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서울에 가서 오전엔 라사라, 국제복장, 오후엔 노라노 식으로 치열하게 양장 기술을 배웠다. 큰누이가 경비를 대주었다. 디자인공부, 재단을 배우고 이대 앞에서 재단사 보조를 거쳐 고향으로 내려왔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의상실에서 옷을 맞춰 입었다. 1970년대 안동에 의상실이 120여개나 있었다고 한다. 그는 19세 때 삼산동 우체국 앞 <노라 의상실>을 거쳐 1972년에 <유 의상실>로 내 가게를 시작했다. 중고생들의 교복을 주로 만들었다. 까다로운 여학생들의 비위를 맞춰가면서 교복 잘하는 집으로 소문이 났다. <하얀집> 재단사, <동아양장점> 미싱 재봉도 했다. 1976년부터 삼산동 삼방사 옆에서 <고우네 의상실>을 열었다. 만19년간 호시절이었다. 안동 시내 멋쟁이들은 대부분 그가 만든 옷을 입어봤을 것이다. 나 또한 결혼 예복으로 만든 검은 정장은 아직도 갖고 있다. 논노, 코롱, 기성복 나오면서 맞춤옷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때부터 기성복으로 전환했다. 맞춤을 하다가 기성복을 팔기만 하니까 처음에는 무지 수월했다. <헌트><쉐인>< 휠라클래식> 순으로 품목을 바꾸어가며 삼산동에서 오래 버티었다. 삼산동에서 집을 팔든 임대를 하든 권사장 한테 자문을 구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삼산동의 산 역사이다. 덕분에 어디 가서 누굴 만나면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는지도 꿰고 있었다. <고우네 의상실> 시절 권오걸씨는 옥류관 자리에 살았다. 그전에는 옥류관 자리가 ‘참사랑’예식장이었다. 이웃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보고 들은 이야기가 있겠다 싶었다. ""현재 안동호텔과 안동관 자리에 광제병원이 있었다. 허박사가 병원을 하셔가지고 재산을 많이 일구었다. 자제들도 잘 되어 국제변호사도 있고, 교수도 있고, 의사도 있다. 허동섭 씨가 몸이 아팠어요. 일본인가 미국인가 가서 치료를 하고 제2 인생을 사시니까, 자제들도 잘 사니까 어른 마음대로 하라고 해서 장학재단을 만들었다. 혼자 안동호텔 2층에 수발하는 사람 두고 기거하시다가 98세까지 살다가 돌아가셨다."" # 광제병원과 호연장학회 1960년대 광제병원 (호연장학회 제공) 생전의 허동섭 박사 (호연장학회 제공) 광제병원 설립자는 의학박사 허동섭 許東燮이다. 원래 일본사람이 지어서 사용하던 2 층 적산가옥이었다. 한국전쟁 때에는 미 군정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휴전 직후에 허박사가 불하받아서 개보수하여 병원을 그 자리에 개원하였다. 한국전쟁 직후 1953 년경 부터 1978 년 경까지 운영했으며, 개설된 진료과는 외과, 산부인과였다. 특이한 점은 일찍이 X선 장비도 도입하여 골절 등의 정형외과 진료도 했다는 것. 입원실이 20에서 30실 정도 규모였다. 병원 입구는 지금 삼산 우체국 앞 도로에서 안동호텔로 들어오는 쪽에 있었다. 1960년대 광제병원 의사와 간호사(호연장학회 제공) 1985 년 5 월, 유지를 받들어 재단법인 호연 장학회를 설립했다. 초기에는 고등학생과 대학생 반반 정도, 지원대상은 안동시 관내에 있는 고등학교로 부터 졸업생 중 대상자를 추천 받아서 면접을 통하여 선발한다. 지금은 한해에 5 ~10 명 정도 대학생 중심으로 지원한다. 장학금 재원은 허박사께서 그간 운영하시던 광제병원 건물을 헐고 신축한 안동호텔 건물로부터 나오는 임대료와 기금에서 나오는 이자 수입을 주재원으로 한다. 광제병원 가족들 1060년대 (호연장학회 제공) 옛 광재병원자리 안동호텔 (서미숙) #옛 <삼방사>주인 김건종 1949년생 김건종 씨는 의성김씨 집성촌 내앞 마을이 고향이다. 8남 2녀 중, 9남매가 모두 서울에 산다. 셋째인 그이만 안동에 살며 선산을 지킨다. 그와 삼산동은 일찍부터 인연이 깊다. 그의 선친(고 김시박)이 삼산동 삼방사 자리에 일찍이 터를 잡았다. 6.25 사변 후 1950년대 초반 선친이 건물을 매입하여 <상공주식회사>를 설립해서 당시 사옥으로 사용했다. 인쇄업을 하다가, 문경 시멘트 경북북부지구 총판대표이사였던 부친은 2대, 3대 무소속 경북도의원을 지냈다. 부친과 삼촌 김경종이 <상공인쇄소>를 운영했다. 통학하기 힘든 시절이라 중학교 때부터 안동 시내로 왔다. 삼방사 자리 뒤에 한옥이 있었다. 당시는 그 한옥이 삼촌댁이여서 자취를 하면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훗날 삼촌으로부터 한옥을 매입하여 결혼 후 그 집에서 살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삼산동 140 ? 5, <상공주식회사>가 있었던 부친의 건물에 1973. 3. 3. <삼방사>를 개업했다. 1973년부터 2000년까지 29년간 삼방사란 문구점을 운영했다. -문구점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네요. ""아버지가 안동에서 의성 김가 우리 일가가 하지 않는 업종을 찾아봐라. 찾아보니 다 있는데 문방구가 없어. 우리 조상이 선비인데 학자들한테 필요한 게 지필묵이다. 그래서 문방구를 시작하게 되었지요."" 한편 김건종 씨는 (77~91) 국정교과서주식회사 안동공급소장을 맡아 일년에 100만권씩 공급하느라 갈빗대가 세 대 부러질 정도로 힘들었다. 무시로 (가마니로 포장된 = 허적대기 포장)포장된 교과서는 당시는 박봉의 봉급과 공급 경비를 받았다. 학자는 못 되었지만 학생들에게 필요한 공책 팔고 책 나르는 일을 했다. 삼방사 한옥에서 살던 시절 김건종 가족과 처남 김영훈 (사진제공 김건종) 연탄난로를 피우던 초창기 삼방사 내부, 사진 속 남매는 성인이 되었다. 아들은 지금 삼산동 문화의 거리 3층에서 만화카페 벌툰을 운영한다. 80년대 삼방사 앞에서 기념촬영한 막내동생 김순종 (사진제공 김건종) 작은 문구점으로 시작해서 1984년 부친으로부터 그 건물을 구입했다. 33세에 건물주가 되어 건물을 신축했다. 삼방사를 개업하고 나서 문구점 관리는 부인이 주로 맡다시피 했다. 이후 삼산동의 <마켓 21>부터 <베스킨라빈스> <CNA (상공인쇄소 자리)> 까지 건물을 사들여 임대업을 한다. 아들이 건물관리를 하고 노후를 보내며 뒤를 봐주는 편이다. 1988년 삼방사 건물 개축당시 모습, 삼방사 옆에 고우네 의상실, 톰보이, 동방당 안경점 간판이 보인다. (사진제공 김건종) 도시재생사업으로 환경개선을 한 문화의 거리 ⓒ서미숙 천만광광객 유치를 위한 플래시몹 (서미숙) ""삼산동이 다운타운이 된 것은 교학사 자리, 농협지부 자리에 예전에 버스터미널이 있어서였다.""고 김건종씨는 회고했다. 문화의 거리가 차 없는 거리가 되면서 인근 상인들은 오히려 피해를 보는 쪽이 많다고 한다. 차가 지나다니지 않는 거리는 접근성이 떨어져 매출에는 지장이 있는 모양이다. 김건종씨에게 삼산동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우마차가 다닐 때 소 엉덩이에 소똥 떨어질까 봐 가마니를 받히고 다녔다. 삼방사 맞은편 가게였던 대구전기 함동훈 씨 부친이 먼지 날지 말라고 날마다 길에 물을 뿌렸다.""고 한다. # 삼산동에서 멋 부리고 놀았던 이상호 탈 쓰나 안쓰나 똑같다는 이상호 선생 (서미숙) 사람의 끼는 타고 나는 모양이다. 인간문화재(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 69호 백정 역) 이상호 씨는 삼산동에 대한 추억이 많다. 1945년 해방동이다. 남부동에서 태어났지만 주로 삼산동에서 놀았다. ""다섯 살 때부터 구두 신고 가죽가방 메고 남부동에서 삼산동을 거쳐 대건 유치원에 다녔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이 목성동 성당에 신부님으로 오셨다. 안동초등학교 시절부터 연극도 하고 끼가 다분했다."" 아들 셋 낳아 놓고 아버지는 6. 25 때 좌익으로 몰려 경찰에 잡혀가서 돌아가셨다. 연좌제 때문에 공부할 생각도 안했다. ""예전에는 사장 뚝을 중심으로 해서 구시장 쪽에 사는 아들은 멋쟁이고, 맘보바지, 나팔바지입고 살았고, 야바위꾼 모이는 거는 베전 골목 부근에 많이 모였지."" 안동중학교에서 열린 시민체육대회에서 트위스트 추던 이상호, 사진 왼쪽 첫번째 경안고등학교 시절에는 양복점에서 제일모직 바지 맞춰 입고, 흰 운동화 대신 백구두를 신고 폼잡았다. 당시 삼산동에는 구두점이 많았다. ""'국제양화점'이 중소기업은행 앞에 있다가 삼방사 옆으로 옮겼다. 김창현이 서울 가서 수제구두 만드는 기술을 배워왔는데 안동 시내 건달들은 국제양화점 구두를 다 신었다."" 삼산동 조흥 은행 뒤에는 <경일식당>이란 한식집이 있었다. 그곳은 이상호 선생 조모님 언니가 운영했는데 갈비탕을 주로했다. ""세멘 거랑이라 그랬어요. 안동시청 앞에서 어개골까지 흘러가는 하천을 안동의 세느강이라고 했지요. 맘모스 뒤쪽으로 해서 남부동 우리 집(최유근 안과 맞은편, 당시 대동식당) 앞으로 흘러갔죠. 비오면 반도 가지고 고기도 잡고 그랬어요."" ""6.25사변 전에는 농협에서부터 대구은행 뒷길로 해서 맘모스제과 뒤쪽에 큰 거랑이 홈플러스 앞쪽으로 흘러갔다. 농협자리가 버스 터미널인데 삼환여객 하나 뿐이었다. 삼환여객 버스도 우리집(남부동 최유근안과 맞은편으로 당시 대동식당 ) 앞으로 해서 지금 홈플러스(당시 철도국) 앞을 거쳐갔다. 오가다로 원동기 돌리듯이 손으로 돌려서 시동을 걸었다."" 버스터미널은 중소기업은행 자리로 이전했다가 홈플러스 자리를 거쳐 현재 송현시대를 맞이했다. <대구전기> 옆에는 70년대 중반 안동에서 유명한 <8.15제과점>이 있었다. 맘모스 제과점이 생기기 전에 중고생들의 데이트장소였다. 80년대 중반에는 <대구전기> 옆에 숙녀복과 잡화를 주로 취급하는 <신라백화점>이 있었다. 삼산동 대구전기상회 4층서 1970년 9.12 개국한 안동문화방송(출처:안동문화방송 30년사) 1970년 9월 12일, 안동시 삼산동 99번지 대구전기상회(현재 중앙시네마 맞은편) 건물 4층에서 안동방송이 첫 전파를 발사했다. 처음에는 AM 라디오 중심이었다. 당시 2,3,4층을 임대해서 5년간 방송업무를 수행했다. 1971년 한국문화방송의 가맹사가 되면서 안동문화방송으로 상호를 바꿨다. 1975년 9월부터 남문동 145-3, 대구은행 건물 3층은 1985년 태화동 신 사옥 으로 옮길 때까지 약 10년 가까이 MBC의 애환이 서린곳이다. 1980년 언론 통폐합과 함께 ㈜문화방송의 계열사로 변경되면서 오늘에 이른다. (출처 : 안동문화방송 30년사) 1970년대 후반 '별이 빛나는 밤에'란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이 인기 있었다. 시그널 뮤직만 나와도 가슴 떨리던 시절이었다. 이상호는 1980년경 안동 MBC 1기 전속가수로 활동했다. 돌아가는 삼각지, 비 내리는 명동거리 등 배호 노래를 주로 불렀다. MBC에서 성우를 해보라고 해서 매주 일요일 아침 가십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광복 20년 연속 소설 낭독도 했다. mbc 가수 시절 희방사 야유회. 왼쪽 기마 앞에 선 이상호와 안동 MBC상징(출처:안동문화방송 30년사) 군대에서도 연예단 소속이었다. 1972년부터 탈춤을 시작한 그는 타고 난 춤꾼이다. ""춤 춰가지고 디다는 소리는 안 한다. 안동 친구들이 날 보고 저 새끼 돌았는 놈이라 그래. 가수나 연예인 하면 돈이나 벌겐데. 재주도 좋은 놈이 저거 한다고."" 돌았다 카던 말던 내 혼자 끝까지 해보면 안되겠나 싶었다. 하도 그카니까 나중에 친구들이 그래. ""니는 탈 쓰나 안쓰나 똑같다."" #삼산동에 활기를 불러오는 사람들 예술영화 전용관 중앙시네마 (서미숙) 예술영화 전용관 중앙시네마 중앙시네마는 삼산동 문화의 거리 자존심이다. 예술영화전용관으로 안동 사람들의 문화 갈증을 해소해주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이다. 2000년 8월에 정사영씨가 개관한 극장을 2014년 2월부터 한태희 씨가 인수했다.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바뀐 건 2009년 부터이다. <워낭소리>가 인기를 끌면서 사람들이 독립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독립영화 살리고 영화진흥공사를 영화진흥위원회로 바꾸면서 독립영화관 지원사업, 예술영화 지원사업이 진행되었다. 한 대표는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충청도 보은에서 자랐다. 청주에서 살다가 1994년 KT 발령을 받고 안동에 정착하게 되었다. 2009년 12월 퇴직하고 시민단체 활동하면서 중앙시네마를 알게 되었다. 당시 공동체 영화, 시류에 민감한 영화 같이 보기 운동을 하면서 <우리 학교> <서해 여기>등 북한 관련 영화도 상영했다. 전 주인은 중앙시네마와 구시장 안에 진성극장을 같이 운영했다. 2004년 안동에 멀티플랙스가 들어오면서 단관영화관은 문을 닫는 시점이었다. 중앙시네마 내부 (사진제공 중앙시네마) ""안될 줄 알았어요. 그래도 해야겠다. 예술영화 전용관이라 예술영화지원사업이 있으니까 이런저런 시도를 해볼 수도 있고, 큰 이득은 없지만, 손해 보지 않고 현상 유지할 수 있으면 의미 있는 일이란 생각으로 시작했지요."" ""박근혜 정부 초기에 이명박 정부의 <천안함 프로젝트>란 독립영화를 상영 못하게 하는데 했어요. 그랬더니 ""지원 사업에서 탈락되어 2014년 첫해엔 손해를 봤죠. 2,500만원 사비가 들어갔어요. 2015년 <다이빙 벨> 상영으로 예술영화 전용관 지원 사업이 없어졌어요. 그러자 왜곡 현상이 생긴 것이죠. 영화 상영할 곳이 없어지자 2016년 유통배급 지원 사업으로 계약을 갱신했습니다."" ""2017년 정부 바뀌고 문화정책이 다시 안정적으로 돌아간 셈이죠. 문 닫을까 하던 중 사회적기업 운영으로 가기 전 단계인 사회적 기업 육성가 사업이 생겨 여기까지 오게 되었죠."" 최근 예술영화전용관운영 지원 사업으로 감독을 초대하고, 테마별 영화상영과 기획전, 시나리오 입문과정도 해왔다. 내년에는 영화제작사업 일환으로 영화비평, 단편영화 제작교육 등 계획 중이다. 좋은 영화를 상영하는 예술영화 전용관이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늘 감사한다. 아날로그 시대에 사용하던 영사기는 장식품으로 밀려났다. ⓒ서미숙 #집밥이 땡기는 날은 태함식당 골부리국 할머니의 손맛으로 만든 밑반찬과 골부리국 (서미숙) <태함식당>은 집밥이 땡기는 날 가는 단골집이다. 중앙파출소에서 뒤에서 임치순 할머니가 53세부터 19년째 운영 중이다. 한결같이 단아한 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맵짜다. ""내 금소 동네서 컸잖니껴. 안동포 나는 동네. 어릴 적에는 골부리 넣고 된장도 찌져 먹고, 친정엄마한테 골부리국 끓이는 거 배웠지요. 처음에는 소머리 곰탕도 하고 닭 볶아주고 해 보이 술집도 밥집도 아닌 것이 어중간해. 석 달 만에 치워 부랬어. 그때부터 골부리국 한 가지만 해."" 반찬도 모두 할머니가 손수 만든다. 정갈한 밑반찬과 계절별로 나물 반찬을 준비한다. 사계절 빠지지 않는 매뉴가 콩가루 무쳐 찐 부추 무침이다. 토속적인 맛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점심시간에는 인근 직장인들이 몰려온다. 입소문을 듣고 할머니들이 곗날에 찾기도 한다. 서른둘에 혼자되어 아이들 키우느라 힘들었다. 안동역 앞에서 여인숙을 했다. 돈 빌려줬다가 떼이는 바람에 신경 써서 큰 병을 얻었다. 쉰한 살에 직장암 수술을 받았다. 병원에서 원장이 움직이라 해서 태함식당을 시작했다. 그때 내 죽었다 생각하고 골부리국 가격을 한 번도 올리지 않았다. 골부리국전문 태함식당 (서미숙) 가격이 착한 대신에 한 그릇은 팔지 않는다. 둘 이상은 함께 가야 할머니도 상 차린 보람이 있다니 기억할 일이다. 막내아들(43세)이 요즘 와서 도와준다. 앞으로 가게를 이어받으려고 배우는 중이다. ""아침 7시 전에 나와서 준비하면 11시 반부터 점심 장사를 해요. 골부리국 떨어지면 문 닫아 부래. 요즘 국을 사가는 사람이 얼매나 많은 동, 저녁에는 일찍 문 닫는 날이 많애. 일요일도 쉬지 않고 문을 연다."" 주방에 데쳐놓은 얼갈이배추와 파가 선명한 녹색이다. 거기에 부추와 골부리를 넣고 밀가루를 풀어 걸쭉한 맛을 낸다. 할머니는 음식은 재료가 좋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쪼록 대를 이어 삼산동 맛집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오래 해야 된다고 손님들이 그꾸 나싸. 6시 내 고향에도 세 번이나 소개하라 그는 데 아(안) 했어."" #삼산동 유감 문화의 거리에서 서점이 사라지다 한 때 삼산동에는 조흥은행(현 신한은행)을 중심으로 <스쿨서점>과 <교학사>가 나란히 같은 통로에 있었다. 스쿨서점이 삼산동 중앙파출소 옆 버스승강장 앞으로 옮겼다가 2011년 끝내 문을 닫았다. 그때만 해도 충격이었다. 시내에 나가면 가끔 들러 잡지라도 뒤적이던 아지트가 사라져 몹시 허전했다. 50년 전통의 서점, 교학사도 어느 날 삼산동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어떤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교학사 서점 자리는 몇 년째 비워져 있다. 새로 옮겨 간 곳은 남부동으로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다. 교학사는 55년째다. 장사숙 사장이 1965년 예천에서 창업해서 하다가 안동으로 와서 47년 하셨다. 장남 장우영이 5년 가까이 부친을 도왔다. 장사숙 사장이 돌아가시고 2010.11부터 처남 손질걸 씨가 인수했다. 2018.6월 남부동으로 이사했다. 문화의 거리에서 50년이 넘은 서점이 사라지는데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11월 11일 서점의 날이다. 제1회 때 그는 문 닫아야 할 서점을 살리고, 지역 서점을 지켰다고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받았다. 몇 년째 비어있는 교학사 서점 자리 (서미숙) 서점이 온라인 업체에 이길 수 없다. 책방 하나 없는 도시는 너무 삭막하다. 젊은 친구들이 책을 너무 안 읽는다. 책 사러 오는 분들은 연세가 있고 책 읽는 게 몸에 밴 분들이다. 교학사 손대표는 ""오십 년이 넘는 가게를 찾아서 스토리를 만들면 자부심을 가지게 되고 시에서는 표시를 해주자.""고 제안했다. 몇 집 건너 빈 점포 우려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삼산동을 돌다 보니 도심공동화가 피부로 느껴진다. 삼산동 핵심 신한은행 앞에 세 코너가 몽땅 비었다. 가게 유리마다 임대문의만 잔뜩 붙어 있다. 어쩌다가도 아니고 몇 집 건너이다. 삼산동 전체를 파악하면 숫자가 꽤 된다. 현재 가게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지금 있는 사람들도 전부 나가고 싶을 걸요."" 도시재생사업을 한답시고 혈세를 쏟아부어도 효과는 미미하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러다가 유령의 도시가 될까 두렵다. 임대ⓒ서미숙 임대ⓒ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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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안동의 북쪽 관문 북문동을 돌아보다
태사묘와 장터가 있는 북문동 골목의 시간 안막동에서부터 천리천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들던 물길이 지나고, 안동읍성 북문 문루가 있었고, 고려의 흔적이 새겨진 태사묘와 장터가 있는 북문동 골목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다시 돌아본 북문동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안동시 북문동 지적도. 북문시장이 들어서기 전으로 북문동 구역과 태사묘, 자혜의원(현 안동의료원), 안동시청(현 안동시보건소)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안막동에서부터 신안동, 북문동을 지나 천리동으로 흘러내려가던 천리천 물길이 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79년의 안동시 북문동 일대 지적도 (출처:국토정보지리원) 북문동은 안동시 중구동에 속하는 동네로 조선 후기에는 안동부 북부에 속하던 지역으로 1947년 해방이 되고 일본식으로 변경했던 동 이름을 삼산동, 서부동, 북문동, 옥정동, 율세동, 신세동, 법흥동, 동문동, 동부동, 운흥동, 남문동, 남부동, 천리동으로 세분하면서 북문이 있던 곳이라 하여 특별히 북문동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북문동이라는 지명은 이곳이 안동부 읍성 안에 속했던 동네로 북문 문루가 있는 곳이었음을 알려준다. 영가지에 따르면 안동읍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안동부내 읍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947자이고 높이는 8자이고 안에 우물이 18개소, 도랑은 2개소, 못은 5개소였고 성의 4 곳에 문루가 있었다. 태사묘 옆 담장을 따라 안동의료원 쪽으로 올라가는 길 끝쪽 약국 앞에서 북문읍성의 표식을 만날 수 있다. 북문읍성 표지석과 함께 바닥에 읍성지도가 인장처럼 새겨져 있다. 북문읍성 표지석 ⓒ이미홍 북문읍성 표지석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안동의료원이 있다. 1912년에 자혜의원으로 문을 열었다. 지역민을 위한 의료 시설 확충과 지역의료 발전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경상북도가 전액 출자해 설립한 북부지역 공공의료기관으로 거듭난 도립안동의료원은 한 자리에서 100년이 넘는 시간을 안동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 안동군처와 자혜의원 사진(유리건판. 1915 국립중앙박물관) 북문동에서 100년의 역사를 이어온 경북도립안동의료원 ⓒ이미홍 고려 속의 안동을 만날 수 있는 태사묘 북문읍성 표지석이 있는 지점에서 안동의료원을 등지고 골목을 따라 내려가면 태사묘담장과 만난다. 북문동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태사묘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의 병산전투에서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친 권행, 김선평, 장길 삼태사를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태사묘 대성전 안에는 고려를 개국하고 왕이 삼태사의 공을 치하하고 세 성씨를 내린 흔적들이 중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태사묘 안 보물각은 삼태사가 아닌 홍건적의 난 때 노국공주와 함께 안동으로 몽진을 왔던 공민왕과 고려왕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유물을 보존·전시하기 위한 '보물각'이 1963년에 건립되었다. 태사묘 본당 대성전 (유리건판 1915년, 국립중앙박물관) 시내 북문동 도심 골목에 자리하고 있는 태사묘는 삼태사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묘, 즉 사당이라는 말이니, 도심 골목 안에 역사적 위인을 위한 추모공간을 세운 것이다. 안동부라는 지명과 함께 고려시대로부터 이어져내려온 이 골목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태사로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태사묘 깊숙한 안쪽에 삼공신을 모신 사당이 있고 삼태사의 묘정비와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삼태사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하는 것이 태사묘의 첫 번째 존재이유일 것이다. 태사묘가 생긴 이래로 오늘까지 삼태사의 후손들이 그 일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태사묘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정제 권정찬 ⓒ이미홍 권태사의 후손으로 오랫동안 태사묘 일을 봐왔던 권정찬 선생을 만나러 태사묘를 찾아간 날, 중구동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태사묘 앞 골목길이 속까지 깊이 파헤쳐져 바닥이 드러나 보였다. 태사로 골목에 전선을 땅속으로 묻는 지중화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태사로 거리를 재생한다고 동의서를 받으러 왔더라고요. 우선 불편해도 감수를 해야지요. 담장 낮추는 것에도 삼성 대표들이 동의를 했고요."" 태사묘가 있어서 붙여진 거리 이름 태사로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이 함께 있는 셈이다. 시청에서 근무하면서 태사묘를 자주 드나들게 되면서 퇴직 후 자연히 권씨 문중 어른들에게 눈도장이 찍혀 태사묘 일을 이어받아 하게 되었다는 권정찬 선생은 태사묘에서 첫 번째로 공을 들이는 일이 향사라고 했다. ""향사를 올리는 것이 후손들이 하는 가장 중한 일이지요. 세 성씨의 후손들이 같이 준비해서 향사를 올리는데 전국 각지에서 후손들이 태사묘에 모여 선조들 앞에 고하는 자리이기도 하지요. 향사를 무사히 잘 치르고 나면 그해 가장 큰 일을 마친 셈이지요."" 태사묘 대성전에서 고지기와 이야기하고 있는 권정찬 ⓒ이미홍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집안 어른들 중에 삼태사와 태사묘 내력이며 보물각에 얽힌 이야기들을 낱낱이 꿰고 있는 분들이 계셔서 참 좋았는데, 그 어른들이 돌아가시고 난 후로 태사묘를 제대로 지켜나가는 일이 후손들에게 점점 쉽지 않은 숙제가 되고 있다고 말하며, 상주하는 관광해설사 분에게 열쇠를 받아 잠겨있던 문들을 열어주었다. 태사묘 사당 문을 여는 태사묘 해설사 ⓒ이미홍 알고 보면 태사묘는 삼태사만의 공간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왕건을 도와 고려의 시작을 함께한 삼태사의 이야기를 품은 공간과 홍건적의 난 때 몽진하여 안동에 70여일을 머물고 간 공민왕과 왕실 가족들의 이야기가 담긴 보물각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두 공간을 나누는 작은 문이 사이에 있어 중문을 넘어가면 보물각이 자리한다. 고려 공민왕이 내린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태사묘 보물각 ⓒ이미홍 대성전과 사당 공간이 삼태사의 공간이라면 보물각은 공민왕의 공간인 셈이다. 공민왕 일행이 몽진을 와서 70일을 머물며 홍건적의 난을 물리치고 상경 하면서 왕실을 보필한 고창 백성들을 치하하고 왕실 물품들을 하사했으니, 보물 제451호로 일괄 지정된 공민왕의 교지와 관모, 옥관자와 200여점에 이르는 물품들이 보존, 전시되고 있다. 관광해설사가 상주하고 있어 누구라도 신청을 하면 문을 열어줄 뿐 아니라 해설까지 곁들여 들을 수 있다. 웅부공원이 지척이고 시내 어디서도 접근이 어렵지 않으니 볕 좋은 날 잠시 시간을 내어 보물도 구경하고 고려와 안동의 오랜 내력을 해설로 들어보면 좋을 것이다. 태사묘 열 골목안 두 번째 집에 살던 기억 고향이 예안면 귀단리 고통인 임옥순은 1948년 생으로 이웃 동네에 살던 이문원과 혼인을 하고 아들 형제를 낳았다. 처녀 때 안동읍내에 자취를 하며 미용학교를 다녔고 혼인을 하고 난 후에 시내로 나와 살아서 60년대와 70년대 북문동의 모습을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 옥순씨가 미용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분수대 지나 버스터미널까지만 포장이 되어 있고 북문동 다리가 있던 지금 시청 그 위쪽으로는 다 비포장 흙길이었다고 기억한다. 처녀 때 다닌 안동미용학교 졸업식 사진 ⓒ임옥순 ""미용학교 다닐 때 북문동 버스터미널서 집까지 버스를 타도 한 시간이 넘는 거리였어. 여자애들이 늦게 다닐 수도 없고 해서 방을 얻어 자취를 하면서 미용 배우러 다니고 했지. 멋 내는 것에 흥미도 많을 나이인데다 머리를 만지는 걸 배우니까 재미있었지. 배워서 언니 머리, 친구들 멀리 다 만져주고. 그런데 미용학교 마치고 얼마 안 있다 시집가는 바람에 미장원 일을 하지는 않았어."" 결혼을 하고 이사도 여러 번 다녔다. 옥야동에서도 살고 당북동 쪽에도 살다가 북문동으로 와서는 태사묘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바로 옆 골목에 집을 얻어 살았다. 재건운동본부에서 마을금고 만드는 일을 했던 남편 이문원 ⓒ임옥순 ""옛날 태사묘 바로 옆 왼쪽 골목에 집이 있었어. 애들 아버지가 그때 분수대 쪽에 있던 국민운동재건본부에서 마을금고 일을 하고 있어서 그쪽에 집을 얻은 거지. 골목 안 두 번째 한옥집이었는데 태사묘 하고 담장 하나로 이웃하고 있어서 우리집 툇마루에 서면 담장 너머로 태사묘가 다 보였어. 태사묘에서 제사 지내고 하는 것도 다 보였지. 애들이 태사묘 잔디가 깔린 마당에도 많이 가서 놀았어. 큰애가 세발자전거 타고 가서 세워놓고 시청 앞 분수대에 들어가 물놀이 하고 있는 걸 잡아온 적도 있어."" 옥순씨 바로 옆집이자 골목안 첫 번째 집은 총을 팔던 총포사여서 엽총을 든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그 골목을 따라 가면 북문시장이 나왔다. ""그 샛골목 따라 쭉 가면 북문시장이랬어. 그때는 복개를 하기 전이랬는데 개천둑 양쪽으로 가게들이 있었어. 분수대에서 올라가면서 왼쪽으로 목욕탕, 이발소가 있었고 이쪽에 국수가게, 기름방, 식육점 그런 게 있었어. 북문시장에 국수 사러 가다가 골목에서 바바리맨 만나서 기겁하기도 하고 그랬어. 그때는 버스터미널도 북문동 다리 있는데 있었어. 집에 갈 때 거기서 덜컹거리는 버스 타고 집에 가고 했던 기억이 많지."" 태사묘 잔디밭에서 놀던 옥순씨네 아들 형제. 1970년대. ⓒ임옥순 북문동 살면서 가장 기억나는 일로 옥순씨는 연탄파동을 꼽았다. ""그때 연탄파동이 났어. 석유파동이 어떻고 하더니 동네 연탄보급소마다 연탄이 떨어져서 돈 들고 가도 연탄을 못 사는 거야. 파동이 나니까 동사무소에서 연탄 배급표를 줬어. 큰애는 걸리고 둘째는 들춰 업고 동사무소 가서 배급표 받아서 안동연탄공장으로 갔어."" 당시 연탄공장은 강원도에서 기차로 실어오는 석탄을 받아서 만들었기에 대부분 역 근처에 있었다. 연탄공장 가서 배급표를 주면 연탄 백장을 실은 리어카가 한 대 따라나왔다. ""연탄 배달하는 아저씨가 연탄이 무거우니까 쉬지도 않고 빨리 가. 나는 애를 업고 하나는 손에 끌다시피 하면서 연탄리어카 따라잡던 게 지금도 기억이 나지."" 그 연탄공장 자리는 그 뒤 북문동에 있던 버스터미널이 옮겨가 안동버스터미널이 되었고, 그리고 지금은 그 자리에 다시 대형마트가 들어서 있으니 강산이 몇 번이나 변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연필스케치로 옥순씨가 그린 자신의 얼굴 ⓒ임옥순 연탄파동이 났을 때 배급표를 들고 연탄공장에 가서 연탄을 배급받았던 옥순씨는 남편의 직장 따라 북문동 골목을 뒤로하고 대전으로 갔다가 서울로 가서 서울사람이 되었다. 서울에 살면서는 고추파동을 겪었는데, 서울서도 동사무소에서 배급표를 받아 고추상회에 가서 한 집에 몇 근씩 달아주는 대로 고추를 받아서 그해를 났던 기억이 있다. 사람과 물자가 흔하다고 해도 서민들이 사는 모습이야 어디라도 별다르지 않더라 했다. 태사로에서 고려의 거리를 꿈꾸는 사람 1987년에 KBS 안동방송국으로 발령이 나면서 북문동에서 30여년을 살아온 강점용은 1946년 생으로 경남 진주 함양이 고향이다. TV문학관을 찍으며 전국을 다니면서 안동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북문동 태사로에서 30년을 살아온 강점용 ⓒ이미홍 ""제가 77년도부터 하회를 들락거렸어요. 내가 들락거리던 그때만 해도 하회에 초가집에 하인들만 살았어요. 기와집에 있는 사람들은 문을 잠가 놓고 다 외지로 나가 있고 관리자만 남아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TV문학관 할 때 하회마을에 가서 촬영을 많이 했어요. 그때만 해도 집집이 문을 열어보면 등잔이며 병풍이며 골동품들이 가득 했어요. 촬영을 위해 전국을 다녀봤지만 안동이 제일 역사성이 깊더라 이거예요. 역사적 장소와 이야기가 안동만큼 많이 남아있는 곳이 없어요."" 태사로와 웅부공원이 잘 보이는 도시재생센터 1층에서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태사로의 역사성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내는 강점용씨다. ""여기 안동예식장 자리가 있는 이 태사로 거리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고려시대 역사를 증명하는 태사묘가 있고, 여기 웅부공원 자리가 조선시대 안동부가 있던 장소고 맹사성이 심었다는 부신목이 있지요. 그리고 이 길을 따라 쭉 나가면 임청각이 있습니다. 임청각은 우리 근대 역사를 말해주는 상징적인 공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10년 전에 태사로 거리를 조성할 때부터 임청각을 꼭 넣어야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 사람들이 의외로 임청각을 멀리 생각하더라고요. 별개의 자리라고 생각하더라 이겁니다. 임청각이 우리 역사를 말해주는 근대고 그리고 월영교가 뭐죠? 스토리를 입혀 현대에 만든 다리죠. 이 태사로에서 월영교까지 고려에서, 조선, 근대, 현대까지 이렇게 시대 순으로 장소들이 놓여져 있는, 그런 곳이 세계적으로 여기 말고 없습니다."" 북문동 사람들이 태사로 고려의 거리 재현을 위해 왕실의 복장을 입고 있는 모습 ⓒ강점용 안동이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옛날부터의 역사적인 뿌리가 튼튼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안동이고 그리고 그 출발점이 태사로라고 그는 생각한다. 고창전투가 실제 있었고 놋다리밟기, 차전놀이의 발원지가 다 이곳과 연관이 있다. 왕건하고 견훤하고 싸웠던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원 뿌리가 있고, 노국공주와 공민왕이 남긴 유물도 있고, 놋다리밟기, 차전놀이 같은 민속놀이도 있기 때문이다. 전국에서 고려와 관련된 역사적 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인 태사로를 사람들이 찾아오는 태사로로 만들고 싶은 것이 그의 꿈이자 도시재생센터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중구동 태사로 재생사업의 큰 줄기라고 한다. 그런데 꿈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가 북문동에 둥지를 튼 이래로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일이지만, 한 사람의 개인이 노력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었다. 다행히 안동예식장 자리에 도시재생센터가 들어서면서 태사로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고 있다. 고려의 거리 이야기도 먼 일이 아니게 되었다. 그런데 태사로 골목 안 사람들이 그 일을 다 반기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일에는 그늘이 있는 법이었다. ""집 가진 세대주 입장하고 세입자 분들하고는 생각이 다른 것도 많지요. 이렇게 재생사업을 해서 이곳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면 임대료 오르고 세입자들이 쫓겨나는 사태가 온다 이거지요. 임대로 내며 장사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지요. 저도 아내하고 이 골목 안에서 오래 추어탕 장사를 했지만 상인들 입장에서는 해도 걱정, 안 해도 걱정인 거지요."" 도시재생센터에서 바라본 부신목과 회나무가 있는 태사로 웅부공원 ⓒ이미홍 ""요즘도 여기 아침에 산책을 나와 보면 아침마다 저 부신목 앞에서 기도하는 할머니가 있어요. 신령한 나무, 신목이라는 거지요."" 퇴직을 하고 아침이면 동네 산책을 하는 그저 평범한 시민이지만 태사로 조성사업을 하면서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나서서 주민들을 설득하고 다니며 안 들어도 될 말도 듣지만 그래도 이 거리의 역사성을 살리는 것이 결국은 다 같이 잘 사는 길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친구가 보내준 모친이 했던 진주 함양 동문식당 사진. 사진 오른쪽 기와지붕 건물이 동문식당이다. (출처:함양군청) 그가 안동방송국으로 부임해 방송국에서 일을 할 때 부인은 북문동 골목 안에서 시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추어탕 장사를 시작했다. 집을 구할 때 북문동 골목 안에 있는 집을 택한 것도 이유가 있어서였다. ""우리 어머니가 진주 함양에서 추어탕을 했어요. 그리고 서울 가서 형수님이 물려받아 하다가 형수 돌아가시고 우리 집사람이 이어받아서 했어요. 그러다가 내가 안동으로 오면서 여기 북문동에서 집사람이 추어탕집 문을 연 거지요. 경상도추어탕이라고 붙인 이유는 경상도하고 전라고하고 추어탕 만드는 게 달라요. 경상도 추어탕은 생채를 풋내가 안 나게 바구니에 으깨서 넣고 전라도 추어탕은 무청을 삶아서 넣어요. 그리고 툭바리가 달라요. 경상도 툭바리는 아래 위가 같아요. 남성적인 느낌이랄까, 그런데 전라도 툭바리는 하관이 좀 빠졌어요. 좀 더 여성적이지요."" 그의 모친이 함양 동문식당에서 추어탕을 할 때 전라도 남원에서는 샛집추어탕이 유명했다. 당시 두 집이 추어탕으로 양쪽 지역에서 알아주는 양대 맛 집이었던 셈이다. 그런 만큼 어머니의 손맛을 이어받은 경상도추어탕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미꾸라지도 전라도는 평야가 많으니까 미꾸라지가 크고 납닥하고, 경상도는 산이 많고 개울이 좁다보니까 미꾸라지도 잘고 동글동글해요. 습생도 다른데 미꾸라지가 야행성인데 전라도 미꾸라지는 잡아넣어 놓으면 그냥 자지만 경상도 미꾸라지는 동그랗게 몸을 말고 똬바리를 틀고 머리를 틀고 있어요. 미꾸라지는 활동성이 좋은 게 맛이 더 있는데 경상도 미꾸라지가 더 많이 움직이고 훨씬 더 맛이 있어요."" 전라도 사람들이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는 그렇게 보고 배웠다. ""추어탕 할 때 가을 '추(秋를)' 쓰는데 추어탕을 원래는 가을에만 먹었기 때문이에요. 왜냐, 속배추가 있어야 하니까. 가을배추속이 고소하잖아요. 그냥 야채를 삶아서 쓰면 맛이 없어요. 제피도 우리는 지리산에서 나는 것을 쓰고 추어탕을 담는 툭바리도 고향의 흙으로 만든 걸 가져와요. 추어탕은 툭바리에 먹어야 돼요. 그래서 우리 집은 배달을 안 해요. 음식은 옮겨서 먹으면 맛이 달라요. 그릇도 다르고, 그리고 와서 그곳에서 먹어야만 보이지 않는 마늘이며, 제피며 그 속 재료의 맛을 제대로 즐길 수가 있어요."" 골목 안으로 들어가야 맛볼 수 있는 경상도식 추어탕 집 ⓒ이미홍 그는 아들 며느리에게 추어탕 가게를 물려준 지금도 마늘을 자신이 직접 의성에 가서 눈으로 보고 사서 가져온다. ""추어탕에 갈아 넣을 거니까 사실 떨어진 거나 됫박을 까서 파는 마늘 사오면 가격도 더 싸지만 마늘이 단단하게 제대로 붙은 걸로 접으로 매달린 걸사요. 마늘 사러 30년 동안 같은 집을 가요. 처음 그 집을 선정할 때도 가업을 이은 집을 찾아서 갔어요. 가업을 이은 집은 어른들들 때부터 이어온 명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소홀히 하지 않거든요. 처음에는 내가 바가지를 좀 썼어요. 30년 지난 지금은 내가 가면 가장 좋은 마늘을 가장 좋은 가격으로 줘요. 그리고 그 입소문이 안동까지 와요. 그 사장은 마늘 하나를 사도 떨어진 거는 안사고 그리 사가더라고요."" 광고가 따로 필요 없이 재료 하나를 구입하는 것에서부터 어머니 때부터 해온 기본을 지키는 것,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경상도추어탕을 찾아온다고 그가 며느리와 아들을 앉혀놓고 늘 하는 말이다. 점용씨 모친이 남한테 맡기지 말라고 했던 쪽과 주걱 ⓒ이미홍 경상도추어탕 집은 골목 밖에서 보면 간판이 잘 보이지 않는다. 골목 바로 앞에 와야 그제야 간판이 보이는 집이다. 소문 듣고 물어물어 찾아오는 집, 추어탕은 그렇게 골목 안에 찾아들어가 먹는 음식이라고 그는 말한다. 부인을 도와 추어탕 식당을 하면서도, 항상 보이지 않는 거에 더 신경을 쓰라던 어머니가 하신 말씀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가 내한테 또 뭐라 했냐 하면 장사를 할 때 쪽을 남한테 주지 마라 그랬어요. 쪽이 국자를 말하는데, 국 하나 푸는 데도 정성이 중요하다 그거지요. 옛날에 하숙할 때 하숙집 밥을 먹으면 반찬이 많은데도 집에서 먹는 거하고 맛이 달라요. 정성이 들어가는 게 다른 거지요. 그리고 국을 뜰 때 손님을 보고 떠라 그래요. 목이 굵고 짧은 사람은 많이 먹으니까 밑에 무거운 걸 떠 줘야 잘 먹었다고 그래요, 목이 가늘고 긴 사람은 가벼운 걸 좋아해요. 그러면 위에 가벼운 걸 떠줘야 좋아해요. 우리 어머니한테 배운 거지요. 쪽을 남한테 주지 마라는 그 말 속에 그런 정성이 들어 있어요. 이상하게 어릴 때 배운 건 잘 안 잊혀져요. 대학가서 배운 거나 사회에 나와서 배운 건 다 잊어버렸는데 어릴 때 들은 건 지금도 기억나요."" 형제들 중에 막내였던 점용씨는 학교에 갔다 오면 힘들게 장사하는 어머니를 도와 국솥에 불을 떼곤 했다. 그때 어머니에게 들은 것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사는 것, 경상도추어탕이 삼대째 이어지고 있는 바탕인지도 모른다. 세벌식타자기가 있는 시청 앞 행정서사 사무소 북문동 분수대 앞에서 보건소를 지나 목성교에서 시청 쪽으로 꺾어들어 조금만 걸어가면 시청 정문을 살짝 비낀 자리에 김일수 행정사무소가 있다. 김일수씨는 1935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네 살이 되던 해 부모님 손을 잡고 귀국선을 탔고 청송군 현서면 화목에 일가가 정착을 했다. 화목에서 학교를 마친 후 면사무소에 취직을 해서 호적 관련 업무로 행정 일을 하다가 1970년대에 시험을 치고 행정서사가 되었다. 행정서사 김일수 ⓒ이미홍 일수씨는 서른 살 무렵에 현서면에서 월곡면으로 가게 된다. 장터 앞에 자리를 잡았는데 잡고 보니 면사무소 바로 앞이었다. ""안동댐 되기 얼마 전일 거래. 내가 미질로 들어간 게. 월곡면 미질1동에 가서 살고 있는데 면장이 불러서 일 좀 도와달라고 그래. 당시 월곡면사무소 면장이 권한섭 면장이었는데 그분이 그전 청송 화목 살 때 내가 면에서 행정 일을 본 걸 알았어. 수몰 앞두고 민원이 하도 많아서 감당을 다 못하니까 책상을 하나 주고 호적 일을 맡겨서 무보수로 우선 일을 도와주고 있었어."" 그런데 그때 안동군에서 행정감사가 나왔는데 당시 김상도라고 고향 선배가 안동군에 행정과장으로 왔는데 월곡면으로 사무감사를 나왔다. ""청송 화목 살 때 앞뒷집 살아서 잘 아시는 분인데 나를 보고 깜짝 놀래. 한참 이야기를 듣더니 내보고 뭐를 하고 싶노? 그래. 당시 면서기 전형시험이 있었어. 면서기를 할라나? 하고 싶은 거 이야기를 해보라 그래? 나는 면서기 공무원은 몸서리가 나서 안 할라니더. 행정서사를 하고 싶니더 그랬어."" 당시에는 면 단위에 행정서사가 한 사람만 배정되었는데, 그때 월곡면에는 이미 행정서사가 있었다. 그런데 도청 행정과에 오래 근무해서 지역단위로 행정사 정원을 한 사람 더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안동군에 한 사람을 더 받아서 월곡면에 정원을 1명 더 주는 것이었다. 고향 선배의 도움으로 그동안 호적계에서 일한 경력이 인정이 돼서 서류를 제출하고 행정서사 자격증을 발급받게 된 것이다. 일수씨는 그길로 호적을 떼러 그전에 일하던 청송 현서면 면사무소로 갔다. 소사로 일하던 면사무소에 행정서사 자격증 발급 때문에 서류를 떼러 간 그 발걸음이 얼마나 일수씨는 행정서사가 되고 장가를 들었다. ""미질 갔을 때가 서른 안짝 되었을 때야. 그때 아직 장개를 안 갔을 때래. 나는 장개를 늦게 갔어. 애들이 2남 1녀인데 중매로 혼인했지. 안에는 이름이 이정숙인데 내보다 열 살이나 아래지. 친정이 청주야. 집안 어른이 중매했지."" 집이 면사무소 바로 앞 장터 쪽에 있었다. 그동안 면사무소에서 무료봉사만 하다가 자격증을 받고 집에 사무소를 차린 것이다. 면에서 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건너에 행정서사 일을 보는 일수씨네 집이 보였다. ""면소 일을 그만두고 행정서사 일을 한 거지요. 면에서도 일이 많고 또 서류 같은 거 만들어야 하는 거 있으면 보내고, 다 우리집으로 일을 보러 오는 거예요. 면소 바로 앞이다 보니 일이 많았죠."" 수몰을 앞두고 보상이며 이전이며 등기며 일을 봐주며 주민들과 얼굴을 익혔던 일수씨는 장터사람들이 정산으로 이주를 할 때 같이 짐을 싸서 정산으로 갔다. ""수몰되면서 면사무소가 정산으로 가서 예안면사무소가 됐어요. 나도 정산으로 올라가서 그때 일을 많이 했어요. 면사무소하고 장터 들어선 그 일대가 다 밭이던 곳이다 보니 분할해서 지목변경 하는 것부터 건축하고 등기하고 일이 많았어요. 그전에 보상 타는 거부터 이주해서 집 짓는 거까지 행정서류가 오죽 많니껴? 행정서사가 하나뿐이라 그걸 전부 내가 다 했어요. 이주자금 타는 것도 내 손으로 다하고요."" 김일수씨가 지금도 사용하는 오래된 세벌식타자기 ⓒ이미홍 정산에서 수몰주민들의 이주가 마무리되고 안정이 되어가면서 일수씨는 안동으로 나오게 된다. 태화동에 집을 얻고, 법원이 있던 동부동 한양아파트 상가에 사무소를 열었다. 시내에 나와 사무실을 차렸을 때도 단골 중 월곡 사람들이 많았다. ""나와서도 옛날 월곡면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어요. 자식들 일로 찾아오는 경우가 제일 많아요. 출생신고, 전적 신고, 아들 딸 개명, 내가 그 자녀들 연령 정정도 많이 해줬어요. 공무원 시험 볼려고 하는 젊은 사람들이 주로 정정 많이 했지. 고등학교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 치려고 보니까 만 나이가 모자라는 거라. 요즘은 병원에서 태어나면 자동으로 출생신고가 되지만 그전에는 출생신고 제때 안 된 사람이 많던 때라 나이 정정 하는 사람이 많았죠. 지금 여기 시청 직원들 중에도 더러 있어요. 그때 내가 나이 정정해준 이들이 다른 데 근무하다가 시청으로 들어온 그 사람들이 지금 연령대가 최하가 계장인데 내 보면 고맙다고 그래요. 어른 때문에 잘 벌어먹고 사니더, 애 둘 놓고 잘 사니더, 그래 인사하는 사람도 있어요."" 동네에서 아기가 태어나거나 총상이 나면 반장, 동장이 출생신고와 사망 신고할 것들을 모아서 면사무소에 가서 대신 신고를 하던 시절이었다. ""월곡서 일할 때 임동 장날 나가면 임동면사무소에서 동네 동장들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때는 동장들이 출생 신고, 사망 신고 같은 일을 모아서 한꺼번에 면에 가서 대신 신고하고 그랬어요. 출생 날짜 적은 거, 나이 정정 적은 거를 주머니에 넣고 장에 왔다가 술 한 잔 하는 바람에 잃어버리고 있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하느라 제 날짜가 아닌 경우도 많고, 이름 적어준 걸 잃어버리거나 기억을 못하면 생각나는 대로 적어 넣어서 한자 뜻이 잘못 바뀌기도 하고 그런 게 많았지요 뭐."" 몇 번을 고쳐 쓰고 있는 타자기와 전화기 한 대로 온갖 행정 민원을 해결해온 김일수 행정서사ⓒ이미홍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남편 호적 잘못된 거 바로잡으러 온 부부래요. 남편이 성이 임동 중평 류씨인데 강원도 가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다가 주인집 딸하고 결혼을 했어요. 근데 군대를 가려고 주인집 성인 박○○로 호적신고를 해서 나중에 태어난 아이들도 그 성을 따랐고요. 자식들도 다 장성하고 앞으로 더 늦기 전에 남편 본래 성도 찾아주고 자식들 위해서라도 뿌리를 찾아주고 싶다고 부인되는 사람이 왔더라고요. 여기 면사무소 찾아가고 강원도 면사무소 찾아가고를 몇 번을 했어요. 그래 결국 본래 호적으로 정정이 왰어요. 버스 타고 먼 길을 오가고 했지만 나중에 그분들이 좋아하며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하는 거 보니까 마음이 참 뿌듯하더라고요. 그게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돈 받고 일하고도 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듣는 것은 그만큼 진심으로 일을 봐줬기 때문일 거다. 몇 평 안 되는 좁은 사무실에 전화기 한 대,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오래된 세벌식 타자기가, 남 해코지 하는 일은 돌아보지 않고 성심으로 손님들 일을 봐줬던, 행정서사 김일수가 걸어온 시간들을 묵묵히 대변해준다. 안동시군 통폐합 하고 시청 청사 이전할 때 일수 씨도 시청 앞 지금의 자리로 이전을 했다. 처음 이전을 할 때만 해도 일거리가 많았지만 전자정부가 되고 컴퓨터로 앉아서 클릭 한 번으로 대부분의 서류를 주고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자연 행정서사 사무실을 찾는 사람도 줄어들고 있다. ""안동댐 만들 때도 일이 많았고 80년대, 90년대 때도 일이 많았어요. 시군통합 되면서 새로 고치고 바뀌고 하는 게 많다보니 그때도 서류 일이 많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웬만한 거는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서류 떼고 다 하니까 일이 별로 없어요. 나이 정정 하는 일이나 호적 정정, 개명 그런 일들이지. 한양 아파트 쪽에 있다가 시청 새로 짓고 난 뒤에 여기로 왔는데 요즘은 그저 소일삼아 나와서 문 열어놓고 몇 시간 앉아 있다가 들어가는 거지요."" 시청 앞 김일수 행정서사 사무실이 있는 시청 앞 골목 풍경 ⓒ이미홍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와 고소장을 써 달라고 한다. ""고소장은 안 씁니다. 다른 데 가보세요."" 그 소리에 두 마디도 안 듣고 거절을 하고 손님을 돌려세운다. ""시청 앞에 있으니까 문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래도 더러 있어요. 혼인신고 하는 요새 신혼부부들 중에 신랑 신부가 어려운 한자 이름 잘 몰라서 오는 경우도 있고, 잘못된 호적 밝히려고 오는 사람도 있어요. 또 많이 하는 게 시골 산골짜기 땅 산 서울사람들 농지취득자격증명서 같은 서류 대신 발급받아주는 거래요. 지금도 서울서 땅 사러 많이 오지만 안동댐 되고 난 뒤로 외지 사람들이 와룡 도산 쪽으로 산이나 골짜기 밭까지 서울사람들이 와서 많이 샀어요. 외지서 일일이 왔다갔다하기 힘드니까 우리 같은 사람에게 위임하는 거지. 그런데 요즘 문 열고 들어오는 사람 중에 고소장 써달라는 게 제일 많아요. 그런데 나는 그런 건 일절 안 받아요."" 고소·고발은 상대가 있는 일이라 누구 한 사람은 가해자 만들거나 피해자 만드는 일이라 잠깐 서류 한 장 써주면 5만원을 벌 수 있지만 그거 벌자고 남 못할 일 할 수는 없다는 일수씨는 일이 있으나 없으나 집에서 자전거 타고 나와서 문열고 있다가 손님이 영 없으면 좀 일찍 들어가기도 한다. 평생 김일수 행정사의 발 노릇을 한 자전거가 시청 앞 김일수사무소 옆 한쪽에 기대어 세워져 있으면 안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천리천의 복개와 번성했던 북문시장 안동댐이 준공될 무렵을 전후해서 천리천 복개사업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안막동에서 북문동 앞을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들던 개천 양옆으로 가게들이 들어서 장이 섰던 북문장은 복개천을 중심으로 천막들과 가게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새롭게 형성되어 5일장이 번성하고 늘어나는 주민수와 더불어 상설시장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거기에는 안동댐 건설이 마무리되고 1976년부터 담수를 시작한 안동댐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주를 했는데 보상을 넉넉하게 받아 대도시로 떠난 일부를 제외한 많은 사람들이 인근 지역이나 안동 시내로 이주한 영향도 한 몫을 했다. 시내에서 북쪽 방면에 위치한 와룡면, 예안면, 도산면 일대의 수몰민들도 안동 시내로 나와 터전을 잡았는데 태화동, 평화동 일대와 법흥동 일대에 자리를 잡은 이들도 많았지만 고향에서 나오는 길목인 북문동, 율세동, 신안동 쪽에 터를 잡고 둥지를 튼 사람도 많았다. 농사 대신 먹고 살 길을 찾던 이들이 시장 안에 자리를 잡고 장사를 시작했고, 시장 입구에 버스정류소가 있어 안동 장날이면 와룡면, 예안면, 도산면 일대에서 장보러 나온 사람들로 북문시장은 성시를 이루었다. 파는 이들과 사는 이들이 서로 고향사람들 소식을 나누기도 했다. 북문시장 전경 ⓒ임덕자 북문시장을 살리고 싶은 시민광장 맛집 주인이야기 북문시장 시민맛집광장 주인 임덕자 ⓒ이미홍 안동시 녹전면이 고향인 임덕자는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녹전에서 다니고 여고 진학을 하면서 안동으로 나왔다. 언니는 경안여상을 다니고 덕자씨는 안동여고를 다녀서 같이 자취를 하면서 북문시장에서 칼국수도 먹고 붕어빵, 찐빵 같은 주전부리들을 사먹었던 추억이 많다. 그때 북문장에 병아리며 강아지, 토끼 등을 집에서 길러 장날에 새끼들을 가져와 파는 동물시장도 유명했다. 햇살이 따뜻한 봄날 오후 노란병아리 앞에서 발을 떼지 못하다가 병아리를 사들고 가던 초등학생들이 있었고, 갓 태어난 강아지의 귀여운 눈망울에 동동거리던 여학생들도 있었다. 시골에서는 부업으로 동물들을 길러 장날 나와서 팔았고, 마당 있는 집이 대부분인 시절이라 아이들이 있는 집에서는 강아지를 많이 사갔고, 직접 낳은 달걀을 먹기 위해서 중병아리를 사다가 키우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마당이 있고 골목 안 삶이 있던 시절 이야기다. 교복을 입고 있는 중학생 시절의 덕자씨 ⓒ임덕자 안동댐에서 엄마와 고등학교 다닐 무렵 엄마와 안동댐에 간 덕자씨 ⓒ임덕자 덕자씨가 안동에서 대학을 들어갔던 그해는 아시안게임이 있었던 해였다. 대학1학년이었던 덕자씨는 서울 구경도 할 겸 자원봉사로 등록을 했고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10일간 자원봉사를 마치고 난 후, 서울에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동안 우물안 개구리로만 살았다는 걸 그 열흘 동안 세계에서 온 젊은이들을 만나고, 서울 학생들을 보면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왜 내가 안동에서 학교를 꼭 마쳐야 하지? 라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자원봉사단 단장님을 졸졸 쫓아다니면서 취직시켜 달라고 졸랐어요. 우선 돈을 벌어야 서울에서 살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들어간 곳이 고려여행사였어요. 여행사 직원으로 10년을 일했죠."" 그 시기동안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그러다가 시어머니가 거동이 힘들게 되면서 집을 정리하고 시댁이 있는 전북 김제로 내려갔고, 농사꾼이 되었다. 김제는 들이 넓었고 논이 많았다. 자연 쌀이 넘쳐났다. 김제로 내려갈 무렵의 덕자씨네 가족 ⓒ임덕자 ""저도 시골 내려갔으니까 농사를 지었죠. 그런데 아는 분이 토마토 농장을 하는데 자꾸 토마토를 가져다 먹으라고 주는 거예요. 토마토 값이 떨어져서 출하를 많이 못하면 이웃과 나눠 먹으라고 몇 박스를 주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그냥 공짜로 나눠줄 거면 내가 가져가서 한 번 팔아보겠다고 하니까 토마토를 실어주면서 팔아서 트럭 한 대에 7만원만 달라고 그래요. 그걸 싣고 전주시내 아파트 단지에 가서 팔아서 30만원을 벌었어요."" 그걸 계기로 동네 시간이 있는 부녀회 동생들 몇에게 같이 토마토를 팔아보지 않겠느냐고 하니 남편들이 타던 트럭이 있는 부인들 셋 집이 하겠다고 나섰다. 트럭마다 전주 시내를 수소문해서 팔 곳을 정해줬다. 그때 같이 토마토 장사를 시작했던 사람들은 다 부자가 됐고 지금도 김제에서 유통업을 하고 있다. 토마토를 팔면서 보니 김제에는 쌀이 지천이고 이웃한 논산에는 딸기, 토마토가 지천이었다. 두 지역의 농민회 사람들을 모아 지역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김제 사람들은 딸기와 토마토 같은 싱싱한 제철 과일들을 좀 더 싸게 구입할 수 있었고 논산 사람들은 주식인 쌀을 더 저렴하게 공급받을 수 있으니 모두가 환영이었다. 조합원인 농민들도 지역주민들도 이득이고 판로 확보도 되니 일이 점점 커져서 대도시 직거래도 했다. 그때고 지금이고 무슨 일을 해도 혼자 잘 먹지 않고 남들하고 같이 잘 먹고 사는 게 좋다는 게 덕자씨의 지론이다. 북문시장 시장들을 바꾸고 싶은 마음으로 꽃을 키우는 덕자씨네 가게 ⓒ이미홍 2015년 덕자씨는 엄마를 모시고 고향인 안동으로 왔고, 서부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다음해 안동은 길안댐으로 시끄러웠다. 그리고 환경운동 활동가이기도 한 덕자씨는 그때 ‘길안천지키기범시민연대’ 간사 일을 맡고 있었고, 길안천을 지키기 위해 시청 앞에서 185일 동안 1인 시위를 했다. 그러면서 잊혀졌던 북문시장을 다시 보게 되었다. 시작은 시위를 시작하기 전이나 끝난 후에 배가 고파 밥을 사먹으러 시장 안으로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시장 안에 들어갔는데 문 열린 밥집이 없었고, 먹을 만한 식당도 없었다. 오래 전 드나들었던 활기 넘치던 북문시장을 알았던 덕자씨는 충격을 받았다. 제대로 된 식당이 없는 것은 그렇다 치고, 가게들에 천막들이 여기저기 쳐져 있었다.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고 썰렁한 데다 천막이 쳐진 시장 안은 70년대의 모습 그대로 멈춰 서서 세월 속에 방치돼 낡아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몇 번 더 들어와보니까 시장 안 모습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낡고 허름한데 옛날 골목들이며 가게 자리들이 그 모습 그대로인 거예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시청 바로 앞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밥장사만 해도 제대로 먹고 살 수 있을 텐데, 70년대 그대로의 모습을 잘만 정비만 해도 살 길이 보일 텐데, 진짜 안타깝더라고요."" 생각하면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게 덕자씨 스타일이었다. 지역구 시의원들도 만나고 시청 다니는 고향 선배들한테도 물어보고 다녔다. 아니 왜 북문시장을 저렇게 그냥 두느냐는 거듭된 물음에 돌아온 답은 상인회가 없어서 개인 점포들을 상대로 지원해주기도 쉽지 않고 사업을 추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상인회가 있으면 그런 것들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했다. 상인회를 만들면 환경개선사업을 지원해주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해 12월, 덕자씨는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시청에서 가까운 입구 쪽 점포를 임대해 식당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시장 어르신들을 만나고 다녔어요. 제가 총대를 멜 테니 시장상인회 만들자고 설득하러 집집마다 다녔어요. 그런데 시장 분들이 다들 좋다고 하시는 거예요. 이제 시장이 더 죽을 것도 없다고, 천막만 걷어내도 좋겠다고, 뭐라도 해보자고 하시더라고요. 상인회 만들어서 등록하고 그 다음해 봄에 시장 환경개선사업 신청을 해서 예산을 받았어요."" 그 예산으로 비가림막 설치를 했다. 그리고 간판도 교체했다. 그러나 시설이 조금 정비된다고 당장 시장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었다. 고령의 상인들이 대부분이라 무언가를 선뜻 바꾸거나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지만, 어떻게 할 줄 몰라서 못하는 부분도 많았다. 식당 일에 아름다운 재단 프로젝트 공모사업으로 진행하는 영풍제련소 현장모니터링과 기록 활동도 겸하고 있어 시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애를 쓰지만 사실 시간도 모자라고 모르는 것도 많다 보니 한계가 있다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래도 실망하지도 포기하지도 않고 열심히 길을 찾아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같이 살 궁리를 한다. 시장을 살리기 위해 장흥시장을 찾은 북문시장 시장상인회 사람들 ⓒ임덕자 ""저는 무슨 일을 할 때 한 사람만 제대로 미쳐도 뭔가 된다고 봐요. 북문시장에서는 제가 미쳤어요."" 지난여름에 처음 만났을 때 덕자씨가 했던 말이다. 서울서도 살고 김제서도 살고 안동에서도 살았는데, 다른 곳보다 안동이 전국에서도 먹고살기가 힘든 곳이더라고요. 물산이 풍부하지도 않고 공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보니까 같이 열심히 해서 같이 잘 살자고 하는 그런 게 약하더라고요. 공유하고 나누면서 같이 잘 살아야 신이 나잖아요. 북문시장 일에 열심인 걸 보고 어떤 사람들은 뭔가 돈이 되니까 이익이 도니까 하는 거지 그런 말들을 해요. 국밥봉사를 하고 있으면 젊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요즘 시장에 저런 거 다 지원받아 하는 거지 그래요. 그런데 덕자씨는 그런 면에서 떳떳하다. 돈 때문에 사람들 사이가 틀어지거나 잘못된 오해로 북문시장 살리기가 잘못되지 않게 하기 위해 덕자씨는 상인들을 설득해 지원금을 상인회 통장으로 받지도 집행하지도 않았다. 시청 담당자가 집행을 하면 거꾸로 감시를 상인회에서 하고 있다. 시에서 북문시장 상인회를 믿고 시장 활성화 사업을 적극 밀어주는 것도 그렇게 형성된 신뢰감 때문이다. 그런 덕자씨를 힘들게 하는 건 사실 그런 것들보다 시장 안에서 벌어먹고 사는 것에 대한 안동 어른들의 고정관념이다. ""우리 엄마 아시는 분이 지나가다가 제가 장터에서 국밥 파는 걸 보셨나봐요. 장터에서 국밥 파느라 고생하더라고. 우리 엄마도 저한테 멀쩡하게 직장 다니며 돈 잘 벌 수 있는데 장터에서 국밥판다는 소리 듣기 싫다고 그러기도 했어요. 그래도 저는 열심히 땀 흘리며 시장 사람들하고 같이 일하는 게 좋아요."" 장터에서 국밥봉사도 하고 팔기도 하는 덕자씨와 북문시장 부녀회 사람들 ⓒ이미홍 여름 지나고 가을에 문턱에 들어서는 10월에 장날 풍경을 찍으러 다시 갔을 때 덕자씨는 시장 부녀회원들과 장터에서 국밥을 팔고 있었다. 직접 지은 농산물을 북문시장에 팔러 오는 이들에게는 국밥을 무료로 나누어주었다. 나머지 시장 상인들과 손님들에게는 국밥 한 그릇에 3천원을 받고 팔았다. 장터 인심이 묻어나는 국밥이라 더 따뜻하고 든든한 한 끼였다. 파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물건을 사러 장을 찾는 사람들도 늘게 마련이었다. 시장 안에 전을 펴는 노점상들에게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명찰을 만들어 목에 걸어주십사 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팔려고 가지고 나온 물건의 생산지와 품목을 적었다. '○○○ , 010- ****- ****, 와룡면 태자리, 깨, 고추, 도라지' 명찰이 곧 국산 농산물인증카드였다. 파는 사람들이 밭에서 직접 기른 농산물이라는 것을 소비자들이 알게 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그 분들을 상인회 외 북문시장의 별도 회원으로 등록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처음에 열 몇 명이던 노점상들이 국밥봉사를 시작하고 명찰 인증제를 하면서 지금은 57명으로 늘어났다. 불과 한 두달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이분들을 포함해서 와룡, 예안, 도산의 농민들과 함께 조합을 만들어 로컬푸드사업단을 조직해서 직거래장터 사업을 할 구상을 하고 있다는 덕자씨가 사실 처음 북문시장에 오면서 하고 싶었던 것은 시장 안 아지매들하고 장터 먹거리 조합을 만드는 것이었다. ""묵 잘 만드는 아지매도 있고, 손두부 잘 만드는 아지매도 있고, 막걸리 잘 담는 아지매도 있어요. 이분들하고 마을조합 만들어서 묵하고 손두부 만들어 팔 거예요. 그걸 하려면 교육을 먼저 받아야 하는데 세 분이 내년에 저하고 같이 교육 받기로 했어요. 두부 만들어서 시장 안에서도 팔고 안동역 앞에 가서도 팔고 할 거예요."" 북문시장에서 장사하는 시장 사람들이 열심히 해서 시장도 살리고 돈돈 많이 벌어서 다같이 잘 사는 것이 덕자씨 마음이다. ""뭘해도 여기 시장 사람들하고 같이 만들어서 같이 잘 살고 싶고, 농사 힘들게 짓는 분들 농산물도 같이 팔아서 같이 잘 살고 싶지 저 혼자 궁리해서 혼자 잘 살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 거는 왠지 신이 안 나요."" 장날이면 만날 수 있는 북문장 난전 아지매들 장날이면 시장 안 삼거리 공터에 아침 일찍부터 자리를 잡고 보따리를 푸는 아지매들이 있다. 농사지은 나물이며 곡식을 가지고 장보러 오는 난전 아지매 장꾼들이다. 장터 골목 안쪽 담벼락 앞에 전을 펴고 도라지와 생강을 비롯한 채소들을 파는 오금자 아지매는 와룡 태자리서 농사를 짓는다. 명찰을 보고 안 내용이다. 태자리서 온 오금자 아지매 ⓒ이미홍 11시가 한참 넘은 시간이었는데 손님을 한 사람이라도 놓칠까봐 여태 국밥을 못 먹었다며 국밥 솥이 있는 천막 쪽을 연신 보시더니 점심시간이 되어 국밥봉사가 끝날까 걱정이 되는지 잠깐만 자리를 지켜달라며 도라지는 5천원, 생강도 5천원, 고추는 3천원, 배추, 쪽파는 2천원이라고 가격을 말해주고는 국밥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그 사이 할아버지 손님이 왔다. 보더니 대뜸, 주인은 어디 갔냐고 묻는다. 국밥 먹으러 잠깐 가셨다 하니 가지 않고 좌판 앞에 서신다. 어설픈 여인네 대신 좌판을 지키고 계시는 모양새다. 간판도 없는 장사지만 단골이신 듯 했다. 좀 있자니까 또 장에 나온 할머니 두 분이 길가다 앞에 서는가 했더니 묻지도 않고 세 분이서 이야기를 나눈다. 지난 장에는 뭘 샀는지, 점심은 자셨는지 주거니 받거니 하고들 계시는데 오금자 아지매가 왔다. 장사가 못 미더워 국밥 한 그릇을 받아서 들고 오신 거였다. 그제야 어르신이 등 뒤로 감추고 계시던 빈 포대자루들을 건네신다. 자연스럽게 받는 아지매, 그리고 스스럼없이 남의 도라지 농사, 생강 수매 걱정을 하는 할매들, 물건을 사지 않는 날이라도 안부는 묻고 가는 정이 남아있는 것이 북문장날 풍경이다. ""올해는 도라지와 생강이 잘 됐니더. 도라지 한 바가지 가지고 가소."" 해서 한 손에 카메라를 옮겨들고 오천원을 치르고 도라지를 샀다. 도산면 의일리에서 농사짓는 오천댁 ⓒ이미홍 도산 의일리서 온 아지매는 이름을 묻자 친정이 와룡 오천이라 오천댁이라고 했다. 집이 의일리 중에서도 물가에 가까운 곳으로 안동댐이 만들어질 때 살고 있는 집 바로 아래까지 물이 차올랐는데, 집은 수몰되었지만 토지는 잠기지 않아 남아서 평생 농사지어서 북문장에 내다 판 역사가 오래 되었다. 오천댁 아지매가 이날 가져온 건 끝물 고추와 나물이었다. 북문장 고추장사 이국주 ⓒ이미홍 이날 장에는 김장철이 다가오고 있어서인지 고추장사 아주머니도 보였다. 올해 78세인 이국주 아지매는 스물다섯에 행상을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고추장사를 한 지는 30년이라고 했다. 아주머니가 처음 고추장사를 시작했던 당시만 해도 북문시장은 장날 새벽이면 전국의 상인들이 돈다발을 들고 고추를 사러 찾아오는 알아주는 큰 장이었다. 몇 백만 원, 몇 천만 원이 오가는 경우도 많아 경찰이 지키고 서기도 했다고 한다. 요새는 장사가 그럭저럭 겨우 먹고 살만한 정도이다. 씨앗가게 장갑순 할매 ⓒ이미홍 북문시장에서 씨앗가게 장갑순 할매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1930년 경오년생인 할매는 율세동으로 이사 와서 장사를 시작한 이래로 북문시장서 평생을 보냈다. 한나절 앉아 있어도 씨앗은커녕 고무줄 한 다발도 못 팔 때도 많지만 집에 있으면 심심해서 나온다고 했다. 보통은 시장 안 그릇 철물점 앞이 고정석이지만 장날은 노점장터로 자리를 옮긴다. 옆에 앉은 오천댁 아지매와 자식 이야기도 하고, 물 건파는 것보다 오래봐 단골이 된 할매들이 장에 나오면 얼굴 보는 그 재미가 좋아서 오늘도 장에 나와 봤다며 웃는다. (글/이미홍 lmh33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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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향교골 명륜동 이야기
- 사람을 밝히는 동네 명륜동- 상가와 주택으로 형성된 작은 마을 2019년 안동예천 근대기행은 생생한 르포취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다룬 <구술생애사>와 안동과 예천 두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사의 근간이 되는 '마을'을 테마로 한 <우리 마을 이야기>를 그려낼 예정입니다. 두 번째 <우리 마을 이야기>는 향교골 안동시 명륜동입니다. -편집자 1. 1990년~1996년 1990년 2월 4일 일요일, 흐리고 약간의 비 차에 몇 가지 짐을 싣고 오는 내내 불안에 휩싸였다. 곧 새 생활이 시작 될 테니까. 명륜동 338-28번지 1통 4반. 자취할 집은 아주 작고 초라하다. 엄마는 어쩌다 이런 집을 찾아냈을까… 주인은 할아버지 할머니 내외이시고 안동여고 3학년인 언니 두 명과 중학교에 입학하게 될 남자애 한 명이 이 집 별채에 살고 있다. 세 명은 한 방을 쓴다. 동생과 내가 있을 방은 집의 규모에 비하면 큰 편이다. 새 장판이 깔려져 있고 도배지 여섯 롤이 구석에 세워져 있다. 책상과 찬장, 옷장은 내일 사기로 했다. 내일 엄마와 동생이 가버리고 나면 얼마간은 나 혼자 남게 된다. 낯선 학교와 아이들, 처음 해보는 자취 생활, 모든 것이 두렵고 불안하다. 얼른 토요일이 오고 봄방학이 왔으면….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1990년 2월 5일 월요일 새벽에 여러 번 깨었다가 잠들었다. 결국 6시 30분에 일어났다. 연탄불이 꺼져서 집 앞 구멍가게에 가서 번개탄을 사왔다. 겨우 불을 살리고 걸어서 시내로 나가보았다. 우연히 경안고등학교에 다니는 친구 도철이를 만났다. 경안여자상업고등학교에 다니는 현주도 보고 숙자 언니도 보았다. 어쩌면 안동이란 곳이 생각만큼 낯설지만은 않은 곳일지도 모르겠다. 9시 넘어서 새로 맞춘 교복을 입고 엄마와 함께 전학 하는 학교로 갔다. 학교는 시내를 조금 벗어난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개학날이라서 아이들은 모두 청소를 하고 있었다. 담임선생님께 인사만 드리고 다시 명륜동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영경이와 함께 동생을 버스터미널까지 걸어서 바래다 주었다. 그 옛날의 자취방 ⓒ신준영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칠 즈음 의성에서 안동으로 전학을 했다. 이전에도 가끔 안동에 올 기회는 있었다. 시내 중심가의 아디다스, 나이키 대리점에서 운동화나 양말을 사 신기도 하고 맘모스 제과점, 코끼리 분식점, 스쿨서점, 교학사, 삼방사에 들러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짐을 싸들고 살러 온다는 것은, 그것도 내가 나의 보호자가 되어서 낯선 방, 낯선 사람들에게 나를 부리워 와야 한다는 것은 상당한 두려움과 불안이 따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명륜동과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명륜동(明倫洞)은 안동시청과 대구교육대학교 안동부설초등학교, 국도 35호선인 퇴계로를 따라 형성된 상가들, 그리고 그 사이의 주택들로 구성된 작은 동네다. 1931년 4월 1일 안동읍제 실시에 따라 안막동의 일부를 분할해 이곳에 있던 안동향교의 강당인 명륜당의 이름을 따서 향교골, 즉 명륜정 1정목이라고 했다. 1947년에는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명륜동으로 개칭하였는데 향교가 있던 자리는 명륜동 344번지로 안동의 대표적인 명당자리로 유명하다. 안동향교는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는데 당시 대부분의 문서도 함께 분실되어 정확한 연원은 알 수 없지만 1361년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했을 때 '복주향교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 즈음으로 추정한다. 1983년 향교복설추진위원회가 발족되어 송천동에 터를 잡아 1986년 중건하였다. 안동의 교육기관 거의가 이 향교 터에서 문을 열었다. 1933년 안동공립농림학교 설립을 시작으로 1942년 5월에는 4년제 안동공립고등여학교를 설립하여 같은 해 10월에 옥야동으로 교사를 신축, 이전하였는데 이는 안동여자중학교와 안동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947년 7월에는 안동사범학교가 설립되었고 1962년 3월에는 도립 안동농업초급대학으로 개편 되었다가 1965년 3월에 안동교육대학으로 다시 개편되었다. 안동교육대학은 1978년 2월에 국립 안동초급대학으로 개편되었고 1979년 3월에 다시 4년제 국립 안동대학교로 승격되었다. 1983년 2월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같은 해 3월에 송천동으로 이전하였다. 1991년 안동시청이 이 자리에 청사를 지었다. 2019년에는 안동시의회 건물이 신축되었다. 현재의 안동시청 ⓒ신준영 현재의 안동시청 ⓒ신준영 안동시청 앞 표지판에 안내된 지도 명륜동에서 1990년 2월부터 1996년 늦가을 까지 6년여를 살았다. 이후로는 한 번도 찾아간 적이 없었던 그 골목, 그 집, 그 방은 대신 가끔 꿈에 나타났다. 지난 달력을 정갈하게 찢어서 그 달의 공과금을 적어주시던 주인 할아버지의 섬세한 손과 그보다 연상이었던 피부가 곱던 할머니, 방주인이 자주 바뀌던 별채와 토마토가 익어가던 마당의 텃밭, 바지랑대를 높이 세우던 빨랫줄, 마룻장을 들어내야 나타나던 연탄아궁이, 수시로 창호지를 뚫고 들어와 머리맡에 앉던 달빛과 알 수 없는 그림자들. 연탄 냄새와 응달 냄새로 깊고 서늘한 골목을 통과해야 그 집에 닿을 수 있었다. 골목을 통과하는 동안 세 채의 집을 지나가야 하는데 마지막 집에는 학교에 다니지 않아 보이는 내 또래의 여자 아이를 비롯해 여럿의 형제가 늘 큰 소리를 냈다. 다투는 듯도 보였고 어쩌면 늘 그렇게 크게 말하는 습관이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 집 앞엔 대용량 토마토케첩과 식용유가 툇마루 위에 쌓여 있었다. 어느 날은 다른 동네에서 개조한 손수레에서 핫도그를 팔고 있는 그 집 식구들을 본 적이 있다. 잘 아는 얼굴이었지만 아는 척 할 수 없었다. 서로가 그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주변에는 중학교 동창 여럿이 자취를 하고 있었다. 당시엔 경안여자상업고등학교가 아직 신안동에 있을 때였고 경일고등학교와 길원여자고등학교도 명륜동에서 가까웠다. 친구들과 선후배들을 길에서 자주 마주치곤 했다. 자취방 사정들은 대동소이했다. 방 한 칸에 간이 부엌이 딸린 정도였고 화장실은 외따로 떨어진 공용 화장실이었다. 중학교 때 체육선생님이 안동으로 전근 와 계셨는데 선생님의 자취방도 신안동 산 위에 줄줄이 늘어선 집들 중에 하나거나 명륜동의 대로변 상가에 딸린 작은 방 한 칸이거나 그랬으니까. 아침이면 얼굴이 뽀얀 아이들이 노란 모자를 쓰고 남색 체육복을 입고 언덕을 올랐다. 명륜동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대구교육대학교 안동부속국민학교 학생들이었다. 아이들의 손엔 악기가 들려 있곤 했다. 대구교육대학교 안동부설초등학교는 1956년 4월 1일에 안동사범학교 부속국민학교로 개교했다. 1966년 3월 1일에는 안동교육대학 부속국민학교로 개교했으며 1978년 3월 1일에는 다시 대구교육대학교 안동부속구민학교로 개칭했다. 2001년 3월 2일에 대구교육대학교 안동부설초등학교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른다. 2. 1956년~1968년 안동사범병설부속국민학교와 안동사범병설중학교, 안동교육대학 출신 권부옥(1947년생) ""중앙국민학교에 다니다가 안동사범병설부속국민학교가 신설되면서 그리로 옮겼어요. 시험을 봐서 들어간 거 같아요. 당시에 교육에 관심을 가진 부모들이 아이들을 부속국민학교에 보냈어요. 우리 집도 그랬지만 돈이 있어서 보낸 건 아니에요. 새로 생기는 학교니 교육적으로 우수한 학교일 거라는 기대가 있었지요. 우리 집이 신안동에 있어서 학교 다니기도 편하고 그래서 그랬는지 3학년 때 학교를 옮겼어요.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던 기억, 서후까지 송충이 잡으러 걸어간 기억이 있어요. 그날은 하루 종일 수업도 없이 송충이를 잡았어요. 쥐 잡은 증거로 쥐꼬리도 잡아오라 그러고 했던 시절이니까. 1960년 2월에 내가 2회로 졸업했어요. 그리고 그 친구들이 대게 그대로 안동사범병설중학교에 입학했어요. 내가 13회인데 안동사범학교가 없어지니까 안동사범병설중학교도 2학년 때 없어졌어요. 그래서 우리는 공부는 거기서 하면서도 안동중학교 졸업장을 받았지. 남녀공학만 다니다가 안동여고에 들어갔는데 여자학교에 적응이 잘 안되더라고요.(웃음) 그러다가 안동교육대학이 생겨서 시험 쳐서 들어갔어요. 1968년에 졸업해서 첫 발령을 와룡 이하 문청국민학교로 받았지. 시내서 와룡까지 기차로 통근했어요."" 안동교육대학 교정 3. 1974년~1976년 안동교육대학 졸업생 장국수(1956년생) ""1974년 3월 5일 입학해서 1976년 2월 16일 졸업했어요. 12회가 마지막 졸업생인데 내가 10회야. 한 학년에 우리는 300명, 위는 400명, 우리 아래는 200명. 지금 안동시청 본관 자리에 학교 건물이 있었어요. 나는 학도 호국단을 했는데 당시는 교원이 부족할 때라서 교육대학에 들어가면 군에 안가고 학교 다니면서 소정의 군사 훈련을 받는 것으로 군에 가는 걸 갈음을 해주지. 여름 방학 때 36사단에 가서 1학년 때 3주, 2학년 때 3주 교육을 받고 하사 계급장을 받아요. 의무적으로 학교에 5년간 근무를 해야 해요. 만약 근무를 안 하면 다시 군에 가야했어요."" 안동교육대학 교정 안동교육대학 교정 학생군사교육단 수료증 1976년 안동교육대학 제10회 졸업기념 앨범의 첫 장과 기념사진 ""당시에 전공반이 10개 반이었는데 반 별 30명씩 300명이야. 도덕교육연구반, 국어교육연구반, 사회교육연구반, 산수교육연구반, 자연교육연구반, 체육·무용교육연구반, 음악교육연구반, 미술교육연구반, 실과교육연구반, 초등교육연구반 이렇게 열 개 반이지요. 남녀 비율은 남자가 180명, 여자가 120명쯤 된 거 같아요. 나는 체육·무용교육연구반이었어요. 음악반은 아무래도 악기를 잘 다루고 체육반은 달리기나 기계체조 같은 운동을 잘하고. 나는 기계체조를 했어요. 미술반은 그림에 소질이 있었겠지요. 학교 뒤에 연못이 있었어요. 그 앞에서 그림도 많이 그리고 했어."" 교내 체육대회 교내 체육대회. 뒤로 시내 전경이 보인다. 체육연구반 활동 ""학교 가서 입학시험을 쳤어요. 면접 볼 때 음치는 아닌지, 피아노는 칠 수 있는지 신체검사도 하고. 당시 교문은 지금 시청 입구 그대로예요. 동아리 연구 활동, 문학의 밤, 시낭송, 작품 활동, 대학축제인 명륜제도 생각이 나고. 명륜제 때는 반 대표로 노래자랑에 나가서 2등인가 한 기억이 있어요. '춘향아 울지 마라'하는 노랜데 제목이 기억이 안 나네."" 학교에 가서 입학시험을 치렀다. 입학시험 1974년 입학식 ""농촌 봉사활동도 청송 어느 산골로 나간 기억이 있어요. 전국교대체육대회에 체조 선수로 출전도 했어요. 학교 다니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그림 과제였는데 일주일에 8절지에 두 장씩 의무적으로 그려 내야 했어요. 잘못 그리면 '불가' 판정이 나요. 나는 그림 실력이 없어서 졸업하는데 애를 먹었어요. 풍금도 애국가 4절을 4부로 쳐야 됐고. 우리 안동교육대학이 우수한 점은 현장에 나가면 아이들을 좀 더 잘 교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예체능 쪽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교육 시켰다는 거예요. 팔방미인이 되도록 말이죠."" 체육회 활동 mbc에서 실황중계했던 교내 음악대회 1974년 3월 21일 명륜체육대회 행사 후 뒤풀이 중인 학생들 RNTC 군사훈련 청송으로 갔던 농촌봉사활동 ""당시에 학교 주변 모습을 떠올려보면 북문시장은 형성이 되어 있었는데 학교 주변에 가게는 흔하지 않았어요. 구내식당이 있었고 둘레둘레 자취생들이 많았어요. 지금은 복개됐지만 신안동에서 내려오는 큰 도랑이 있어서 건너 다녔어요. 안동의료원 뒤쪽 북문동에 특히 자취생들이 많았어요. 나는 학교 수업만 열심히 듣고 다녀서 대학 문화라든가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 별로 없어요(웃음). 학교 졸업하고 첫 부임지는 의성 안평면의 도옥초등학교예요. 지금의 시청 옛 자리에 안동교육대학이 있어서 많은 교사가 배출이 된 까닭에 우리나라 인재 배출에 큰 역할을 했다고 봐요."" 졸업사진 졸업증서 졸업앨범 편집위원 4. 1995년~2019년 현재, 2차선 도로와 4차선 도로 사이 명륜주유소, 대신종합건설 김명자(1954년생) 김명자 ⓒ신준영 명륜주유소 ⓒ신준영 ""옥야동 영호초등학교 후문 근처에 살다가 1995년 1월 15일에 명륜동으로 이사 왔어요. 옥야동 살던 어느 날 남편에게 외식을 하자고 졸라서 웅부공원 옆 선미식당에서 국수를 먹었어요. 그러고 나서 시청 근처로 구경 가자고 또 졸랐지. 시청 앞 어디쯤에 서서 저 건너에 보이는 저 집이 매물로 나왔다는데… 하고 남편에게 넌지시 얘기했어요. 안풍기계 사장 집이었어요. 남편이 그 집이 안동 부잣집인데 좋지 안 좋나? 하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그 집을 사서 이사를 하게 됐지요. 문 열어놓고 수리할 적에 사람들이 안이 어떤가 하고 구경을 할 정도로 튼튼하게 잘 지은 집이었어요. 밖에서 보면 2층인데 안에 들어가면 4층이었어요."" 1997년경 명륜주유소 짓기 전 주택에서 뒤로 보이는 대문이 1999년에 도로에 편입되었다. ""명륜주유소 건물이 있는 여기가 일제강점기 때는 사방관리소가 있던 자리예요. 사방관리소 사무실을 리모델링해서 검도장으로도 쓰다가 잠시 태평양 횟집이 들어오기도 했고. 또 여기에 안전카서비스센터가 있었어요. 지금 우리 집 옆에 있는 새마을금고까지가 사방관리소가 있던 자리예요. 1999년경 집 앞 도로가 2차선에서 4차선으로 확장 되면서 도로변 상가들이 뜯어지고 없어지고 신축되고 했어요. 4차선이 되면서 거리가 완전히 바뀌었지요. 우리도 한 100여 평이 도로에 편입됐어요. 도로 확장 되면서 대문이 편입이 됐거든요. 그래서 안전카센터를 사서 대문을 옆으로 돌렸어요. 2000년도에는 검도장 자리에 태평양 횟집이 잠시 들어섰을 땐데 그 집도 그때 샀어요. 2002년에서 2003년에 걸쳐서 명륜주유소 건물을 준공 했고요. 네 필지 전체가 사방관리소 자리였지요."" 사방관리소가 있던 자리에 명륜주유소와 명륜새마을금고가 들어섰다. 2003년 명륜주유소 개업 안내장 ""지금 동물병원 자리에 대우전파사가 있었는데 건물을 지어서 옮겨갔어요. 그게 지금의 대우철물, 대우공구예요. 그 아래에 북문세탁소가 있었고 교대(시청) 앞쪽은 주산학원, 고려지업사 옆에 영화장품, 명륜문구사, 금홍문구사, 수산낚시, 한양미용실, 북문유리점 등이 있었지요. 정일목욕탕은 우리 이사 온 후에 지었어요. 북문마트도 우리 오고 나서 지었고. 우리가 주유소를 연 이유는 우선 주변에 주유소가 없었고 만약에 자식들이 물려받게 된다면 주유소 마당이라도 쓸고 기름이라도 넣으면서 노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 했어요. 또 기름은 썩지 않으니 재고가 생겨도 문제없다 생각해서 주유소를 개업한 거지요. 처음 6개월은 제가 직접 운영해봤는데 그것 참 어렵더라고요. 당시에는 카드도 안 쓰던 때라 달로 외상을 끊어 줬어요. 학원이고 어디고 거래처 텄다고 좋아했는데 수금하러 가면 폐업하기도 하고 번호판 떼 가라 하기도 하고. 어려워서 손들고 세를 줬어요. 아무나 하는 거 아니더라고요."" 명륜동 전경 ⓒ신준영 명륜동 전경. 왼쪽으로 신축한 안동시의회 건물이 보인다. ⓒ신준영 ""처음 이사 와서 보니 도로변 좌우로 상가들이 쭉 늘어서 있었어요. 남의 동네에 살러 왔으니 여기 사람들과 섞여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는데 이웃에서 나보고 모임에 나오라고 해서 나갔어요. 원래 있던 모임인데 내가 나가서 이름을 ‘숙녀회’라고 지었어요. 지금은 일곱 여덟 명 남았어요. 그때 모임에 한양미용실, 북문세탁소, 민정칼라, 대우전기, 성희미용실, 영화장품, 고려지업사, 수산낚시, 북문시장 안 떡방앗간집 등 스물 세집이 있었어요. 매달 한 번씩 모였어요. 나이 많은 사람, 젊은 사람 한데 섞여 있었어요. 그때는 매월 만원씩 모았는데 지금은 이만 원씩 모아요.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밥도 먹고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여행도 가는데 중국 장가계도 갔다 왔어요. 이름이 정확히 '명륜동 숙녀회'지요. 매월 25일에 모여요. 각자 집에 잔치 있으면 서로 부조하고 오고 가면서 정을 내요.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옛날 거리 모습 그대로였어요. 1999년에 도로 확장 되면서 이사도 많이 가고 모습이 바뀌었지요."" 명륜동 전경. ⓒ신준영 명륜동 전경. 멀리 목성동성당과 법상 상일아파트 등이 보인다. ⓒ신준영 5. 1983년~2019년 현재, 명륜동 숙녀회 고려지업사 김현숙(1959년생), 김재택(1958년생) 고려지업사 김현숙 ⓒ신준영 고려지업사 김재택 ⓒ신준영 ""남편(김재택)은 1980년부터 도로 건너 지금의 동물병원 자리에서 고려지업사를 운영했어요. 1983년 결혼할 때부터 여기서 살았고요. 1999년에 도로가 2차선에서 4차선으로 변경되면서 2000년도에 이 건물을 지어서 이사를 왔어요. 장안카메라가 옆집이었는데 카메라 대여도 하고 그랬어요. 영화장품 할인코너도 옆에 있었고요. 맞은편 효성이발관 옆에 초대 시의원을 지낸 안상하 씨가 하던 북문세탁소가 있었어요. 그분은 명륜마을금고 이사장도 역임 했고요."" 1985년 무렵 고려지업사 부근 1985년 무렵 고려지업사 부근 1985년 무렵 고려지업사 부근 ""숙녀회에서 중국 장가계도 가고 울릉도도 가고 제주도도 가고 했어요. 참 재밌었지요. 2011년 10월 6일 중국 장가계 단체 사진에 회원들이 쭉 있어요. 건어물 가게인 진보상회 옥순희, 효성이발관 건물주인 이미옥, 대왕수퍼 박춘선, 영화장품 이준필, 고려지업사 김현숙, 민정칼라 송종숙, 화장지와 세제를 취급하던 길도상사 임종길, 수산낚시 박옥남, 한양미용실 권순옥, 명륜주유소 김명자 모두 들어있네요. 내가 이 모임 총무라서 이름을 다 기억해요. 명륜동 모임은 1990년경부터 시작됐어요. 35호선 도로를 따라 올라가며 양쪽 가게 주인들이 회원이고요. 제주도 갔을 때 사진에는 대우전파사 신혜숙, 북문시장 안 떡방앗간 하나 엄마, 영화장품 이준필, 이미옥, 진보상회 옥순희, 민정칼라 송종식, 중대장 부인, 박미경, 새성희미용실 박성자, 대왕수퍼 박춘선, 수산낚시 박옥남, 북문세탁소, 길도상사 임종길. 고려지업사 김현숙 이렇게 다 들어있네요. 이때만 해도 아가씨 같지요.(웃음)"" 명륜동 숙녀회에서 간 중국 장가계 명륜주유소 김명자(왼쪽), 고려지업사 김현숙 ⓒ신준영 ""상가 말고 주변 한옥들 중에는 하숙집이나 자취방들이 많았어요. 경안여상이 이 근처에 있을 때니까. 지금은 손자 손녀도 있는데 이 사진 속 우리 아이들보다 손자 손녀가 더 커요. 아들은 1984년생, 딸이 1986년생인데 당시 집 밖에서 노는 모습을 이렇게라도 찍어놔서 거리 모습이 남아있네요."" 1980년대 중반 고려지업사 부근 1980년대 중반 고려지업사 부근 1980년대 중반 고려지업사 부근 1980년대 중반 고려지업사 부근 6. 2019년 현재 해결되지 않는 빚진 마음이 발길을 옮기게 했다. 오래 앓아온 막연한 서러움과 그리움의 정체를 알 것도 같았다. 외따로 희미한 별처럼 가족에게서 분리되어 나왔던 최초의 공간과 시간이 머무는 곳, 명륜동은 내게 그런 곳이다. 응달의 온도와 냄새를 알게 했고 그 길 끝에 몸을 웅크려 세상을 향한 도약을 준비하던 작은 방 한 칸이 풀잎으로 엮은 둥지처럼 숨겨져 있던 곳. 그 안에서 음악을 듣고 편지를 쓰고 글을 읽었다. 명륜동은 변한 거 같지 않지만 골목골목 돌아보면 참 많이 변했다. 암호처럼 날아오는 삐삐 문자에 답하기 위해 줄 서서 기다리던 공중전화 앞 구멍가게에는 원룸 건물이 들어섰다. 대나무 깃발이 높이 솟아있던 어느 집 마당에는 대신 태극기가 펄럭인다.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던 언덕 위의 집은 카페로 변신했다. 언덕도 사람과 같아서 시간이 쌓일수록 키를 낮추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 즈음 자취방이 있던 그 골목 앞에 섰다. 시간이 멈춘 듯 골목은 그대로다. ⓒ신준영 그 시절 골목 입구에서 치르던 나만의 의식을 생각해냈다. 바라는 것이 있으면 반대의 결과를 먼저 떠올리는 것, 가령 기다리는 편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는 식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겠지, 살아계신다면 백 살은 넘으셨을 테니까. 그 집은 대문이 닫혀 있거나 허물어지고 없겠지, 하고 생각하며 나름의 의식을 치렀다. 의식을 치르고 나면 예측했던 결과가 나왔을 때 실망하는 마음이 덜하다. 물론 그 반대의 결과가 나오면 행운을 얻은 듯 기쁨 또한 더한 것이 된다. 시간이 멈춘 듯 골목은 그대로였다. 녹이 슨 녹색 대문은 굳게 닫혀져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본 듯한 남자가 툇마루가 있던 그 집에서 나와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 옛날 주인은 다 돌아가셨죠. 집도 팔렸는데 지금은 아무도 안 살아요. 빈집이에요."" 남자의 집 안에서 개가 사납게 짖는다. 들어갈 땐 몰랐는데 나올 때 보니 개 짖는 집 옆집은 불탄 흔적 그대로 안이 훤히 드러난 채 비어있다. 하얀 레이스 커튼만이 멀쩡한 채로 유리문 안쪽에 조용히 걸려있을 뿐. (글/ 신준영 5longgol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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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 '나의 일생' 예안면 아키비스트 권상길
선성 사람 권상길의 '나의 삶 나의 인생'기록과 스크랩은 일상, 전직 신문기자 2019년 안동예천 근대기행은 생생한 르포취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다룬 <구술생애사>와 안동과 예천 두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사의 근간이 되는 '마을'을 테마로 한 <우리 마을 이야기>를 그려낼 예정이다. 다섯 번째 <구술생애사>의 주인공은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에 사는 86세의 권상길 씨다. 스크랩북 가득 걸어온 이력을 차곡차곡 모아둔 권상길 씨의 삶의 여정에 동행해 본다. 권상길 ⓒ백소애 예안면의 기록가, 권상길 예안면 동부리에 사는 권상길 씨는 '호모 아키비스트'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쪽 동네 어른들한테 '아키비스트' 얘기를 할 땐 말을 아주 잘~해야 한다. 잘못 하면 '아나키스트'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권 선생님, 진정한 아키비스트세요."" ""뭐라카노"" ""권 선생님, 기록을 정말 잘 남기셨다구요."" ""암, 그거 하난 내 자신하지."" 1960년대 구 예안 서쪽방향 ⓒ권상길 1960년대 구 예안 동쪽 방향. 뒤로 고통마을 가는 길이 보인다. ⓒ권상길 농꾼, 면서기, 정미소 사장, 신문지국을 운영한 신문기자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그 와중에 동장, 선거관리위원장, 의용소방대, 중대 소대장 등등 정부와 기관 단체에서 하는 업무에 적극적이었던 흔적을 보노라면 그는 경상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수적인 가장이 틀림없다. 그리고 저녁식사 중 정치뉴스를 보다 서로 언성을 높이게 되는 우리네 아버지일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러나 그는 해방과 전쟁, 지독한 근현대의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묵묵히 걸어온 성실한 사나이다. 자신의 삶의 과정을 기록하고 스크랩하여 모아놓은 권상길 씨의 공식적인 출생년도는 1936년, 그러나 실제로는 올해 86세다. 총기가 남다른 그이지만 자식들의 성화와 걱정에 이태 전, 운전면허를 반납했다. 지금은 처분한 자동차 대신 3륜 바이크를 몰고 서부리 시내를 누빈다. ""내가 34년생이래요, 올케로는. 호적에 늦게 올라갔니더만… 나이 먹은 지금은 어제 일도 잘 모르는데 옛날 일은 꽹해요."" 어제 일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그가 수십 년도 넘은 이야기를 술술 꺼내놓았다. 근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을 몸소 겪은 나이 아니던가. 고향은 예안면 귀단1리 고통마을이다. 공민왕이 몽진 때 지나갔다 하여 '높으신 분이 지나간 마을'이라는 '고통' 출신이다. 그가 해방 때의 기억을 풀어낸다. 예안공립국민학교 3학년 통지표 ⓒ백소애 해방과 전쟁 ""월곡 미질동에 고모가 살고 있었거든. 우리 할머니가 그 고모를 항상 좋아했단 말이래. 고통마을에서 미질까정 한 20리가 넘어. 할머니하고 그 길을 걸어서 갔더니 아이고, 울 고모가 아를 나놓고 있는 기라. 그래 고모가 출산을 하고 있는데 더 있을 수도 없고, 할매가 집에 가자 캐서 그 길로 다시 돌아 왔는 기라. 근데 집에 오니깐에 아버지가 뭐 허연 광목에다가 먹으로 뭘 막 기래. 그래 그게 뭐니껴 그러니깐, 생전 못 봤던 거거든. 야야 태극기 기린다. 태극기를 기려가지고 낼 자(장) 간다. 만세 부르러 장에 내려간다, 그 카시더라고. 그럼 그런갑다 하는데, 해방이 되었다고 캐. 내가 해방이 뭔동 아나, 해방이라는 거는 일본이 졌단다. 하니 할매 가 큰일났다, 일본이 지면 미국놈들이 와가지고 우리 코 꿰가 댕긴다는데 어야노, 이랬다마. 우린 교육을 그래 받았거든. 그땐 일본말로 베이에이 게끼메스(미영격멸). 이 말이 뭐냐면 미국놈 영국놈 찔러 죽이자 이카면서 총검을 가지고 우리 국민학교 때도 그런 교육을 받았다고."" 1955년경 귀단리 고통마을 ⓒ권상길 예안장까지는 걸어서 10리였다. 아버지의 만세를 직접 보진 못했으나 소년 권상길의 일상은 원하지 않게 격동의 세월 속에 포함되었다. 안동중학교 재학 당시에는 교육을 위해 시내로 이사를 나왔다. 식구는 아버지, 어머니, 형, 권상길 씨로 단촐했다. 안동중학교에 재학 시절부터 신문배달을 했는데 경향신문 안동지국에서 신문을 받아 학비를 벌곤 했다. 전쟁이 한창 때인 1950년 7월 29일 때의 일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지금의 안동시청 부근 향교골 친구 집에서 놀고 있는데 천주교 성당에서 방송이 나왔다. ""안동시민 여러분, 안동시민 여러분! 3일간만 남하(南下)하십시오!"" 친구들과 웅성거렸다. ""야, 남하가 뭐로?"" ""몰따 뭔 말인동""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당시 살던 안흥동 신시장 배전골목 집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아버지랑 어머니가 열심히 보따리를 싸고 있었다. 그도 옆에서 책을 싸니 아버지가 ""야야 그쿠 무거운 건 못 가간다. 우선 먹을 쌀하고 입을 옷이나 갖고 가야지 딴 건 아무것도 무거워 못 가간다.""고 해서 책도 버려두고 7월 29일에 피난을 나섰다. ""야단이 났지. 안동교를 건너가는데 그 광경이야말로 참 기가 막혀. 급하니께 뭐 보자기에 쌀 이고 온 사람들은 엎어지면 깨부고 말이 아니랬어. 밀리고 밀치고 그러이 성질 급한 사람들은 물을 건넜지. 7월이니 강물이 얼매나 불었겠어 근데도 막 건넜어."" 안동과 대구를 잇던 유일한 다리였던 안동교는 권상길 씨가 건넌 3일 후인 8월 1일 폭파되고 만다. 한국군과 국제연합군을 지휘하던 미8군사령부가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낙동강 방어선을 기획하고, 8월 1일 한국군에게 낙동강을 건너 남하한 뒤 안동교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9월엔 어디서 피난을 했나 하면 저 하양역 밑에 청천이라는 곳이 있었어. 청천역이 있는데, 그 청천역 뒤가 안심면 내곡동인데 거기에 우리 어머니 고모가 살고 있었어. 그래 그 고모가에서 피난을 했어. 그러다 9월 30일에 다시 올라왔거든. 안동 안흥동 배전골목 집까지 걸어서 오니 그때가 10월 6일이라. 와가지고 내가 젤 처음 찾은 게 책이래. 책을 찾으니 있나 어디? 다 타부리고 없는기라. 남은 거라곤 그저 쇠 쪼가리 옹기 쪼가리뿐이라. 그래가지고 다시 예안면 귀단동 우리 고향으로 갔어. 거기를 가니 우리 삼촌, 할머니 이래 살고 있는데, 쌀을 좀 달라 하니 쌀이 없어. 인민군에게 전부 몰수당해서 없다 이래. 가정 형편이 할 수 없으니 내가 고등학교를 못 갔는 기라. 1951년에 안동중학교를 졸업하고 그때 우리 동기생들이 마뜰에 가서, 벽돌을 벗겨가지고 안동고등학교를 지었어. 지금은 저짜 정하동으로 갔지."" 3일의 남하는 두 달여가 되었다. 피난을 갔다 안동시내에 도착하니 10월 6일이었다. 무릉재에 올라오니 빨간 벽돌건물로 된 학교가 그대로 있어서 다행이다 했는데 가까이 와보니 형체만 있고 속은 다 폭격을 받아 부셔져 있더란다. 안동 시내가 70% 이상이 폐허가 됐지만 안동교회는 멀쩡했다. 서악사 광감루에서 공부를 하니 너무 비좁아 학교에서 교회를 빌려 교회에서 3학년 공부를 하고 1951년 7월 18일, 여름에 졸업을 했다. 총 4개 반이었는데 동반, 서반, 남반, 죽반으로 반을 나누었다. 북반은 없었다. '북'반 이 아닌 '죽'반이라 불렀는데 아마 시대적 상황 때문이 아닌지 추측해볼 뿐이다. 60명씩 4개 반 모두 240명이었는데 피난 때 생사를 모르는 친구들이 많았다. 당시 학도의용군에도 40명이 지원했다고 한다. 1951년 7월 안동교회에서 찍은 안동중학교 1회 졸업사진. 앞줄 다섯 번째 오른쪽 네 번째가권상길 씨 ⓒ권상길 교사에서 다시 학생으로 그리고 해병대 입대까지, 쉴 틈 없는 청년기 함께 졸업한 동기들이 진학할 고등학교를 짓고 있을 때 권상길 씨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공백의 기간 동안 마침 예안 동계초등학교 공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사범학교를 나와야 교사를 했을 때니까 그는 '강사'였던 셈이다. 공민학교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이었다. 동계국민학교 교사 신분증명서 ⓒ백소애 ""글때 동계국민학교라고 있었어. 거기 공민학교라는 게 부설로 생겨서 거서 학생을 가르쳤어요. 지금은 폐교됐지. 예안면 태곡동인데 지금도 학교는 그대로 있어. 그때 학교를 못간 애들이 내 또래 비슷해. 내보다 조금 작게나… 아-들 국문해득을 다 시켰어. 그러자니 말을 아주 많이 했거덩… 교사질 하이 배가 고팠어, 허기가 져. 에너지 소모가 커서. 잠깐 하긴 했어도 힘든 일이야."" 그러다 예안고등학교가 설립되면서 입학하여 1회 졸업생으로 졸업을 했다. 못다 한 고등학교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병역이 해결됐지만 이후 실제 나이 스물다섯에 해병대에 입대하게 된다. 진해에서 훈련 받고 포항 가적도 등지에서 활동했다. 사관과 신사. 1959년 여름, 휴가를 맞아 도산서원을 찾은 권상길(왼쪽) 씨. ⓒ권상길 ""내가 해병대 77기라. 어디 나가면 선배는 별로 없어, 마구 후배지. 지금은 아마 1000기가 넘었지 싶어. 당시엔 자부심이 대단했지. 헌병이 검문을 해도, 우리는 무기를 갖고 있어도 건드리지 않았어. 그럴 때는 괜시리 어깨 힘도 들어가고 자부심을 느꼈어. 뭐 결혼을 하고 갔을 때라 다 보고 싶었지만 맹 애들 어마이가 제일 보고 싶었지. 군에서 '화랑'이라는 담배가 나오거든, 내가 담배를 안 태워. 그걸 하나둘 모아놨다가 집에 와서 아부지 드리면 되게 좋아했어. 휴가 한번 나오면 이동하는 시간이 많이 걸렸어, 힘든 거 같지? 웬걸, 이동하는 게 좋았어. 군용열차가 주로 밤에 있거든? 안동서도 밤 9시쯤 올라가고 청량리서도 9시쯤 가는데, 한두 명만 타놓으면 하나는 끝에 앉고 하나는 중간에 앉는데 그 중간에 육군은 못 앉아 갔었지. 늦게 올라가도 자리가 있었거든. 중간에 척 하니 앉고 가고… 그땐 좀 그런 게 있었어."" 해병대 행정병으로 타자를 쳤던 그는 국문학을 좋아해 국문학 독본과 고전을 즐겨 읽곤 했다. 1960년대 후반 수몰 후 동부동 지금 집터 마당에 지은 동부정미소 ⓒ권상길 동부정미소 1963년쯤 시작한 정미소(방앗간)는 1980년대에 그만두게 되었다. 수몰로 물이 들고난 후에도 동부리 지금의 집터에 새로 지어 꾸려온 정미소는 가계가 자리 잡게 된 계기도 됐지만 몸이 골병 나게 된 계기도 됐다. ""저 밑에서 정미소를 하다가 75년도에 수몰이 되가지고 지금 우리 마당으로 옮겨 지어서 하다가 고마 치아뿌랬어. 서부동에 정미소가 하나 있었고, 우리 동부동에는 다른 이가 정미소를 지을라고 하는데 터를 못 구했더랬어. 그런데 내가 한다 그러니 동네에서 선뜻 주는 기라."" 1965년쯤 물 들기 전의 동부정미소 ⓒ권상길 1965년쯤 권상길 씨 내외에게서 용돈을 갈취(?)하는 큰 딸과 막내 딸 ⓒ권상길 예부터 마을의 우물가, 정미소, 이발관, 미용실은 모든 동네 소문의 근원지요 요긴한 정보가 오가는 곳이자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이나 다름없었다. ""요새는 쌀 10키로, 20키로 이렇지만 그때는 80키로 랬다고. 가마니에 넣으면 엔간한 사람 몸무게보다 더 나가는 걸 번쩍번쩍 들었으니 골병이 나지. 건강할 때 너무 자신했어. 내가 지금 현재 인공관절을 양쪽 다 넣었거든. 성소병원에서 2010년도에 했어. 사진을 보면 인공관절이 닳아서 한쪽으로 닿여. 뼈과 뼈가 데이면 되게 아퍼. 건강관리는 건강할 때 해야 돼."" 1963년 월천서당 강변에서. 예안면 면서기로 근무 당시 자바라 카메라로 찍은 사진.소산병원 원장, 지서장 면장, 조합장 등 예안면 삼계출장소 개소식 후 낙동강변 달애(다래)월천서당 강변에서 포즈를 취한 지역 유지들의 모습. ⓒ권상길 신문기자로 활약하다 제대 후 예안면 면서기로 잠깐 일하게 되면서 각종 행사장을 카메라를 들고 누비게 된다. ""집에서 약품 하이버라고 있어. 요새 사진관에 물어보면 하이버를 타면 원판에 형체가 나타나. 그래 되면은 어느 정도 됐다 싶을 때 증착기에다 담가버려. 담가 보면 딱 고만 화면이 스톱되지."" 자바라 카메라를 들고 찍은 사진에는 예안면의 기록이 현상되어 있다. 그가 살아온 삶의 다양한 이력 속에서도 당시 흔치 않은 직업인 신문기자가 단연 눈에 띈다. 어려서부터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 그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직업이 아닐 수 없다. 1962년 경향신문을 시작으로 이후 매일신문, 영남일보 지국을 운영했고 동시에 자연스레 기자로도 활동했다. 그는 당시 거래했던 장부를 아직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1964년 경향신문 신문기사. 권상길 씨가 직접 쓴 기사, 낙동강 아홉구비 내려오는 예안면 서부리 낙동강 기슭에는 조선시대 왕실에 은어를 잡아 올리기 위해 저장해둔 석빙고가 있다는 내용.(자료제공: 권상길) ""매일신문, 영남일보 할 적에 독자들 구독료 받던 장부래. 옛날 장부지, 거래장이라고도 할 수 있고. 보자, 77년도에는 그때 월 구독료가 400원, 600원 그래 할 때야. 구독료 받고 본사에서 나오는 영수증을 띠주곤 했지. 당시 이 지방 유지들은 싹 다 알았지. 그래도 볼 만하니 보지, 무식꾼이 어디 신문을 보겠나… 구독자도 꽤 됐어."" 신문 구독료 장부 ⓒ백소애 양조장, 이발소, 미장원, 면장, 서울사진관, 신흥가구점, 예약약국… 1960년대 시내라는 것은 예안장터를 말하는 것이다. 토박이부터 기관장까지 유일한 '미디어'의 창구였던 신문으로 예안의 소식통이자 기록가가 되었다. ""당시엔 보도증으로 기사를 무료로 실어줬지. 젤 처음에 경향신문 지국을 하고 그 다음에 매일신문을 했어. 중앙지하고 지방지하고 두 개를 했어. 나중에 영남일보 지사장 권오인 씨라고 우리 일간데, 영남일보를 지국을 하면 어떻겠노, 해서 영남일보를 맡았지. 전국적으로 경향신문을 많이 봤어. 예안에서 타지에 가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사람들이 고향 오면 나를 갖다가 향토예비군이라 그랬거든. 나는 고향을 안 떠나고 항상 고향에 있었고 또 고향의 소식을 경향신문에 많이 냈으니… 경향신문을 타지에서도 많이 본다고 했어. 출향인들이 고향 소식을 보기 위해서 신문을 본다카이 나도 보람이 컸지."" 연애 반 중매 반, 우리가 빠지는 인물은 아니지 동부리 권상길 씨 댁을 방문했을 때 부인 엄원조 씨는 재봉틀을 밟고 있었다. 50여 년 전에 9천원에 월부로 주고 산 아이디알 미싱은 아직도 건재하다, 마치 부부처럼. 당시 매일신문 예안지국을 경영하던 권상길 씨가 그나마 형편이 좀 되어서 구입한 것이다. 이 재봉틀로 해마다 아이들 옷을 직접 지어 입혔다. 동갑내기 옆지기 엄원조 씨 ⓒ백소애 ""우리 둘 다 실지로는 갑술생이야. 1934년 갑술년에 안동에 홍수가 범람해 영호루가 떠내려갔잖아. 난 2년 늦게, 마눌님은 1년 늦게 호적에 신고했지. 옛날엔 그런 일이 숱했으이. 할마이는 어렸을 적에 저 아부지 따라 일본 갔다가 해방되고 나왔어. 가까운데 살았으이 얼굴 정도는 알았지. 실제 나이 열아홉 동갑에 결혼했거든. 동네서 대놓고 연애는 못하고, 처삼촌 되 니하고 우리 아버지하고 친구 간이거든. 사우 삼자, 며느리 삼자 했지. 뭐 사실 우리 동네서 우리 할마이도 여자로선 잘 생겼고 나도 남자로선 안 빠졌지."" 부리부리 선이 굵고 진하게 생긴 남자와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여자의 만남이었다. 젊었을 땐 누구 엄마, 임자, 여보 그렇게 불렀다. 1950년대 권상길, 엄원조 부부 ⓒ권상길 ""지금은 할마이라 그러지. 자기는 영감이라 그카고. 성질이 우린 반대야. 임자는 A형이고 나는 O형이거든. 저기는 성질이 굉장히 세밀하고 먼지도 하나 있음 안 되고, 안 그래도 오늘 손님 온다고 이불도 막 개놓고… 내야 까짓 노인방인데 뭘 그래 하지만서두. 싸워보기는 했지만도 싸워봐야 칼로 물 치기라, 암 것도 아니지. 집 사람이 세게 나오면 내가 입을 다물지. 싸워봐야 이웃에 남사스럽고 아-들 보기 영 아니어서 안 싸우지. 내가 말을 안 하면 조금 지나면 누그러져."" 은륜 친목회 무릉 야유회. 가장 행복했던 시절. ⓒ권상길 은퇴하고는 우리 집 옆에 전지가 한 600평 됐던 거 그걸 경작했지. 농사일도 손 놓은 지가 한 3년? 이젠 몸이 예전 같지가 않아서 슬슬 다 내 손에서 떠나보내고 있어. 일평생 중에 제일 즐겁고 행복했던 시절을 묻자 그는 딱 3초도 고민 않고 바로 대답했다. ""오도바이 친목회 '은륜 친목회'라고 있어요. 은륜은 은빛 바퀴라는 뜻이야. 부부 동반으로 속리산도 가고 고은사도 가고 할마이 태워가지고 여럿이 한 십여 대 됐나? 열 쌍 정도 되는 사람이 맘 맞아서 열심히 놀러 댕겼지. 암산 보트장에 가서 보트도 젓고 애들도 젊고 우리도 젊고 좋았어. 아주 즐거웠던 시절이었어."" 지금은 벌써 해체됐지만 젊은 시절 거침없이 도로와 산과 강, 좋은 사람들과 좋은 곳에서 보냈던 기억이 선하다. ""그러다 95년쯤 티코 사고 다음에 노란 마티즈, 은색 마티즈… 그렇게 몰다가 자동차도 은퇴했지."" 그의 청춘과 함께 했던 바이크 ⓒ권상길 새로운 것 배우기를 두려워 말라 예안에 속했다가 도산에 속했다가 귀단에 살았다가 서부리로 갔다 안동댐 수몰로 서당골로 그러다 또 동부리로, 사연 많고 이동 많은 삶속에서 그는 돌이켜보면 자신의 삶이 그다지 권장할 게 못되는 삶이라고 말한다.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니더만. 여기저기 다니니까 사람 꼬라지가 안돼. 내가 줏대가 없나봐. 요즘엔 젊은 사람들한테 그케요. 뭐 하나만 똑바로 잘하면 되고, 한 직장을 가져도 그것만 꾸준히 하지 나처럼 이것저것 하다가는 이도저도 아니게 된다고."" 많은 일 중 가장 적성에 맞았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하여튼 뭔가 많이 했고 많이 기록하고 그랬소만!"" ⓒ백소애 ""그 당시에 할 적에는 다 내 적성에 맞는 거 같지. 신문할 적에는 신문이 맞고 정미소 할 적엔 정미소가 맞는 거고, 다 맞으니까 그래 했지. 하기 싫으면 다 치왔지. 너무너무 복잡해. 생활이. 아 다섯이 키우는데 내가 그쿠 나대니 부모 노릇을 올케 못했어. 연년생도 있고 줄줄이 복작복작하니 살았어. 첫째는 바로 밑에 동생 때문에 젖도 제대로 못 먹였어… 공납금도 한꺼번에 나가서 밀리기도 하고. 지금 봐도 미안치 뭐. 세상에서 제일 맘대로 안되는 게 자식이랑 날씨 잖어."" 그는 총기가 있을 때 자필로 또렷하게 유언장 작성도 미리 해놓을 참이다. 근 몇 년 전엔 무릎에 인공관절도 넣었고 백내장 수술도 하고 이 치료도 하고 이래저래 탈나는 데도 많다. 개인병원은 물론이고 성소병원, 안동병원도 꾸준히 다니지만 마지막엔 안동의료원으로 가야한다고 말한다. 왜 의료원으로 가야하냐고 의아해하자 그가 말하길 ""거서 죽어야 아-들 댕기기가 쉬워."" 그의 실용유머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수몰이 되고 얼마 안 되는 수몰 보상금을 받고 사람들은 '여기서 300리 밖을 나가라'고 했다. 300리 밖을 나가야 그 돈을 가지고 뭐를 좀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도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성공한 사례가 많다. ""하여튼 뭔가를 많이 했어. 했는데 성공한 건 하나도 없어."" 성공의 사전적 의미 중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목적한 바를 이루는 것'이고 또 하나는 '거룩한 공적'이다. 후자까지는 안 되더라도 그는 전자를 이루었다. 호기심 많고 열정적이었던 그의 삶은 자신의 메모지에 적어둔 말과 그 결을 같이 한다. '새로운 것 배우기를 두려워 말라.' (글/ 백소애 sodoor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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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 혹독한 삶의 시련, 글로 위로하다 안동시 일직면 광연리, 권영숙 시인 이야기
- 70에 첫 시집을 낸 할머니 시인- 파란만장 그 세월 '참 재밌다 그지'- 거친 풍파 헤치고 야생화처럼 피어난 삶 권영숙(75) 할머니 ⓒ정형민 2019년 안동예천 근대기행은 생생한 르포취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다룬 '구술생애사'와 안동과 예천 두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사의 근간이 되는 '마을'을 테마로 한 '우리 마을 이야기'를 그려낼 예정입니다. 네 번째 '구술생애사'의 주인공은 안동시 일직면 광연리에 사는 권영숙 할머니입니다. 칠십 넘어 첫 시집을 낸 할머니의 삶은 '시' 그 자체입니다. 거친 풍파를 헤치고 야생화처럼 피어난, 사랑에 용감했고 시에 몰두했던 권영숙 할머니의 삶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편집자 일직면 광연리 ⓒ정형민 여든을 바라보는 내가이제 첫발을 딛습니다.60억 인구 중의 미미한 존재지만무엇이 되고 싶었습니다. 나의 내부에 참답게 관용을 못한 채평생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쓰든 달든 나만의 길,아름다운 동화처럼 그저 그립습니다. 2018년 봄 - 권영숙 시집 <참 재밌다 그지> 서문 일직면 광연리 사는 권영숙 할머니. 70대 할머니가 되어서 첫 시집을 내신 분이라는 얘기를 듣고, 올해 개봉한 다큐멘터리 '칠곡 가시나들'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내 뇌는 스스로 권영숙 할머니에 대한 선입견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할머니가 되어서 뒤늦게 시를 배우고, 시집을 내셨나 보다.' 인터뷰 약속을 잡기 위해 전화를 하면서 어떤 호칭을 사용할까 참 고민이 많았다. 권영숙 시인, 시인 할머니, 할머니, 어르신…. 낯선 어른을 뵙는 일은 참 어렵다. 다행히 첫 통화에서 낯선 만남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없어졌는데, 통화 말미에 시인께서 해주신 말씀이 따사로이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권영숙 시인… 선생님이세요?"" ""예, 글니더."" 사투리를 구사하는 투박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내가 사는 봉화 산골 동네의 옆집 할머니랑 얘기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저는 오지 다큐를 찍는 정형민 감독이라고 합니더. 어르신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는데, 인터뷰 날짜를 잡으려고 전화드렸습니더. 저도 11년 전에 봉화로 귀촌해서, 어머니랑 함께 살고 있습니더."" ""아이고 효자시네. 어머니까지 모시고……"" ""아닙니더. 결혼도 못 하고 아직 어머니 옆에 있는 불효잡니더.""""그런 게 중요한가?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면 그게 최고지."" 사실 할머니의 답변에 많이 놀랐다. 주변에 계신 어른들은 한결같이 ""빨리 결혼해서 어서 아기를 낳아야지.""라는 말씀을 하셨으니까. 아주 짧은 대화였지만, 처음에 가졌던 선입견이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보통 할머니들과 많이 다름!' 갑자기 내 마음은 권영숙 할머니와의 만남에 대한 기대로 설레기 시작했고, 할머니한테서 삶에 대한 소중한 지혜들를 얻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첫 만남은 안동향교회관에서 이루어졌다.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소학을 배우러 안동향교회관에 나오신다고 하셨다. 솔직히 첫 모습부터 남다르셨다. 체구는 작았지만, 허리도 꼿꼿하고, 작은 배낭을 멘 모습에서 활기와 정열 같은 게 느껴졌다. 할머니께서 점심을 먹고 집으로 가자고 하셔서, 일직면 읍내에 들렀다. 할머니는 자꾸 불고기를 먹자고 하셨는데, 한눈에 보아도 손님 대접을 하시려는 게 분명했다. 내가 몰래 밥값을 계산해도 야단을 맞을 것 같아서 머리를 굴렸다. ""어머니, 불고기가 드시고 싶습니꺼?"" ""귀한 손님이 이렇게, 아니 오셨는데, 그래도 맛있는 걸 대접해야지요."" ""그럼 저는 간단히 먹으면 좋겠습니더. 제가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고기를 먹지 싶습니더."" ""그러니꺼? 그러면 정식 먹을까요?"" ""네, 정식이 딱 좋겠습니더."" 시인 할머니를 만나기 전부터 아주 궁금했던 게 있었다. 일직면에 산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제일 먼저 권정생 선생님이 떠올랐다. 일직면에 권정생 선생님도 일직면에 사셨으니, 권영숙 할머니와 어떤 인연이 있지는 않을까? 일직 권영숙 할머니 댁 ⓒ정형민 일직 권영숙 할머니 댁 ⓒ정형민 늘 동경했지만 끝내 만나지 못했던 권정생 선생 우리 집안 어른이지요. 우리 마을에 권씨가 50명쯤 살아요. 권정생 할배가 일직면 조탑리에 사셨잖아요. 근데 내가 선생님 살아생전에는 우리 집안인 줄 몰랐어. 제일 가까운 집안인데 몰랐다니까! 돌아가시고 나서 뒤늦게 알았지. 내가 그것도 모르고… 정생이 할배 부친은 옛날에 우리 집에 와서 더러 밥도 자셨는데, 굉장히 못살았어. 그때 우리 집은 밥은 먹고 살았기 때문에 그 할배가 더러 오셨어. 어른이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간이 털썩 내려앉더라꼬. 우리 집안 어른인 줄 몰랐을 때도 늘 뵙고 싶었지. '몽실 언니'가 테레비에 나오고 그라니까, 우리 일직에 저런 유명한 분이 계시는데 언젠가는 한번 그 할배를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남편 없이 사니까 내 삶이 얼마나 힘들어. 막노동판에 가서 일 마치면 해가 빠지제. 또 그 할배 있는 마을이랑 우리 동네는 왕래하기가 참 힘들어. 조탑이 옛날에 엄청 깡촌이라서 차가 잘 안 갔다니까. 그래가 못갔다카이. 그래서 내 마음이 안 좋아. 살아생전에 한 번이라도 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 할배가 젊었을 때부터 몸이 아팠잖아. 폐 질환을 앓다가 또 복막이랑 방광까지 그 세월을…그래서 내가 저 할배는 저렇게 아픈 몸으로도 글을 쓰는데 나는 도대체 뭐 하는기고 싶어서 늘 마음속으로 동경했지. 그런데 우리 모친도 정생이 할배 돌아가신 그해 5월에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장례 때도 못 가봤지.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었거든. 권영숙 할머니의 방. 머리맡 서랍장에 권정생 선생 사진과 모친과 함께 찍은 사진이 놓여있다 ⓒ정형민 어느 날 일직면 공공근로일을 하게 되었는데, 정생이 할배 집 일을 시키더라고. 한 달 동안 했어. 조탑동에 가서 환경미화하고, 방문객들 맞을 준비하고, 꽃밭 만들고, 코스모스 심고, 메밀 갈고 홍초 심고... 하여튼 멋지게 만드는 거야. 그때 우리가 벽화도 그리고 일을 했거든. 그렇게 갈 수 있는데, 내가 왜 한 번도 할배한테 못 찾아갔는가 싶더라고. 살아 계실 때 할배를 봤으면, 내 인생이 더 빨리 달라졌을지도 몰라. 그때는 시를 쓸 생각은 안했지만, 그래도 혼자서 주절주절 글을 계속 쓰려고 했었거든. 쓰려고 하는데, 글은 잘 안 되고... (웃음) 막 그러면서 살았지. 정생이 할배는 정신력이 놀라워. 책을 얼마나 많이 쓰셨는지, 나중에 도서관에 가니까 할배 책이 그만치 많은 걸 알았지. 동화 쓰기가 진짜 힘들잖아요. 그 불편한 몸으로도 아이들 생각하면서 그렇게 많은 책을 쓰신 걸 보면, 진짜 역사적인 인물이지. 정작 당신은 홀로 그렇게 아프고 힘들게 사시고, 남을 위해 잘 살게 해주고 떠나셨잖아요. 권정생 동화나라에서 ⓒ정형민 어디까지 왔나 세월에 배 띄워오니 순풍만 아니더라허허벌판에 모가 깨진 마음이 웃습니다 놀란 꿩처럼 휘둥그래 뜬 생각이아직은 살아 있다는 긍정을 가져봅니다 한순간의 일도 낮잡아 잊어버리는잎 진 꽃입니다접혀진 투박한 나이테는옹졸하게 시샘까지 합니다 희망을 가져보아라붙잡아보고 싶어도 손 새에 빠지는 모래알 같습니다 냉골에 들기 전까지뇌세포의 포말을 또렷이 하기 위하여신의 로고스를 찾아도 봅니다 나는 내가 뭣을 해야 되는지도어벙벙해지며해목은 어머니 사진만 자꾸 꺼내봅니다 - 권영숙 시집 <참 재밌다 그지> 부잣집 딸인 어머니, 농림학교 수재였던 아부지 우리 엄마는 임하면에서 부자집 딸이었어요. 논만 4백 마지기에 집 대지가 6백 평이었어. 어머니가 한 살 연상이셨어요. 외할아부지가 엄청 부자였지만, 여자가 공부하면 바람난다고 어머니를 학교에 안 보내셨다니까. 그런데 아부지가 농림학교를 나왔는데 소문난 수재였거든. 그래서 아부지가 평범한 집안 출신이지만, 아부지한테 엄마를 시집을 보낸 기라. 우리 집도 대가족이었는데, 위로 오빠가 있고, 내가 둘째 그리고 남동생, 그 밑으로 쭈루룩 딸만 넷 그렇게 7남매였지요. 내가 1945년 12월 24일에 태어났는데, 그때는 다 출생신고를 늦게 했잖아. 하지만 아부지가 면사무소에 근무하셔서, 내가 태어나자마자 바로 출생신고를 했어요. 어릴 때 외갓집에 가면 하인들도 있고, 큰 괘종시계가 당당 울리고, 재봉틀도 있고 집안에 온갖 화초가 피어 있고 선인장까지 있었으니까, 진짜 부자지요. 그런데 우리 엄마가 아부지한테 시집와서 고생이란 걸 처음 해본 거지. 엄마는 가난하게 사실 때에도 몸에 한 줌 흐트러짐이 없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에 동백기름 바르고. 사람들 눈에 교만하게 보일 정도였어. 우리 집도 부자였는데, 아홉 살 때까지 머슴한테 업혀 댕겼어. 그때 집에 목화밭이 있었는데, 목화 수확할 때면 할매가 꼭 날 데리고 갔지. 그럼 나는 밭고랑에 혼자 놀다가 목화 가시에 긁혀 피가 나면 엉엉 울었지. 나의 아픔은 나의 아픔은 사랑덤빌 줄도 모르고구할 줄도 모르고어리석게 오랜 기다림으로쫓아오기만 기다리는 바보그대를 꿈꾸며나를 노래해 달라눈물 흘리며바보처럼어리석은 행복을 기도하며하염없는 기다림 속에그대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눈물 뿌린 시간을 보내는바보로 남으리라 - 권영숙 시인의 오래전 일기장에서 일직고등공민학교 시절. 왼쪽이 권영숙 할머니 전쟁이 끝난 후 나타난 낯선 남자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6.25가 터지고, 우리도 소달구지를 타고 의성까지 피난을 갔어. 의성에서 소도 내버리고 그때부터 청도를 지나서 밀양까지 걸어갔지요. 그때 내가 6살이니까, 발이 엄청나게 부어올랐어. 그러다가 밀양에서 오빠까지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할매랑 엄마가 엄청 울었제. 아부지도 장남이라고 얼마나 예뻐했겠노. 다행히 오빠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니까 자기 이름은 쓸 줄 알잖아요. 그래서 아부지 이름을 부르고 다니니까, 누가 데리고 왔더라고. 그런데 오빠를 찾자마자 아부지가 붙들려 가버렸어. 헌병들이 막 호루라기를 불면서 검문을 하는데, 우리 아부지가 외동이니까 집안을 지켜야 했거든. 그래서 친척 할배들이 우리 아부지는 붙잡혀 가면 안 된다고 엄마 치마 밑에 숨으라고 했지. 그때 엄마가 여동생을 임신해서 배가 산처럼 불룩했는데, 거기 숨으면 우쨌겠노? (웃음) 하여튼 아부지는 막 화를 내시더라고. 사나이 대장부가 군대에 가야지, 여자 치마 밑에 왜 숨노 하면서……. 그래서 당당히 붙잡혀 가버렸어. 군대를 갔다가 왔는데 전쟁이 나서 또 끌려가신 거야. 그래서 아부지가 전쟁에서 살아 돌아올지 알 수 없으니까, 엄마는 나를 오빠 따라 학교에 일찍 넣었지. 그런데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학교에 갔다 오니까 얼굴이 누런 남자가 마루에 앉아 있더라고. 속으로 얄궂어 보이는 저 남자가 누굴까 생각했지, 내가 아부지를 못 알아봤어. 그때 간디스토마에 걸려서 얼굴이 누렇게 돼서 돌아왔더라고. 엄마가 개를 얼마나 잡았는지 몰라. 그래서 겨우겨우 살아나셨어. 아부지가 간간이 군대 끌려가서 겪었던 얘기를 해주셨어. 총살당할 뻔했다가 살게 됐다고. 전투가 한창 벌어졌는데, 산에서 굴러 떨어져서 뒤에 혼자만 남게 되셨대. 다행히 산을 헤매다가 부대를 찾았는데, 탈영병이라고 총부리를 딱 겨누더라네. '아! 이제 죽었구나' 생각하셨는데, 마침 거기 책임자가 농림학교 후배였는기라. 그래서 그 후배 덕분에 총살을 면했지. 아부지는 팔에 총 맞은 자국도 있었어. 전투하다가 총알이 팔을 관통했거든. 일직고등공민학교 시절. 기차를 타고 수학여행 가는 길 전쟁이 끝나고 아부지는 다시 면사무소에서 근무하셨는데, 아부지 간호한다고 집안 살림이 많이 기울었지. 그래도 참 멋쟁이셨어. 일직면장도 오래 하시고…. 그때는 학교 마치면 면사무소에 놀러 가서, 인쇄하는 롤러를 가지고 장난도 많이 쳤지. 아부지가 면장 선거 나갈 때 논밭까지 다 팔아버렸어. 그래서 내가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어요. 그때 중학교 입학금이 3,300원인가 했는데, 입학금이 없어서 안동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합격은 했는데 못 갔어. 집안 살림도 어려웠지만, 오빠가 사범대학에도 가야 되고, 밑에 남동생도 있으니까. 그래서 놀다가 동네에 있는 일직고등공민학교에 조금 다녔어. 인가가 없는 학교였는데, 그때만 해도 학교에 늦게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나보다 5살 많은 학생도 있었어요. 일기장을 꺼내본다 ⓒ정형민 노을 누가 사랑을 하다서쪽 하늘에 걸어둔 건가다 못한 정애타는 불꽃인가그래서 그리움이 목말라그토록 발갛게 타나 눈물 젖은 너속 오빈 마지막 적선에갈대밭 함께 불탄다피라미 떼만 반짝반짝노을 춤추는여울살 물 구르는 소린백사장 붉고 고운 이마에어둡살이 앉으려니물새야너는 또 왜 달떠 우는가 - 권영숙 시집 <참 재밌다 그지> 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혼 부모님의 결혼 반대, 그리고 삭발 초등학교를 일곱 살에 들어갔어. 옛날에 오빠나 언니한테 책을 물려받잖아요. 그래서 1년 일찍 학교에 들어갔어. 그때는 학교도 멀고, 공부하기 싫어서 맨날 울었어. 학교까지 10리 길이었거든. 왕복 20리. 학교 안 가고 철둑에서 맨날 놀아뿌러. 그럼 엄마가 부지깽이 들고 막 쫓아 와. 그럼 울면서 도망가고, 할매 치마폭에 숨고 그랬지. 난 어릴 때도 내내 혼자 놀았어. 그때는 같은 성 아니면 같이 안 놀아줘. 같은 집안사람 아니면 안 놀아준다니까. 원래 고향 마을(일직면 원리)에는 권씨들이 없었어.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때 여기 광연리로 이사를 했지. 여기는 권씨 집성촌이거든. 그런데 학교가 더 멀어졌어. 왕복 30리나 됐지. 지금 사는 이 집을 아부지가 동네 어른들하고 직접 지었어. 큰 기와집을 뜯어서 소달구지에 싣고 옮겼지. 작은 짐들은 지게로 옮기고. 옛날에는 원래 살던 집을 뜯어서 새집을 짓곤 했다꼬. 초등학교 4학년 때 광연리로 이사하고 나서부터 우리 주인(남편)을 봤어요. 나보다 두 살 위 동네 오빠였는데, 같은 학교 한 해 선배였지요. 우리 오빠랑 같은 학년이었는데, 오빠가 공부를 잘했거든. 그래서 공부 못하는 우리 아저씨를 상대도 안 하더라고. 그래도 나는 우리 아저씨가 참 좋았어. 사람이 참 착했거든. 그때 우리 신랑 등에 타고 개울도 많이 건너다녔어. 맨날 물 건널 때 업어주곤 했어. 그러다가 우리 주인이 가슴 속에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나 봐. 그런데 나는 아예 아닌기라. 우리 집하고 그 집하고 너무 차이가 나니까. 그런데 아저씨가 우물가에 쪽지를 갖다 놓으면 내가 잽싸게 챙겼지. 다른 사람이 보면 절단날 일이제. 어쨌든 어릴 때부터 만났으니까 나도 결혼을 해야 하는갑다 생각했는데, 부모님이 정말 반대하는기라. 그래서 우리 아저씨한테 시집 안 보내주면 죽어버린다꼬 내가 내 머리를 빡빡 밀어 버렸어. 그러면 다른 데 중매를 못 설 테니까. (웃음) 그때는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 그때 나랑 선을 봤던 남자가 대학 교수가 됐는데, 지금은 퇴직했을끼라. 그 사람이 우리 집안 동생한테 묻더래. 나랑 선봤던 그 아가씨는 지금 어떻게 사느냐고. 그래서 내가 그 사람 지금 다마내기(양파) 까면서 하루 3만 원 번다캐라 그랬지. 우리 아저씨가 나한테 혈서를 써서 마음을 고백할 정도로 날 열렬히 사랑했어요. 결혼하고 나서도 고생을 말로 다 못할 정도로 많이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한 번도 안 싸웠어. 우리 아저씨가 정말 착하고 순딩이었거든. 가끔 내가 화를 내도 늘 나를 안아주었어. 할머니를 열렬히 사모했던 남편 김동혁 어머니(배성화)와 함께 오! 사랑이여 피맺힌 사랑이여당신의 마음이 가버렸나내 마음이 가버렸나 저 멀리시냇가아지랑이 아롱거리며살랑이는 봄바람을 타고 당신의 사랑은나의 귓전에 와 닿았지너를 사랑했노라고무척 사랑했었다고 허지만지금은찢기우는 눈물이마음을 찢는아픈 사랑을 낳았지 오! 맑았던 그 사랑이여!어릴 때 꾸밈없었던 그 사랑이여 (중략) - 권영숙 시인의 오래전 일기장에서 국제염직에 다니던 시절의 남편(앞줄 왼쪽). 문래동 판자촌 생활 결혼반지도 못 주고받았어. 내가 스물넷이고, 신랑이 스물다섯이었지. 그때 너무 가난하니까, 반지 값으로 돼지 새끼를 한 마리 사서 그걸 살림 밑천으로 시작했지. 그렇게 그래저래 살다가, 신랑이 국제염직에 다녀서 서울로 올라갔어요. 영등포 문래동이랬어. 그런데 세상에나 올라가 보니까 여기 거지는 거지도 아니야. 다 쓰러져가는 판자촌에 완전히 진창이더라고. 영등포 그 둑에서 살아가는 삶이. 그런 데서 몇 년을 살았다니까, 맨날 눈물 찔찔 흘리면서. 거기 강서구 화곡동이 그때는 전부 다 논이었어, 목동까지. 강둑에 나가서 새우도 잡으러 다녔지. 쪼깨난 새우가 억수로 많았어. 그리 살아선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멸치 장사도 하고 떡 장사도 하다가 그때부터 내가 담배에 손을 댔어. 내가 내 삶을 못 받아드리겠더라고. 너무 형편없이 사니까. 얼마나 못살았는지 설명하기도 힘들어. 엄청 작은방에 연탄불 피워서 겨울을 나고, 수돗물도 사람들이 물통 들고 가서 10원, 20원 주고 사서 먹었다니까. 주인집에서 수돗물까지 팔아먹고 살아. 서울에 있을 때 첫째를 낳았는데, 겨우 돌 지난 애를 방에 남겨두고 문을 잠가 놓고 일하러 다녔거든. 옛날에는 여의도에 공군부대가 있었는데, 거기서 일하면서 그렇게 울고불고 살았어. 다다미방이 추우니까 애(장남)는 맨날 설사하제, 도저히 살 수가 없어. 그래서 안동으로 내려와 버렸지. 우리 아저씨한테 나는 다시는 서울 안 간다고 그랬어. 나 혼자서 애기를 데리고 친정에 와부렀지. 그런데 우리 아저씨도 빚만 늘고 생활이 안 되니까 안동에 내려왔지. 두 아들 규완, 규진과 함께 우리 동네 뒷산이 문중 산이거든. 그래서 농사를 지으려고 거기를 개간하기 시작했지. 우리 아저씨가 얼마나 부지런한지 몰라. 밤에도 초롱불을 들고 가서 일하는기라. 그러다가 초롱불이 꺼지면 컴컴하니까 집에 돌아왔는데, 그게 새벽 한 시고 그랬어. 그렇게 뒷산을 일구었지. 그때는 개간할 때 우리 애를 포대기에 싸서 밭에 데리고 갔어. 그때만 해도 봉화 재산에서 호랑이가 애기를 물어갔다는 소문이 들릴 때였거든. 근데 내 친구가 봉화로 시집을 갔는데, 진짜 눈앞에서 호랑이가 이웃집 애를 물어가는 걸 보고 식겁을 했대. 그래서 친정으로 다시 왔어. 그때는 우리 동네도 늑대 같은 짐승들이 잘 내려왔어. 그런데 애를 포대기에 싸서 밭에 데리고 가서 겁도 없이 일했다니께. 사실 내가 몸이 너무 약해서 거의 일을 못 했거든. 그래서 이웃에서 내가 농사일도 안 한다고 뒤에서 욕을 많이 했어. 그래도 우리 주인은 늘 나를 감싸주었지. 그렇게 착한 사람이었어. 님이 가신 뒤 오늘은이렇게 느꼈습니다나뭇가지 끝마다맺힌 아름다운 쪼그만수정 구슬을 보아도내게는 서럽게만느껴집니다하얀 가지의 노래마저도서럽게만 느껴집니다지상의 가지가지모든 것들이예전에 몰랐던 서러움으로 가득 찹니다 - 권영숙 시인의 오래전 일기장에서 남편의 은사님과 함께 죽을 고비 앞에서 일기를 쓰다 내가 농사일은 잘 못 했지만, 새마을운동은 열심히 했어. 서울에서 내려오니까 농촌이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꼬. 그래서 정말 열심히 뛰어다녔어. 내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나 봐. 지금은 목소리가 이렇지만, 그때는 사람들 마음을 휘어잡는 목소리였어요. 일직면 새마을 부녀회장으로 일을 참 많이 했지. 연탄을 팔아서 부녀회 기금까지 마련하면서 앞장섰지. 그래서 청와대 가서 훈장까지 받았어요. 새마을운동 야유회. 오른쪽에 검은 양장차림 새마을부녀회장 시절. 뒷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가 할머니. 열심히 살다 보니까 그래도 밥술이라도 뜨게 되더라고. 그런데 막내(규영)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내가 많이 아프기 시작했어.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어. 계속 어지럽고, 길을 가다가 쓰러지기도 하고. 병원에서도 원인을 모르더라고. 그래서 별 방도가 없으니까 기도원에 들어가게 됐어. 무언가 의지할 것이 필요했지. 기도를 하니까 머리가 조금씩 맑아지는 것 같더라고. 그래도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삶이 허무해지는기라. 그래서 내 삶의 흔적이라도 남기려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게 막내딸 초등학교 4학년 때였지. 안녕, 내 사랑 살림이 조금 좋아지니까 우리 주인이 비닐하우스를 세워서 고추 농사를 지었어. 안동에서 제일 처음으로. 그래서 우리 주인이 영농우수상도 타고 그랬지. 멜론도 하우스에서 재배했는데, 연탄불을 피워서 멜론을 키웠어. 그렇게 살림이 좋아지니까 우리 주인이 포크레인을 사면서, 이제 자네 고생 안 시킬께 그러더라꼬. 안동에 골프장이 들어온다고 하면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제일 비싼 포크레인을 샀지. 그래서 완전히 거지가 돼 부렀지. 그것 때문에 우리 주인이 나락(벼) 장사한다고, 나락을 나르다가 허리를 다쳤는데…… 수술 받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 그게 1998년이지. 우리 주인이 쉰여섯 살 때. 혼자서 살아야 하니까, 뭐든 해야 했지. 내가 쓰레기 매립장 공사장에도 나가서 일했어. 매립장의 하루 까마귀 때 우글거리는기분 나쁘게 우는 곳쓴 무더기가 왜 저렇게 많을까사람들은 단 것을 다 먹고쓴 것만 토해 내는가벌 떼, 파리 떼는 너무 많이우글거려, 단맛을 찾으니징그럽기 그지없다 더러움 무더기의 무질서 위에유리 못 찔릴까두려움 안고엄마들의 기적의 가슴을연출하는 삶을 엿보며넘어가는 석양 언덕에 서니인간의 긍지에 가슴이 저리다. - 권영숙 시인의 오래전 일기장에서 젊은 시절 등 떠민 아들의 미국행 1998년 그해 2월에 우리 아저씨가 세상 떠나고, 8월에 둘째 아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어. 원래 우리 주인이 아이들한테 너희들은 우리처럼 고생하지 말고, 큰 나라에 가서 잘살아보라고 했거든. 그래서 장례식 치르고 집에 있는 걸 다 터니까 1,600만 원이 나오더라고. 그걸 쥐어서 보냈지. 애가 공항에 가서 안 간다고 하면서 막 울더라고. 그래서 더 나은 세상에 가서 공부하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고 등을 떠밀었지. 그런데 6개월이 지나니까 돈이 뚝 떨어졌대. 돈을 벌면서 공부를 계속 하려고 해도 학비도 안 되더래요. 그래서 공부를 포기하고, 청소일을 시작했대. 그렇게 엄청 고생을 했는데 지금은 자리를 잡았지. 그래서 형도 데리고 가고. 형은 미국에 늦게 갔는데도 빨리 성공했지. 동생보다 돈을 더 많이 벌어. 지금은 아들들이 엄마가 참 그때 잘 보내셨다고 해. 그런데 내가 처음 미국에 나갔을 때는 정말 펑펑 울었어요. 어느 해 눈 오던 날 환갑 때쯤 미국 있는 아들한테 갈라고 비자를 낼라 하니 돈이 있나? 주인이 빚만 2천만 원 남겨 놓고 가서 그 빚을 갚는다고 10년이나 걸렸어. 노동판에 나가서 품 팔아서 빚을 갚고 있을 때였는데, 그래도 무리를 해서 아들을 보러 갔어. 둘째를 8년 만에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그때까지 진짜 눈물로 세월을 보냈으니까. 통화도 하기 어렵잖아. 미국 가서 만나기 전만 해도, 아들이 미국서 부자 돼서 잘 사는 줄 알았어. 근데 가보니까 흑인 빈민촌에,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 같은 데 사는 기라. 방도 없이 거실에 매트리스 하나 깔고 전기장판 켜고 살더라고. 내가 진짜 깜짝 놀랬어. 막 눈물이 쏟아지는데 펑펑 울었어. 그래서 내가 아들한테 집에 가자고 그랬어. 그래도 한국 가서 살면 이것보다는 낫지 않겠냐 했지. 그런데 아들도 울면서, 이제껏 고생했는데 이렇게는 못 간다 하더라꼬. 그때 미국서 5개월 있다가 왔어. 곁에 한국 아가씨(며느리)가 들어가서 같이 살고 있더라꼬. 며느리가 참 고맙고 착해. 한국에서 대학까지 나왔는데... 나는 며느리한테 자존심 상하지 않으려고 10만 원짜리 속옷을 사서 입고 갔어요. 그런데 며느리는 10달러에 5개짜리 속옷을 사서 입고 지내더라고. 그래서 할매도 아닌 젊은 네가 왜 이런걸 입노 했더니, 자기가 미국에 멋 내러 왔느냐고 하더라고. 아이들 훌륭하게 키우려고 미국에 온 거지, 자기들 호강하러 온 게 아니라고 하잖아. 내가 그 말 듣고 깜짝 놀랬지. 딸만 둘인데 공부를 참 잘해. 애들이 1학년 때부터 내내 일등이래. 할머니의 책장 ⓒ정형민 1984년 일기장. 막내 규영 씨가 선물했던 카네이션 ⓒ정형민 버려진 매트리스 깽하게 달린 하늘가을 아파트 앞외로워 떠는 듯도 해 보이는버려진 매트리스아직은 유년이구나 뗏목처럼 둥둥 떠오는 생각알라바바 댄디 마을 표정찬물사발에 간장만 타서누렇게 부황 뜬 얼굴 비친 물마실 때가 언제였던가?참한 솔 껍질 벗겨 울리던떪은 송구죽 미국 글자 그대로 아름다운 나라애배처럼 말고 부유한 나라에 잘살아 보거라애비 뜻에 따라 주립대 들어간 아들학비로 중단하고궁궐 같은 르네상스 호텔 근무하나흑인촌 싸구려 집을 빌려청설모가 밤새도록 푸른 달빛을 넘나들며건반처럼 두드려대는 천장매트리스 두 개 휠터 한 개그것도 쓰레기장에서 구한 것이라고 하는 아들 아! 가난!이 지구상 어디를 가도 가난이 있구나버럭 무릎이 휘청거렸다학부 나온 며느리에게하도 면목이 없어어떻게 이렇게 사느냐화장기 없는 입술괜스레 어머니 속을 끓게 하네요 - 권영숙 시집 <참 재밌다 그지> ""죽기 전에 시집이라도 한 권 냈으면 싶었어"" ⓒ정형민 시골 할매가 시를 배웠지 서울 딸네 집에서 8년쯤 지내다가 작년 11월에 내려왔어요. 내가 외손주를 돌봐주었어. 이제 4학년인데, 손주랑 떨어지니까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처음에 서울 올라가서, 손주만 보면서 집에 있으니까 심심하잖아. 그래서 책이라도 보려고 도서관에 갔어요. 그런데 도서관 직원이 내가 시골에 살아서 책을 못 빌려주니까, 딸을 데리고 오라 하더라고. 그래서 딸을 데리고 갔더마 책을 빌려주는기라. 거기서 딸이 내 자랑을 했지. 우리 엄마는요, 시골에 살아도 톨스토이도 읽고, 까뮈 전집도 읽는다꼬. 나는 평생 책 한 권도 못 사봤어. 형편이 안 되니까. 그래서 쓰레기장에 버려진 걸 주워서 집에 가져오고. 공공근로 같은 일 하면서 책을 많이 주웠어. 권영숙 시집 '참 재밌다 그지', 소울앤북, 2018 ⓒ정형민 그때 딸애 얘기를 듣고, 도서관 직원이 시를 배울 생각이 없느냐고 묻더라꼬. 그래서 시창작반에 들어가서 유종인 시인한테 시를 배웠지. 그리고서 죽기 전에 시집이라도 한 권 내야겠다는 생각에 두 아들한테 돈을 3백만 원씩 받았어. 처음에 111편을 유 시인께 들고 갔더니, 너무 많다고 60편으로 잘라버리더라꼬. 그리고 출판사를 소개받아서 시집을 냈는데, 몇 년 지나고 내 시집이 우수도서로 선정됐다고 천만 원을 지원해 주는기라. 그래서 출판사에서 나한테 백만 원을 주고, 나머지 돈으로 또 시집을 인쇄했지. 거친 풍파 헤치고 야생화처럼 피어나 권영숙 할머니를 마주한 감회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마치 폭풍우 속에 피어 있는 한 송이 야생화를 본 것 같기도 하고, 거친 풍랑이 치는 바다로 거침없이 배를 몰고 나가는 강인한 어부를 만난 것 같기도 하다. 일직면 광연리 마을에는 일흔다섯의 나이에도 여전히 꿈을 놓지 않고 작가의 길에 들어선 할머니가 산다. 꽤 많은 얘기를 나누고, 거친 손으로 쓴 시와 일기들을 읽어본 지금, 나는 권영숙 할머니를 '권영숙 시인'이라 부르고 싶다. ""잘 가시우"" ⓒ정형민 권영숙 시인의 시집 <참 재밌다 그지>를 필독하기를 권한다. 시집을 읽는 내내, 어느 유명한 시인의 시집을 읽는 것처럼 탄성이 절로 나온다. 시를 배우기 전에 일기장에 써놓은 시들도 세상에 나왔으면 좋겠다. 야생의 생명력을 물씬 풍기며 마음을 울린다. 일기를 담은 수필집도 출간될 예정이라니 몹시 기다려진다. 출판사에서 일기장을 많이 챙겨 갔는데도, 집에는 아직도 일기장이 아주 많이 남아 있었다. 조심스레 일기장을 펼쳐들었는데 가슴이 하염없이 먹먹해진다. 눈물을 훔치며 할머니의 일기 두 편으로 글을 맺는다. (글/정형민 makalu21@naver.com) 오래된 일기 中 ⓒ정형민 오래된 일기 中 ⓒ정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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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목성동 연가
- -목성교가 있던 목성동-개천에서 잡은 메기-목성동의 오래된 가게 천리사, 동양방송설비, 화산인쇄사 2019년 안동예천 근대기행은 생생한 르포취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다룬 <구술생애사>와 안동과 예천 두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사의 근간이 되는 '마을'을 테마로 한 <우리 마을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마지막 <우리 마을 이야기>는 목성교가 있던 안동시 목성동 이야기를 펼쳐내 본다. 내려다본 목성동 ⓒ구자을 목성교가 있던 목성동 사라진 지명을 부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라진 지명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 장소가 갖는 의미는 또 무엇일까. 하이마, 나이야가라식당, 진모래, 농고 사거리, 36사단, 마뜰비행장, 제일은행 사거리, 태화 삼거리 그리고 목성교. 지금은 사라진 목성교지만 안동사람들은 여전히 목성교를 습관처럼 얘기한다. 목성교 사거리에 '푸쉬쉭'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정차하던 2번, 11번 시내버스, 가을이면 안동시산림조합 골목에서 열리던 송이시장, 돈까스로 유명했던 코끼리분식 그리고 내 인생에 커다란 아랫목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사무실이 있던 권방사선과 건물 4층. 안동시 목성동 지도. 2019년 12월 5일 카카오맵 목성교 사거리는 동쪽으로 보건소, 서쪽으로 안동교회를 잇는 서동문로, 동북쪽 시청과 서남쪽 천리동을 비스듬히 연결하는 퇴계로가 지나는 곳이다. 목성교 사거리에서 목성동성당까지를 직선으로 이어 그곳을 꼭짓점으로 한다면 삼각형 모양을 이루는 동네가 목성동에 해당한다. 하지만 '목성교'의 상징성은 그 이상이어서 일대의 서부동과 화성동, 천리동까지 언급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안막동에서 흘러내려 안동시청 앞을 지나 낙동강으로 흐르던 천리천은 목성동을 도심 속 낭만의 공간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장뚝에 즐비하던 포장마차촌에서 시인묵객들은 천리천을 '세느강'이라 명명하고 실제로 세느강, 행운집 등의 실내포차가 즐비한 거리엔 술 취한 청춘들이 자주 목도되곤 했으니까. 1989년 도시개발사업으로 천리천 복개공사가 시작되면서 목성교와 천리천, 사장뚝이라 불린 천리천 제방 등은 모습을 달리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59년 여름, 목성동에서 ⓒ조창희 조창희 목사가 기억하는 목성동 전 의성감리교회 조창희 목사는 지금으로 치면 천리사 맞은편 영창피아노(현재는 화장품도매창고) 앞이 생가다. 사진은 남동생(조덕희, 1957년생)이 집 앞에서 목마를 타고 놀고 있는 모습이다. 옆에는 주철로 만든 우체통이 있고 맞은편엔 기와집이 있다. 조창희 목사에 의하면 6.25전쟁 때 안동에서는 포탄이 떨어진 곳이 3~4군데 정도였다고 한다. 그중 안동기차역과 지금의 안동시청에 각각 포탄이 떨어졌다. 나머지는 공중에서 기름을 살포했는지 화마로 뒤덮여 시내의 70% 이상이 잿더미로 소실된 것이라 한다. 포탄이 떨어진 기차역 웅덩이에서 아이들은 메기를 잡기도 했다고. 지금의 경북유교문화회관은 옛날의 화산학원이 있던 터다. 이곳은 지역에서도 역사적 상징성이 있는 중요한 장소이다. 화산학원은 안동지역에서 처음으로 신학문을 가르쳤던 교육기관으로 일제강점기에 세워졌다. 이후 안동교육청이 들어섰고 후에 그 터에 경북상호신용금고가 새로 지어진 후 권택근 성형외과가 들어섰다가 지금은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경북유교문화회관으로 바뀌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안동을 거쳐 북진해 올라갈 때에는 경북유교문화회관 건물에 미군사령부와 국군부대가 임시 사령부 거처로 삼아 이용을 했다고 한다. ""안동중앙국민학교(안동초등학교)는 허허벌판이니까 포탄 투하 시 그대로 날아가 버리거든요? 산 밑에 있으면 포탄을 쏟아 부어도 명중시키기 힘드니까 위치적으로도 아마 임시사령부로 제격이었지 싶어요."" 북쪽으로는 천주교성당이 울타리 쳤고 뒤로 언덕 산이 막아주는 형국이라 군사학적으로 유교회관 건물은 안전한 요새와 같았다. 그런데 사령부로는 삼긴 삼았는데 정작 마실 물이 없었다고 한다. 학교 건물임에도 펌프가 없어 물이 안 나와 애를 먹던 중 근처 조창희 목사의 집에서 물을 길러다 썼다. ""우리 집에는 뿜뿌가 나와서 한국군 특무상사가 졸병들을 인솔해서 바게쓰에 쌀을 담아 와서 우리 집 마당에서 쌀을 씻어 가곤 했어요. 그렇게 부대에서 밥을 지어먹고 하니 군인아저씨들이 공짜로 물 받아먹는 게 미안했는지 쌀을 바가지로 퍼다 줘서 우리가 그때 다행히 쌀 걱정은 안하고 밥을 해먹었다는 거 아닙니까."" 한번은 부대 안으로 들어가 본 적도 있었다. ""미군들이 나를 귀엽게 봤는지 달랑 안고 부대 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온 식구가 걱정을 했어요. 씨레이션(전시에 먹는 식량) 박스, 식빵, 초콜렛, 껌 등을 안겨줘서 내보내는 바람에 부대 구경도 잘했고 온 집안 식구들이 덕분에 잘 먹었죠. 부대 안에서 나대로 이런 것 저런 것 구경을 해보니 신기했죠. 아마도 필요할 때는 땅굴을 파기도 한 모양인데 그런 흔적도 있었어요."" 화산학원이 화산국민학교로 다시 사범학교 부속 화산국민학교로 통폐합 후 폐지가 되면서 학생들은 흩어지게 된다. ""안동사범고등학교를 폐지하고 교육초급대학으로 승격시켰거든요. 내 생각에는요, 화산학교가 부설 초등학교여서 사범고등학교가 폐지되니까 안동사범학교 병설중학교도 함께 폐지되고 연쇄적으로 다 폐지가 됐지 싶어요."" 학교가 폐지되면서 동쪽에 있는 학생들은 동부초등학교로, 서쪽에 살고 있는 학생들은 안동초등학교로 분산·편입시켰다. 목성동에 살았던 조창희 목사는, 입학은 화산국민학교에서 하고 2학년 가을학기에 안동초등학교로 편입했다. 한 학년이 60명씩 두 반이었던 규모에서 한 클라스 당 60명씩 6~7반씩, 전교생이 2천명을 훌쩍 넘긴 규모로 가게 된 것이다. 1974년 목성교에서 ⓒ조창희 개천에서 잡은 메기 목성교 다리는 그다지 크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복개 전 여름 장마철에는 이 집 저 집 분뇨를 퍼서 장마로 흘러가는 황톳물에 퍼부어 버리곤 했다고. 장마가 멎어 물살이 약해지면 그 다음부터는 초등학생 애들부터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밴드(그물망)를 가지고 풀숲에 놓고 발로 꾹꾹 눌러가면서 메기며 장어 등 저녁 반찬거리를 마련했다. ""목성교 다리는 완전한 다리로 건재했었고 지금 시청 앞에는 다리가 없다보니까 전봇대 같은 통나무를 두세 개 엮어서 외나무다리를 임시방편으로 만들어 사용했지요. 명륜동 쪽에도 안막동 가는 길 쪽에 목성교처럼 옳은 다리가 있었어요."" 도로 포장도 안 되었던 그 시절 목성교 동쪽 서부동과 삼산동에는 전봇대가 세워져서 전기가 들어왔지만 반대편 안동교회 가는 쪽은 전기가 안 들어왔다. ""우리 집도 전기가 안 들어와서 남포등, 석유 등잔을 키고 살았어요. 당시에 전봇대만 세우면 전기를 가설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 목성교에서 우리 집 있던 피아노대리점까지 기껏해야 7~80m 되나? 전봇대를 세우자고 하니 사람들이 우리는 지금까지 전기 없이 남포등으로 잘 살았다고 필요 없다고 해요. 그러니 어째요 방법이 있나, 우리 집 혼자 전봇대 2~3개 세우는 값을 다 물어서 전기를 넣었지요. 그런데 전봇대를 세우니 막상 전기는 또 다 땡겨 쓰더라구요."" 옆에는 금은방과 국화빵집, 그 옆에는 호떡집, 또 그 옆에는 제재소가 있었다. 제재소는 개천까지 넓게 톱날이 돌면서 규모가 컸던 모양이다. 이후 군장마크, 학교 명찰, 체육용품을 판매했던 천리사가 들어서고 옆에 미장원, 2층에 사진관, 또 그 옆에 시계점포, 이발관, 쌀가게, 솜 트는 집, 그 다음이 삼일약방(지금의 목성교 바로 가기 전), 철물점, 인쇄소 마지막에 목성교가 있었다 한다. 그리고 너머에 안동문화사와 보건소 맞은편 경북인쇄소 등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목성동 성당 ⓒ백소애 목성동성당과 종교타운 목성동성당은 안동의 랜드마크 중 하나다. 이제 목성동성당 일대를 종교타운이라 부른다. 성당 입구 바로 옆으로는 목성공원을 조성해놓았다. 안동 종교타운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개신교, 유교, 원불교, 민간신앙 등을 하나로 아울러 소통과 화합, 봉사를 구현하기 위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동쪽에서부터 유·불·선을 합친 신흥종교 성덕도 안동교화원, 1927년 설립된 천주교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 1770년에 건립된 안동김씨 종회소,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고운사 안동포교당 대원사, 경상북도유교문화회관, 1909년 설립된 개신교 안동교회 등의 시설이 밀집되어 있다. 1987년 목성동성당. 각종 시국사건 관련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천주교 안동교구청 안상학 시인은 2018년 겨울에 발간된 <기록창고> 1호(경북기록문화연구원 발간)에 실린 '안동민주화운동의 성지, 목성동성당'이라는 글을 통해 ""옛 천주교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경북 안동시 목성동 산1번지, 이하 목성동성당)은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안동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로서 한 시대를 누렸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붉은 벽돌과 높은 첨탑이 인상적인 고딕양식에 가까운 건축물이었다. 풍수지리로 살펴보면 잠두혈 자리다. 명당 중에 명당이다. 안동시가지가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목성산 이마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안동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자리라면 어디서라도 높은 산 위에 올라앉은 성당 건물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외부 사람들이 안동을 둘러보고 이미지를 새긴다면 몇 손가락 안에 들기에 모자람이 없는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얘기했다. 또 ""신자들에게는 참으로 신성한 공간이지만 일반 시민들에게는 훌륭한 공원이나 다름없었다. 가난한 연인들에게는 더없이 아늑한 데이트 장소였다. 안동시민들에게는 소중한 추억이 서려있는 정서적 공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는 한편 목성동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성지이자 각종 시국사건이 있을 때마다 저항과 투쟁이 있었던 역사적인 공간이었다. 농민도, 학생도, 사제도, 수녀도, 시민도 함께 나섰다. 그러한 상징적인 공간이었던 목성동성당은 2004년 지금의 건물로 새롭게 지어졌다. 아도니스 레스토랑 광고 ⓒ백소애 안동교회의 로뎀나무, 목성동성당의 에스포와처럼 대원사에도 커피숍이 들어섰다. 이름은 '무심코無心co'다. 지금의 대원사가 지어지기 전 1980년대 반변천 문학회 문청들이 대원사 지하예향다방에서 시낭송회를 갖는 등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곤 했다. 그전에는 심지다방이었다고 한다. 후에 예향다방이 사라지고 아도니스라는 레스토랑이 생겼다. 그곳에서도 안개 시낭송회 등이 열렸다. 문청들의 문화공간으로 사랑받던 그곳은 1990년대 들어서며 없어지게 된다. 목성동의 터줏대감 천리사 ⓒ백소애 천리만큼 길고 오래 가라, 천리사 목성동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는 단연 천리사다. 스포츠용품 전문점 천리사는 1958년 문을 열었다. 당시 28세의 창업주 홍영표 씨가 운동구점을 하고 있던 숙부의 도움으로 시작한 가게로 상호도 숙부가 '천리만큼 길고 오래가라'고 지어준 것이다. 그 덕일까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천리천이 흐르고 있어 천리사라 불렀을 거라 유추한 생각과는 달랐다. ""안동사범학교 1회 졸업생이셨는데 교직으로 안가고 장사를 시작하셨어요. 처음엔 천리체육당이라고도 했답니다."" 30년 전 가게를 물려받은 2대 사장 홍웅기(63) 씨의 말이다. 홍웅기 사장은 창업주의 재종손자 된다. 은퇴 후 천리사 2층 건물에 거주했던 홍영표 사장은 89세의 일기로 작년에 작고했다. 천리사는 처음부터 지금 자리 있었던 건 아니다. 서부동에서 문을 열었다가 지금의 목성동 자리로 옮긴 것이 1967년쯤이고 10년 후 지금의 2층 건물로 지었다 한다. 홍웅기 사장이 맡아서 시작할 때는 바로 옆에 있던 사진현상소 백광사를 터 가게를 넓혔다. ""주소가 목성동 62번지입니다. 그래서 전화번호도 6200번이에요. 처음엔 국번 없는 62번이었다가 620번, 그러다 6200번이 되었지요."" 한창 호시절에 시작한 가게였으나 요즘은 조용한 편이다. 천리사 홍웅기 사장 ⓒ백소애 ""요즘 애들은 운동, 특히 야외운동을 안하니까 예전 같지 않죠. 학교에 체육용품을 납품한다거나 행사할 때 단체로 체육복을 주문하거나 해요. 가게 소매를 한다거나 그런 건 거의 없다고 봐야죠. 우리뿐만 아니고 대부분 소매가 잘 안되고 그래요."" 2대째 이어오는 동양방송설비 ⓒ백소애 2대째 이어오는 동양방송설비 서른 둘 성덕기 씨는 1973년 서부동 안동문화사 옆에서 '동양소리사'를 열었다. 고향 진주에 살다가 금성사에 취직하게 되면서 대구에 발령을 받게 된다. 이후 금성사를 퇴직하면서 안동에 자리 잡아 창업을 하게 된다. 47년 전 안동에 왔을 때는 집이 낙후됐고 기와집이 많았다. 지금의 목성동으로 옮긴 게 1978년이다. 처음에 상호는 '동양티브이'였다. ""금성사 나와서는 바로 티브이로 이름을 졌어요. 근데 당시 한글순화운동을 한다고 해가지고 이름을 소리사로 바꿨지. 근데 자(아들)가 맡으면서 소리사는 챙피하다꼬 다시 바꿨지요."" 정보통신 자격증을 딴 아들 성동철(47세) 씨가 대를 이어 가게를 이어가고 있다. 올해 79세가 되는 성덕기 사장은 일선에서 물러나 아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다. 정보통신 공사업체이고 학교방송장비를 주로 취급한다. 초창기에는 TV, 전자제품, 부품 수리 등에 1988년 안동유선방송이 생길 때는 가장 호황을 누렸다. ""유선방송 시조랬지. 호시절이랬어요. 전두환 시절이었는데 그때 젊은 사람들은 전혀 모르지. 장사가 잘됐어요. 국내 수요가 폭발해서 그 당시 티브이가 대구 밑에 수성교에 있다가 팔공산 올라가면서 경북지역에 급진적으로 수요가 늘어났거든. 난리 났었지. 당시엔 동네에 티비 한 대 사면 동네 애들 친척들 바글바글해서 티비 사는 걸 싫어했어요. 요새는 꺼뜩하면 살 수 있으이 쉽잖아요. 지금은 현상유지나 겨우 해요."" 아무 연고도 없는 안동에 자리 잡아 1남 2녀 낳고 지금의 집을 장만했다. 가게와 붙어있는 집을 장만했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 못한다. 막둥이 장남 아들이 대를 이어가니 마음도 든든하다. 1대 성덕기 사장 ⓒ백소애 ""안동 와서 이 집을 샀을 때가 제일 기뻤어요. 가정집이 여기 붙어 있어요. 셋집을 댕기다 보니까 다른 사람 보기에는 별거 없어 보여도 내한테는 이만한 궁전이 없어요. 처음에사 회사서 대구 파견 나온 인연으로 여 안동에 주저앉았지, 뭐. 큰 변화 없이 안동시민들 덕분에 잘 살았고 처음엔 운이 좋아서 장사도 곧잘 됐어요. 유선방송을 안동 가구 수의 80%를 우리가 가입시켰어요. 나중엔 못하게 됐지만."" 1979년 가게 앞에서 ⓒ성덕기 목성동 길가를 지나가도 아는 사람만 알지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는 업종이라고 한다. 특수 기능이라 필요한 사람만 오는 곳이지 일반 소매업을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부심도 대단한데 안동에서 자격증 갖고 일하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라 한다. 성동철 2대 사장이 전기통신 자격증을 가진 덕이다. ""아들놈이 어려서부터 컴퓨터를 되게 만졌어요. 프로그램을 했는데 요새 젊은이들은 모르겠지만 오디오 신호를 풀어서 게임을 했어요. 그런 쪽으로 재주가 좀 있었어요. 아무도 안 가르쳐줬는데… 공부를 몬하니까 그런 쪽으로 트였겠죠? 하하. 아들놈이 일은 곧잘 합니다."" 동양소리사 시절. 오른쪽이 2대 사장 성동철 씨의 6살 무렵. 어려서부터 덩치가 컸다고 한다.ⓒ성덕기 번화가인 목성동도 예전만 못한 느낌이다. 일단 가게 앞을 오가는 사람이 확연히 줄었다. ""우리가 여 이사 올 때 요 사거리 다리 밑으로는 다 하천이랬어요. 비 오면 붕어가 올라왔지요. 요 밑에는 신시장 넘어가는 다리가 있었고. 복개되고 포장되면서 목성교가 없어졌지. 복개된 지 한 30년 안됐겠습니까."" 유선방송 하다 뺏기고 대리점 하다가 뺏기고 잘될라치면 손안에서 빠져나갔다. 지금은 방송장비 쪽으로 주력하고 있다. 국번도 없는 전화번호 시절부터 같은 번호를 부여받아 지금까지 쭉 쓰고 있다. ""0303. 요 전화번호 딸라꼬 정말 애 먹었어요. 추첨을 했는데 한 5~60대 1이었나, 그 정도로 경쟁이 심했지요. 흑색전화 백색전화 하던 시절 시청홀에서 공식적인 추첨을 했어요."" 1980년대 안동댐에서 열린 불교 행사에서 ⓒ성덕기 사진 한 장 찍자는 말에 서로 찍으라고 미루던 부자(父子)는 출장 나가버린 아드님의 승리로 끝나버렸다. ""뭐 이런 얼굴 찍어 뭐할라니껴."" 목성동 거리를, 목성동 동네를 한결같이 47년 지켜온 '이런 얼굴'이다. 화산학교를 기억하는 화산인쇄사 인근의 경북인쇄사, 목성인쇄사처럼 인쇄사 말고도 시청 부근에는 많은 인쇄사가 있다. 그중 화산인쇄사는 목성동에 자리 잡아 상호만으로도 이곳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옛날 화산학원이 있었던 때를 보지는 못했지만 교육청도 있었고 남다른 장소잖니껴. 그래서 화산이라 이름 졌지요. 인제는 연세 많은 분 아니면 화산을 잘 몰래요."" 와룡이 고향인 지창호(65세) 사장의 말이다. 1980년 10월에 경북유교문화회관 맞은편 자리에 6~7년 있다가 지금의 목성동성당 입구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그때는 명함 가격이 2천원, 2천 5백 원 하던 시절이었다. 초창기엔 관공서 서식, 학교 문집, 청첩장 등을 주로 만들었는데 청타(한문타자)를 주로 사용했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에는 활자 자판을 사용하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컴퓨터가 있는 세상엔 모든 게 빠르고 편해졌지만 일은 그만큼 줄었다고. 목성동성당 입구 건너에 있는 화산인쇄사 ⓒ백소애 ""요새도 서식 좀 하고 스티커, 명함, 팸플릿 뭐 그렇게 하죠."" 지창호 사장의 기억 속 목성교는 길이가 5m 정도나 됐을까 폭도 그렇게 넓지 않은 2차선 교량이었다. ""요 목성교 삼각지대에 방공호가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민방위 훈련하던."" 연말에 많이 바쁜 시기지만 요즘엔 예전만 같지 않고 별다른 일이 없을 때면 고향 와룡에서 쉬엄쉬엄 농사를 짓고 있다. 화산인쇄사 지창호 사장 ⓒ백소애 ""평생, 거진 인쇄 일을 했다고 봐야지요."" 함께 나이 먹어가는 마스터기와 제판기 앞에서 너털웃음을 짓는 그다. 그리고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은 주로 이렇게 불린다. 사랑방, <안동>지, 사랑방 안동. '안동사람의 삶과 생각을 담는 책'이라는 캐치플레이즈로 46배판 40쪽 분량의 계간 무가지로 내다가 80쪽 분량의 격월간지로 발행하게 되었다. 책 이름은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책을 내는 곳은 '문화모임 사랑방'이었다가 '문화모임 안동'으로 개명을 하게 되었다. 1988년 창간하여 2014년 11,12월 종간호를 내며 문을 닫았으나 2015년 5,6월부터 책을 내는 곳이 '문화모임 안동'이 아닌 '도서출판 한빛'으로 바뀌면서 복간호를 내게 되었다. 당시 함께 했던 편집위원, 운영위원들은 새로운 운영진으로 모두 바뀌었다. 목성교사거리에 있던 권방사선과 4층 사무실에서 올려다보면 우뚝 보였던 목성동성당과 내려다본 삼각지에 서 있던 광고탑. 광고탑에는 주로 시민체전, 민속축제, 탈춤축제를 알리는 광고가 붙었고 복잡한 교통 흐름에 불법 주정차 단속 호루라기 소리는 4층까지 들리곤 했다. 내비게이션이 일상화되지 않던 시절에도 안동사람에겐 '목성교사거리 권방사선과 건물'이라고 하면 척하면 착 알아들었다. 간혹 타지에서 오는 사람들은 길을 몰라 헤매기 일쑤였다. 목성교 ⓒ백소애 사랑방 시절 '그의 원고가 도착하면 인쇄소에 넘겨도 된다'는 전설을 남겼던 안상학 시인의 시로 '목성동 연가'를 마무리한다. 이 시는 2014년 겨울 종간을 앞두고 그해 봄, 그에게 종간의 소회를 청탁한 시다. 청탁받은 사실을 까맣게 잊은 그가 전화로 다시 물어왔을 때는 마감일까지 채 일주일도 남지 않았을 때였다. 그러고 3일 후 그는 이 시를 보내왔는데,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상보다 너무 빨리 보내줘서 놀랐고 그 짧은 시간에 이토록 서정적인 시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시를 읽고 나는 잠시 먹먹해졌던 거 같다. 그건 종간 때까지 함께 한 편집장 김복영 방장님도 마찬가지였는데 좀체 칭찬에 인색한 분이 ""좋다.""고 하셨으니 그걸로 족했다. 2번 버스를 타고 내렸던 '목성동 연가'도 그렇게 끝이 났고 이제 새주소 이름 '퇴계로'가 자리한 동네가 되었다. 그러나 콘크리트 아래 어딘가에는 지금도 천리천, 세느강이 홀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글/ 백소애 sodoor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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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목성동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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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안동의 원도심 삼산동
- # 시내서 보시더 ""집이 어디~껴?"" ""시내래요."" ""어디서 만나면 좋을리껴?"" ""시내서 보시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 사이에는 지금도 통용되는 안동 표준말이다. ""시내래요.""에서 시내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기 전 안동시 전체를 의미한다. ""시내서 보시더.""에서 시내는 주로 안동시에서도 삼산동 일대 원도심을 지칭한다. 삼산동 이야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접근했다. 먼저 기록으로 존재하는 근대 삼산동을 찾아보았다. 근대라 함은 일제 강점기에서 6.25 전쟁 이전까지다. 내가 만난 사람들이 기억하는 안동 삼산동은 대부분 1960년대부터였다. 오래 그곳을 지키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더 늦기 전에 우리 시대 이야기를 기록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그래서 삼산동 근현대 이야기로 폭을 넓혔다. 네이버 지도에 나타난 삼산동 구역 드론으로 본 삼산동 (제공 구자을) 삼뭇들, 삼뭇돌, 삼산동 삼산동은 안동시보건소 앞에서 동쪽으로 삼뭇들, 장거리들이 있어서 삼뭇돌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태사묘 앞에서 내려오며 이 지역에 망호루, 제남루, 문루 등 누각이 서 있었다. 망호루 옆에 객사가 있고, 객사 앞에 내삼문이 보인다. 안동부 당시 안동의 수령이 제남루 앞에 많은 백성들을 모아 놓고 죄인을 다스려 백성들에게 일벌백계一罰百戒의 교훈을 일깨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종루가 있는 거리라 하여 종로라 불렀다. 현재 신한은행 앞 차 없는 거리에서 중앙파출소에 이르는 통로를 말한다. 2019 광복절 삼산동 문화의 거리 (서미숙) 3.1 독립운동의 성지, 삼산동 신한은행 앞 일제 강점기에는 신한은행 앞에서 옛 스쿨서점 방향으로 난 도로를 본정통으로 불렀다. 본정은 일제가 잠식한 거리, 일제의 경제 수탈기구가 모여 있었던 곳이다. 금융조합, 대구은행안동지점, 식산은행 등이 있었다. 삼산동 신한은행 앞은 3.1운동의 성지다. 신한은행 앞은 이상동이 혼자 만세운동을 했던 곳이다. 이상동은 석주 이상룡 동생이다. 임청각은 태어나면서부터 유학을 공부했던 집안이지만 그는 1906년 기독교를 수용했다. 이상동은 영양 석보면 지경리에 가서 주로 포교활동을 했다. 남좌현 지사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바로 인근 소산동에서 포교를 하고 교회를 지었던 분이다. 1919년 3. 13. 안동에서는 처음으로 만세를 불렀다. ""너희들은 멸망할 것이다. 우리는 독립할 것이다.""외치며 단독으로 만세운동을 했다. 종이로 태극기를 만들어 흔들었다. 기독교인들이 논의를 하다가 검거되는 바람에 단독으로 하게 되었다. 태극기를 종이에 그려서 흔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 다음 장날 3. 18일에 그곳에서 다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안동교회에서 태극기를 준비해서 기독교 인사들이 서쪽에서 들어오고, 송천동에서 동쪽 유림들이 동문동을 지나 물밀 듯이 들어오고, 북쪽에서는 예안에서 밤 세워 전날부터 걸어왔다. 그 전날 예안에서는 안동지역 대규모 3.1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곳이다. 현재 도산면 서부리 선성산에서 만세를 시작한다. 교회 쪽에서 오고, 면사무소 직원, 유림들이 각각 세 갈래로 모여서 대규모 만세운동을 했다. 구금자를 석방하라며 관청들이 몰려있던 지금의 웅부공원으로 가서 시위를 하다가 40여명의 순국자가 나오기도 했다. 일제는 일본국경일 때마다 일장기 계양을 강요했다. (사진으로 보는 근대안동. 서문당) 안동읍성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서문당) 삼산동을 지키는 사람들 동인당 한의원 (서미숙) #2대에 걸쳐 운영하는 동인당 한의원 동인당은 2대에 걸쳐 한의원을 운영중이다. 작고한 부친 권오규 원장은 1918년생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태화오거리 근처에서 한약방을 하다가 삼산동 우체국 건너편으로 이사했다. 권기종 원장 (1956년생)이 병원에 딸린 집에서 살 때 광제병원에서 태어났으니 그 이전에 삼산동 시대를 맞이한 셈이다. 부친은 88세로 생의 마지막 날까지 일을 하다가 밤에 돌아가셨다. 복 많은 어른이다. 슬하에 13남매를 두셨다. 7남 6녀 중에 위에 형들은 약사, 유도선수, 건축가가 되었다. 동인당 한의원 권기종 원장 (서미숙) 부친의 권유로 넷째인 기종 씨가 한의학을 공부하여 가업을 잇게 되었다. 늘 한 곳에 갇혀서 진료하니 좀 답답하다고 한다. 편안한 인상에 조용조용 말하는 분위기가 한의사에 어울리는 분이다. 2004년 12월까지만 해도 동인당 한약방 1층은 부친이, 2층은 아들이 각각 진료를 봤다. 부친의 후광에 가려져 빛을 못 보던 시절도 있었지만, 침은 아들이 책임졌다. 지금은 경안약국 자리까지 매입하여 한의원을 확장 했지만, 찾는 환자 수는 예전 같지 않다. 요즘 비싼 인건비를 감안하면 환자가 많아도 감당하기 어렵고, 혼자 진료하기엔 적정수준이라니 다행이다. ""막상 공부해보니 한의학은 매력적인 학문이다. 다만 정부에서 뒷받침이 안 되고, 양의사들 파워가 세어서 기를 못 펴고 있는 실정이지요. 한방을 모르는 양방 의사들은 무시하고 미신화하니까. 심지어 젊은 사람들은 한약 먹으면 간이 나빠진다는 편견을 갖고 터부시한다. 옛날부터 한약을 먹어온 사람이 자식 데리고 꾸준히 찾는다."" 한약은 양약에 비해 비용부담이 크기에 의료보험제도 개선이 필요한 실정이다. 현실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삼산동 터줏대감 동인당이 오래 그 자리를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고한 부친 권오규 원장이 붓으로 쓴 처방전 ⓒ서미숙 작고한 부친 권오규 원장은 처방전을 붓으로 썼다. 지금도 부친이 쓴 처방전을 보관중이다. 부친이 사용하던 오래된 약장과 아들(현재 원장) 약장이 나란히 자리한다. 오래된 약장에 지금도 하수오 등 약재를 보관한다.슬하에 아들 형제를 두었지만 한의학을 하라고 권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며느리나 친척 중에서라도 가업을 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권기종 원장은 중학교 때까지 삼산동 동인당 한의원 1층에서 살았다. 고교와 대학시절은 서울로 갔지만 졸업 후에 다시 삼산동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용상동에 거주하지만 근무시간은 내내 삼산동에서 보낸다. 부친이 쓰던 약장 (서미숙) 동인당 한약방 앞이 예전엔 비포장 도로였다. 소달구지가 지나다니고, 소 지르메에 똥통을 싣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길에 소똥이 밟히기도 하고, 가끔 말도 다녔다. 지게에 솔잎을 지고 팔러 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갓 쓰고 한복 입은 어른들이 많이 지나다녔다. 길가에 리어카 짐꾼들이 햇볕을 쬐며 쭉 늘어서 있었다. 당시 짐 싣던 분이 요즘 동인당에 오기도 한다. 그는 1968년 5월 18일 밤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안동시 운흥동 <문화극장>에 수류탄 폭발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휴가 나온 육군 하사가 애인의 변심에 앙심을 품고 극장에 수류탄을 투척하여 수십 명의 사장자를 내었다. 즉사 5명 부상자 44명이나 되는 대형 사고였다. 동인당 바로 옆이 시내 유일한 외과였던 <광제병원>으로 가는 작은 골목이었다. 환자를 업고 바삐 가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경회루가 있던 자리는 현재 윤가네부대찌개 ⓒ서미숙동인당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경안약국>, <노라 양장점>, <창신당>,그리고 코너가 구멍가게였다. 구멍가게 옆에 당시 유명한 <8.15제과점>이었다. 조흥은행 옆 왼쪽코너에 <클레오파트라> 옷가게, 다음이 <스쿨서점>, 학용품을 팔던 <광문사>, 코너에 <영창피아노>가 있었다. 스쿨서점 맞은편에는 <수미사>란 양복점이 있었다. 동인당 오른쪽 코너엔 철물점 <대창사>가 있었다. 대창사 옆 골목 안에는 유명한 중국 요리집 <경회루>가 자리했다. 당시 외식이라면 <경회루>에 가서 짜장면을 먹거나 잔칫날 구 시장 <해동식당>에서 불고기를 먹었다. 동인당 바로 맞은 편에는 <안동우체국>이었다. 지금은 그 자리가 삼산동 우체국이다. 삼산동 우체국 옆 코너엔 일식요리점 <공주식당>이었다. 공주식당이 사라지고 교학사가 들어섰다가 최근 몇 년째 가게가 비어있다. -삼산동에 오래 살아보니 어떠신지요? ""예전에 구시장이 번화할 땐 시장 가깝고 편리했는데 요즘은 외곽지로 도시가 확장되면서 다소 불편해졌다."" 그에게 삼산동은 고향이자 안식처이다. 어릴 적 눈이 오면 눈 속에 연탄재 넣어 친구들과 눈싸움하던 추억이 서린 곳이다. 그는 삼산동을 떠나면 불안할 정도로 삼산동 토박이다. #일공공일 김옥현 ""그때만 해도 시계기술은 우주과학만큼이나 대단하게 생각했던 시절이었죠."" 김옥현 사장(69세)은 예천 보문이 고향이다. 열여덟에 시계기술을 배우러 안동시 삼산동 <남방상사>를 찾았다. 신한은행에서 서쪽 통로 당시 <광문사> 맞은편에 가게가 있었다. 당시엔 시계와 안경을 함께 취급했다. 안경과 인연이 되려고 그랬을까. 시계 배울 자리가 없어 안경을 익혔다. ""처음에 안경기술을 배운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시시하게 생각했다. 그런 걸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1968년 3월, 현재 일공안경 자리에 있던 남방상사에서 김옥현이 렌즈메터기로 안경도수를측정하는 중이다. 가게주인 아우는 신시장에 <남방시계점>을 열고, 형님인 민병필씨가 지금 일공안경점 자리로 옮겨서 <남방안경점>을 했다. 그때 남방안경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남방 안경점에서 일하던 시절의 김옥한 (제공 김옥한) 처음엔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월급 600원을 받았다. 6개월 후에 800원으로 인상되었다가 그 뒤에 1,300원을 받았다. 옷이 귀해서 주인이 입던 옷을 얻어 입었다. 명절이 되면 티셔츠를 선물 받기도 했다. 그렇게 경력이 쌓였다. 그간 모은 돈과 본가에서 논을 팔고 소를 팔아 지원을 해주었다. 당시 소 40마리 시세로 <남방안경점>을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스물다섯에 가게주인이 되었다. 전 주인이 <남방안경점> 상호를 못 쓰게 했다. 아우가 하던 <남방시계점>에서 안경을 취급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동방안경>으로 바꾸었다. 그 자리에서 묵묵히 외길을 걸어왔다. 정밀한 기기를 다루는 만큼 그는 세심하고 철저하다. 업무일지는 기본이고 개인 일기도 날마다 쓴다. 업무일지 여백에 안동 사투리 메모가 빼곡하다. 안경 맞추러 온 고객들이 일상으로 쓰던 말을 바쁜 일과 중에도 꼼꼼히 기록해놓았다. 개인정보가 담겨 일지 원본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재미있는 사투리 몇 개를 옮겨본다. ""안경 쓰면 첩에 집에 간 것 긋다."" ""내가 87이래. 나이 많은데 전좌 보고 잘 복키는거 ..."" ""안경이 작꾸 내리왓사"" ""호부레비 뒤따라 옥까봐 식겁했다"" ""옛날에 여무까시라고 백내장 비슷한거 있었는데 걷어내는 의원을 만나야 되는데..."" ""얄브제라? 했다 잘 안보이드라"" ""본방치기 한 동네 남자와 결혼"" ""마커 18금이껴"" 김사장은 사라져가는 것에 관심이 많다. 오래된 책과 사진도 수집한다. 지금까지 수집한 스크랩북이 수십 권이라 한다. 보여준 파일에는 안경 쓴 유명인들 사진이 많다. 정작 그는 사진 찍히는 걸 사양했다. 2019년 11월 현재 일공공일 안경점 (서미숙) 프랜차이즈 바람은 안경이라고 예외가 아닌가 보다. 2002년1월 9일 상호를 <일공공일>로 바꾸었다. 일공공일은 전주에 본부가 있으며 전국적으로 400개 이상 가맹점을 둔 업체다. 현재 가게 면적은 예전의 다섯 배 크기로 늘어났다. 김사장 외에 직원이 세 명이다. 43년째 함께 일하는 직원이 있는가 하면, 딸 김남씨도 안경학을 전공하고 합류했다. 넷째 아들도 안경학과 재학 중에 군에 입대했다니 얼마나 든든할까. 앞으로 자녀들이 가업을 이어갈 테니 <일공공일>은 삼산동에서 건재할 것이다. # 안동우체사-부산우편국 안동출장소-안동우편국-안동우체국-안동우체국 삼산동 분점-삼산동우체국 왼쪽 삼산동우체국ⓒ서미숙 휴대전화와 이메일과 택배가 없던 시절, 우체국은 우리 생활과 더 밀착되어 있었다. 군대에서도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요즘 청춘들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전화가 없는 집이 많았다. 시외전화를 하려면 우체국이나 전화국에서 시외전화를 신청하고 상대방과 연결시켜 주는 교환원이 있었다. 펜팔이 유행했던 그 시절, 잡지에는 펜팔을 원하는 주소가 즐비했다. 밤새 손편지를 써서 빨간우체통에 넣던 기억 하나쯤은 묻어둔 장년층이 많을 것이다. 우편 집배원이 빨간자전거를 타고 집집마다 배달을 다녔다. 편지를 부치고 답장을 기다리며 설렘 가득하던 그 시절이 그립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는 연말연시가 되면 성탄카드와 연하장을 부치러 오는 사람들로 우체국이 성시를 이루었다. 요즘 우체국은 편지보다 택배와 금융기관으로 무게중심이 옮겨졌다. 추석과 음력 설날 무렵이면 택배 선물배달로 더 분주하다. 안동의 체신업무는 1895년 12월 07일 <안동우체사>로 출발했다. 1902년 6월 10일 <부산우편국 안동출장소>로 바뀌었고, 1907년 6월 12일 <안동우편국>으로 개칭했다가 1950년 1월 12일 <안동우체국>이 되었다. 과거엔 안동우체국이 지금의 삼산동 우체국 자리에 있었다. 1984년 안동우체국이 당북동으로 이전하고 안동우체국 삼산동 분점이 되었다가 이듬해 <삼산동 우체국>으로 개칭했다. # 대구은행 안동지점-조흥은행-신한은행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핵심 상권에 금융기관이 자리한다. 일찍이 삼산동엔 신한은행을 중심으로 무진회사(현재 삼산동 우체국 자리)란 일제의 고리대금업체가 있었다. 1916년 4월22일 안동군 부내면 동부동에서 주식회사 대구은행 안동지점으로 개점했다. 1941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동군 안동읍 본정 3정목 114로 주소가 변경되었다. 1943년 한성은행과 동일은행의 합병으로 인하여 주식회사 조흥은행 안동지점으로 되었다. 1947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동군 안동읍 삼산동 114로 주소가 변경되면서 삼산동이란 동명을 쓰게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안동 지역에 금융기관의 각 지점들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1973년 안동농업협동조합이 업무를 시작했다. 사진으로 보는 근대 한국, 서문당 조흥은행 1989년 안동법원 출장소 개점홍보 현수막을 내걸었다.(제공 조흥은행) 1950년 7월29일, 6.25 전쟁으로 일시 휴업을 했다. 1950년 11월 11일, 원점포는 소실되고 동문동 446-3 지점장 사택에서 영업을 재개했다. 1951년 삼산동 114로 신축이전한 건물이 오늘에 이른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1963년 경상북도 안동시 삼산동 114로 주소가 변경되었다. 도로명 주소 도입으로 안동시 중앙로 41이 현주소이다. 이렇듯 신한은행은 우리나라 근대사와 맥을 같이했다. 신한은행 안동지점 2019년 11월 20일 (서미숙) #삼산동 성결교회 성결교회는 2019년에 66주년을 맞이했다. 1953년 10월 20일 교단 십자군 제 3전도대에 의해 안동시 삼산동 136번지에서 천막을 치고 장기 부흥 중에 본부의 보조로 192평의 대지를 구입하고 설립한 교회이다. 설립유공자는 천세광목사, 이성봉 목사이다. (출처: 사진으로 보는 안동 성결교회 60년사) 안동성결교회 (출처 : 사진으로 보는 안동성결교회 60년사) 66주년 맞이한 안동성결교회 (서미숙) # 안동에 칼라사진 시대를 연 성광칼라 성광칼라는 삼산동의 아이콘이다. 만주에서 사진관을 하던 형 이인홍의 영향으로 이인호가 1963년 안동에서 처음으로 <성광사>란 사진관을 열었다. 초기에는 사진 재료도 팔았다. 이인호 사장은 자식이 없었다. 성광사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서대교 씨가 양자 들다시피 했다. 1970년대에 서대교 씨가 인수하여 <성광칼라>로 상호를 바꾸었다. 1980년부터 성광칼라 사진 기사이자 책임자로 근무했던 남성진 씨가 1999년에 인수하여 23년째 3대 대표이다. 현재 아들이 사진영상학과를 졸업하고 4대를 이을 준비를 하며 출근 중이다. 성광칼라는 경북 북부지역 처음으로 칼라 현상을 시작했다. 아날로그로 암실 작업을 하던 시절에는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 할 정도였다. 1990년대 후반 남대표가 인수받을 무렵이 성광칼라 전성기였다. 졸업시즌이면 필름 사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과자 사놓고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차츰 필름이 자취를 감추고 디지털시대로 바뀌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작품사진이나 특별한 용도가 아니면, 사진을 파일로 보관하고 모니터에서 보는 걸로 만족하는 추세이다. 서사장이 남사장 외가 쪽 친척이다. 칼라사진을 처음 현상한 성광사 (출처 : 사진으로 보는 20세기 안동의 모습) 3대를 이어가는 성광칼라 (제공 성광칼라) -삼산동에 살아보니 어떠신지요? ""옛날에는 삼산동이 최고 상권이었는데, 시내가 죽어가니 많이 처졌지요."" -앞으로 삼산동이 어떻게 되길 바라는지요? ""주거지역 지어주고, 주민이 있어야 장사가 되지, 외지 사람 상대로만 장사하면 상권에도 신경을 덜 쓰게 된다. 상권이 살아나려면 인구가 늘어나고 지속적으로 구도심을 살려줘야 한다."" 성광칼라는 점포와 주택이 안쪽으로 연결되어 있다. 상주하는 주민이다 보니 동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삼산동이 옛날의 영화를 다시 찾을 해법은 없는 걸까? 삼산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삼산동 고우네 의상실 권오걸 사장 #삼산동의 산 역사 권오걸 권오걸 씨는 이천동 출신이다. 석수암 앞에서 살았는데 농사가 힘들어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서울에 가서 오전엔 라사라, 국제복장, 오후엔 노라노 식으로 치열하게 양장 기술을 배웠다. 큰누이가 경비를 대주었다. 디자인공부, 재단을 배우고 이대 앞에서 재단사 보조를 거쳐 고향으로 내려왔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의상실에서 옷을 맞춰 입었다. 1970년대 안동에 의상실이 120여개나 있었다고 한다. 그는 19세 때 삼산동 우체국 앞 <노라 의상실>을 거쳐 1972년에 <유 의상실>로 내 가게를 시작했다. 중고생들의 교복을 주로 만들었다. 까다로운 여학생들의 비위를 맞춰가면서 교복 잘하는 집으로 소문이 났다. <하얀집> 재단사, <동아양장점> 미싱 재봉도 했다. 1976년부터 삼산동 삼방사 옆에서 <고우네 의상실>을 열었다. 만19년간 호시절이었다. 안동 시내 멋쟁이들은 대부분 그가 만든 옷을 입어봤을 것이다. 나 또한 결혼 예복으로 만든 검은 정장은 아직도 갖고 있다. 논노, 코롱, 기성복 나오면서 맞춤옷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때부터 기성복으로 전환했다. 맞춤을 하다가 기성복을 팔기만 하니까 처음에는 무지 수월했다. <헌트><쉐인>< 휠라클래식> 순으로 품목을 바꾸어가며 삼산동에서 오래 버티었다. 삼산동에서 집을 팔든 임대를 하든 권사장 한테 자문을 구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삼산동의 산 역사이다. 덕분에 어디 가서 누굴 만나면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는지도 꿰고 있었다. <고우네 의상실> 시절 권오걸씨는 옥류관 자리에 살았다. 그전에는 옥류관 자리가 ‘참사랑’예식장이었다. 이웃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보고 들은 이야기가 있겠다 싶었다. ""현재 안동호텔과 안동관 자리에 광제병원이 있었다. 허박사가 병원을 하셔가지고 재산을 많이 일구었다. 자제들도 잘 되어 국제변호사도 있고, 교수도 있고, 의사도 있다. 허동섭 씨가 몸이 아팠어요. 일본인가 미국인가 가서 치료를 하고 제2 인생을 사시니까, 자제들도 잘 사니까 어른 마음대로 하라고 해서 장학재단을 만들었다. 혼자 안동호텔 2층에 수발하는 사람 두고 기거하시다가 98세까지 살다가 돌아가셨다."" # 광제병원과 호연장학회 1960년대 광제병원 (호연장학회 제공) 생전의 허동섭 박사 (호연장학회 제공) 광제병원 설립자는 의학박사 허동섭 許東燮이다. 원래 일본사람이 지어서 사용하던 2 층 적산가옥이었다. 한국전쟁 때에는 미 군정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휴전 직후에 허박사가 불하받아서 개보수하여 병원을 그 자리에 개원하였다. 한국전쟁 직후 1953 년경 부터 1978 년 경까지 운영했으며, 개설된 진료과는 외과, 산부인과였다. 특이한 점은 일찍이 X선 장비도 도입하여 골절 등의 정형외과 진료도 했다는 것. 입원실이 20에서 30실 정도 규모였다. 병원 입구는 지금 삼산 우체국 앞 도로에서 안동호텔로 들어오는 쪽에 있었다. 1960년대 광제병원 의사와 간호사(호연장학회 제공) 1985 년 5 월, 유지를 받들어 재단법인 호연 장학회를 설립했다. 초기에는 고등학생과 대학생 반반 정도, 지원대상은 안동시 관내에 있는 고등학교로 부터 졸업생 중 대상자를 추천 받아서 면접을 통하여 선발한다. 지금은 한해에 5 ~10 명 정도 대학생 중심으로 지원한다. 장학금 재원은 허박사께서 그간 운영하시던 광제병원 건물을 헐고 신축한 안동호텔 건물로부터 나오는 임대료와 기금에서 나오는 이자 수입을 주재원으로 한다. 광제병원 가족들 1060년대 (호연장학회 제공) 옛 광재병원자리 안동호텔 (서미숙) #옛 <삼방사>주인 김건종 1949년생 김건종 씨는 의성김씨 집성촌 내앞 마을이 고향이다. 8남 2녀 중, 9남매가 모두 서울에 산다. 셋째인 그이만 안동에 살며 선산을 지킨다. 그와 삼산동은 일찍부터 인연이 깊다. 그의 선친(고 김시박)이 삼산동 삼방사 자리에 일찍이 터를 잡았다. 6.25 사변 후 1950년대 초반 선친이 건물을 매입하여 <상공주식회사>를 설립해서 당시 사옥으로 사용했다. 인쇄업을 하다가, 문경 시멘트 경북북부지구 총판대표이사였던 부친은 2대, 3대 무소속 경북도의원을 지냈다. 부친과 삼촌 김경종이 <상공인쇄소>를 운영했다. 통학하기 힘든 시절이라 중학교 때부터 안동 시내로 왔다. 삼방사 자리 뒤에 한옥이 있었다. 당시는 그 한옥이 삼촌댁이여서 자취를 하면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훗날 삼촌으로부터 한옥을 매입하여 결혼 후 그 집에서 살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삼산동 140 ? 5, <상공주식회사>가 있었던 부친의 건물에 1973. 3. 3. <삼방사>를 개업했다. 1973년부터 2000년까지 29년간 삼방사란 문구점을 운영했다. -문구점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네요. ""아버지가 안동에서 의성 김가 우리 일가가 하지 않는 업종을 찾아봐라. 찾아보니 다 있는데 문방구가 없어. 우리 조상이 선비인데 학자들한테 필요한 게 지필묵이다. 그래서 문방구를 시작하게 되었지요."" 한편 김건종 씨는 (77~91) 국정교과서주식회사 안동공급소장을 맡아 일년에 100만권씩 공급하느라 갈빗대가 세 대 부러질 정도로 힘들었다. 무시로 (가마니로 포장된 = 허적대기 포장)포장된 교과서는 당시는 박봉의 봉급과 공급 경비를 받았다. 학자는 못 되었지만 학생들에게 필요한 공책 팔고 책 나르는 일을 했다. 삼방사 한옥에서 살던 시절 김건종 가족과 처남 김영훈 (사진제공 김건종) 연탄난로를 피우던 초창기 삼방사 내부, 사진 속 남매는 성인이 되었다. 아들은 지금 삼산동 문화의 거리 3층에서 만화카페 벌툰을 운영한다. 80년대 삼방사 앞에서 기념촬영한 막내동생 김순종 (사진제공 김건종) 작은 문구점으로 시작해서 1984년 부친으로부터 그 건물을 구입했다. 33세에 건물주가 되어 건물을 신축했다. 삼방사를 개업하고 나서 문구점 관리는 부인이 주로 맡다시피 했다. 이후 삼산동의 <마켓 21>부터 <베스킨라빈스> <CNA (상공인쇄소 자리)> 까지 건물을 사들여 임대업을 한다. 아들이 건물관리를 하고 노후를 보내며 뒤를 봐주는 편이다. 1988년 삼방사 건물 개축당시 모습, 삼방사 옆에 고우네 의상실, 톰보이, 동방당 안경점 간판이 보인다. (사진제공 김건종) 도시재생사업으로 환경개선을 한 문화의 거리 ⓒ서미숙 천만광광객 유치를 위한 플래시몹 (서미숙) ""삼산동이 다운타운이 된 것은 교학사 자리, 농협지부 자리에 예전에 버스터미널이 있어서였다.""고 김건종씨는 회고했다. 문화의 거리가 차 없는 거리가 되면서 인근 상인들은 오히려 피해를 보는 쪽이 많다고 한다. 차가 지나다니지 않는 거리는 접근성이 떨어져 매출에는 지장이 있는 모양이다. 김건종씨에게 삼산동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우마차가 다닐 때 소 엉덩이에 소똥 떨어질까 봐 가마니를 받히고 다녔다. 삼방사 맞은편 가게였던 대구전기 함동훈 씨 부친이 먼지 날지 말라고 날마다 길에 물을 뿌렸다.""고 한다. # 삼산동에서 멋 부리고 놀았던 이상호 탈 쓰나 안쓰나 똑같다는 이상호 선생 (서미숙) 사람의 끼는 타고 나는 모양이다. 인간문화재(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 69호 백정 역) 이상호 씨는 삼산동에 대한 추억이 많다. 1945년 해방동이다. 남부동에서 태어났지만 주로 삼산동에서 놀았다. ""다섯 살 때부터 구두 신고 가죽가방 메고 남부동에서 삼산동을 거쳐 대건 유치원에 다녔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이 목성동 성당에 신부님으로 오셨다. 안동초등학교 시절부터 연극도 하고 끼가 다분했다."" 아들 셋 낳아 놓고 아버지는 6. 25 때 좌익으로 몰려 경찰에 잡혀가서 돌아가셨다. 연좌제 때문에 공부할 생각도 안했다. ""예전에는 사장 뚝을 중심으로 해서 구시장 쪽에 사는 아들은 멋쟁이고, 맘보바지, 나팔바지입고 살았고, 야바위꾼 모이는 거는 베전 골목 부근에 많이 모였지."" 안동중학교에서 열린 시민체육대회에서 트위스트 추던 이상호, 사진 왼쪽 첫번째 경안고등학교 시절에는 양복점에서 제일모직 바지 맞춰 입고, 흰 운동화 대신 백구두를 신고 폼잡았다. 당시 삼산동에는 구두점이 많았다. ""'국제양화점'이 중소기업은행 앞에 있다가 삼방사 옆으로 옮겼다. 김창현이 서울 가서 수제구두 만드는 기술을 배워왔는데 안동 시내 건달들은 국제양화점 구두를 다 신었다."" 삼산동 조흥 은행 뒤에는 <경일식당>이란 한식집이 있었다. 그곳은 이상호 선생 조모님 언니가 운영했는데 갈비탕을 주로했다. ""세멘 거랑이라 그랬어요. 안동시청 앞에서 어개골까지 흘러가는 하천을 안동의 세느강이라고 했지요. 맘모스 뒤쪽으로 해서 남부동 우리 집(최유근 안과 맞은편, 당시 대동식당) 앞으로 흘러갔죠. 비오면 반도 가지고 고기도 잡고 그랬어요."" ""6.25사변 전에는 농협에서부터 대구은행 뒷길로 해서 맘모스제과 뒤쪽에 큰 거랑이 홈플러스 앞쪽으로 흘러갔다. 농협자리가 버스 터미널인데 삼환여객 하나 뿐이었다. 삼환여객 버스도 우리집(남부동 최유근안과 맞은편으로 당시 대동식당 ) 앞으로 해서 지금 홈플러스(당시 철도국) 앞을 거쳐갔다. 오가다로 원동기 돌리듯이 손으로 돌려서 시동을 걸었다."" 버스터미널은 중소기업은행 자리로 이전했다가 홈플러스 자리를 거쳐 현재 송현시대를 맞이했다. <대구전기> 옆에는 70년대 중반 안동에서 유명한 <8.15제과점>이 있었다. 맘모스 제과점이 생기기 전에 중고생들의 데이트장소였다. 80년대 중반에는 <대구전기> 옆에 숙녀복과 잡화를 주로 취급하는 <신라백화점>이 있었다. 삼산동 대구전기상회 4층서 1970년 9.12 개국한 안동문화방송(출처:안동문화방송 30년사) 1970년 9월 12일, 안동시 삼산동 99번지 대구전기상회(현재 중앙시네마 맞은편) 건물 4층에서 안동방송이 첫 전파를 발사했다. 처음에는 AM 라디오 중심이었다. 당시 2,3,4층을 임대해서 5년간 방송업무를 수행했다. 1971년 한국문화방송의 가맹사가 되면서 안동문화방송으로 상호를 바꿨다. 1975년 9월부터 남문동 145-3, 대구은행 건물 3층은 1985년 태화동 신 사옥 으로 옮길 때까지 약 10년 가까이 MBC의 애환이 서린곳이다. 1980년 언론 통폐합과 함께 ㈜문화방송의 계열사로 변경되면서 오늘에 이른다. (출처 : 안동문화방송 30년사) 1970년대 후반 '별이 빛나는 밤에'란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이 인기 있었다. 시그널 뮤직만 나와도 가슴 떨리던 시절이었다. 이상호는 1980년경 안동 MBC 1기 전속가수로 활동했다. 돌아가는 삼각지, 비 내리는 명동거리 등 배호 노래를 주로 불렀다. MBC에서 성우를 해보라고 해서 매주 일요일 아침 가십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광복 20년 연속 소설 낭독도 했다. mbc 가수 시절 희방사 야유회. 왼쪽 기마 앞에 선 이상호와 안동 MBC상징(출처:안동문화방송 30년사) 군대에서도 연예단 소속이었다. 1972년부터 탈춤을 시작한 그는 타고 난 춤꾼이다. ""춤 춰가지고 디다는 소리는 안 한다. 안동 친구들이 날 보고 저 새끼 돌았는 놈이라 그래. 가수나 연예인 하면 돈이나 벌겐데. 재주도 좋은 놈이 저거 한다고."" 돌았다 카던 말던 내 혼자 끝까지 해보면 안되겠나 싶었다. 하도 그카니까 나중에 친구들이 그래. ""니는 탈 쓰나 안쓰나 똑같다."" #삼산동에 활기를 불러오는 사람들 예술영화 전용관 중앙시네마 (서미숙) 예술영화 전용관 중앙시네마 중앙시네마는 삼산동 문화의 거리 자존심이다. 예술영화전용관으로 안동 사람들의 문화 갈증을 해소해주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이다. 2000년 8월에 정사영씨가 개관한 극장을 2014년 2월부터 한태희 씨가 인수했다.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바뀐 건 2009년 부터이다. <워낭소리>가 인기를 끌면서 사람들이 독립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독립영화 살리고 영화진흥공사를 영화진흥위원회로 바꾸면서 독립영화관 지원사업, 예술영화 지원사업이 진행되었다. 한 대표는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충청도 보은에서 자랐다. 청주에서 살다가 1994년 KT 발령을 받고 안동에 정착하게 되었다. 2009년 12월 퇴직하고 시민단체 활동하면서 중앙시네마를 알게 되었다. 당시 공동체 영화, 시류에 민감한 영화 같이 보기 운동을 하면서 <우리 학교> <서해 여기>등 북한 관련 영화도 상영했다. 전 주인은 중앙시네마와 구시장 안에 진성극장을 같이 운영했다. 2004년 안동에 멀티플랙스가 들어오면서 단관영화관은 문을 닫는 시점이었다. 중앙시네마 내부 (사진제공 중앙시네마) ""안될 줄 알았어요. 그래도 해야겠다. 예술영화 전용관이라 예술영화지원사업이 있으니까 이런저런 시도를 해볼 수도 있고, 큰 이득은 없지만, 손해 보지 않고 현상 유지할 수 있으면 의미 있는 일이란 생각으로 시작했지요."" ""박근혜 정부 초기에 이명박 정부의 <천안함 프로젝트>란 독립영화를 상영 못하게 하는데 했어요. 그랬더니 ""지원 사업에서 탈락되어 2014년 첫해엔 손해를 봤죠. 2,500만원 사비가 들어갔어요. 2015년 <다이빙 벨> 상영으로 예술영화 전용관 지원 사업이 없어졌어요. 그러자 왜곡 현상이 생긴 것이죠. 영화 상영할 곳이 없어지자 2016년 유통배급 지원 사업으로 계약을 갱신했습니다."" ""2017년 정부 바뀌고 문화정책이 다시 안정적으로 돌아간 셈이죠. 문 닫을까 하던 중 사회적기업 운영으로 가기 전 단계인 사회적 기업 육성가 사업이 생겨 여기까지 오게 되었죠."" 최근 예술영화전용관운영 지원 사업으로 감독을 초대하고, 테마별 영화상영과 기획전, 시나리오 입문과정도 해왔다. 내년에는 영화제작사업 일환으로 영화비평, 단편영화 제작교육 등 계획 중이다. 좋은 영화를 상영하는 예술영화 전용관이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늘 감사한다. 아날로그 시대에 사용하던 영사기는 장식품으로 밀려났다. ⓒ서미숙 #집밥이 땡기는 날은 태함식당 골부리국 할머니의 손맛으로 만든 밑반찬과 골부리국 (서미숙) <태함식당>은 집밥이 땡기는 날 가는 단골집이다. 중앙파출소에서 뒤에서 임치순 할머니가 53세부터 19년째 운영 중이다. 한결같이 단아한 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맵짜다. ""내 금소 동네서 컸잖니껴. 안동포 나는 동네. 어릴 적에는 골부리 넣고 된장도 찌져 먹고, 친정엄마한테 골부리국 끓이는 거 배웠지요. 처음에는 소머리 곰탕도 하고 닭 볶아주고 해 보이 술집도 밥집도 아닌 것이 어중간해. 석 달 만에 치워 부랬어. 그때부터 골부리국 한 가지만 해."" 반찬도 모두 할머니가 손수 만든다. 정갈한 밑반찬과 계절별로 나물 반찬을 준비한다. 사계절 빠지지 않는 매뉴가 콩가루 무쳐 찐 부추 무침이다. 토속적인 맛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점심시간에는 인근 직장인들이 몰려온다. 입소문을 듣고 할머니들이 곗날에 찾기도 한다. 서른둘에 혼자되어 아이들 키우느라 힘들었다. 안동역 앞에서 여인숙을 했다. 돈 빌려줬다가 떼이는 바람에 신경 써서 큰 병을 얻었다. 쉰한 살에 직장암 수술을 받았다. 병원에서 원장이 움직이라 해서 태함식당을 시작했다. 그때 내 죽었다 생각하고 골부리국 가격을 한 번도 올리지 않았다. 골부리국전문 태함식당 (서미숙) 가격이 착한 대신에 한 그릇은 팔지 않는다. 둘 이상은 함께 가야 할머니도 상 차린 보람이 있다니 기억할 일이다. 막내아들(43세)이 요즘 와서 도와준다. 앞으로 가게를 이어받으려고 배우는 중이다. ""아침 7시 전에 나와서 준비하면 11시 반부터 점심 장사를 해요. 골부리국 떨어지면 문 닫아 부래. 요즘 국을 사가는 사람이 얼매나 많은 동, 저녁에는 일찍 문 닫는 날이 많애. 일요일도 쉬지 않고 문을 연다."" 주방에 데쳐놓은 얼갈이배추와 파가 선명한 녹색이다. 거기에 부추와 골부리를 넣고 밀가루를 풀어 걸쭉한 맛을 낸다. 할머니는 음식은 재료가 좋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쪼록 대를 이어 삼산동 맛집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오래 해야 된다고 손님들이 그꾸 나싸. 6시 내 고향에도 세 번이나 소개하라 그는 데 아(안) 했어."" #삼산동 유감 문화의 거리에서 서점이 사라지다 한 때 삼산동에는 조흥은행(현 신한은행)을 중심으로 <스쿨서점>과 <교학사>가 나란히 같은 통로에 있었다. 스쿨서점이 삼산동 중앙파출소 옆 버스승강장 앞으로 옮겼다가 2011년 끝내 문을 닫았다. 그때만 해도 충격이었다. 시내에 나가면 가끔 들러 잡지라도 뒤적이던 아지트가 사라져 몹시 허전했다. 50년 전통의 서점, 교학사도 어느 날 삼산동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어떤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교학사 서점 자리는 몇 년째 비워져 있다. 새로 옮겨 간 곳은 남부동으로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다. 교학사는 55년째다. 장사숙 사장이 1965년 예천에서 창업해서 하다가 안동으로 와서 47년 하셨다. 장남 장우영이 5년 가까이 부친을 도왔다. 장사숙 사장이 돌아가시고 2010.11부터 처남 손질걸 씨가 인수했다. 2018.6월 남부동으로 이사했다. 문화의 거리에서 50년이 넘은 서점이 사라지는데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11월 11일 서점의 날이다. 제1회 때 그는 문 닫아야 할 서점을 살리고, 지역 서점을 지켰다고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받았다. 몇 년째 비어있는 교학사 서점 자리 (서미숙) 서점이 온라인 업체에 이길 수 없다. 책방 하나 없는 도시는 너무 삭막하다. 젊은 친구들이 책을 너무 안 읽는다. 책 사러 오는 분들은 연세가 있고 책 읽는 게 몸에 밴 분들이다. 교학사 손대표는 ""오십 년이 넘는 가게를 찾아서 스토리를 만들면 자부심을 가지게 되고 시에서는 표시를 해주자.""고 제안했다. 몇 집 건너 빈 점포 우려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삼산동을 돌다 보니 도심공동화가 피부로 느껴진다. 삼산동 핵심 신한은행 앞에 세 코너가 몽땅 비었다. 가게 유리마다 임대문의만 잔뜩 붙어 있다. 어쩌다가도 아니고 몇 집 건너이다. 삼산동 전체를 파악하면 숫자가 꽤 된다. 현재 가게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지금 있는 사람들도 전부 나가고 싶을 걸요."" 도시재생사업을 한답시고 혈세를 쏟아부어도 효과는 미미하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러다가 유령의 도시가 될까 두렵다. 임대ⓒ서미숙 임대ⓒ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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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안동의 원도심 삼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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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안동의 북쪽 관문 북문동을 돌아보다
- 태사묘와 장터가 있는 북문동 골목의 시간 안막동에서부터 천리천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들던 물길이 지나고, 안동읍성 북문 문루가 있었고, 고려의 흔적이 새겨진 태사묘와 장터가 있는 북문동 골목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다시 돌아본 북문동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안동시 북문동 지적도. 북문시장이 들어서기 전으로 북문동 구역과 태사묘, 자혜의원(현 안동의료원), 안동시청(현 안동시보건소)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안막동에서부터 신안동, 북문동을 지나 천리동으로 흘러내려가던 천리천 물길이 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79년의 안동시 북문동 일대 지적도 (출처:국토정보지리원) 북문동은 안동시 중구동에 속하는 동네로 조선 후기에는 안동부 북부에 속하던 지역으로 1947년 해방이 되고 일본식으로 변경했던 동 이름을 삼산동, 서부동, 북문동, 옥정동, 율세동, 신세동, 법흥동, 동문동, 동부동, 운흥동, 남문동, 남부동, 천리동으로 세분하면서 북문이 있던 곳이라 하여 특별히 북문동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북문동이라는 지명은 이곳이 안동부 읍성 안에 속했던 동네로 북문 문루가 있는 곳이었음을 알려준다. 영가지에 따르면 안동읍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안동부내 읍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947자이고 높이는 8자이고 안에 우물이 18개소, 도랑은 2개소, 못은 5개소였고 성의 4 곳에 문루가 있었다. 태사묘 옆 담장을 따라 안동의료원 쪽으로 올라가는 길 끝쪽 약국 앞에서 북문읍성의 표식을 만날 수 있다. 북문읍성 표지석과 함께 바닥에 읍성지도가 인장처럼 새겨져 있다. 북문읍성 표지석 ⓒ이미홍 북문읍성 표지석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안동의료원이 있다. 1912년에 자혜의원으로 문을 열었다. 지역민을 위한 의료 시설 확충과 지역의료 발전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경상북도가 전액 출자해 설립한 북부지역 공공의료기관으로 거듭난 도립안동의료원은 한 자리에서 100년이 넘는 시간을 안동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 안동군처와 자혜의원 사진(유리건판. 1915 국립중앙박물관) 북문동에서 100년의 역사를 이어온 경북도립안동의료원 ⓒ이미홍 고려 속의 안동을 만날 수 있는 태사묘 북문읍성 표지석이 있는 지점에서 안동의료원을 등지고 골목을 따라 내려가면 태사묘담장과 만난다. 북문동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태사묘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의 병산전투에서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친 권행, 김선평, 장길 삼태사를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태사묘 대성전 안에는 고려를 개국하고 왕이 삼태사의 공을 치하하고 세 성씨를 내린 흔적들이 중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태사묘 안 보물각은 삼태사가 아닌 홍건적의 난 때 노국공주와 함께 안동으로 몽진을 왔던 공민왕과 고려왕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유물을 보존·전시하기 위한 '보물각'이 1963년에 건립되었다. 태사묘 본당 대성전 (유리건판 1915년, 국립중앙박물관) 시내 북문동 도심 골목에 자리하고 있는 태사묘는 삼태사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묘, 즉 사당이라는 말이니, 도심 골목 안에 역사적 위인을 위한 추모공간을 세운 것이다. 안동부라는 지명과 함께 고려시대로부터 이어져내려온 이 골목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태사로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태사묘 깊숙한 안쪽에 삼공신을 모신 사당이 있고 삼태사의 묘정비와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삼태사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하는 것이 태사묘의 첫 번째 존재이유일 것이다. 태사묘가 생긴 이래로 오늘까지 삼태사의 후손들이 그 일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태사묘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정제 권정찬 ⓒ이미홍 권태사의 후손으로 오랫동안 태사묘 일을 봐왔던 권정찬 선생을 만나러 태사묘를 찾아간 날, 중구동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태사묘 앞 골목길이 속까지 깊이 파헤쳐져 바닥이 드러나 보였다. 태사로 골목에 전선을 땅속으로 묻는 지중화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태사로 거리를 재생한다고 동의서를 받으러 왔더라고요. 우선 불편해도 감수를 해야지요. 담장 낮추는 것에도 삼성 대표들이 동의를 했고요."" 태사묘가 있어서 붙여진 거리 이름 태사로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이 함께 있는 셈이다. 시청에서 근무하면서 태사묘를 자주 드나들게 되면서 퇴직 후 자연히 권씨 문중 어른들에게 눈도장이 찍혀 태사묘 일을 이어받아 하게 되었다는 권정찬 선생은 태사묘에서 첫 번째로 공을 들이는 일이 향사라고 했다. ""향사를 올리는 것이 후손들이 하는 가장 중한 일이지요. 세 성씨의 후손들이 같이 준비해서 향사를 올리는데 전국 각지에서 후손들이 태사묘에 모여 선조들 앞에 고하는 자리이기도 하지요. 향사를 무사히 잘 치르고 나면 그해 가장 큰 일을 마친 셈이지요."" 태사묘 대성전에서 고지기와 이야기하고 있는 권정찬 ⓒ이미홍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집안 어른들 중에 삼태사와 태사묘 내력이며 보물각에 얽힌 이야기들을 낱낱이 꿰고 있는 분들이 계셔서 참 좋았는데, 그 어른들이 돌아가시고 난 후로 태사묘를 제대로 지켜나가는 일이 후손들에게 점점 쉽지 않은 숙제가 되고 있다고 말하며, 상주하는 관광해설사 분에게 열쇠를 받아 잠겨있던 문들을 열어주었다. 태사묘 사당 문을 여는 태사묘 해설사 ⓒ이미홍 알고 보면 태사묘는 삼태사만의 공간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왕건을 도와 고려의 시작을 함께한 삼태사의 이야기를 품은 공간과 홍건적의 난 때 몽진하여 안동에 70여일을 머물고 간 공민왕과 왕실 가족들의 이야기가 담긴 보물각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두 공간을 나누는 작은 문이 사이에 있어 중문을 넘어가면 보물각이 자리한다. 고려 공민왕이 내린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태사묘 보물각 ⓒ이미홍 대성전과 사당 공간이 삼태사의 공간이라면 보물각은 공민왕의 공간인 셈이다. 공민왕 일행이 몽진을 와서 70일을 머물며 홍건적의 난을 물리치고 상경 하면서 왕실을 보필한 고창 백성들을 치하하고 왕실 물품들을 하사했으니, 보물 제451호로 일괄 지정된 공민왕의 교지와 관모, 옥관자와 200여점에 이르는 물품들이 보존, 전시되고 있다. 관광해설사가 상주하고 있어 누구라도 신청을 하면 문을 열어줄 뿐 아니라 해설까지 곁들여 들을 수 있다. 웅부공원이 지척이고 시내 어디서도 접근이 어렵지 않으니 볕 좋은 날 잠시 시간을 내어 보물도 구경하고 고려와 안동의 오랜 내력을 해설로 들어보면 좋을 것이다. 태사묘 열 골목안 두 번째 집에 살던 기억 고향이 예안면 귀단리 고통인 임옥순은 1948년 생으로 이웃 동네에 살던 이문원과 혼인을 하고 아들 형제를 낳았다. 처녀 때 안동읍내에 자취를 하며 미용학교를 다녔고 혼인을 하고 난 후에 시내로 나와 살아서 60년대와 70년대 북문동의 모습을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 옥순씨가 미용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분수대 지나 버스터미널까지만 포장이 되어 있고 북문동 다리가 있던 지금 시청 그 위쪽으로는 다 비포장 흙길이었다고 기억한다. 처녀 때 다닌 안동미용학교 졸업식 사진 ⓒ임옥순 ""미용학교 다닐 때 북문동 버스터미널서 집까지 버스를 타도 한 시간이 넘는 거리였어. 여자애들이 늦게 다닐 수도 없고 해서 방을 얻어 자취를 하면서 미용 배우러 다니고 했지. 멋 내는 것에 흥미도 많을 나이인데다 머리를 만지는 걸 배우니까 재미있었지. 배워서 언니 머리, 친구들 멀리 다 만져주고. 그런데 미용학교 마치고 얼마 안 있다 시집가는 바람에 미장원 일을 하지는 않았어."" 결혼을 하고 이사도 여러 번 다녔다. 옥야동에서도 살고 당북동 쪽에도 살다가 북문동으로 와서는 태사묘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바로 옆 골목에 집을 얻어 살았다. 재건운동본부에서 마을금고 만드는 일을 했던 남편 이문원 ⓒ임옥순 ""옛날 태사묘 바로 옆 왼쪽 골목에 집이 있었어. 애들 아버지가 그때 분수대 쪽에 있던 국민운동재건본부에서 마을금고 일을 하고 있어서 그쪽에 집을 얻은 거지. 골목 안 두 번째 한옥집이었는데 태사묘 하고 담장 하나로 이웃하고 있어서 우리집 툇마루에 서면 담장 너머로 태사묘가 다 보였어. 태사묘에서 제사 지내고 하는 것도 다 보였지. 애들이 태사묘 잔디가 깔린 마당에도 많이 가서 놀았어. 큰애가 세발자전거 타고 가서 세워놓고 시청 앞 분수대에 들어가 물놀이 하고 있는 걸 잡아온 적도 있어."" 옥순씨 바로 옆집이자 골목안 첫 번째 집은 총을 팔던 총포사여서 엽총을 든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그 골목을 따라 가면 북문시장이 나왔다. ""그 샛골목 따라 쭉 가면 북문시장이랬어. 그때는 복개를 하기 전이랬는데 개천둑 양쪽으로 가게들이 있었어. 분수대에서 올라가면서 왼쪽으로 목욕탕, 이발소가 있었고 이쪽에 국수가게, 기름방, 식육점 그런 게 있었어. 북문시장에 국수 사러 가다가 골목에서 바바리맨 만나서 기겁하기도 하고 그랬어. 그때는 버스터미널도 북문동 다리 있는데 있었어. 집에 갈 때 거기서 덜컹거리는 버스 타고 집에 가고 했던 기억이 많지."" 태사묘 잔디밭에서 놀던 옥순씨네 아들 형제. 1970년대. ⓒ임옥순 북문동 살면서 가장 기억나는 일로 옥순씨는 연탄파동을 꼽았다. ""그때 연탄파동이 났어. 석유파동이 어떻고 하더니 동네 연탄보급소마다 연탄이 떨어져서 돈 들고 가도 연탄을 못 사는 거야. 파동이 나니까 동사무소에서 연탄 배급표를 줬어. 큰애는 걸리고 둘째는 들춰 업고 동사무소 가서 배급표 받아서 안동연탄공장으로 갔어."" 당시 연탄공장은 강원도에서 기차로 실어오는 석탄을 받아서 만들었기에 대부분 역 근처에 있었다. 연탄공장 가서 배급표를 주면 연탄 백장을 실은 리어카가 한 대 따라나왔다. ""연탄 배달하는 아저씨가 연탄이 무거우니까 쉬지도 않고 빨리 가. 나는 애를 업고 하나는 손에 끌다시피 하면서 연탄리어카 따라잡던 게 지금도 기억이 나지."" 그 연탄공장 자리는 그 뒤 북문동에 있던 버스터미널이 옮겨가 안동버스터미널이 되었고, 그리고 지금은 그 자리에 다시 대형마트가 들어서 있으니 강산이 몇 번이나 변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연필스케치로 옥순씨가 그린 자신의 얼굴 ⓒ임옥순 연탄파동이 났을 때 배급표를 들고 연탄공장에 가서 연탄을 배급받았던 옥순씨는 남편의 직장 따라 북문동 골목을 뒤로하고 대전으로 갔다가 서울로 가서 서울사람이 되었다. 서울에 살면서는 고추파동을 겪었는데, 서울서도 동사무소에서 배급표를 받아 고추상회에 가서 한 집에 몇 근씩 달아주는 대로 고추를 받아서 그해를 났던 기억이 있다. 사람과 물자가 흔하다고 해도 서민들이 사는 모습이야 어디라도 별다르지 않더라 했다. 태사로에서 고려의 거리를 꿈꾸는 사람 1987년에 KBS 안동방송국으로 발령이 나면서 북문동에서 30여년을 살아온 강점용은 1946년 생으로 경남 진주 함양이 고향이다. TV문학관을 찍으며 전국을 다니면서 안동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북문동 태사로에서 30년을 살아온 강점용 ⓒ이미홍 ""제가 77년도부터 하회를 들락거렸어요. 내가 들락거리던 그때만 해도 하회에 초가집에 하인들만 살았어요. 기와집에 있는 사람들은 문을 잠가 놓고 다 외지로 나가 있고 관리자만 남아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TV문학관 할 때 하회마을에 가서 촬영을 많이 했어요. 그때만 해도 집집이 문을 열어보면 등잔이며 병풍이며 골동품들이 가득 했어요. 촬영을 위해 전국을 다녀봤지만 안동이 제일 역사성이 깊더라 이거예요. 역사적 장소와 이야기가 안동만큼 많이 남아있는 곳이 없어요."" 태사로와 웅부공원이 잘 보이는 도시재생센터 1층에서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태사로의 역사성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내는 강점용씨다. ""여기 안동예식장 자리가 있는 이 태사로 거리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고려시대 역사를 증명하는 태사묘가 있고, 여기 웅부공원 자리가 조선시대 안동부가 있던 장소고 맹사성이 심었다는 부신목이 있지요. 그리고 이 길을 따라 쭉 나가면 임청각이 있습니다. 임청각은 우리 근대 역사를 말해주는 상징적인 공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10년 전에 태사로 거리를 조성할 때부터 임청각을 꼭 넣어야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 사람들이 의외로 임청각을 멀리 생각하더라고요. 별개의 자리라고 생각하더라 이겁니다. 임청각이 우리 역사를 말해주는 근대고 그리고 월영교가 뭐죠? 스토리를 입혀 현대에 만든 다리죠. 이 태사로에서 월영교까지 고려에서, 조선, 근대, 현대까지 이렇게 시대 순으로 장소들이 놓여져 있는, 그런 곳이 세계적으로 여기 말고 없습니다."" 북문동 사람들이 태사로 고려의 거리 재현을 위해 왕실의 복장을 입고 있는 모습 ⓒ강점용 안동이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옛날부터의 역사적인 뿌리가 튼튼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안동이고 그리고 그 출발점이 태사로라고 그는 생각한다. 고창전투가 실제 있었고 놋다리밟기, 차전놀이의 발원지가 다 이곳과 연관이 있다. 왕건하고 견훤하고 싸웠던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원 뿌리가 있고, 노국공주와 공민왕이 남긴 유물도 있고, 놋다리밟기, 차전놀이 같은 민속놀이도 있기 때문이다. 전국에서 고려와 관련된 역사적 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인 태사로를 사람들이 찾아오는 태사로로 만들고 싶은 것이 그의 꿈이자 도시재생센터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중구동 태사로 재생사업의 큰 줄기라고 한다. 그런데 꿈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가 북문동에 둥지를 튼 이래로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일이지만, 한 사람의 개인이 노력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었다. 다행히 안동예식장 자리에 도시재생센터가 들어서면서 태사로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고 있다. 고려의 거리 이야기도 먼 일이 아니게 되었다. 그런데 태사로 골목 안 사람들이 그 일을 다 반기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일에는 그늘이 있는 법이었다. ""집 가진 세대주 입장하고 세입자 분들하고는 생각이 다른 것도 많지요. 이렇게 재생사업을 해서 이곳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면 임대료 오르고 세입자들이 쫓겨나는 사태가 온다 이거지요. 임대로 내며 장사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지요. 저도 아내하고 이 골목 안에서 오래 추어탕 장사를 했지만 상인들 입장에서는 해도 걱정, 안 해도 걱정인 거지요."" 도시재생센터에서 바라본 부신목과 회나무가 있는 태사로 웅부공원 ⓒ이미홍 ""요즘도 여기 아침에 산책을 나와 보면 아침마다 저 부신목 앞에서 기도하는 할머니가 있어요. 신령한 나무, 신목이라는 거지요."" 퇴직을 하고 아침이면 동네 산책을 하는 그저 평범한 시민이지만 태사로 조성사업을 하면서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나서서 주민들을 설득하고 다니며 안 들어도 될 말도 듣지만 그래도 이 거리의 역사성을 살리는 것이 결국은 다 같이 잘 사는 길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친구가 보내준 모친이 했던 진주 함양 동문식당 사진. 사진 오른쪽 기와지붕 건물이 동문식당이다. (출처:함양군청) 그가 안동방송국으로 부임해 방송국에서 일을 할 때 부인은 북문동 골목 안에서 시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추어탕 장사를 시작했다. 집을 구할 때 북문동 골목 안에 있는 집을 택한 것도 이유가 있어서였다. ""우리 어머니가 진주 함양에서 추어탕을 했어요. 그리고 서울 가서 형수님이 물려받아 하다가 형수 돌아가시고 우리 집사람이 이어받아서 했어요. 그러다가 내가 안동으로 오면서 여기 북문동에서 집사람이 추어탕집 문을 연 거지요. 경상도추어탕이라고 붙인 이유는 경상도하고 전라고하고 추어탕 만드는 게 달라요. 경상도 추어탕은 생채를 풋내가 안 나게 바구니에 으깨서 넣고 전라도 추어탕은 무청을 삶아서 넣어요. 그리고 툭바리가 달라요. 경상도 툭바리는 아래 위가 같아요. 남성적인 느낌이랄까, 그런데 전라도 툭바리는 하관이 좀 빠졌어요. 좀 더 여성적이지요."" 그의 모친이 함양 동문식당에서 추어탕을 할 때 전라도 남원에서는 샛집추어탕이 유명했다. 당시 두 집이 추어탕으로 양쪽 지역에서 알아주는 양대 맛 집이었던 셈이다. 그런 만큼 어머니의 손맛을 이어받은 경상도추어탕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미꾸라지도 전라도는 평야가 많으니까 미꾸라지가 크고 납닥하고, 경상도는 산이 많고 개울이 좁다보니까 미꾸라지도 잘고 동글동글해요. 습생도 다른데 미꾸라지가 야행성인데 전라도 미꾸라지는 잡아넣어 놓으면 그냥 자지만 경상도 미꾸라지는 동그랗게 몸을 말고 똬바리를 틀고 머리를 틀고 있어요. 미꾸라지는 활동성이 좋은 게 맛이 더 있는데 경상도 미꾸라지가 더 많이 움직이고 훨씬 더 맛이 있어요."" 전라도 사람들이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는 그렇게 보고 배웠다. ""추어탕 할 때 가을 '추(秋를)' 쓰는데 추어탕을 원래는 가을에만 먹었기 때문이에요. 왜냐, 속배추가 있어야 하니까. 가을배추속이 고소하잖아요. 그냥 야채를 삶아서 쓰면 맛이 없어요. 제피도 우리는 지리산에서 나는 것을 쓰고 추어탕을 담는 툭바리도 고향의 흙으로 만든 걸 가져와요. 추어탕은 툭바리에 먹어야 돼요. 그래서 우리 집은 배달을 안 해요. 음식은 옮겨서 먹으면 맛이 달라요. 그릇도 다르고, 그리고 와서 그곳에서 먹어야만 보이지 않는 마늘이며, 제피며 그 속 재료의 맛을 제대로 즐길 수가 있어요."" 골목 안으로 들어가야 맛볼 수 있는 경상도식 추어탕 집 ⓒ이미홍 그는 아들 며느리에게 추어탕 가게를 물려준 지금도 마늘을 자신이 직접 의성에 가서 눈으로 보고 사서 가져온다. ""추어탕에 갈아 넣을 거니까 사실 떨어진 거나 됫박을 까서 파는 마늘 사오면 가격도 더 싸지만 마늘이 단단하게 제대로 붙은 걸로 접으로 매달린 걸사요. 마늘 사러 30년 동안 같은 집을 가요. 처음 그 집을 선정할 때도 가업을 이은 집을 찾아서 갔어요. 가업을 이은 집은 어른들들 때부터 이어온 명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소홀히 하지 않거든요. 처음에는 내가 바가지를 좀 썼어요. 30년 지난 지금은 내가 가면 가장 좋은 마늘을 가장 좋은 가격으로 줘요. 그리고 그 입소문이 안동까지 와요. 그 사장은 마늘 하나를 사도 떨어진 거는 안사고 그리 사가더라고요."" 광고가 따로 필요 없이 재료 하나를 구입하는 것에서부터 어머니 때부터 해온 기본을 지키는 것,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경상도추어탕을 찾아온다고 그가 며느리와 아들을 앉혀놓고 늘 하는 말이다. 점용씨 모친이 남한테 맡기지 말라고 했던 쪽과 주걱 ⓒ이미홍 경상도추어탕 집은 골목 밖에서 보면 간판이 잘 보이지 않는다. 골목 바로 앞에 와야 그제야 간판이 보이는 집이다. 소문 듣고 물어물어 찾아오는 집, 추어탕은 그렇게 골목 안에 찾아들어가 먹는 음식이라고 그는 말한다. 부인을 도와 추어탕 식당을 하면서도, 항상 보이지 않는 거에 더 신경을 쓰라던 어머니가 하신 말씀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가 내한테 또 뭐라 했냐 하면 장사를 할 때 쪽을 남한테 주지 마라 그랬어요. 쪽이 국자를 말하는데, 국 하나 푸는 데도 정성이 중요하다 그거지요. 옛날에 하숙할 때 하숙집 밥을 먹으면 반찬이 많은데도 집에서 먹는 거하고 맛이 달라요. 정성이 들어가는 게 다른 거지요. 그리고 국을 뜰 때 손님을 보고 떠라 그래요. 목이 굵고 짧은 사람은 많이 먹으니까 밑에 무거운 걸 떠 줘야 잘 먹었다고 그래요, 목이 가늘고 긴 사람은 가벼운 걸 좋아해요. 그러면 위에 가벼운 걸 떠줘야 좋아해요. 우리 어머니한테 배운 거지요. 쪽을 남한테 주지 마라는 그 말 속에 그런 정성이 들어 있어요. 이상하게 어릴 때 배운 건 잘 안 잊혀져요. 대학가서 배운 거나 사회에 나와서 배운 건 다 잊어버렸는데 어릴 때 들은 건 지금도 기억나요."" 형제들 중에 막내였던 점용씨는 학교에 갔다 오면 힘들게 장사하는 어머니를 도와 국솥에 불을 떼곤 했다. 그때 어머니에게 들은 것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사는 것, 경상도추어탕이 삼대째 이어지고 있는 바탕인지도 모른다. 세벌식타자기가 있는 시청 앞 행정서사 사무소 북문동 분수대 앞에서 보건소를 지나 목성교에서 시청 쪽으로 꺾어들어 조금만 걸어가면 시청 정문을 살짝 비낀 자리에 김일수 행정사무소가 있다. 김일수씨는 1935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네 살이 되던 해 부모님 손을 잡고 귀국선을 탔고 청송군 현서면 화목에 일가가 정착을 했다. 화목에서 학교를 마친 후 면사무소에 취직을 해서 호적 관련 업무로 행정 일을 하다가 1970년대에 시험을 치고 행정서사가 되었다. 행정서사 김일수 ⓒ이미홍 일수씨는 서른 살 무렵에 현서면에서 월곡면으로 가게 된다. 장터 앞에 자리를 잡았는데 잡고 보니 면사무소 바로 앞이었다. ""안동댐 되기 얼마 전일 거래. 내가 미질로 들어간 게. 월곡면 미질1동에 가서 살고 있는데 면장이 불러서 일 좀 도와달라고 그래. 당시 월곡면사무소 면장이 권한섭 면장이었는데 그분이 그전 청송 화목 살 때 내가 면에서 행정 일을 본 걸 알았어. 수몰 앞두고 민원이 하도 많아서 감당을 다 못하니까 책상을 하나 주고 호적 일을 맡겨서 무보수로 우선 일을 도와주고 있었어."" 그런데 그때 안동군에서 행정감사가 나왔는데 당시 김상도라고 고향 선배가 안동군에 행정과장으로 왔는데 월곡면으로 사무감사를 나왔다. ""청송 화목 살 때 앞뒷집 살아서 잘 아시는 분인데 나를 보고 깜짝 놀래. 한참 이야기를 듣더니 내보고 뭐를 하고 싶노? 그래. 당시 면서기 전형시험이 있었어. 면서기를 할라나? 하고 싶은 거 이야기를 해보라 그래? 나는 면서기 공무원은 몸서리가 나서 안 할라니더. 행정서사를 하고 싶니더 그랬어."" 당시에는 면 단위에 행정서사가 한 사람만 배정되었는데, 그때 월곡면에는 이미 행정서사가 있었다. 그런데 도청 행정과에 오래 근무해서 지역단위로 행정사 정원을 한 사람 더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안동군에 한 사람을 더 받아서 월곡면에 정원을 1명 더 주는 것이었다. 고향 선배의 도움으로 그동안 호적계에서 일한 경력이 인정이 돼서 서류를 제출하고 행정서사 자격증을 발급받게 된 것이다. 일수씨는 그길로 호적을 떼러 그전에 일하던 청송 현서면 면사무소로 갔다. 소사로 일하던 면사무소에 행정서사 자격증 발급 때문에 서류를 떼러 간 그 발걸음이 얼마나 일수씨는 행정서사가 되고 장가를 들었다. ""미질 갔을 때가 서른 안짝 되었을 때야. 그때 아직 장개를 안 갔을 때래. 나는 장개를 늦게 갔어. 애들이 2남 1녀인데 중매로 혼인했지. 안에는 이름이 이정숙인데 내보다 열 살이나 아래지. 친정이 청주야. 집안 어른이 중매했지."" 집이 면사무소 바로 앞 장터 쪽에 있었다. 그동안 면사무소에서 무료봉사만 하다가 자격증을 받고 집에 사무소를 차린 것이다. 면에서 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건너에 행정서사 일을 보는 일수씨네 집이 보였다. ""면소 일을 그만두고 행정서사 일을 한 거지요. 면에서도 일이 많고 또 서류 같은 거 만들어야 하는 거 있으면 보내고, 다 우리집으로 일을 보러 오는 거예요. 면소 바로 앞이다 보니 일이 많았죠."" 수몰을 앞두고 보상이며 이전이며 등기며 일을 봐주며 주민들과 얼굴을 익혔던 일수씨는 장터사람들이 정산으로 이주를 할 때 같이 짐을 싸서 정산으로 갔다. ""수몰되면서 면사무소가 정산으로 가서 예안면사무소가 됐어요. 나도 정산으로 올라가서 그때 일을 많이 했어요. 면사무소하고 장터 들어선 그 일대가 다 밭이던 곳이다 보니 분할해서 지목변경 하는 것부터 건축하고 등기하고 일이 많았어요. 그전에 보상 타는 거부터 이주해서 집 짓는 거까지 행정서류가 오죽 많니껴? 행정서사가 하나뿐이라 그걸 전부 내가 다 했어요. 이주자금 타는 것도 내 손으로 다하고요."" 김일수씨가 지금도 사용하는 오래된 세벌식타자기 ⓒ이미홍 정산에서 수몰주민들의 이주가 마무리되고 안정이 되어가면서 일수씨는 안동으로 나오게 된다. 태화동에 집을 얻고, 법원이 있던 동부동 한양아파트 상가에 사무소를 열었다. 시내에 나와 사무실을 차렸을 때도 단골 중 월곡 사람들이 많았다. ""나와서도 옛날 월곡면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어요. 자식들 일로 찾아오는 경우가 제일 많아요. 출생신고, 전적 신고, 아들 딸 개명, 내가 그 자녀들 연령 정정도 많이 해줬어요. 공무원 시험 볼려고 하는 젊은 사람들이 주로 정정 많이 했지. 고등학교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 치려고 보니까 만 나이가 모자라는 거라. 요즘은 병원에서 태어나면 자동으로 출생신고가 되지만 그전에는 출생신고 제때 안 된 사람이 많던 때라 나이 정정 하는 사람이 많았죠. 지금 여기 시청 직원들 중에도 더러 있어요. 그때 내가 나이 정정해준 이들이 다른 데 근무하다가 시청으로 들어온 그 사람들이 지금 연령대가 최하가 계장인데 내 보면 고맙다고 그래요. 어른 때문에 잘 벌어먹고 사니더, 애 둘 놓고 잘 사니더, 그래 인사하는 사람도 있어요."" 동네에서 아기가 태어나거나 총상이 나면 반장, 동장이 출생신고와 사망 신고할 것들을 모아서 면사무소에 가서 대신 신고를 하던 시절이었다. ""월곡서 일할 때 임동 장날 나가면 임동면사무소에서 동네 동장들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때는 동장들이 출생 신고, 사망 신고 같은 일을 모아서 한꺼번에 면에 가서 대신 신고하고 그랬어요. 출생 날짜 적은 거, 나이 정정 적은 거를 주머니에 넣고 장에 왔다가 술 한 잔 하는 바람에 잃어버리고 있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하느라 제 날짜가 아닌 경우도 많고, 이름 적어준 걸 잃어버리거나 기억을 못하면 생각나는 대로 적어 넣어서 한자 뜻이 잘못 바뀌기도 하고 그런 게 많았지요 뭐."" 몇 번을 고쳐 쓰고 있는 타자기와 전화기 한 대로 온갖 행정 민원을 해결해온 김일수 행정서사ⓒ이미홍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남편 호적 잘못된 거 바로잡으러 온 부부래요. 남편이 성이 임동 중평 류씨인데 강원도 가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다가 주인집 딸하고 결혼을 했어요. 근데 군대를 가려고 주인집 성인 박○○로 호적신고를 해서 나중에 태어난 아이들도 그 성을 따랐고요. 자식들도 다 장성하고 앞으로 더 늦기 전에 남편 본래 성도 찾아주고 자식들 위해서라도 뿌리를 찾아주고 싶다고 부인되는 사람이 왔더라고요. 여기 면사무소 찾아가고 강원도 면사무소 찾아가고를 몇 번을 했어요. 그래 결국 본래 호적으로 정정이 왰어요. 버스 타고 먼 길을 오가고 했지만 나중에 그분들이 좋아하며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하는 거 보니까 마음이 참 뿌듯하더라고요. 그게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돈 받고 일하고도 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듣는 것은 그만큼 진심으로 일을 봐줬기 때문일 거다. 몇 평 안 되는 좁은 사무실에 전화기 한 대,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오래된 세벌식 타자기가, 남 해코지 하는 일은 돌아보지 않고 성심으로 손님들 일을 봐줬던, 행정서사 김일수가 걸어온 시간들을 묵묵히 대변해준다. 안동시군 통폐합 하고 시청 청사 이전할 때 일수 씨도 시청 앞 지금의 자리로 이전을 했다. 처음 이전을 할 때만 해도 일거리가 많았지만 전자정부가 되고 컴퓨터로 앉아서 클릭 한 번으로 대부분의 서류를 주고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자연 행정서사 사무실을 찾는 사람도 줄어들고 있다. ""안동댐 만들 때도 일이 많았고 80년대, 90년대 때도 일이 많았어요. 시군통합 되면서 새로 고치고 바뀌고 하는 게 많다보니 그때도 서류 일이 많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웬만한 거는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서류 떼고 다 하니까 일이 별로 없어요. 나이 정정 하는 일이나 호적 정정, 개명 그런 일들이지. 한양 아파트 쪽에 있다가 시청 새로 짓고 난 뒤에 여기로 왔는데 요즘은 그저 소일삼아 나와서 문 열어놓고 몇 시간 앉아 있다가 들어가는 거지요."" 시청 앞 김일수 행정서사 사무실이 있는 시청 앞 골목 풍경 ⓒ이미홍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와 고소장을 써 달라고 한다. ""고소장은 안 씁니다. 다른 데 가보세요."" 그 소리에 두 마디도 안 듣고 거절을 하고 손님을 돌려세운다. ""시청 앞에 있으니까 문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래도 더러 있어요. 혼인신고 하는 요새 신혼부부들 중에 신랑 신부가 어려운 한자 이름 잘 몰라서 오는 경우도 있고, 잘못된 호적 밝히려고 오는 사람도 있어요. 또 많이 하는 게 시골 산골짜기 땅 산 서울사람들 농지취득자격증명서 같은 서류 대신 발급받아주는 거래요. 지금도 서울서 땅 사러 많이 오지만 안동댐 되고 난 뒤로 외지 사람들이 와룡 도산 쪽으로 산이나 골짜기 밭까지 서울사람들이 와서 많이 샀어요. 외지서 일일이 왔다갔다하기 힘드니까 우리 같은 사람에게 위임하는 거지. 그런데 요즘 문 열고 들어오는 사람 중에 고소장 써달라는 게 제일 많아요. 그런데 나는 그런 건 일절 안 받아요."" 고소·고발은 상대가 있는 일이라 누구 한 사람은 가해자 만들거나 피해자 만드는 일이라 잠깐 서류 한 장 써주면 5만원을 벌 수 있지만 그거 벌자고 남 못할 일 할 수는 없다는 일수씨는 일이 있으나 없으나 집에서 자전거 타고 나와서 문열고 있다가 손님이 영 없으면 좀 일찍 들어가기도 한다. 평생 김일수 행정사의 발 노릇을 한 자전거가 시청 앞 김일수사무소 옆 한쪽에 기대어 세워져 있으면 안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천리천의 복개와 번성했던 북문시장 안동댐이 준공될 무렵을 전후해서 천리천 복개사업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안막동에서 북문동 앞을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들던 개천 양옆으로 가게들이 들어서 장이 섰던 북문장은 복개천을 중심으로 천막들과 가게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새롭게 형성되어 5일장이 번성하고 늘어나는 주민수와 더불어 상설시장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거기에는 안동댐 건설이 마무리되고 1976년부터 담수를 시작한 안동댐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주를 했는데 보상을 넉넉하게 받아 대도시로 떠난 일부를 제외한 많은 사람들이 인근 지역이나 안동 시내로 이주한 영향도 한 몫을 했다. 시내에서 북쪽 방면에 위치한 와룡면, 예안면, 도산면 일대의 수몰민들도 안동 시내로 나와 터전을 잡았는데 태화동, 평화동 일대와 법흥동 일대에 자리를 잡은 이들도 많았지만 고향에서 나오는 길목인 북문동, 율세동, 신안동 쪽에 터를 잡고 둥지를 튼 사람도 많았다. 농사 대신 먹고 살 길을 찾던 이들이 시장 안에 자리를 잡고 장사를 시작했고, 시장 입구에 버스정류소가 있어 안동 장날이면 와룡면, 예안면, 도산면 일대에서 장보러 나온 사람들로 북문시장은 성시를 이루었다. 파는 이들과 사는 이들이 서로 고향사람들 소식을 나누기도 했다. 북문시장 전경 ⓒ임덕자 북문시장을 살리고 싶은 시민광장 맛집 주인이야기 북문시장 시민맛집광장 주인 임덕자 ⓒ이미홍 안동시 녹전면이 고향인 임덕자는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녹전에서 다니고 여고 진학을 하면서 안동으로 나왔다. 언니는 경안여상을 다니고 덕자씨는 안동여고를 다녀서 같이 자취를 하면서 북문시장에서 칼국수도 먹고 붕어빵, 찐빵 같은 주전부리들을 사먹었던 추억이 많다. 그때 북문장에 병아리며 강아지, 토끼 등을 집에서 길러 장날에 새끼들을 가져와 파는 동물시장도 유명했다. 햇살이 따뜻한 봄날 오후 노란병아리 앞에서 발을 떼지 못하다가 병아리를 사들고 가던 초등학생들이 있었고, 갓 태어난 강아지의 귀여운 눈망울에 동동거리던 여학생들도 있었다. 시골에서는 부업으로 동물들을 길러 장날 나와서 팔았고, 마당 있는 집이 대부분인 시절이라 아이들이 있는 집에서는 강아지를 많이 사갔고, 직접 낳은 달걀을 먹기 위해서 중병아리를 사다가 키우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마당이 있고 골목 안 삶이 있던 시절 이야기다. 교복을 입고 있는 중학생 시절의 덕자씨 ⓒ임덕자 안동댐에서 엄마와 고등학교 다닐 무렵 엄마와 안동댐에 간 덕자씨 ⓒ임덕자 덕자씨가 안동에서 대학을 들어갔던 그해는 아시안게임이 있었던 해였다. 대학1학년이었던 덕자씨는 서울 구경도 할 겸 자원봉사로 등록을 했고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10일간 자원봉사를 마치고 난 후, 서울에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동안 우물안 개구리로만 살았다는 걸 그 열흘 동안 세계에서 온 젊은이들을 만나고, 서울 학생들을 보면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왜 내가 안동에서 학교를 꼭 마쳐야 하지? 라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자원봉사단 단장님을 졸졸 쫓아다니면서 취직시켜 달라고 졸랐어요. 우선 돈을 벌어야 서울에서 살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들어간 곳이 고려여행사였어요. 여행사 직원으로 10년을 일했죠."" 그 시기동안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그러다가 시어머니가 거동이 힘들게 되면서 집을 정리하고 시댁이 있는 전북 김제로 내려갔고, 농사꾼이 되었다. 김제는 들이 넓었고 논이 많았다. 자연 쌀이 넘쳐났다. 김제로 내려갈 무렵의 덕자씨네 가족 ⓒ임덕자 ""저도 시골 내려갔으니까 농사를 지었죠. 그런데 아는 분이 토마토 농장을 하는데 자꾸 토마토를 가져다 먹으라고 주는 거예요. 토마토 값이 떨어져서 출하를 많이 못하면 이웃과 나눠 먹으라고 몇 박스를 주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그냥 공짜로 나눠줄 거면 내가 가져가서 한 번 팔아보겠다고 하니까 토마토를 실어주면서 팔아서 트럭 한 대에 7만원만 달라고 그래요. 그걸 싣고 전주시내 아파트 단지에 가서 팔아서 30만원을 벌었어요."" 그걸 계기로 동네 시간이 있는 부녀회 동생들 몇에게 같이 토마토를 팔아보지 않겠느냐고 하니 남편들이 타던 트럭이 있는 부인들 셋 집이 하겠다고 나섰다. 트럭마다 전주 시내를 수소문해서 팔 곳을 정해줬다. 그때 같이 토마토 장사를 시작했던 사람들은 다 부자가 됐고 지금도 김제에서 유통업을 하고 있다. 토마토를 팔면서 보니 김제에는 쌀이 지천이고 이웃한 논산에는 딸기, 토마토가 지천이었다. 두 지역의 농민회 사람들을 모아 지역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김제 사람들은 딸기와 토마토 같은 싱싱한 제철 과일들을 좀 더 싸게 구입할 수 있었고 논산 사람들은 주식인 쌀을 더 저렴하게 공급받을 수 있으니 모두가 환영이었다. 조합원인 농민들도 지역주민들도 이득이고 판로 확보도 되니 일이 점점 커져서 대도시 직거래도 했다. 그때고 지금이고 무슨 일을 해도 혼자 잘 먹지 않고 남들하고 같이 잘 먹고 사는 게 좋다는 게 덕자씨의 지론이다. 북문시장 시장들을 바꾸고 싶은 마음으로 꽃을 키우는 덕자씨네 가게 ⓒ이미홍 2015년 덕자씨는 엄마를 모시고 고향인 안동으로 왔고, 서부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다음해 안동은 길안댐으로 시끄러웠다. 그리고 환경운동 활동가이기도 한 덕자씨는 그때 ‘길안천지키기범시민연대’ 간사 일을 맡고 있었고, 길안천을 지키기 위해 시청 앞에서 185일 동안 1인 시위를 했다. 그러면서 잊혀졌던 북문시장을 다시 보게 되었다. 시작은 시위를 시작하기 전이나 끝난 후에 배가 고파 밥을 사먹으러 시장 안으로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시장 안에 들어갔는데 문 열린 밥집이 없었고, 먹을 만한 식당도 없었다. 오래 전 드나들었던 활기 넘치던 북문시장을 알았던 덕자씨는 충격을 받았다. 제대로 된 식당이 없는 것은 그렇다 치고, 가게들에 천막들이 여기저기 쳐져 있었다.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고 썰렁한 데다 천막이 쳐진 시장 안은 70년대의 모습 그대로 멈춰 서서 세월 속에 방치돼 낡아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몇 번 더 들어와보니까 시장 안 모습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낡고 허름한데 옛날 골목들이며 가게 자리들이 그 모습 그대로인 거예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시청 바로 앞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밥장사만 해도 제대로 먹고 살 수 있을 텐데, 70년대 그대로의 모습을 잘만 정비만 해도 살 길이 보일 텐데, 진짜 안타깝더라고요."" 생각하면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게 덕자씨 스타일이었다. 지역구 시의원들도 만나고 시청 다니는 고향 선배들한테도 물어보고 다녔다. 아니 왜 북문시장을 저렇게 그냥 두느냐는 거듭된 물음에 돌아온 답은 상인회가 없어서 개인 점포들을 상대로 지원해주기도 쉽지 않고 사업을 추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상인회가 있으면 그런 것들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했다. 상인회를 만들면 환경개선사업을 지원해주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해 12월, 덕자씨는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시청에서 가까운 입구 쪽 점포를 임대해 식당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시장 어르신들을 만나고 다녔어요. 제가 총대를 멜 테니 시장상인회 만들자고 설득하러 집집마다 다녔어요. 그런데 시장 분들이 다들 좋다고 하시는 거예요. 이제 시장이 더 죽을 것도 없다고, 천막만 걷어내도 좋겠다고, 뭐라도 해보자고 하시더라고요. 상인회 만들어서 등록하고 그 다음해 봄에 시장 환경개선사업 신청을 해서 예산을 받았어요."" 그 예산으로 비가림막 설치를 했다. 그리고 간판도 교체했다. 그러나 시설이 조금 정비된다고 당장 시장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었다. 고령의 상인들이 대부분이라 무언가를 선뜻 바꾸거나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지만, 어떻게 할 줄 몰라서 못하는 부분도 많았다. 식당 일에 아름다운 재단 프로젝트 공모사업으로 진행하는 영풍제련소 현장모니터링과 기록 활동도 겸하고 있어 시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애를 쓰지만 사실 시간도 모자라고 모르는 것도 많다 보니 한계가 있다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래도 실망하지도 포기하지도 않고 열심히 길을 찾아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같이 살 궁리를 한다. 시장을 살리기 위해 장흥시장을 찾은 북문시장 시장상인회 사람들 ⓒ임덕자 ""저는 무슨 일을 할 때 한 사람만 제대로 미쳐도 뭔가 된다고 봐요. 북문시장에서는 제가 미쳤어요."" 지난여름에 처음 만났을 때 덕자씨가 했던 말이다. 서울서도 살고 김제서도 살고 안동에서도 살았는데, 다른 곳보다 안동이 전국에서도 먹고살기가 힘든 곳이더라고요. 물산이 풍부하지도 않고 공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보니까 같이 열심히 해서 같이 잘 살자고 하는 그런 게 약하더라고요. 공유하고 나누면서 같이 잘 살아야 신이 나잖아요. 북문시장 일에 열심인 걸 보고 어떤 사람들은 뭔가 돈이 되니까 이익이 도니까 하는 거지 그런 말들을 해요. 국밥봉사를 하고 있으면 젊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요즘 시장에 저런 거 다 지원받아 하는 거지 그래요. 그런데 덕자씨는 그런 면에서 떳떳하다. 돈 때문에 사람들 사이가 틀어지거나 잘못된 오해로 북문시장 살리기가 잘못되지 않게 하기 위해 덕자씨는 상인들을 설득해 지원금을 상인회 통장으로 받지도 집행하지도 않았다. 시청 담당자가 집행을 하면 거꾸로 감시를 상인회에서 하고 있다. 시에서 북문시장 상인회를 믿고 시장 활성화 사업을 적극 밀어주는 것도 그렇게 형성된 신뢰감 때문이다. 그런 덕자씨를 힘들게 하는 건 사실 그런 것들보다 시장 안에서 벌어먹고 사는 것에 대한 안동 어른들의 고정관념이다. ""우리 엄마 아시는 분이 지나가다가 제가 장터에서 국밥 파는 걸 보셨나봐요. 장터에서 국밥 파느라 고생하더라고. 우리 엄마도 저한테 멀쩡하게 직장 다니며 돈 잘 벌 수 있는데 장터에서 국밥판다는 소리 듣기 싫다고 그러기도 했어요. 그래도 저는 열심히 땀 흘리며 시장 사람들하고 같이 일하는 게 좋아요."" 장터에서 국밥봉사도 하고 팔기도 하는 덕자씨와 북문시장 부녀회 사람들 ⓒ이미홍 여름 지나고 가을에 문턱에 들어서는 10월에 장날 풍경을 찍으러 다시 갔을 때 덕자씨는 시장 부녀회원들과 장터에서 국밥을 팔고 있었다. 직접 지은 농산물을 북문시장에 팔러 오는 이들에게는 국밥을 무료로 나누어주었다. 나머지 시장 상인들과 손님들에게는 국밥 한 그릇에 3천원을 받고 팔았다. 장터 인심이 묻어나는 국밥이라 더 따뜻하고 든든한 한 끼였다. 파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물건을 사러 장을 찾는 사람들도 늘게 마련이었다. 시장 안에 전을 펴는 노점상들에게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명찰을 만들어 목에 걸어주십사 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팔려고 가지고 나온 물건의 생산지와 품목을 적었다. '○○○ , 010- ****- ****, 와룡면 태자리, 깨, 고추, 도라지' 명찰이 곧 국산 농산물인증카드였다. 파는 사람들이 밭에서 직접 기른 농산물이라는 것을 소비자들이 알게 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그 분들을 상인회 외 북문시장의 별도 회원으로 등록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처음에 열 몇 명이던 노점상들이 국밥봉사를 시작하고 명찰 인증제를 하면서 지금은 57명으로 늘어났다. 불과 한 두달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이분들을 포함해서 와룡, 예안, 도산의 농민들과 함께 조합을 만들어 로컬푸드사업단을 조직해서 직거래장터 사업을 할 구상을 하고 있다는 덕자씨가 사실 처음 북문시장에 오면서 하고 싶었던 것은 시장 안 아지매들하고 장터 먹거리 조합을 만드는 것이었다. ""묵 잘 만드는 아지매도 있고, 손두부 잘 만드는 아지매도 있고, 막걸리 잘 담는 아지매도 있어요. 이분들하고 마을조합 만들어서 묵하고 손두부 만들어 팔 거예요. 그걸 하려면 교육을 먼저 받아야 하는데 세 분이 내년에 저하고 같이 교육 받기로 했어요. 두부 만들어서 시장 안에서도 팔고 안동역 앞에 가서도 팔고 할 거예요."" 북문시장에서 장사하는 시장 사람들이 열심히 해서 시장도 살리고 돈돈 많이 벌어서 다같이 잘 사는 것이 덕자씨 마음이다. ""뭘해도 여기 시장 사람들하고 같이 만들어서 같이 잘 살고 싶고, 농사 힘들게 짓는 분들 농산물도 같이 팔아서 같이 잘 살고 싶지 저 혼자 궁리해서 혼자 잘 살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 거는 왠지 신이 안 나요."" 장날이면 만날 수 있는 북문장 난전 아지매들 장날이면 시장 안 삼거리 공터에 아침 일찍부터 자리를 잡고 보따리를 푸는 아지매들이 있다. 농사지은 나물이며 곡식을 가지고 장보러 오는 난전 아지매 장꾼들이다. 장터 골목 안쪽 담벼락 앞에 전을 펴고 도라지와 생강을 비롯한 채소들을 파는 오금자 아지매는 와룡 태자리서 농사를 짓는다. 명찰을 보고 안 내용이다. 태자리서 온 오금자 아지매 ⓒ이미홍 11시가 한참 넘은 시간이었는데 손님을 한 사람이라도 놓칠까봐 여태 국밥을 못 먹었다며 국밥 솥이 있는 천막 쪽을 연신 보시더니 점심시간이 되어 국밥봉사가 끝날까 걱정이 되는지 잠깐만 자리를 지켜달라며 도라지는 5천원, 생강도 5천원, 고추는 3천원, 배추, 쪽파는 2천원이라고 가격을 말해주고는 국밥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그 사이 할아버지 손님이 왔다. 보더니 대뜸, 주인은 어디 갔냐고 묻는다. 국밥 먹으러 잠깐 가셨다 하니 가지 않고 좌판 앞에 서신다. 어설픈 여인네 대신 좌판을 지키고 계시는 모양새다. 간판도 없는 장사지만 단골이신 듯 했다. 좀 있자니까 또 장에 나온 할머니 두 분이 길가다 앞에 서는가 했더니 묻지도 않고 세 분이서 이야기를 나눈다. 지난 장에는 뭘 샀는지, 점심은 자셨는지 주거니 받거니 하고들 계시는데 오금자 아지매가 왔다. 장사가 못 미더워 국밥 한 그릇을 받아서 들고 오신 거였다. 그제야 어르신이 등 뒤로 감추고 계시던 빈 포대자루들을 건네신다. 자연스럽게 받는 아지매, 그리고 스스럼없이 남의 도라지 농사, 생강 수매 걱정을 하는 할매들, 물건을 사지 않는 날이라도 안부는 묻고 가는 정이 남아있는 것이 북문장날 풍경이다. ""올해는 도라지와 생강이 잘 됐니더. 도라지 한 바가지 가지고 가소."" 해서 한 손에 카메라를 옮겨들고 오천원을 치르고 도라지를 샀다. 도산면 의일리에서 농사짓는 오천댁 ⓒ이미홍 도산 의일리서 온 아지매는 이름을 묻자 친정이 와룡 오천이라 오천댁이라고 했다. 집이 의일리 중에서도 물가에 가까운 곳으로 안동댐이 만들어질 때 살고 있는 집 바로 아래까지 물이 차올랐는데, 집은 수몰되었지만 토지는 잠기지 않아 남아서 평생 농사지어서 북문장에 내다 판 역사가 오래 되었다. 오천댁 아지매가 이날 가져온 건 끝물 고추와 나물이었다. 북문장 고추장사 이국주 ⓒ이미홍 이날 장에는 김장철이 다가오고 있어서인지 고추장사 아주머니도 보였다. 올해 78세인 이국주 아지매는 스물다섯에 행상을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고추장사를 한 지는 30년이라고 했다. 아주머니가 처음 고추장사를 시작했던 당시만 해도 북문시장은 장날 새벽이면 전국의 상인들이 돈다발을 들고 고추를 사러 찾아오는 알아주는 큰 장이었다. 몇 백만 원, 몇 천만 원이 오가는 경우도 많아 경찰이 지키고 서기도 했다고 한다. 요새는 장사가 그럭저럭 겨우 먹고 살만한 정도이다. 씨앗가게 장갑순 할매 ⓒ이미홍 북문시장에서 씨앗가게 장갑순 할매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1930년 경오년생인 할매는 율세동으로 이사 와서 장사를 시작한 이래로 북문시장서 평생을 보냈다. 한나절 앉아 있어도 씨앗은커녕 고무줄 한 다발도 못 팔 때도 많지만 집에 있으면 심심해서 나온다고 했다. 보통은 시장 안 그릇 철물점 앞이 고정석이지만 장날은 노점장터로 자리를 옮긴다. 옆에 앉은 오천댁 아지매와 자식 이야기도 하고, 물 건파는 것보다 오래봐 단골이 된 할매들이 장에 나오면 얼굴 보는 그 재미가 좋아서 오늘도 장에 나와 봤다며 웃는다. (글/이미홍 lmh33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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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안동의 북쪽 관문 북문동을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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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향교골 명륜동 이야기
- - 사람을 밝히는 동네 명륜동- 상가와 주택으로 형성된 작은 마을 2019년 안동예천 근대기행은 생생한 르포취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다룬 <구술생애사>와 안동과 예천 두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사의 근간이 되는 '마을'을 테마로 한 <우리 마을 이야기>를 그려낼 예정입니다. 두 번째 <우리 마을 이야기>는 향교골 안동시 명륜동입니다. -편집자 1. 1990년~1996년 1990년 2월 4일 일요일, 흐리고 약간의 비 차에 몇 가지 짐을 싣고 오는 내내 불안에 휩싸였다. 곧 새 생활이 시작 될 테니까. 명륜동 338-28번지 1통 4반. 자취할 집은 아주 작고 초라하다. 엄마는 어쩌다 이런 집을 찾아냈을까… 주인은 할아버지 할머니 내외이시고 안동여고 3학년인 언니 두 명과 중학교에 입학하게 될 남자애 한 명이 이 집 별채에 살고 있다. 세 명은 한 방을 쓴다. 동생과 내가 있을 방은 집의 규모에 비하면 큰 편이다. 새 장판이 깔려져 있고 도배지 여섯 롤이 구석에 세워져 있다. 책상과 찬장, 옷장은 내일 사기로 했다. 내일 엄마와 동생이 가버리고 나면 얼마간은 나 혼자 남게 된다. 낯선 학교와 아이들, 처음 해보는 자취 생활, 모든 것이 두렵고 불안하다. 얼른 토요일이 오고 봄방학이 왔으면….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1990년 2월 5일 월요일 새벽에 여러 번 깨었다가 잠들었다. 결국 6시 30분에 일어났다. 연탄불이 꺼져서 집 앞 구멍가게에 가서 번개탄을 사왔다. 겨우 불을 살리고 걸어서 시내로 나가보았다. 우연히 경안고등학교에 다니는 친구 도철이를 만났다. 경안여자상업고등학교에 다니는 현주도 보고 숙자 언니도 보았다. 어쩌면 안동이란 곳이 생각만큼 낯설지만은 않은 곳일지도 모르겠다. 9시 넘어서 새로 맞춘 교복을 입고 엄마와 함께 전학 하는 학교로 갔다. 학교는 시내를 조금 벗어난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개학날이라서 아이들은 모두 청소를 하고 있었다. 담임선생님께 인사만 드리고 다시 명륜동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영경이와 함께 동생을 버스터미널까지 걸어서 바래다 주었다. 그 옛날의 자취방 ⓒ신준영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칠 즈음 의성에서 안동으로 전학을 했다. 이전에도 가끔 안동에 올 기회는 있었다. 시내 중심가의 아디다스, 나이키 대리점에서 운동화나 양말을 사 신기도 하고 맘모스 제과점, 코끼리 분식점, 스쿨서점, 교학사, 삼방사에 들러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짐을 싸들고 살러 온다는 것은, 그것도 내가 나의 보호자가 되어서 낯선 방, 낯선 사람들에게 나를 부리워 와야 한다는 것은 상당한 두려움과 불안이 따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명륜동과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명륜동(明倫洞)은 안동시청과 대구교육대학교 안동부설초등학교, 국도 35호선인 퇴계로를 따라 형성된 상가들, 그리고 그 사이의 주택들로 구성된 작은 동네다. 1931년 4월 1일 안동읍제 실시에 따라 안막동의 일부를 분할해 이곳에 있던 안동향교의 강당인 명륜당의 이름을 따서 향교골, 즉 명륜정 1정목이라고 했다. 1947년에는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명륜동으로 개칭하였는데 향교가 있던 자리는 명륜동 344번지로 안동의 대표적인 명당자리로 유명하다. 안동향교는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는데 당시 대부분의 문서도 함께 분실되어 정확한 연원은 알 수 없지만 1361년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했을 때 '복주향교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 즈음으로 추정한다. 1983년 향교복설추진위원회가 발족되어 송천동에 터를 잡아 1986년 중건하였다. 안동의 교육기관 거의가 이 향교 터에서 문을 열었다. 1933년 안동공립농림학교 설립을 시작으로 1942년 5월에는 4년제 안동공립고등여학교를 설립하여 같은 해 10월에 옥야동으로 교사를 신축, 이전하였는데 이는 안동여자중학교와 안동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947년 7월에는 안동사범학교가 설립되었고 1962년 3월에는 도립 안동농업초급대학으로 개편 되었다가 1965년 3월에 안동교육대학으로 다시 개편되었다. 안동교육대학은 1978년 2월에 국립 안동초급대학으로 개편되었고 1979년 3월에 다시 4년제 국립 안동대학교로 승격되었다. 1983년 2월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같은 해 3월에 송천동으로 이전하였다. 1991년 안동시청이 이 자리에 청사를 지었다. 2019년에는 안동시의회 건물이 신축되었다. 현재의 안동시청 ⓒ신준영 현재의 안동시청 ⓒ신준영 안동시청 앞 표지판에 안내된 지도 명륜동에서 1990년 2월부터 1996년 늦가을 까지 6년여를 살았다. 이후로는 한 번도 찾아간 적이 없었던 그 골목, 그 집, 그 방은 대신 가끔 꿈에 나타났다. 지난 달력을 정갈하게 찢어서 그 달의 공과금을 적어주시던 주인 할아버지의 섬세한 손과 그보다 연상이었던 피부가 곱던 할머니, 방주인이 자주 바뀌던 별채와 토마토가 익어가던 마당의 텃밭, 바지랑대를 높이 세우던 빨랫줄, 마룻장을 들어내야 나타나던 연탄아궁이, 수시로 창호지를 뚫고 들어와 머리맡에 앉던 달빛과 알 수 없는 그림자들. 연탄 냄새와 응달 냄새로 깊고 서늘한 골목을 통과해야 그 집에 닿을 수 있었다. 골목을 통과하는 동안 세 채의 집을 지나가야 하는데 마지막 집에는 학교에 다니지 않아 보이는 내 또래의 여자 아이를 비롯해 여럿의 형제가 늘 큰 소리를 냈다. 다투는 듯도 보였고 어쩌면 늘 그렇게 크게 말하는 습관이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 집 앞엔 대용량 토마토케첩과 식용유가 툇마루 위에 쌓여 있었다. 어느 날은 다른 동네에서 개조한 손수레에서 핫도그를 팔고 있는 그 집 식구들을 본 적이 있다. 잘 아는 얼굴이었지만 아는 척 할 수 없었다. 서로가 그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주변에는 중학교 동창 여럿이 자취를 하고 있었다. 당시엔 경안여자상업고등학교가 아직 신안동에 있을 때였고 경일고등학교와 길원여자고등학교도 명륜동에서 가까웠다. 친구들과 선후배들을 길에서 자주 마주치곤 했다. 자취방 사정들은 대동소이했다. 방 한 칸에 간이 부엌이 딸린 정도였고 화장실은 외따로 떨어진 공용 화장실이었다. 중학교 때 체육선생님이 안동으로 전근 와 계셨는데 선생님의 자취방도 신안동 산 위에 줄줄이 늘어선 집들 중에 하나거나 명륜동의 대로변 상가에 딸린 작은 방 한 칸이거나 그랬으니까. 아침이면 얼굴이 뽀얀 아이들이 노란 모자를 쓰고 남색 체육복을 입고 언덕을 올랐다. 명륜동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대구교육대학교 안동부속국민학교 학생들이었다. 아이들의 손엔 악기가 들려 있곤 했다. 대구교육대학교 안동부설초등학교는 1956년 4월 1일에 안동사범학교 부속국민학교로 개교했다. 1966년 3월 1일에는 안동교육대학 부속국민학교로 개교했으며 1978년 3월 1일에는 다시 대구교육대학교 안동부속구민학교로 개칭했다. 2001년 3월 2일에 대구교육대학교 안동부설초등학교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른다. 2. 1956년~1968년 안동사범병설부속국민학교와 안동사범병설중학교, 안동교육대학 출신 권부옥(1947년생) ""중앙국민학교에 다니다가 안동사범병설부속국민학교가 신설되면서 그리로 옮겼어요. 시험을 봐서 들어간 거 같아요. 당시에 교육에 관심을 가진 부모들이 아이들을 부속국민학교에 보냈어요. 우리 집도 그랬지만 돈이 있어서 보낸 건 아니에요. 새로 생기는 학교니 교육적으로 우수한 학교일 거라는 기대가 있었지요. 우리 집이 신안동에 있어서 학교 다니기도 편하고 그래서 그랬는지 3학년 때 학교를 옮겼어요.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던 기억, 서후까지 송충이 잡으러 걸어간 기억이 있어요. 그날은 하루 종일 수업도 없이 송충이를 잡았어요. 쥐 잡은 증거로 쥐꼬리도 잡아오라 그러고 했던 시절이니까. 1960년 2월에 내가 2회로 졸업했어요. 그리고 그 친구들이 대게 그대로 안동사범병설중학교에 입학했어요. 내가 13회인데 안동사범학교가 없어지니까 안동사범병설중학교도 2학년 때 없어졌어요. 그래서 우리는 공부는 거기서 하면서도 안동중학교 졸업장을 받았지. 남녀공학만 다니다가 안동여고에 들어갔는데 여자학교에 적응이 잘 안되더라고요.(웃음) 그러다가 안동교육대학이 생겨서 시험 쳐서 들어갔어요. 1968년에 졸업해서 첫 발령을 와룡 이하 문청국민학교로 받았지. 시내서 와룡까지 기차로 통근했어요."" 안동교육대학 교정 3. 1974년~1976년 안동교육대학 졸업생 장국수(1956년생) ""1974년 3월 5일 입학해서 1976년 2월 16일 졸업했어요. 12회가 마지막 졸업생인데 내가 10회야. 한 학년에 우리는 300명, 위는 400명, 우리 아래는 200명. 지금 안동시청 본관 자리에 학교 건물이 있었어요. 나는 학도 호국단을 했는데 당시는 교원이 부족할 때라서 교육대학에 들어가면 군에 안가고 학교 다니면서 소정의 군사 훈련을 받는 것으로 군에 가는 걸 갈음을 해주지. 여름 방학 때 36사단에 가서 1학년 때 3주, 2학년 때 3주 교육을 받고 하사 계급장을 받아요. 의무적으로 학교에 5년간 근무를 해야 해요. 만약 근무를 안 하면 다시 군에 가야했어요."" 안동교육대학 교정 안동교육대학 교정 학생군사교육단 수료증 1976년 안동교육대학 제10회 졸업기념 앨범의 첫 장과 기념사진 ""당시에 전공반이 10개 반이었는데 반 별 30명씩 300명이야. 도덕교육연구반, 국어교육연구반, 사회교육연구반, 산수교육연구반, 자연교육연구반, 체육·무용교육연구반, 음악교육연구반, 미술교육연구반, 실과교육연구반, 초등교육연구반 이렇게 열 개 반이지요. 남녀 비율은 남자가 180명, 여자가 120명쯤 된 거 같아요. 나는 체육·무용교육연구반이었어요. 음악반은 아무래도 악기를 잘 다루고 체육반은 달리기나 기계체조 같은 운동을 잘하고. 나는 기계체조를 했어요. 미술반은 그림에 소질이 있었겠지요. 학교 뒤에 연못이 있었어요. 그 앞에서 그림도 많이 그리고 했어."" 교내 체육대회 교내 체육대회. 뒤로 시내 전경이 보인다. 체육연구반 활동 ""학교 가서 입학시험을 쳤어요. 면접 볼 때 음치는 아닌지, 피아노는 칠 수 있는지 신체검사도 하고. 당시 교문은 지금 시청 입구 그대로예요. 동아리 연구 활동, 문학의 밤, 시낭송, 작품 활동, 대학축제인 명륜제도 생각이 나고. 명륜제 때는 반 대표로 노래자랑에 나가서 2등인가 한 기억이 있어요. '춘향아 울지 마라'하는 노랜데 제목이 기억이 안 나네."" 학교에 가서 입학시험을 치렀다. 입학시험 1974년 입학식 ""농촌 봉사활동도 청송 어느 산골로 나간 기억이 있어요. 전국교대체육대회에 체조 선수로 출전도 했어요. 학교 다니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그림 과제였는데 일주일에 8절지에 두 장씩 의무적으로 그려 내야 했어요. 잘못 그리면 '불가' 판정이 나요. 나는 그림 실력이 없어서 졸업하는데 애를 먹었어요. 풍금도 애국가 4절을 4부로 쳐야 됐고. 우리 안동교육대학이 우수한 점은 현장에 나가면 아이들을 좀 더 잘 교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예체능 쪽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교육 시켰다는 거예요. 팔방미인이 되도록 말이죠."" 체육회 활동 mbc에서 실황중계했던 교내 음악대회 1974년 3월 21일 명륜체육대회 행사 후 뒤풀이 중인 학생들 RNTC 군사훈련 청송으로 갔던 농촌봉사활동 ""당시에 학교 주변 모습을 떠올려보면 북문시장은 형성이 되어 있었는데 학교 주변에 가게는 흔하지 않았어요. 구내식당이 있었고 둘레둘레 자취생들이 많았어요. 지금은 복개됐지만 신안동에서 내려오는 큰 도랑이 있어서 건너 다녔어요. 안동의료원 뒤쪽 북문동에 특히 자취생들이 많았어요. 나는 학교 수업만 열심히 듣고 다녀서 대학 문화라든가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 별로 없어요(웃음). 학교 졸업하고 첫 부임지는 의성 안평면의 도옥초등학교예요. 지금의 시청 옛 자리에 안동교육대학이 있어서 많은 교사가 배출이 된 까닭에 우리나라 인재 배출에 큰 역할을 했다고 봐요."" 졸업사진 졸업증서 졸업앨범 편집위원 4. 1995년~2019년 현재, 2차선 도로와 4차선 도로 사이 명륜주유소, 대신종합건설 김명자(1954년생) 김명자 ⓒ신준영 명륜주유소 ⓒ신준영 ""옥야동 영호초등학교 후문 근처에 살다가 1995년 1월 15일에 명륜동으로 이사 왔어요. 옥야동 살던 어느 날 남편에게 외식을 하자고 졸라서 웅부공원 옆 선미식당에서 국수를 먹었어요. 그러고 나서 시청 근처로 구경 가자고 또 졸랐지. 시청 앞 어디쯤에 서서 저 건너에 보이는 저 집이 매물로 나왔다는데… 하고 남편에게 넌지시 얘기했어요. 안풍기계 사장 집이었어요. 남편이 그 집이 안동 부잣집인데 좋지 안 좋나? 하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그 집을 사서 이사를 하게 됐지요. 문 열어놓고 수리할 적에 사람들이 안이 어떤가 하고 구경을 할 정도로 튼튼하게 잘 지은 집이었어요. 밖에서 보면 2층인데 안에 들어가면 4층이었어요."" 1997년경 명륜주유소 짓기 전 주택에서 뒤로 보이는 대문이 1999년에 도로에 편입되었다. ""명륜주유소 건물이 있는 여기가 일제강점기 때는 사방관리소가 있던 자리예요. 사방관리소 사무실을 리모델링해서 검도장으로도 쓰다가 잠시 태평양 횟집이 들어오기도 했고. 또 여기에 안전카서비스센터가 있었어요. 지금 우리 집 옆에 있는 새마을금고까지가 사방관리소가 있던 자리예요. 1999년경 집 앞 도로가 2차선에서 4차선으로 확장 되면서 도로변 상가들이 뜯어지고 없어지고 신축되고 했어요. 4차선이 되면서 거리가 완전히 바뀌었지요. 우리도 한 100여 평이 도로에 편입됐어요. 도로 확장 되면서 대문이 편입이 됐거든요. 그래서 안전카센터를 사서 대문을 옆으로 돌렸어요. 2000년도에는 검도장 자리에 태평양 횟집이 잠시 들어섰을 땐데 그 집도 그때 샀어요. 2002년에서 2003년에 걸쳐서 명륜주유소 건물을 준공 했고요. 네 필지 전체가 사방관리소 자리였지요."" 사방관리소가 있던 자리에 명륜주유소와 명륜새마을금고가 들어섰다. 2003년 명륜주유소 개업 안내장 ""지금 동물병원 자리에 대우전파사가 있었는데 건물을 지어서 옮겨갔어요. 그게 지금의 대우철물, 대우공구예요. 그 아래에 북문세탁소가 있었고 교대(시청) 앞쪽은 주산학원, 고려지업사 옆에 영화장품, 명륜문구사, 금홍문구사, 수산낚시, 한양미용실, 북문유리점 등이 있었지요. 정일목욕탕은 우리 이사 온 후에 지었어요. 북문마트도 우리 오고 나서 지었고. 우리가 주유소를 연 이유는 우선 주변에 주유소가 없었고 만약에 자식들이 물려받게 된다면 주유소 마당이라도 쓸고 기름이라도 넣으면서 노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 했어요. 또 기름은 썩지 않으니 재고가 생겨도 문제없다 생각해서 주유소를 개업한 거지요. 처음 6개월은 제가 직접 운영해봤는데 그것 참 어렵더라고요. 당시에는 카드도 안 쓰던 때라 달로 외상을 끊어 줬어요. 학원이고 어디고 거래처 텄다고 좋아했는데 수금하러 가면 폐업하기도 하고 번호판 떼 가라 하기도 하고. 어려워서 손들고 세를 줬어요. 아무나 하는 거 아니더라고요."" 명륜동 전경 ⓒ신준영 명륜동 전경. 왼쪽으로 신축한 안동시의회 건물이 보인다. ⓒ신준영 ""처음 이사 와서 보니 도로변 좌우로 상가들이 쭉 늘어서 있었어요. 남의 동네에 살러 왔으니 여기 사람들과 섞여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는데 이웃에서 나보고 모임에 나오라고 해서 나갔어요. 원래 있던 모임인데 내가 나가서 이름을 ‘숙녀회’라고 지었어요. 지금은 일곱 여덟 명 남았어요. 그때 모임에 한양미용실, 북문세탁소, 민정칼라, 대우전기, 성희미용실, 영화장품, 고려지업사, 수산낚시, 북문시장 안 떡방앗간집 등 스물 세집이 있었어요. 매달 한 번씩 모였어요. 나이 많은 사람, 젊은 사람 한데 섞여 있었어요. 그때는 매월 만원씩 모았는데 지금은 이만 원씩 모아요.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밥도 먹고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여행도 가는데 중국 장가계도 갔다 왔어요. 이름이 정확히 '명륜동 숙녀회'지요. 매월 25일에 모여요. 각자 집에 잔치 있으면 서로 부조하고 오고 가면서 정을 내요.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옛날 거리 모습 그대로였어요. 1999년에 도로 확장 되면서 이사도 많이 가고 모습이 바뀌었지요."" 명륜동 전경. ⓒ신준영 명륜동 전경. 멀리 목성동성당과 법상 상일아파트 등이 보인다. ⓒ신준영 5. 1983년~2019년 현재, 명륜동 숙녀회 고려지업사 김현숙(1959년생), 김재택(1958년생) 고려지업사 김현숙 ⓒ신준영 고려지업사 김재택 ⓒ신준영 ""남편(김재택)은 1980년부터 도로 건너 지금의 동물병원 자리에서 고려지업사를 운영했어요. 1983년 결혼할 때부터 여기서 살았고요. 1999년에 도로가 2차선에서 4차선으로 변경되면서 2000년도에 이 건물을 지어서 이사를 왔어요. 장안카메라가 옆집이었는데 카메라 대여도 하고 그랬어요. 영화장품 할인코너도 옆에 있었고요. 맞은편 효성이발관 옆에 초대 시의원을 지낸 안상하 씨가 하던 북문세탁소가 있었어요. 그분은 명륜마을금고 이사장도 역임 했고요."" 1985년 무렵 고려지업사 부근 1985년 무렵 고려지업사 부근 1985년 무렵 고려지업사 부근 ""숙녀회에서 중국 장가계도 가고 울릉도도 가고 제주도도 가고 했어요. 참 재밌었지요. 2011년 10월 6일 중국 장가계 단체 사진에 회원들이 쭉 있어요. 건어물 가게인 진보상회 옥순희, 효성이발관 건물주인 이미옥, 대왕수퍼 박춘선, 영화장품 이준필, 고려지업사 김현숙, 민정칼라 송종숙, 화장지와 세제를 취급하던 길도상사 임종길, 수산낚시 박옥남, 한양미용실 권순옥, 명륜주유소 김명자 모두 들어있네요. 내가 이 모임 총무라서 이름을 다 기억해요. 명륜동 모임은 1990년경부터 시작됐어요. 35호선 도로를 따라 올라가며 양쪽 가게 주인들이 회원이고요. 제주도 갔을 때 사진에는 대우전파사 신혜숙, 북문시장 안 떡방앗간 하나 엄마, 영화장품 이준필, 이미옥, 진보상회 옥순희, 민정칼라 송종식, 중대장 부인, 박미경, 새성희미용실 박성자, 대왕수퍼 박춘선, 수산낚시 박옥남, 북문세탁소, 길도상사 임종길. 고려지업사 김현숙 이렇게 다 들어있네요. 이때만 해도 아가씨 같지요.(웃음)"" 명륜동 숙녀회에서 간 중국 장가계 명륜주유소 김명자(왼쪽), 고려지업사 김현숙 ⓒ신준영 ""상가 말고 주변 한옥들 중에는 하숙집이나 자취방들이 많았어요. 경안여상이 이 근처에 있을 때니까. 지금은 손자 손녀도 있는데 이 사진 속 우리 아이들보다 손자 손녀가 더 커요. 아들은 1984년생, 딸이 1986년생인데 당시 집 밖에서 노는 모습을 이렇게라도 찍어놔서 거리 모습이 남아있네요."" 1980년대 중반 고려지업사 부근 1980년대 중반 고려지업사 부근 1980년대 중반 고려지업사 부근 1980년대 중반 고려지업사 부근 6. 2019년 현재 해결되지 않는 빚진 마음이 발길을 옮기게 했다. 오래 앓아온 막연한 서러움과 그리움의 정체를 알 것도 같았다. 외따로 희미한 별처럼 가족에게서 분리되어 나왔던 최초의 공간과 시간이 머무는 곳, 명륜동은 내게 그런 곳이다. 응달의 온도와 냄새를 알게 했고 그 길 끝에 몸을 웅크려 세상을 향한 도약을 준비하던 작은 방 한 칸이 풀잎으로 엮은 둥지처럼 숨겨져 있던 곳. 그 안에서 음악을 듣고 편지를 쓰고 글을 읽었다. 명륜동은 변한 거 같지 않지만 골목골목 돌아보면 참 많이 변했다. 암호처럼 날아오는 삐삐 문자에 답하기 위해 줄 서서 기다리던 공중전화 앞 구멍가게에는 원룸 건물이 들어섰다. 대나무 깃발이 높이 솟아있던 어느 집 마당에는 대신 태극기가 펄럭인다.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던 언덕 위의 집은 카페로 변신했다. 언덕도 사람과 같아서 시간이 쌓일수록 키를 낮추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 즈음 자취방이 있던 그 골목 앞에 섰다. 시간이 멈춘 듯 골목은 그대로다. ⓒ신준영 그 시절 골목 입구에서 치르던 나만의 의식을 생각해냈다. 바라는 것이 있으면 반대의 결과를 먼저 떠올리는 것, 가령 기다리는 편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는 식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겠지, 살아계신다면 백 살은 넘으셨을 테니까. 그 집은 대문이 닫혀 있거나 허물어지고 없겠지, 하고 생각하며 나름의 의식을 치렀다. 의식을 치르고 나면 예측했던 결과가 나왔을 때 실망하는 마음이 덜하다. 물론 그 반대의 결과가 나오면 행운을 얻은 듯 기쁨 또한 더한 것이 된다. 시간이 멈춘 듯 골목은 그대로였다. 녹이 슨 녹색 대문은 굳게 닫혀져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본 듯한 남자가 툇마루가 있던 그 집에서 나와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 옛날 주인은 다 돌아가셨죠. 집도 팔렸는데 지금은 아무도 안 살아요. 빈집이에요."" 남자의 집 안에서 개가 사납게 짖는다. 들어갈 땐 몰랐는데 나올 때 보니 개 짖는 집 옆집은 불탄 흔적 그대로 안이 훤히 드러난 채 비어있다. 하얀 레이스 커튼만이 멀쩡한 채로 유리문 안쪽에 조용히 걸려있을 뿐. (글/ 신준영 5longgol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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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향교골 명륜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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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 '나의 일생' 예안면 아키비스트 권상길
- 선성 사람 권상길의 '나의 삶 나의 인생'기록과 스크랩은 일상, 전직 신문기자 2019년 안동예천 근대기행은 생생한 르포취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다룬 <구술생애사>와 안동과 예천 두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사의 근간이 되는 '마을'을 테마로 한 <우리 마을 이야기>를 그려낼 예정이다. 다섯 번째 <구술생애사>의 주인공은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에 사는 86세의 권상길 씨다. 스크랩북 가득 걸어온 이력을 차곡차곡 모아둔 권상길 씨의 삶의 여정에 동행해 본다. 권상길 ⓒ백소애 예안면의 기록가, 권상길 예안면 동부리에 사는 권상길 씨는 '호모 아키비스트'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쪽 동네 어른들한테 '아키비스트' 얘기를 할 땐 말을 아주 잘~해야 한다. 잘못 하면 '아나키스트'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권 선생님, 진정한 아키비스트세요."" ""뭐라카노"" ""권 선생님, 기록을 정말 잘 남기셨다구요."" ""암, 그거 하난 내 자신하지."" 1960년대 구 예안 서쪽방향 ⓒ권상길 1960년대 구 예안 동쪽 방향. 뒤로 고통마을 가는 길이 보인다. ⓒ권상길 농꾼, 면서기, 정미소 사장, 신문지국을 운영한 신문기자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그 와중에 동장, 선거관리위원장, 의용소방대, 중대 소대장 등등 정부와 기관 단체에서 하는 업무에 적극적이었던 흔적을 보노라면 그는 경상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수적인 가장이 틀림없다. 그리고 저녁식사 중 정치뉴스를 보다 서로 언성을 높이게 되는 우리네 아버지일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러나 그는 해방과 전쟁, 지독한 근현대의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묵묵히 걸어온 성실한 사나이다. 자신의 삶의 과정을 기록하고 스크랩하여 모아놓은 권상길 씨의 공식적인 출생년도는 1936년, 그러나 실제로는 올해 86세다. 총기가 남다른 그이지만 자식들의 성화와 걱정에 이태 전, 운전면허를 반납했다. 지금은 처분한 자동차 대신 3륜 바이크를 몰고 서부리 시내를 누빈다. ""내가 34년생이래요, 올케로는. 호적에 늦게 올라갔니더만… 나이 먹은 지금은 어제 일도 잘 모르는데 옛날 일은 꽹해요."" 어제 일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그가 수십 년도 넘은 이야기를 술술 꺼내놓았다. 근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을 몸소 겪은 나이 아니던가. 고향은 예안면 귀단1리 고통마을이다. 공민왕이 몽진 때 지나갔다 하여 '높으신 분이 지나간 마을'이라는 '고통' 출신이다. 그가 해방 때의 기억을 풀어낸다. 예안공립국민학교 3학년 통지표 ⓒ백소애 해방과 전쟁 ""월곡 미질동에 고모가 살고 있었거든. 우리 할머니가 그 고모를 항상 좋아했단 말이래. 고통마을에서 미질까정 한 20리가 넘어. 할머니하고 그 길을 걸어서 갔더니 아이고, 울 고모가 아를 나놓고 있는 기라. 그래 고모가 출산을 하고 있는데 더 있을 수도 없고, 할매가 집에 가자 캐서 그 길로 다시 돌아 왔는 기라. 근데 집에 오니깐에 아버지가 뭐 허연 광목에다가 먹으로 뭘 막 기래. 그래 그게 뭐니껴 그러니깐, 생전 못 봤던 거거든. 야야 태극기 기린다. 태극기를 기려가지고 낼 자(장) 간다. 만세 부르러 장에 내려간다, 그 카시더라고. 그럼 그런갑다 하는데, 해방이 되었다고 캐. 내가 해방이 뭔동 아나, 해방이라는 거는 일본이 졌단다. 하니 할매 가 큰일났다, 일본이 지면 미국놈들이 와가지고 우리 코 꿰가 댕긴다는데 어야노, 이랬다마. 우린 교육을 그래 받았거든. 그땐 일본말로 베이에이 게끼메스(미영격멸). 이 말이 뭐냐면 미국놈 영국놈 찔러 죽이자 이카면서 총검을 가지고 우리 국민학교 때도 그런 교육을 받았다고."" 1955년경 귀단리 고통마을 ⓒ권상길 예안장까지는 걸어서 10리였다. 아버지의 만세를 직접 보진 못했으나 소년 권상길의 일상은 원하지 않게 격동의 세월 속에 포함되었다. 안동중학교 재학 당시에는 교육을 위해 시내로 이사를 나왔다. 식구는 아버지, 어머니, 형, 권상길 씨로 단촐했다. 안동중학교에 재학 시절부터 신문배달을 했는데 경향신문 안동지국에서 신문을 받아 학비를 벌곤 했다. 전쟁이 한창 때인 1950년 7월 29일 때의 일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지금의 안동시청 부근 향교골 친구 집에서 놀고 있는데 천주교 성당에서 방송이 나왔다. ""안동시민 여러분, 안동시민 여러분! 3일간만 남하(南下)하십시오!"" 친구들과 웅성거렸다. ""야, 남하가 뭐로?"" ""몰따 뭔 말인동""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당시 살던 안흥동 신시장 배전골목 집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아버지랑 어머니가 열심히 보따리를 싸고 있었다. 그도 옆에서 책을 싸니 아버지가 ""야야 그쿠 무거운 건 못 가간다. 우선 먹을 쌀하고 입을 옷이나 갖고 가야지 딴 건 아무것도 무거워 못 가간다.""고 해서 책도 버려두고 7월 29일에 피난을 나섰다. ""야단이 났지. 안동교를 건너가는데 그 광경이야말로 참 기가 막혀. 급하니께 뭐 보자기에 쌀 이고 온 사람들은 엎어지면 깨부고 말이 아니랬어. 밀리고 밀치고 그러이 성질 급한 사람들은 물을 건넜지. 7월이니 강물이 얼매나 불었겠어 근데도 막 건넜어."" 안동과 대구를 잇던 유일한 다리였던 안동교는 권상길 씨가 건넌 3일 후인 8월 1일 폭파되고 만다. 한국군과 국제연합군을 지휘하던 미8군사령부가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낙동강 방어선을 기획하고, 8월 1일 한국군에게 낙동강을 건너 남하한 뒤 안동교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9월엔 어디서 피난을 했나 하면 저 하양역 밑에 청천이라는 곳이 있었어. 청천역이 있는데, 그 청천역 뒤가 안심면 내곡동인데 거기에 우리 어머니 고모가 살고 있었어. 그래 그 고모가에서 피난을 했어. 그러다 9월 30일에 다시 올라왔거든. 안동 안흥동 배전골목 집까지 걸어서 오니 그때가 10월 6일이라. 와가지고 내가 젤 처음 찾은 게 책이래. 책을 찾으니 있나 어디? 다 타부리고 없는기라. 남은 거라곤 그저 쇠 쪼가리 옹기 쪼가리뿐이라. 그래가지고 다시 예안면 귀단동 우리 고향으로 갔어. 거기를 가니 우리 삼촌, 할머니 이래 살고 있는데, 쌀을 좀 달라 하니 쌀이 없어. 인민군에게 전부 몰수당해서 없다 이래. 가정 형편이 할 수 없으니 내가 고등학교를 못 갔는 기라. 1951년에 안동중학교를 졸업하고 그때 우리 동기생들이 마뜰에 가서, 벽돌을 벗겨가지고 안동고등학교를 지었어. 지금은 저짜 정하동으로 갔지."" 3일의 남하는 두 달여가 되었다. 피난을 갔다 안동시내에 도착하니 10월 6일이었다. 무릉재에 올라오니 빨간 벽돌건물로 된 학교가 그대로 있어서 다행이다 했는데 가까이 와보니 형체만 있고 속은 다 폭격을 받아 부셔져 있더란다. 안동 시내가 70% 이상이 폐허가 됐지만 안동교회는 멀쩡했다. 서악사 광감루에서 공부를 하니 너무 비좁아 학교에서 교회를 빌려 교회에서 3학년 공부를 하고 1951년 7월 18일, 여름에 졸업을 했다. 총 4개 반이었는데 동반, 서반, 남반, 죽반으로 반을 나누었다. 북반은 없었다. '북'반 이 아닌 '죽'반이라 불렀는데 아마 시대적 상황 때문이 아닌지 추측해볼 뿐이다. 60명씩 4개 반 모두 240명이었는데 피난 때 생사를 모르는 친구들이 많았다. 당시 학도의용군에도 40명이 지원했다고 한다. 1951년 7월 안동교회에서 찍은 안동중학교 1회 졸업사진. 앞줄 다섯 번째 오른쪽 네 번째가권상길 씨 ⓒ권상길 교사에서 다시 학생으로 그리고 해병대 입대까지, 쉴 틈 없는 청년기 함께 졸업한 동기들이 진학할 고등학교를 짓고 있을 때 권상길 씨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공백의 기간 동안 마침 예안 동계초등학교 공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사범학교를 나와야 교사를 했을 때니까 그는 '강사'였던 셈이다. 공민학교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이었다. 동계국민학교 교사 신분증명서 ⓒ백소애 ""글때 동계국민학교라고 있었어. 거기 공민학교라는 게 부설로 생겨서 거서 학생을 가르쳤어요. 지금은 폐교됐지. 예안면 태곡동인데 지금도 학교는 그대로 있어. 그때 학교를 못간 애들이 내 또래 비슷해. 내보다 조금 작게나… 아-들 국문해득을 다 시켰어. 그러자니 말을 아주 많이 했거덩… 교사질 하이 배가 고팠어, 허기가 져. 에너지 소모가 커서. 잠깐 하긴 했어도 힘든 일이야."" 그러다 예안고등학교가 설립되면서 입학하여 1회 졸업생으로 졸업을 했다. 못다 한 고등학교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병역이 해결됐지만 이후 실제 나이 스물다섯에 해병대에 입대하게 된다. 진해에서 훈련 받고 포항 가적도 등지에서 활동했다. 사관과 신사. 1959년 여름, 휴가를 맞아 도산서원을 찾은 권상길(왼쪽) 씨. ⓒ권상길 ""내가 해병대 77기라. 어디 나가면 선배는 별로 없어, 마구 후배지. 지금은 아마 1000기가 넘었지 싶어. 당시엔 자부심이 대단했지. 헌병이 검문을 해도, 우리는 무기를 갖고 있어도 건드리지 않았어. 그럴 때는 괜시리 어깨 힘도 들어가고 자부심을 느꼈어. 뭐 결혼을 하고 갔을 때라 다 보고 싶었지만 맹 애들 어마이가 제일 보고 싶었지. 군에서 '화랑'이라는 담배가 나오거든, 내가 담배를 안 태워. 그걸 하나둘 모아놨다가 집에 와서 아부지 드리면 되게 좋아했어. 휴가 한번 나오면 이동하는 시간이 많이 걸렸어, 힘든 거 같지? 웬걸, 이동하는 게 좋았어. 군용열차가 주로 밤에 있거든? 안동서도 밤 9시쯤 올라가고 청량리서도 9시쯤 가는데, 한두 명만 타놓으면 하나는 끝에 앉고 하나는 중간에 앉는데 그 중간에 육군은 못 앉아 갔었지. 늦게 올라가도 자리가 있었거든. 중간에 척 하니 앉고 가고… 그땐 좀 그런 게 있었어."" 해병대 행정병으로 타자를 쳤던 그는 국문학을 좋아해 국문학 독본과 고전을 즐겨 읽곤 했다. 1960년대 후반 수몰 후 동부동 지금 집터 마당에 지은 동부정미소 ⓒ권상길 동부정미소 1963년쯤 시작한 정미소(방앗간)는 1980년대에 그만두게 되었다. 수몰로 물이 들고난 후에도 동부리 지금의 집터에 새로 지어 꾸려온 정미소는 가계가 자리 잡게 된 계기도 됐지만 몸이 골병 나게 된 계기도 됐다. ""저 밑에서 정미소를 하다가 75년도에 수몰이 되가지고 지금 우리 마당으로 옮겨 지어서 하다가 고마 치아뿌랬어. 서부동에 정미소가 하나 있었고, 우리 동부동에는 다른 이가 정미소를 지을라고 하는데 터를 못 구했더랬어. 그런데 내가 한다 그러니 동네에서 선뜻 주는 기라."" 1965년쯤 물 들기 전의 동부정미소 ⓒ권상길 1965년쯤 권상길 씨 내외에게서 용돈을 갈취(?)하는 큰 딸과 막내 딸 ⓒ권상길 예부터 마을의 우물가, 정미소, 이발관, 미용실은 모든 동네 소문의 근원지요 요긴한 정보가 오가는 곳이자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이나 다름없었다. ""요새는 쌀 10키로, 20키로 이렇지만 그때는 80키로 랬다고. 가마니에 넣으면 엔간한 사람 몸무게보다 더 나가는 걸 번쩍번쩍 들었으니 골병이 나지. 건강할 때 너무 자신했어. 내가 지금 현재 인공관절을 양쪽 다 넣었거든. 성소병원에서 2010년도에 했어. 사진을 보면 인공관절이 닳아서 한쪽으로 닿여. 뼈과 뼈가 데이면 되게 아퍼. 건강관리는 건강할 때 해야 돼."" 1963년 월천서당 강변에서. 예안면 면서기로 근무 당시 자바라 카메라로 찍은 사진.소산병원 원장, 지서장 면장, 조합장 등 예안면 삼계출장소 개소식 후 낙동강변 달애(다래)월천서당 강변에서 포즈를 취한 지역 유지들의 모습. ⓒ권상길 신문기자로 활약하다 제대 후 예안면 면서기로 잠깐 일하게 되면서 각종 행사장을 카메라를 들고 누비게 된다. ""집에서 약품 하이버라고 있어. 요새 사진관에 물어보면 하이버를 타면 원판에 형체가 나타나. 그래 되면은 어느 정도 됐다 싶을 때 증착기에다 담가버려. 담가 보면 딱 고만 화면이 스톱되지."" 자바라 카메라를 들고 찍은 사진에는 예안면의 기록이 현상되어 있다. 그가 살아온 삶의 다양한 이력 속에서도 당시 흔치 않은 직업인 신문기자가 단연 눈에 띈다. 어려서부터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 그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직업이 아닐 수 없다. 1962년 경향신문을 시작으로 이후 매일신문, 영남일보 지국을 운영했고 동시에 자연스레 기자로도 활동했다. 그는 당시 거래했던 장부를 아직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1964년 경향신문 신문기사. 권상길 씨가 직접 쓴 기사, 낙동강 아홉구비 내려오는 예안면 서부리 낙동강 기슭에는 조선시대 왕실에 은어를 잡아 올리기 위해 저장해둔 석빙고가 있다는 내용.(자료제공: 권상길) ""매일신문, 영남일보 할 적에 독자들 구독료 받던 장부래. 옛날 장부지, 거래장이라고도 할 수 있고. 보자, 77년도에는 그때 월 구독료가 400원, 600원 그래 할 때야. 구독료 받고 본사에서 나오는 영수증을 띠주곤 했지. 당시 이 지방 유지들은 싹 다 알았지. 그래도 볼 만하니 보지, 무식꾼이 어디 신문을 보겠나… 구독자도 꽤 됐어."" 신문 구독료 장부 ⓒ백소애 양조장, 이발소, 미장원, 면장, 서울사진관, 신흥가구점, 예약약국… 1960년대 시내라는 것은 예안장터를 말하는 것이다. 토박이부터 기관장까지 유일한 '미디어'의 창구였던 신문으로 예안의 소식통이자 기록가가 되었다. ""당시엔 보도증으로 기사를 무료로 실어줬지. 젤 처음에 경향신문 지국을 하고 그 다음에 매일신문을 했어. 중앙지하고 지방지하고 두 개를 했어. 나중에 영남일보 지사장 권오인 씨라고 우리 일간데, 영남일보를 지국을 하면 어떻겠노, 해서 영남일보를 맡았지. 전국적으로 경향신문을 많이 봤어. 예안에서 타지에 가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사람들이 고향 오면 나를 갖다가 향토예비군이라 그랬거든. 나는 고향을 안 떠나고 항상 고향에 있었고 또 고향의 소식을 경향신문에 많이 냈으니… 경향신문을 타지에서도 많이 본다고 했어. 출향인들이 고향 소식을 보기 위해서 신문을 본다카이 나도 보람이 컸지."" 연애 반 중매 반, 우리가 빠지는 인물은 아니지 동부리 권상길 씨 댁을 방문했을 때 부인 엄원조 씨는 재봉틀을 밟고 있었다. 50여 년 전에 9천원에 월부로 주고 산 아이디알 미싱은 아직도 건재하다, 마치 부부처럼. 당시 매일신문 예안지국을 경영하던 권상길 씨가 그나마 형편이 좀 되어서 구입한 것이다. 이 재봉틀로 해마다 아이들 옷을 직접 지어 입혔다. 동갑내기 옆지기 엄원조 씨 ⓒ백소애 ""우리 둘 다 실지로는 갑술생이야. 1934년 갑술년에 안동에 홍수가 범람해 영호루가 떠내려갔잖아. 난 2년 늦게, 마눌님은 1년 늦게 호적에 신고했지. 옛날엔 그런 일이 숱했으이. 할마이는 어렸을 적에 저 아부지 따라 일본 갔다가 해방되고 나왔어. 가까운데 살았으이 얼굴 정도는 알았지. 실제 나이 열아홉 동갑에 결혼했거든. 동네서 대놓고 연애는 못하고, 처삼촌 되 니하고 우리 아버지하고 친구 간이거든. 사우 삼자, 며느리 삼자 했지. 뭐 사실 우리 동네서 우리 할마이도 여자로선 잘 생겼고 나도 남자로선 안 빠졌지."" 부리부리 선이 굵고 진하게 생긴 남자와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여자의 만남이었다. 젊었을 땐 누구 엄마, 임자, 여보 그렇게 불렀다. 1950년대 권상길, 엄원조 부부 ⓒ권상길 ""지금은 할마이라 그러지. 자기는 영감이라 그카고. 성질이 우린 반대야. 임자는 A형이고 나는 O형이거든. 저기는 성질이 굉장히 세밀하고 먼지도 하나 있음 안 되고, 안 그래도 오늘 손님 온다고 이불도 막 개놓고… 내야 까짓 노인방인데 뭘 그래 하지만서두. 싸워보기는 했지만도 싸워봐야 칼로 물 치기라, 암 것도 아니지. 집 사람이 세게 나오면 내가 입을 다물지. 싸워봐야 이웃에 남사스럽고 아-들 보기 영 아니어서 안 싸우지. 내가 말을 안 하면 조금 지나면 누그러져."" 은륜 친목회 무릉 야유회. 가장 행복했던 시절. ⓒ권상길 은퇴하고는 우리 집 옆에 전지가 한 600평 됐던 거 그걸 경작했지. 농사일도 손 놓은 지가 한 3년? 이젠 몸이 예전 같지가 않아서 슬슬 다 내 손에서 떠나보내고 있어. 일평생 중에 제일 즐겁고 행복했던 시절을 묻자 그는 딱 3초도 고민 않고 바로 대답했다. ""오도바이 친목회 '은륜 친목회'라고 있어요. 은륜은 은빛 바퀴라는 뜻이야. 부부 동반으로 속리산도 가고 고은사도 가고 할마이 태워가지고 여럿이 한 십여 대 됐나? 열 쌍 정도 되는 사람이 맘 맞아서 열심히 놀러 댕겼지. 암산 보트장에 가서 보트도 젓고 애들도 젊고 우리도 젊고 좋았어. 아주 즐거웠던 시절이었어."" 지금은 벌써 해체됐지만 젊은 시절 거침없이 도로와 산과 강, 좋은 사람들과 좋은 곳에서 보냈던 기억이 선하다. ""그러다 95년쯤 티코 사고 다음에 노란 마티즈, 은색 마티즈… 그렇게 몰다가 자동차도 은퇴했지."" 그의 청춘과 함께 했던 바이크 ⓒ권상길 새로운 것 배우기를 두려워 말라 예안에 속했다가 도산에 속했다가 귀단에 살았다가 서부리로 갔다 안동댐 수몰로 서당골로 그러다 또 동부리로, 사연 많고 이동 많은 삶속에서 그는 돌이켜보면 자신의 삶이 그다지 권장할 게 못되는 삶이라고 말한다.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니더만. 여기저기 다니니까 사람 꼬라지가 안돼. 내가 줏대가 없나봐. 요즘엔 젊은 사람들한테 그케요. 뭐 하나만 똑바로 잘하면 되고, 한 직장을 가져도 그것만 꾸준히 하지 나처럼 이것저것 하다가는 이도저도 아니게 된다고."" 많은 일 중 가장 적성에 맞았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하여튼 뭔가 많이 했고 많이 기록하고 그랬소만!"" ⓒ백소애 ""그 당시에 할 적에는 다 내 적성에 맞는 거 같지. 신문할 적에는 신문이 맞고 정미소 할 적엔 정미소가 맞는 거고, 다 맞으니까 그래 했지. 하기 싫으면 다 치왔지. 너무너무 복잡해. 생활이. 아 다섯이 키우는데 내가 그쿠 나대니 부모 노릇을 올케 못했어. 연년생도 있고 줄줄이 복작복작하니 살았어. 첫째는 바로 밑에 동생 때문에 젖도 제대로 못 먹였어… 공납금도 한꺼번에 나가서 밀리기도 하고. 지금 봐도 미안치 뭐. 세상에서 제일 맘대로 안되는 게 자식이랑 날씨 잖어."" 그는 총기가 있을 때 자필로 또렷하게 유언장 작성도 미리 해놓을 참이다. 근 몇 년 전엔 무릎에 인공관절도 넣었고 백내장 수술도 하고 이 치료도 하고 이래저래 탈나는 데도 많다. 개인병원은 물론이고 성소병원, 안동병원도 꾸준히 다니지만 마지막엔 안동의료원으로 가야한다고 말한다. 왜 의료원으로 가야하냐고 의아해하자 그가 말하길 ""거서 죽어야 아-들 댕기기가 쉬워."" 그의 실용유머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수몰이 되고 얼마 안 되는 수몰 보상금을 받고 사람들은 '여기서 300리 밖을 나가라'고 했다. 300리 밖을 나가야 그 돈을 가지고 뭐를 좀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도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성공한 사례가 많다. ""하여튼 뭔가를 많이 했어. 했는데 성공한 건 하나도 없어."" 성공의 사전적 의미 중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목적한 바를 이루는 것'이고 또 하나는 '거룩한 공적'이다. 후자까지는 안 되더라도 그는 전자를 이루었다. 호기심 많고 열정적이었던 그의 삶은 자신의 메모지에 적어둔 말과 그 결을 같이 한다. '새로운 것 배우기를 두려워 말라.' (글/ 백소애 sodoor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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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 '나의 일생' 예안면 아키비스트 권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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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 혹독한 삶의 시련, 글로 위로하다 안동시 일직면 광연리, 권영숙 시인 이야기
- - 70에 첫 시집을 낸 할머니 시인- 파란만장 그 세월 '참 재밌다 그지'- 거친 풍파 헤치고 야생화처럼 피어난 삶 권영숙(75) 할머니 ⓒ정형민 2019년 안동예천 근대기행은 생생한 르포취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다룬 '구술생애사'와 안동과 예천 두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사의 근간이 되는 '마을'을 테마로 한 '우리 마을 이야기'를 그려낼 예정입니다. 네 번째 '구술생애사'의 주인공은 안동시 일직면 광연리에 사는 권영숙 할머니입니다. 칠십 넘어 첫 시집을 낸 할머니의 삶은 '시' 그 자체입니다. 거친 풍파를 헤치고 야생화처럼 피어난, 사랑에 용감했고 시에 몰두했던 권영숙 할머니의 삶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편집자 일직면 광연리 ⓒ정형민 여든을 바라보는 내가이제 첫발을 딛습니다.60억 인구 중의 미미한 존재지만무엇이 되고 싶었습니다. 나의 내부에 참답게 관용을 못한 채평생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쓰든 달든 나만의 길,아름다운 동화처럼 그저 그립습니다. 2018년 봄 - 권영숙 시집 <참 재밌다 그지> 서문 일직면 광연리 사는 권영숙 할머니. 70대 할머니가 되어서 첫 시집을 내신 분이라는 얘기를 듣고, 올해 개봉한 다큐멘터리 '칠곡 가시나들'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내 뇌는 스스로 권영숙 할머니에 대한 선입견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할머니가 되어서 뒤늦게 시를 배우고, 시집을 내셨나 보다.' 인터뷰 약속을 잡기 위해 전화를 하면서 어떤 호칭을 사용할까 참 고민이 많았다. 권영숙 시인, 시인 할머니, 할머니, 어르신…. 낯선 어른을 뵙는 일은 참 어렵다. 다행히 첫 통화에서 낯선 만남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없어졌는데, 통화 말미에 시인께서 해주신 말씀이 따사로이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권영숙 시인… 선생님이세요?"" ""예, 글니더."" 사투리를 구사하는 투박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내가 사는 봉화 산골 동네의 옆집 할머니랑 얘기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저는 오지 다큐를 찍는 정형민 감독이라고 합니더. 어르신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는데, 인터뷰 날짜를 잡으려고 전화드렸습니더. 저도 11년 전에 봉화로 귀촌해서, 어머니랑 함께 살고 있습니더."" ""아이고 효자시네. 어머니까지 모시고……"" ""아닙니더. 결혼도 못 하고 아직 어머니 옆에 있는 불효잡니더.""""그런 게 중요한가?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면 그게 최고지."" 사실 할머니의 답변에 많이 놀랐다. 주변에 계신 어른들은 한결같이 ""빨리 결혼해서 어서 아기를 낳아야지.""라는 말씀을 하셨으니까. 아주 짧은 대화였지만, 처음에 가졌던 선입견이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보통 할머니들과 많이 다름!' 갑자기 내 마음은 권영숙 할머니와의 만남에 대한 기대로 설레기 시작했고, 할머니한테서 삶에 대한 소중한 지혜들를 얻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첫 만남은 안동향교회관에서 이루어졌다.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소학을 배우러 안동향교회관에 나오신다고 하셨다. 솔직히 첫 모습부터 남다르셨다. 체구는 작았지만, 허리도 꼿꼿하고, 작은 배낭을 멘 모습에서 활기와 정열 같은 게 느껴졌다. 할머니께서 점심을 먹고 집으로 가자고 하셔서, 일직면 읍내에 들렀다. 할머니는 자꾸 불고기를 먹자고 하셨는데, 한눈에 보아도 손님 대접을 하시려는 게 분명했다. 내가 몰래 밥값을 계산해도 야단을 맞을 것 같아서 머리를 굴렸다. ""어머니, 불고기가 드시고 싶습니꺼?"" ""귀한 손님이 이렇게, 아니 오셨는데, 그래도 맛있는 걸 대접해야지요."" ""그럼 저는 간단히 먹으면 좋겠습니더. 제가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고기를 먹지 싶습니더."" ""그러니꺼? 그러면 정식 먹을까요?"" ""네, 정식이 딱 좋겠습니더."" 시인 할머니를 만나기 전부터 아주 궁금했던 게 있었다. 일직면에 산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제일 먼저 권정생 선생님이 떠올랐다. 일직면에 권정생 선생님도 일직면에 사셨으니, 권영숙 할머니와 어떤 인연이 있지는 않을까? 일직 권영숙 할머니 댁 ⓒ정형민 일직 권영숙 할머니 댁 ⓒ정형민 늘 동경했지만 끝내 만나지 못했던 권정생 선생 우리 집안 어른이지요. 우리 마을에 권씨가 50명쯤 살아요. 권정생 할배가 일직면 조탑리에 사셨잖아요. 근데 내가 선생님 살아생전에는 우리 집안인 줄 몰랐어. 제일 가까운 집안인데 몰랐다니까! 돌아가시고 나서 뒤늦게 알았지. 내가 그것도 모르고… 정생이 할배 부친은 옛날에 우리 집에 와서 더러 밥도 자셨는데, 굉장히 못살았어. 그때 우리 집은 밥은 먹고 살았기 때문에 그 할배가 더러 오셨어. 어른이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간이 털썩 내려앉더라꼬. 우리 집안 어른인 줄 몰랐을 때도 늘 뵙고 싶었지. '몽실 언니'가 테레비에 나오고 그라니까, 우리 일직에 저런 유명한 분이 계시는데 언젠가는 한번 그 할배를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남편 없이 사니까 내 삶이 얼마나 힘들어. 막노동판에 가서 일 마치면 해가 빠지제. 또 그 할배 있는 마을이랑 우리 동네는 왕래하기가 참 힘들어. 조탑이 옛날에 엄청 깡촌이라서 차가 잘 안 갔다니까. 그래가 못갔다카이. 그래서 내 마음이 안 좋아. 살아생전에 한 번이라도 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 할배가 젊었을 때부터 몸이 아팠잖아. 폐 질환을 앓다가 또 복막이랑 방광까지 그 세월을…그래서 내가 저 할배는 저렇게 아픈 몸으로도 글을 쓰는데 나는 도대체 뭐 하는기고 싶어서 늘 마음속으로 동경했지. 그런데 우리 모친도 정생이 할배 돌아가신 그해 5월에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장례 때도 못 가봤지.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었거든. 권영숙 할머니의 방. 머리맡 서랍장에 권정생 선생 사진과 모친과 함께 찍은 사진이 놓여있다 ⓒ정형민 어느 날 일직면 공공근로일을 하게 되었는데, 정생이 할배 집 일을 시키더라고. 한 달 동안 했어. 조탑동에 가서 환경미화하고, 방문객들 맞을 준비하고, 꽃밭 만들고, 코스모스 심고, 메밀 갈고 홍초 심고... 하여튼 멋지게 만드는 거야. 그때 우리가 벽화도 그리고 일을 했거든. 그렇게 갈 수 있는데, 내가 왜 한 번도 할배한테 못 찾아갔는가 싶더라고. 살아 계실 때 할배를 봤으면, 내 인생이 더 빨리 달라졌을지도 몰라. 그때는 시를 쓸 생각은 안했지만, 그래도 혼자서 주절주절 글을 계속 쓰려고 했었거든. 쓰려고 하는데, 글은 잘 안 되고... (웃음) 막 그러면서 살았지. 정생이 할배는 정신력이 놀라워. 책을 얼마나 많이 쓰셨는지, 나중에 도서관에 가니까 할배 책이 그만치 많은 걸 알았지. 동화 쓰기가 진짜 힘들잖아요. 그 불편한 몸으로도 아이들 생각하면서 그렇게 많은 책을 쓰신 걸 보면, 진짜 역사적인 인물이지. 정작 당신은 홀로 그렇게 아프고 힘들게 사시고, 남을 위해 잘 살게 해주고 떠나셨잖아요. 권정생 동화나라에서 ⓒ정형민 어디까지 왔나 세월에 배 띄워오니 순풍만 아니더라허허벌판에 모가 깨진 마음이 웃습니다 놀란 꿩처럼 휘둥그래 뜬 생각이아직은 살아 있다는 긍정을 가져봅니다 한순간의 일도 낮잡아 잊어버리는잎 진 꽃입니다접혀진 투박한 나이테는옹졸하게 시샘까지 합니다 희망을 가져보아라붙잡아보고 싶어도 손 새에 빠지는 모래알 같습니다 냉골에 들기 전까지뇌세포의 포말을 또렷이 하기 위하여신의 로고스를 찾아도 봅니다 나는 내가 뭣을 해야 되는지도어벙벙해지며해목은 어머니 사진만 자꾸 꺼내봅니다 - 권영숙 시집 <참 재밌다 그지> 부잣집 딸인 어머니, 농림학교 수재였던 아부지 우리 엄마는 임하면에서 부자집 딸이었어요. 논만 4백 마지기에 집 대지가 6백 평이었어. 어머니가 한 살 연상이셨어요. 외할아부지가 엄청 부자였지만, 여자가 공부하면 바람난다고 어머니를 학교에 안 보내셨다니까. 그런데 아부지가 농림학교를 나왔는데 소문난 수재였거든. 그래서 아부지가 평범한 집안 출신이지만, 아부지한테 엄마를 시집을 보낸 기라. 우리 집도 대가족이었는데, 위로 오빠가 있고, 내가 둘째 그리고 남동생, 그 밑으로 쭈루룩 딸만 넷 그렇게 7남매였지요. 내가 1945년 12월 24일에 태어났는데, 그때는 다 출생신고를 늦게 했잖아. 하지만 아부지가 면사무소에 근무하셔서, 내가 태어나자마자 바로 출생신고를 했어요. 어릴 때 외갓집에 가면 하인들도 있고, 큰 괘종시계가 당당 울리고, 재봉틀도 있고 집안에 온갖 화초가 피어 있고 선인장까지 있었으니까, 진짜 부자지요. 그런데 우리 엄마가 아부지한테 시집와서 고생이란 걸 처음 해본 거지. 엄마는 가난하게 사실 때에도 몸에 한 줌 흐트러짐이 없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에 동백기름 바르고. 사람들 눈에 교만하게 보일 정도였어. 우리 집도 부자였는데, 아홉 살 때까지 머슴한테 업혀 댕겼어. 그때 집에 목화밭이 있었는데, 목화 수확할 때면 할매가 꼭 날 데리고 갔지. 그럼 나는 밭고랑에 혼자 놀다가 목화 가시에 긁혀 피가 나면 엉엉 울었지. 나의 아픔은 나의 아픔은 사랑덤빌 줄도 모르고구할 줄도 모르고어리석게 오랜 기다림으로쫓아오기만 기다리는 바보그대를 꿈꾸며나를 노래해 달라눈물 흘리며바보처럼어리석은 행복을 기도하며하염없는 기다림 속에그대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눈물 뿌린 시간을 보내는바보로 남으리라 - 권영숙 시인의 오래전 일기장에서 일직고등공민학교 시절. 왼쪽이 권영숙 할머니 전쟁이 끝난 후 나타난 낯선 남자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6.25가 터지고, 우리도 소달구지를 타고 의성까지 피난을 갔어. 의성에서 소도 내버리고 그때부터 청도를 지나서 밀양까지 걸어갔지요. 그때 내가 6살이니까, 발이 엄청나게 부어올랐어. 그러다가 밀양에서 오빠까지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할매랑 엄마가 엄청 울었제. 아부지도 장남이라고 얼마나 예뻐했겠노. 다행히 오빠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니까 자기 이름은 쓸 줄 알잖아요. 그래서 아부지 이름을 부르고 다니니까, 누가 데리고 왔더라고. 그런데 오빠를 찾자마자 아부지가 붙들려 가버렸어. 헌병들이 막 호루라기를 불면서 검문을 하는데, 우리 아부지가 외동이니까 집안을 지켜야 했거든. 그래서 친척 할배들이 우리 아부지는 붙잡혀 가면 안 된다고 엄마 치마 밑에 숨으라고 했지. 그때 엄마가 여동생을 임신해서 배가 산처럼 불룩했는데, 거기 숨으면 우쨌겠노? (웃음) 하여튼 아부지는 막 화를 내시더라고. 사나이 대장부가 군대에 가야지, 여자 치마 밑에 왜 숨노 하면서……. 그래서 당당히 붙잡혀 가버렸어. 군대를 갔다가 왔는데 전쟁이 나서 또 끌려가신 거야. 그래서 아부지가 전쟁에서 살아 돌아올지 알 수 없으니까, 엄마는 나를 오빠 따라 학교에 일찍 넣었지. 그런데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학교에 갔다 오니까 얼굴이 누런 남자가 마루에 앉아 있더라고. 속으로 얄궂어 보이는 저 남자가 누굴까 생각했지, 내가 아부지를 못 알아봤어. 그때 간디스토마에 걸려서 얼굴이 누렇게 돼서 돌아왔더라고. 엄마가 개를 얼마나 잡았는지 몰라. 그래서 겨우겨우 살아나셨어. 아부지가 간간이 군대 끌려가서 겪었던 얘기를 해주셨어. 총살당할 뻔했다가 살게 됐다고. 전투가 한창 벌어졌는데, 산에서 굴러 떨어져서 뒤에 혼자만 남게 되셨대. 다행히 산을 헤매다가 부대를 찾았는데, 탈영병이라고 총부리를 딱 겨누더라네. '아! 이제 죽었구나' 생각하셨는데, 마침 거기 책임자가 농림학교 후배였는기라. 그래서 그 후배 덕분에 총살을 면했지. 아부지는 팔에 총 맞은 자국도 있었어. 전투하다가 총알이 팔을 관통했거든. 일직고등공민학교 시절. 기차를 타고 수학여행 가는 길 전쟁이 끝나고 아부지는 다시 면사무소에서 근무하셨는데, 아부지 간호한다고 집안 살림이 많이 기울었지. 그래도 참 멋쟁이셨어. 일직면장도 오래 하시고…. 그때는 학교 마치면 면사무소에 놀러 가서, 인쇄하는 롤러를 가지고 장난도 많이 쳤지. 아부지가 면장 선거 나갈 때 논밭까지 다 팔아버렸어. 그래서 내가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어요. 그때 중학교 입학금이 3,300원인가 했는데, 입학금이 없어서 안동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합격은 했는데 못 갔어. 집안 살림도 어려웠지만, 오빠가 사범대학에도 가야 되고, 밑에 남동생도 있으니까. 그래서 놀다가 동네에 있는 일직고등공민학교에 조금 다녔어. 인가가 없는 학교였는데, 그때만 해도 학교에 늦게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나보다 5살 많은 학생도 있었어요. 일기장을 꺼내본다 ⓒ정형민 노을 누가 사랑을 하다서쪽 하늘에 걸어둔 건가다 못한 정애타는 불꽃인가그래서 그리움이 목말라그토록 발갛게 타나 눈물 젖은 너속 오빈 마지막 적선에갈대밭 함께 불탄다피라미 떼만 반짝반짝노을 춤추는여울살 물 구르는 소린백사장 붉고 고운 이마에어둡살이 앉으려니물새야너는 또 왜 달떠 우는가 - 권영숙 시집 <참 재밌다 그지> 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혼 부모님의 결혼 반대, 그리고 삭발 초등학교를 일곱 살에 들어갔어. 옛날에 오빠나 언니한테 책을 물려받잖아요. 그래서 1년 일찍 학교에 들어갔어. 그때는 학교도 멀고, 공부하기 싫어서 맨날 울었어. 학교까지 10리 길이었거든. 왕복 20리. 학교 안 가고 철둑에서 맨날 놀아뿌러. 그럼 엄마가 부지깽이 들고 막 쫓아 와. 그럼 울면서 도망가고, 할매 치마폭에 숨고 그랬지. 난 어릴 때도 내내 혼자 놀았어. 그때는 같은 성 아니면 같이 안 놀아줘. 같은 집안사람 아니면 안 놀아준다니까. 원래 고향 마을(일직면 원리)에는 권씨들이 없었어.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때 여기 광연리로 이사를 했지. 여기는 권씨 집성촌이거든. 그런데 학교가 더 멀어졌어. 왕복 30리나 됐지. 지금 사는 이 집을 아부지가 동네 어른들하고 직접 지었어. 큰 기와집을 뜯어서 소달구지에 싣고 옮겼지. 작은 짐들은 지게로 옮기고. 옛날에는 원래 살던 집을 뜯어서 새집을 짓곤 했다꼬. 초등학교 4학년 때 광연리로 이사하고 나서부터 우리 주인(남편)을 봤어요. 나보다 두 살 위 동네 오빠였는데, 같은 학교 한 해 선배였지요. 우리 오빠랑 같은 학년이었는데, 오빠가 공부를 잘했거든. 그래서 공부 못하는 우리 아저씨를 상대도 안 하더라고. 그래도 나는 우리 아저씨가 참 좋았어. 사람이 참 착했거든. 그때 우리 신랑 등에 타고 개울도 많이 건너다녔어. 맨날 물 건널 때 업어주곤 했어. 그러다가 우리 주인이 가슴 속에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나 봐. 그런데 나는 아예 아닌기라. 우리 집하고 그 집하고 너무 차이가 나니까. 그런데 아저씨가 우물가에 쪽지를 갖다 놓으면 내가 잽싸게 챙겼지. 다른 사람이 보면 절단날 일이제. 어쨌든 어릴 때부터 만났으니까 나도 결혼을 해야 하는갑다 생각했는데, 부모님이 정말 반대하는기라. 그래서 우리 아저씨한테 시집 안 보내주면 죽어버린다꼬 내가 내 머리를 빡빡 밀어 버렸어. 그러면 다른 데 중매를 못 설 테니까. (웃음) 그때는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 그때 나랑 선을 봤던 남자가 대학 교수가 됐는데, 지금은 퇴직했을끼라. 그 사람이 우리 집안 동생한테 묻더래. 나랑 선봤던 그 아가씨는 지금 어떻게 사느냐고. 그래서 내가 그 사람 지금 다마내기(양파) 까면서 하루 3만 원 번다캐라 그랬지. 우리 아저씨가 나한테 혈서를 써서 마음을 고백할 정도로 날 열렬히 사랑했어요. 결혼하고 나서도 고생을 말로 다 못할 정도로 많이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한 번도 안 싸웠어. 우리 아저씨가 정말 착하고 순딩이었거든. 가끔 내가 화를 내도 늘 나를 안아주었어. 할머니를 열렬히 사모했던 남편 김동혁 어머니(배성화)와 함께 오! 사랑이여 피맺힌 사랑이여당신의 마음이 가버렸나내 마음이 가버렸나 저 멀리시냇가아지랑이 아롱거리며살랑이는 봄바람을 타고 당신의 사랑은나의 귓전에 와 닿았지너를 사랑했노라고무척 사랑했었다고 허지만지금은찢기우는 눈물이마음을 찢는아픈 사랑을 낳았지 오! 맑았던 그 사랑이여!어릴 때 꾸밈없었던 그 사랑이여 (중략) - 권영숙 시인의 오래전 일기장에서 국제염직에 다니던 시절의 남편(앞줄 왼쪽). 문래동 판자촌 생활 결혼반지도 못 주고받았어. 내가 스물넷이고, 신랑이 스물다섯이었지. 그때 너무 가난하니까, 반지 값으로 돼지 새끼를 한 마리 사서 그걸 살림 밑천으로 시작했지. 그렇게 그래저래 살다가, 신랑이 국제염직에 다녀서 서울로 올라갔어요. 영등포 문래동이랬어. 그런데 세상에나 올라가 보니까 여기 거지는 거지도 아니야. 다 쓰러져가는 판자촌에 완전히 진창이더라고. 영등포 그 둑에서 살아가는 삶이. 그런 데서 몇 년을 살았다니까, 맨날 눈물 찔찔 흘리면서. 거기 강서구 화곡동이 그때는 전부 다 논이었어, 목동까지. 강둑에 나가서 새우도 잡으러 다녔지. 쪼깨난 새우가 억수로 많았어. 그리 살아선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멸치 장사도 하고 떡 장사도 하다가 그때부터 내가 담배에 손을 댔어. 내가 내 삶을 못 받아드리겠더라고. 너무 형편없이 사니까. 얼마나 못살았는지 설명하기도 힘들어. 엄청 작은방에 연탄불 피워서 겨울을 나고, 수돗물도 사람들이 물통 들고 가서 10원, 20원 주고 사서 먹었다니까. 주인집에서 수돗물까지 팔아먹고 살아. 서울에 있을 때 첫째를 낳았는데, 겨우 돌 지난 애를 방에 남겨두고 문을 잠가 놓고 일하러 다녔거든. 옛날에는 여의도에 공군부대가 있었는데, 거기서 일하면서 그렇게 울고불고 살았어. 다다미방이 추우니까 애(장남)는 맨날 설사하제, 도저히 살 수가 없어. 그래서 안동으로 내려와 버렸지. 우리 아저씨한테 나는 다시는 서울 안 간다고 그랬어. 나 혼자서 애기를 데리고 친정에 와부렀지. 그런데 우리 아저씨도 빚만 늘고 생활이 안 되니까 안동에 내려왔지. 두 아들 규완, 규진과 함께 우리 동네 뒷산이 문중 산이거든. 그래서 농사를 지으려고 거기를 개간하기 시작했지. 우리 아저씨가 얼마나 부지런한지 몰라. 밤에도 초롱불을 들고 가서 일하는기라. 그러다가 초롱불이 꺼지면 컴컴하니까 집에 돌아왔는데, 그게 새벽 한 시고 그랬어. 그렇게 뒷산을 일구었지. 그때는 개간할 때 우리 애를 포대기에 싸서 밭에 데리고 갔어. 그때만 해도 봉화 재산에서 호랑이가 애기를 물어갔다는 소문이 들릴 때였거든. 근데 내 친구가 봉화로 시집을 갔는데, 진짜 눈앞에서 호랑이가 이웃집 애를 물어가는 걸 보고 식겁을 했대. 그래서 친정으로 다시 왔어. 그때는 우리 동네도 늑대 같은 짐승들이 잘 내려왔어. 그런데 애를 포대기에 싸서 밭에 데리고 가서 겁도 없이 일했다니께. 사실 내가 몸이 너무 약해서 거의 일을 못 했거든. 그래서 이웃에서 내가 농사일도 안 한다고 뒤에서 욕을 많이 했어. 그래도 우리 주인은 늘 나를 감싸주었지. 그렇게 착한 사람이었어. 님이 가신 뒤 오늘은이렇게 느꼈습니다나뭇가지 끝마다맺힌 아름다운 쪼그만수정 구슬을 보아도내게는 서럽게만느껴집니다하얀 가지의 노래마저도서럽게만 느껴집니다지상의 가지가지모든 것들이예전에 몰랐던 서러움으로 가득 찹니다 - 권영숙 시인의 오래전 일기장에서 남편의 은사님과 함께 죽을 고비 앞에서 일기를 쓰다 내가 농사일은 잘 못 했지만, 새마을운동은 열심히 했어. 서울에서 내려오니까 농촌이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꼬. 그래서 정말 열심히 뛰어다녔어. 내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나 봐. 지금은 목소리가 이렇지만, 그때는 사람들 마음을 휘어잡는 목소리였어요. 일직면 새마을 부녀회장으로 일을 참 많이 했지. 연탄을 팔아서 부녀회 기금까지 마련하면서 앞장섰지. 그래서 청와대 가서 훈장까지 받았어요. 새마을운동 야유회. 오른쪽에 검은 양장차림 새마을부녀회장 시절. 뒷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가 할머니. 열심히 살다 보니까 그래도 밥술이라도 뜨게 되더라고. 그런데 막내(규영)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내가 많이 아프기 시작했어.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어. 계속 어지럽고, 길을 가다가 쓰러지기도 하고. 병원에서도 원인을 모르더라고. 그래서 별 방도가 없으니까 기도원에 들어가게 됐어. 무언가 의지할 것이 필요했지. 기도를 하니까 머리가 조금씩 맑아지는 것 같더라고. 그래도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삶이 허무해지는기라. 그래서 내 삶의 흔적이라도 남기려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게 막내딸 초등학교 4학년 때였지. 안녕, 내 사랑 살림이 조금 좋아지니까 우리 주인이 비닐하우스를 세워서 고추 농사를 지었어. 안동에서 제일 처음으로. 그래서 우리 주인이 영농우수상도 타고 그랬지. 멜론도 하우스에서 재배했는데, 연탄불을 피워서 멜론을 키웠어. 그렇게 살림이 좋아지니까 우리 주인이 포크레인을 사면서, 이제 자네 고생 안 시킬께 그러더라꼬. 안동에 골프장이 들어온다고 하면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제일 비싼 포크레인을 샀지. 그래서 완전히 거지가 돼 부렀지. 그것 때문에 우리 주인이 나락(벼) 장사한다고, 나락을 나르다가 허리를 다쳤는데…… 수술 받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 그게 1998년이지. 우리 주인이 쉰여섯 살 때. 혼자서 살아야 하니까, 뭐든 해야 했지. 내가 쓰레기 매립장 공사장에도 나가서 일했어. 매립장의 하루 까마귀 때 우글거리는기분 나쁘게 우는 곳쓴 무더기가 왜 저렇게 많을까사람들은 단 것을 다 먹고쓴 것만 토해 내는가벌 떼, 파리 떼는 너무 많이우글거려, 단맛을 찾으니징그럽기 그지없다 더러움 무더기의 무질서 위에유리 못 찔릴까두려움 안고엄마들의 기적의 가슴을연출하는 삶을 엿보며넘어가는 석양 언덕에 서니인간의 긍지에 가슴이 저리다. - 권영숙 시인의 오래전 일기장에서 젊은 시절 등 떠민 아들의 미국행 1998년 그해 2월에 우리 아저씨가 세상 떠나고, 8월에 둘째 아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어. 원래 우리 주인이 아이들한테 너희들은 우리처럼 고생하지 말고, 큰 나라에 가서 잘살아보라고 했거든. 그래서 장례식 치르고 집에 있는 걸 다 터니까 1,600만 원이 나오더라고. 그걸 쥐어서 보냈지. 애가 공항에 가서 안 간다고 하면서 막 울더라고. 그래서 더 나은 세상에 가서 공부하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고 등을 떠밀었지. 그런데 6개월이 지나니까 돈이 뚝 떨어졌대. 돈을 벌면서 공부를 계속 하려고 해도 학비도 안 되더래요. 그래서 공부를 포기하고, 청소일을 시작했대. 그렇게 엄청 고생을 했는데 지금은 자리를 잡았지. 그래서 형도 데리고 가고. 형은 미국에 늦게 갔는데도 빨리 성공했지. 동생보다 돈을 더 많이 벌어. 지금은 아들들이 엄마가 참 그때 잘 보내셨다고 해. 그런데 내가 처음 미국에 나갔을 때는 정말 펑펑 울었어요. 어느 해 눈 오던 날 환갑 때쯤 미국 있는 아들한테 갈라고 비자를 낼라 하니 돈이 있나? 주인이 빚만 2천만 원 남겨 놓고 가서 그 빚을 갚는다고 10년이나 걸렸어. 노동판에 나가서 품 팔아서 빚을 갚고 있을 때였는데, 그래도 무리를 해서 아들을 보러 갔어. 둘째를 8년 만에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그때까지 진짜 눈물로 세월을 보냈으니까. 통화도 하기 어렵잖아. 미국 가서 만나기 전만 해도, 아들이 미국서 부자 돼서 잘 사는 줄 알았어. 근데 가보니까 흑인 빈민촌에,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 같은 데 사는 기라. 방도 없이 거실에 매트리스 하나 깔고 전기장판 켜고 살더라고. 내가 진짜 깜짝 놀랬어. 막 눈물이 쏟아지는데 펑펑 울었어. 그래서 내가 아들한테 집에 가자고 그랬어. 그래도 한국 가서 살면 이것보다는 낫지 않겠냐 했지. 그런데 아들도 울면서, 이제껏 고생했는데 이렇게는 못 간다 하더라꼬. 그때 미국서 5개월 있다가 왔어. 곁에 한국 아가씨(며느리)가 들어가서 같이 살고 있더라꼬. 며느리가 참 고맙고 착해. 한국에서 대학까지 나왔는데... 나는 며느리한테 자존심 상하지 않으려고 10만 원짜리 속옷을 사서 입고 갔어요. 그런데 며느리는 10달러에 5개짜리 속옷을 사서 입고 지내더라고. 그래서 할매도 아닌 젊은 네가 왜 이런걸 입노 했더니, 자기가 미국에 멋 내러 왔느냐고 하더라고. 아이들 훌륭하게 키우려고 미국에 온 거지, 자기들 호강하러 온 게 아니라고 하잖아. 내가 그 말 듣고 깜짝 놀랬지. 딸만 둘인데 공부를 참 잘해. 애들이 1학년 때부터 내내 일등이래. 할머니의 책장 ⓒ정형민 1984년 일기장. 막내 규영 씨가 선물했던 카네이션 ⓒ정형민 버려진 매트리스 깽하게 달린 하늘가을 아파트 앞외로워 떠는 듯도 해 보이는버려진 매트리스아직은 유년이구나 뗏목처럼 둥둥 떠오는 생각알라바바 댄디 마을 표정찬물사발에 간장만 타서누렇게 부황 뜬 얼굴 비친 물마실 때가 언제였던가?참한 솔 껍질 벗겨 울리던떪은 송구죽 미국 글자 그대로 아름다운 나라애배처럼 말고 부유한 나라에 잘살아 보거라애비 뜻에 따라 주립대 들어간 아들학비로 중단하고궁궐 같은 르네상스 호텔 근무하나흑인촌 싸구려 집을 빌려청설모가 밤새도록 푸른 달빛을 넘나들며건반처럼 두드려대는 천장매트리스 두 개 휠터 한 개그것도 쓰레기장에서 구한 것이라고 하는 아들 아! 가난!이 지구상 어디를 가도 가난이 있구나버럭 무릎이 휘청거렸다학부 나온 며느리에게하도 면목이 없어어떻게 이렇게 사느냐화장기 없는 입술괜스레 어머니 속을 끓게 하네요 - 권영숙 시집 <참 재밌다 그지> ""죽기 전에 시집이라도 한 권 냈으면 싶었어"" ⓒ정형민 시골 할매가 시를 배웠지 서울 딸네 집에서 8년쯤 지내다가 작년 11월에 내려왔어요. 내가 외손주를 돌봐주었어. 이제 4학년인데, 손주랑 떨어지니까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처음에 서울 올라가서, 손주만 보면서 집에 있으니까 심심하잖아. 그래서 책이라도 보려고 도서관에 갔어요. 그런데 도서관 직원이 내가 시골에 살아서 책을 못 빌려주니까, 딸을 데리고 오라 하더라고. 그래서 딸을 데리고 갔더마 책을 빌려주는기라. 거기서 딸이 내 자랑을 했지. 우리 엄마는요, 시골에 살아도 톨스토이도 읽고, 까뮈 전집도 읽는다꼬. 나는 평생 책 한 권도 못 사봤어. 형편이 안 되니까. 그래서 쓰레기장에 버려진 걸 주워서 집에 가져오고. 공공근로 같은 일 하면서 책을 많이 주웠어. 권영숙 시집 '참 재밌다 그지', 소울앤북, 2018 ⓒ정형민 그때 딸애 얘기를 듣고, 도서관 직원이 시를 배울 생각이 없느냐고 묻더라꼬. 그래서 시창작반에 들어가서 유종인 시인한테 시를 배웠지. 그리고서 죽기 전에 시집이라도 한 권 내야겠다는 생각에 두 아들한테 돈을 3백만 원씩 받았어. 처음에 111편을 유 시인께 들고 갔더니, 너무 많다고 60편으로 잘라버리더라꼬. 그리고 출판사를 소개받아서 시집을 냈는데, 몇 년 지나고 내 시집이 우수도서로 선정됐다고 천만 원을 지원해 주는기라. 그래서 출판사에서 나한테 백만 원을 주고, 나머지 돈으로 또 시집을 인쇄했지. 거친 풍파 헤치고 야생화처럼 피어나 권영숙 할머니를 마주한 감회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마치 폭풍우 속에 피어 있는 한 송이 야생화를 본 것 같기도 하고, 거친 풍랑이 치는 바다로 거침없이 배를 몰고 나가는 강인한 어부를 만난 것 같기도 하다. 일직면 광연리 마을에는 일흔다섯의 나이에도 여전히 꿈을 놓지 않고 작가의 길에 들어선 할머니가 산다. 꽤 많은 얘기를 나누고, 거친 손으로 쓴 시와 일기들을 읽어본 지금, 나는 권영숙 할머니를 '권영숙 시인'이라 부르고 싶다. ""잘 가시우"" ⓒ정형민 권영숙 시인의 시집 <참 재밌다 그지>를 필독하기를 권한다. 시집을 읽는 내내, 어느 유명한 시인의 시집을 읽는 것처럼 탄성이 절로 나온다. 시를 배우기 전에 일기장에 써놓은 시들도 세상에 나왔으면 좋겠다. 야생의 생명력을 물씬 풍기며 마음을 울린다. 일기를 담은 수필집도 출간될 예정이라니 몹시 기다려진다. 출판사에서 일기장을 많이 챙겨 갔는데도, 집에는 아직도 일기장이 아주 많이 남아 있었다. 조심스레 일기장을 펼쳐들었는데 가슴이 하염없이 먹먹해진다. 눈물을 훔치며 할머니의 일기 두 편으로 글을 맺는다. (글/정형민 makalu21@naver.com) 오래된 일기 中 ⓒ정형민 오래된 일기 中 ⓒ정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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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 혹독한 삶의 시련, 글로 위로하다 안동시 일직면 광연리, 권영숙 시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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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목성동 연가
- -목성교가 있던 목성동-개천에서 잡은 메기-목성동의 오래된 가게 천리사, 동양방송설비, 화산인쇄사 2019년 안동예천 근대기행은 생생한 르포취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다룬 <구술생애사>와 안동과 예천 두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사의 근간이 되는 '마을'을 테마로 한 <우리 마을 이야기>를 그려내고 있다. 마지막 <우리 마을 이야기>는 목성교가 있던 안동시 목성동 이야기를 펼쳐내 본다. 내려다본 목성동 ⓒ구자을 목성교가 있던 목성동 사라진 지명을 부른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사라진 지명을 기억하는 사람들에게 그 장소가 갖는 의미는 또 무엇일까. 하이마, 나이야가라식당, 진모래, 농고 사거리, 36사단, 마뜰비행장, 제일은행 사거리, 태화 삼거리 그리고 목성교. 지금은 사라진 목성교지만 안동사람들은 여전히 목성교를 습관처럼 얘기한다. 목성교 사거리에 '푸쉬쉭'하고 바람 빠진 소리를 내며 정차하던 2번, 11번 시내버스, 가을이면 안동시산림조합 골목에서 열리던 송이시장, 돈까스로 유명했던 코끼리분식 그리고 내 인생에 커다란 아랫목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사무실이 있던 권방사선과 건물 4층. 안동시 목성동 지도. 2019년 12월 5일 카카오맵 목성교 사거리는 동쪽으로 보건소, 서쪽으로 안동교회를 잇는 서동문로, 동북쪽 시청과 서남쪽 천리동을 비스듬히 연결하는 퇴계로가 지나는 곳이다. 목성교 사거리에서 목성동성당까지를 직선으로 이어 그곳을 꼭짓점으로 한다면 삼각형 모양을 이루는 동네가 목성동에 해당한다. 하지만 '목성교'의 상징성은 그 이상이어서 일대의 서부동과 화성동, 천리동까지 언급을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안막동에서 흘러내려 안동시청 앞을 지나 낙동강으로 흐르던 천리천은 목성동을 도심 속 낭만의 공간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사장뚝에 즐비하던 포장마차촌에서 시인묵객들은 천리천을 '세느강'이라 명명하고 실제로 세느강, 행운집 등의 실내포차가 즐비한 거리엔 술 취한 청춘들이 자주 목도되곤 했으니까. 1989년 도시개발사업으로 천리천 복개공사가 시작되면서 목성교와 천리천, 사장뚝이라 불린 천리천 제방 등은 모습을 달리한 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1959년 여름, 목성동에서 ⓒ조창희 조창희 목사가 기억하는 목성동 전 의성감리교회 조창희 목사는 지금으로 치면 천리사 맞은편 영창피아노(현재는 화장품도매창고) 앞이 생가다. 사진은 남동생(조덕희, 1957년생)이 집 앞에서 목마를 타고 놀고 있는 모습이다. 옆에는 주철로 만든 우체통이 있고 맞은편엔 기와집이 있다. 조창희 목사에 의하면 6.25전쟁 때 안동에서는 포탄이 떨어진 곳이 3~4군데 정도였다고 한다. 그중 안동기차역과 지금의 안동시청에 각각 포탄이 떨어졌다. 나머지는 공중에서 기름을 살포했는지 화마로 뒤덮여 시내의 70% 이상이 잿더미로 소실된 것이라 한다. 포탄이 떨어진 기차역 웅덩이에서 아이들은 메기를 잡기도 했다고. 지금의 경북유교문화회관은 옛날의 화산학원이 있던 터다. 이곳은 지역에서도 역사적 상징성이 있는 중요한 장소이다. 화산학원은 안동지역에서 처음으로 신학문을 가르쳤던 교육기관으로 일제강점기에 세워졌다. 이후 안동교육청이 들어섰고 후에 그 터에 경북상호신용금고가 새로 지어진 후 권택근 성형외과가 들어섰다가 지금은 건물을 리모델링하여 경북유교문화회관으로 바뀌었다. 한국전쟁 당시 미군이 안동을 거쳐 북진해 올라갈 때에는 경북유교문화회관 건물에 미군사령부와 국군부대가 임시 사령부 거처로 삼아 이용을 했다고 한다. ""안동중앙국민학교(안동초등학교)는 허허벌판이니까 포탄 투하 시 그대로 날아가 버리거든요? 산 밑에 있으면 포탄을 쏟아 부어도 명중시키기 힘드니까 위치적으로도 아마 임시사령부로 제격이었지 싶어요."" 북쪽으로는 천주교성당이 울타리 쳤고 뒤로 언덕 산이 막아주는 형국이라 군사학적으로 유교회관 건물은 안전한 요새와 같았다. 그런데 사령부로는 삼긴 삼았는데 정작 마실 물이 없었다고 한다. 학교 건물임에도 펌프가 없어 물이 안 나와 애를 먹던 중 근처 조창희 목사의 집에서 물을 길러다 썼다. ""우리 집에는 뿜뿌가 나와서 한국군 특무상사가 졸병들을 인솔해서 바게쓰에 쌀을 담아 와서 우리 집 마당에서 쌀을 씻어 가곤 했어요. 그렇게 부대에서 밥을 지어먹고 하니 군인아저씨들이 공짜로 물 받아먹는 게 미안했는지 쌀을 바가지로 퍼다 줘서 우리가 그때 다행히 쌀 걱정은 안하고 밥을 해먹었다는 거 아닙니까."" 한번은 부대 안으로 들어가 본 적도 있었다. ""미군들이 나를 귀엽게 봤는지 달랑 안고 부대 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온 식구가 걱정을 했어요. 씨레이션(전시에 먹는 식량) 박스, 식빵, 초콜렛, 껌 등을 안겨줘서 내보내는 바람에 부대 구경도 잘했고 온 집안 식구들이 덕분에 잘 먹었죠. 부대 안에서 나대로 이런 것 저런 것 구경을 해보니 신기했죠. 아마도 필요할 때는 땅굴을 파기도 한 모양인데 그런 흔적도 있었어요."" 화산학원이 화산국민학교로 다시 사범학교 부속 화산국민학교로 통폐합 후 폐지가 되면서 학생들은 흩어지게 된다. ""안동사범고등학교를 폐지하고 교육초급대학으로 승격시켰거든요. 내 생각에는요, 화산학교가 부설 초등학교여서 사범고등학교가 폐지되니까 안동사범학교 병설중학교도 함께 폐지되고 연쇄적으로 다 폐지가 됐지 싶어요."" 학교가 폐지되면서 동쪽에 있는 학생들은 동부초등학교로, 서쪽에 살고 있는 학생들은 안동초등학교로 분산·편입시켰다. 목성동에 살았던 조창희 목사는, 입학은 화산국민학교에서 하고 2학년 가을학기에 안동초등학교로 편입했다. 한 학년이 60명씩 두 반이었던 규모에서 한 클라스 당 60명씩 6~7반씩, 전교생이 2천명을 훌쩍 넘긴 규모로 가게 된 것이다. 1974년 목성교에서 ⓒ조창희 개천에서 잡은 메기 목성교 다리는 그다지 크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복개 전 여름 장마철에는 이 집 저 집 분뇨를 퍼서 장마로 흘러가는 황톳물에 퍼부어 버리곤 했다고. 장마가 멎어 물살이 약해지면 그 다음부터는 초등학생 애들부터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밴드(그물망)를 가지고 풀숲에 놓고 발로 꾹꾹 눌러가면서 메기며 장어 등 저녁 반찬거리를 마련했다. ""목성교 다리는 완전한 다리로 건재했었고 지금 시청 앞에는 다리가 없다보니까 전봇대 같은 통나무를 두세 개 엮어서 외나무다리를 임시방편으로 만들어 사용했지요. 명륜동 쪽에도 안막동 가는 길 쪽에 목성교처럼 옳은 다리가 있었어요."" 도로 포장도 안 되었던 그 시절 목성교 동쪽 서부동과 삼산동에는 전봇대가 세워져서 전기가 들어왔지만 반대편 안동교회 가는 쪽은 전기가 안 들어왔다. ""우리 집도 전기가 안 들어와서 남포등, 석유 등잔을 키고 살았어요. 당시에 전봇대만 세우면 전기를 가설할 수 있다고 했거든요. 목성교에서 우리 집 있던 피아노대리점까지 기껏해야 7~80m 되나? 전봇대를 세우자고 하니 사람들이 우리는 지금까지 전기 없이 남포등으로 잘 살았다고 필요 없다고 해요. 그러니 어째요 방법이 있나, 우리 집 혼자 전봇대 2~3개 세우는 값을 다 물어서 전기를 넣었지요. 그런데 전봇대를 세우니 막상 전기는 또 다 땡겨 쓰더라구요."" 옆에는 금은방과 국화빵집, 그 옆에는 호떡집, 또 그 옆에는 제재소가 있었다. 제재소는 개천까지 넓게 톱날이 돌면서 규모가 컸던 모양이다. 이후 군장마크, 학교 명찰, 체육용품을 판매했던 천리사가 들어서고 옆에 미장원, 2층에 사진관, 또 그 옆에 시계점포, 이발관, 쌀가게, 솜 트는 집, 그 다음이 삼일약방(지금의 목성교 바로 가기 전), 철물점, 인쇄소 마지막에 목성교가 있었다 한다. 그리고 너머에 안동문화사와 보건소 맞은편 경북인쇄소 등이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목성동 성당 ⓒ백소애 목성동성당과 종교타운 목성동성당은 안동의 랜드마크 중 하나다. 이제 목성동성당 일대를 종교타운이라 부른다. 성당 입구 바로 옆으로는 목성공원을 조성해놓았다. 안동 종교타운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개신교, 유교, 원불교, 민간신앙 등을 하나로 아울러 소통과 화합, 봉사를 구현하기 위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동쪽에서부터 유·불·선을 합친 신흥종교 성덕도 안동교화원, 1927년 설립된 천주교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 1770년에 건립된 안동김씨 종회소,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고운사 안동포교당 대원사, 경상북도유교문화회관, 1909년 설립된 개신교 안동교회 등의 시설이 밀집되어 있다. 1987년 목성동성당. 각종 시국사건 관련 시위가 열리기도 했다. ⓒ천주교 안동교구청 안상학 시인은 2018년 겨울에 발간된 <기록창고> 1호(경북기록문화연구원 발간)에 실린 '안동민주화운동의 성지, 목성동성당'이라는 글을 통해 ""옛 천주교 안동교구 목성동주교좌성당(경북 안동시 목성동 산1번지, 이하 목성동성당)은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안동의 대표적인 랜드마크로서 한 시대를 누렸다. 화려하지는 않았지만 붉은 벽돌과 높은 첨탑이 인상적인 고딕양식에 가까운 건축물이었다. 풍수지리로 살펴보면 잠두혈 자리다. 명당 중에 명당이다. 안동시가지가 훤하게 내려다보이는 목성산 이마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안동시가지를 조망할 수 있는 자리라면 어디서라도 높은 산 위에 올라앉은 성당 건물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외부 사람들이 안동을 둘러보고 이미지를 새긴다면 몇 손가락 안에 들기에 모자람이 없는 품격을 지니고 있었다.""고 얘기했다. 또 ""신자들에게는 참으로 신성한 공간이지만 일반 시민들에게는 훌륭한 공원이나 다름없었다. 가난한 연인들에게는 더없이 아늑한 데이트 장소였다. 안동시민들에게는 소중한 추억이 서려있는 정서적 공간.""이었다고 회상했다. 그러는 한편 목성동성당은 민주화 운동의 성지이자 각종 시국사건이 있을 때마다 저항과 투쟁이 있었던 역사적인 공간이었다. 농민도, 학생도, 사제도, 수녀도, 시민도 함께 나섰다. 그러한 상징적인 공간이었던 목성동성당은 2004년 지금의 건물로 새롭게 지어졌다. 아도니스 레스토랑 광고 ⓒ백소애 안동교회의 로뎀나무, 목성동성당의 에스포와처럼 대원사에도 커피숍이 들어섰다. 이름은 '무심코無心co'다. 지금의 대원사가 지어지기 전 1980년대 반변천 문학회 문청들이 대원사 지하예향다방에서 시낭송회를 갖는 등 문화공간으로 활용되곤 했다. 그전에는 심지다방이었다고 한다. 후에 예향다방이 사라지고 아도니스라는 레스토랑이 생겼다. 그곳에서도 안개 시낭송회 등이 열렸다. 문청들의 문화공간으로 사랑받던 그곳은 1990년대 들어서며 없어지게 된다. 목성동의 터줏대감 천리사 ⓒ백소애 천리만큼 길고 오래 가라, 천리사 목성동에서 가장 오래된 가게는 단연 천리사다. 스포츠용품 전문점 천리사는 1958년 문을 열었다. 당시 28세의 창업주 홍영표 씨가 운동구점을 하고 있던 숙부의 도움으로 시작한 가게로 상호도 숙부가 '천리만큼 길고 오래가라'고 지어준 것이다. 그 덕일까 지금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천리천이 흐르고 있어 천리사라 불렀을 거라 유추한 생각과는 달랐다. ""안동사범학교 1회 졸업생이셨는데 교직으로 안가고 장사를 시작하셨어요. 처음엔 천리체육당이라고도 했답니다."" 30년 전 가게를 물려받은 2대 사장 홍웅기(63) 씨의 말이다. 홍웅기 사장은 창업주의 재종손자 된다. 은퇴 후 천리사 2층 건물에 거주했던 홍영표 사장은 89세의 일기로 작년에 작고했다. 천리사는 처음부터 지금 자리 있었던 건 아니다. 서부동에서 문을 열었다가 지금의 목성동 자리로 옮긴 것이 1967년쯤이고 10년 후 지금의 2층 건물로 지었다 한다. 홍웅기 사장이 맡아서 시작할 때는 바로 옆에 있던 사진현상소 백광사를 터 가게를 넓혔다. ""주소가 목성동 62번지입니다. 그래서 전화번호도 6200번이에요. 처음엔 국번 없는 62번이었다가 620번, 그러다 6200번이 되었지요."" 한창 호시절에 시작한 가게였으나 요즘은 조용한 편이다. 천리사 홍웅기 사장 ⓒ백소애 ""요즘 애들은 운동, 특히 야외운동을 안하니까 예전 같지 않죠. 학교에 체육용품을 납품한다거나 행사할 때 단체로 체육복을 주문하거나 해요. 가게 소매를 한다거나 그런 건 거의 없다고 봐야죠. 우리뿐만 아니고 대부분 소매가 잘 안되고 그래요."" 2대째 이어오는 동양방송설비 ⓒ백소애 2대째 이어오는 동양방송설비 서른 둘 성덕기 씨는 1973년 서부동 안동문화사 옆에서 '동양소리사'를 열었다. 고향 진주에 살다가 금성사에 취직하게 되면서 대구에 발령을 받게 된다. 이후 금성사를 퇴직하면서 안동에 자리 잡아 창업을 하게 된다. 47년 전 안동에 왔을 때는 집이 낙후됐고 기와집이 많았다. 지금의 목성동으로 옮긴 게 1978년이다. 처음에 상호는 '동양티브이'였다. ""금성사 나와서는 바로 티브이로 이름을 졌어요. 근데 당시 한글순화운동을 한다고 해가지고 이름을 소리사로 바꿨지. 근데 자(아들)가 맡으면서 소리사는 챙피하다꼬 다시 바꿨지요."" 정보통신 자격증을 딴 아들 성동철(47세) 씨가 대를 이어 가게를 이어가고 있다. 올해 79세가 되는 성덕기 사장은 일선에서 물러나 아들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다. 정보통신 공사업체이고 학교방송장비를 주로 취급한다. 초창기에는 TV, 전자제품, 부품 수리 등에 1988년 안동유선방송이 생길 때는 가장 호황을 누렸다. ""유선방송 시조랬지. 호시절이랬어요. 전두환 시절이었는데 그때 젊은 사람들은 전혀 모르지. 장사가 잘됐어요. 국내 수요가 폭발해서 그 당시 티브이가 대구 밑에 수성교에 있다가 팔공산 올라가면서 경북지역에 급진적으로 수요가 늘어났거든. 난리 났었지. 당시엔 동네에 티비 한 대 사면 동네 애들 친척들 바글바글해서 티비 사는 걸 싫어했어요. 요새는 꺼뜩하면 살 수 있으이 쉽잖아요. 지금은 현상유지나 겨우 해요."" 아무 연고도 없는 안동에 자리 잡아 1남 2녀 낳고 지금의 집을 장만했다. 가게와 붙어있는 집을 장만했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 못한다. 막둥이 장남 아들이 대를 이어가니 마음도 든든하다. 1대 성덕기 사장 ⓒ백소애 ""안동 와서 이 집을 샀을 때가 제일 기뻤어요. 가정집이 여기 붙어 있어요. 셋집을 댕기다 보니까 다른 사람 보기에는 별거 없어 보여도 내한테는 이만한 궁전이 없어요. 처음에사 회사서 대구 파견 나온 인연으로 여 안동에 주저앉았지, 뭐. 큰 변화 없이 안동시민들 덕분에 잘 살았고 처음엔 운이 좋아서 장사도 곧잘 됐어요. 유선방송을 안동 가구 수의 80%를 우리가 가입시켰어요. 나중엔 못하게 됐지만."" 1979년 가게 앞에서 ⓒ성덕기 목성동 길가를 지나가도 아는 사람만 알지 일반 사람들은 잘 모르는 업종이라고 한다. 특수 기능이라 필요한 사람만 오는 곳이지 일반 소매업을 하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부심도 대단한데 안동에서 자격증 갖고 일하는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라 한다. 성동철 2대 사장이 전기통신 자격증을 가진 덕이다. ""아들놈이 어려서부터 컴퓨터를 되게 만졌어요. 프로그램을 했는데 요새 젊은이들은 모르겠지만 오디오 신호를 풀어서 게임을 했어요. 그런 쪽으로 재주가 좀 있었어요. 아무도 안 가르쳐줬는데… 공부를 몬하니까 그런 쪽으로 트였겠죠? 하하. 아들놈이 일은 곧잘 합니다."" 동양소리사 시절. 오른쪽이 2대 사장 성동철 씨의 6살 무렵. 어려서부터 덩치가 컸다고 한다.ⓒ성덕기 번화가인 목성동도 예전만 못한 느낌이다. 일단 가게 앞을 오가는 사람이 확연히 줄었다. ""우리가 여 이사 올 때 요 사거리 다리 밑으로는 다 하천이랬어요. 비 오면 붕어가 올라왔지요. 요 밑에는 신시장 넘어가는 다리가 있었고. 복개되고 포장되면서 목성교가 없어졌지. 복개된 지 한 30년 안됐겠습니까."" 유선방송 하다 뺏기고 대리점 하다가 뺏기고 잘될라치면 손안에서 빠져나갔다. 지금은 방송장비 쪽으로 주력하고 있다. 국번도 없는 전화번호 시절부터 같은 번호를 부여받아 지금까지 쭉 쓰고 있다. ""0303. 요 전화번호 딸라꼬 정말 애 먹었어요. 추첨을 했는데 한 5~60대 1이었나, 그 정도로 경쟁이 심했지요. 흑색전화 백색전화 하던 시절 시청홀에서 공식적인 추첨을 했어요."" 1980년대 안동댐에서 열린 불교 행사에서 ⓒ성덕기 사진 한 장 찍자는 말에 서로 찍으라고 미루던 부자(父子)는 출장 나가버린 아드님의 승리로 끝나버렸다. ""뭐 이런 얼굴 찍어 뭐할라니껴."" 목성동 거리를, 목성동 동네를 한결같이 47년 지켜온 '이런 얼굴'이다. 화산학교를 기억하는 화산인쇄사 인근의 경북인쇄사, 목성인쇄사처럼 인쇄사 말고도 시청 부근에는 많은 인쇄사가 있다. 그중 화산인쇄사는 목성동에 자리 잡아 상호만으로도 이곳의 역사를 말해주고 있다. ""옛날 화산학원이 있었던 때를 보지는 못했지만 교육청도 있었고 남다른 장소잖니껴. 그래서 화산이라 이름 졌지요. 인제는 연세 많은 분 아니면 화산을 잘 몰래요."" 와룡이 고향인 지창호(65세) 사장의 말이다. 1980년 10월에 경북유교문화회관 맞은편 자리에 6~7년 있다가 지금의 목성동성당 입구 맞은편에 자리 잡았다. 그때는 명함 가격이 2천원, 2천 5백 원 하던 시절이었다. 초창기엔 관공서 서식, 학교 문집, 청첩장 등을 주로 만들었는데 청타(한문타자)를 주로 사용했다.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초반에는 활자 자판을 사용하니 시간이 많이 걸렸다. 컴퓨터가 있는 세상엔 모든 게 빠르고 편해졌지만 일은 그만큼 줄었다고. 목성동성당 입구 건너에 있는 화산인쇄사 ⓒ백소애 ""요새도 서식 좀 하고 스티커, 명함, 팸플릿 뭐 그렇게 하죠."" 지창호 사장의 기억 속 목성교는 길이가 5m 정도나 됐을까 폭도 그렇게 넓지 않은 2차선 교량이었다. ""요 목성교 삼각지대에 방공호가 있었던 걸로 기억해요. 민방위 훈련하던."" 연말에 많이 바쁜 시기지만 요즘엔 예전만 같지 않고 별다른 일이 없을 때면 고향 와룡에서 쉬엄쉬엄 농사를 짓고 있다. 화산인쇄사 지창호 사장 ⓒ백소애 ""평생, 거진 인쇄 일을 했다고 봐야지요."" 함께 나이 먹어가는 마스터기와 제판기 앞에서 너털웃음을 짓는 그다. 그리고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 향토문화의 사랑방 안동은 주로 이렇게 불린다. 사랑방, <안동>지, 사랑방 안동. '안동사람의 삶과 생각을 담는 책'이라는 캐치플레이즈로 46배판 40쪽 분량의 계간 무가지로 내다가 80쪽 분량의 격월간지로 발행하게 되었다. 책 이름은 '향토문화의사랑방 안동', 책을 내는 곳은 '문화모임 사랑방'이었다가 '문화모임 안동'으로 개명을 하게 되었다. 1988년 창간하여 2014년 11,12월 종간호를 내며 문을 닫았으나 2015년 5,6월부터 책을 내는 곳이 '문화모임 안동'이 아닌 '도서출판 한빛'으로 바뀌면서 복간호를 내게 되었다. 당시 함께 했던 편집위원, 운영위원들은 새로운 운영진으로 모두 바뀌었다. 목성교사거리에 있던 권방사선과 4층 사무실에서 올려다보면 우뚝 보였던 목성동성당과 내려다본 삼각지에 서 있던 광고탑. 광고탑에는 주로 시민체전, 민속축제, 탈춤축제를 알리는 광고가 붙었고 복잡한 교통 흐름에 불법 주정차 단속 호루라기 소리는 4층까지 들리곤 했다. 내비게이션이 일상화되지 않던 시절에도 안동사람에겐 '목성교사거리 권방사선과 건물'이라고 하면 척하면 착 알아들었다. 간혹 타지에서 오는 사람들은 길을 몰라 헤매기 일쑤였다. 목성교 ⓒ백소애 사랑방 시절 '그의 원고가 도착하면 인쇄소에 넘겨도 된다'는 전설을 남겼던 안상학 시인의 시로 '목성동 연가'를 마무리한다. 이 시는 2014년 겨울 종간을 앞두고 그해 봄, 그에게 종간의 소회를 청탁한 시다. 청탁받은 사실을 까맣게 잊은 그가 전화로 다시 물어왔을 때는 마감일까지 채 일주일도 남지 않았을 때였다. 그러고 3일 후 그는 이 시를 보내왔는데,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예상보다 너무 빨리 보내줘서 놀랐고 그 짧은 시간에 이토록 서정적인 시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시를 읽고 나는 잠시 먹먹해졌던 거 같다. 그건 종간 때까지 함께 한 편집장 김복영 방장님도 마찬가지였는데 좀체 칭찬에 인색한 분이 ""좋다.""고 하셨으니 그걸로 족했다. 2번 버스를 타고 내렸던 '목성동 연가'도 그렇게 끝이 났고 이제 새주소 이름 '퇴계로'가 자리한 동네가 되었다. 그러나 콘크리트 아래 어딘가에는 지금도 천리천, 세느강이 홀로 흐르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글/ 백소애 sodoor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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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목성동 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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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안동의 원도심 삼산동
- # 시내서 보시더 ""집이 어디~껴?"" ""시내래요."" ""어디서 만나면 좋을리껴?"" ""시내서 보시더."" 나이 지긋한 어르신들 사이에는 지금도 통용되는 안동 표준말이다. ""시내래요.""에서 시내는 안동시와 안동군이 통합되기 전 안동시 전체를 의미한다. ""시내서 보시더.""에서 시내는 주로 안동시에서도 삼산동 일대 원도심을 지칭한다. 삼산동 이야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 접근했다. 먼저 기록으로 존재하는 근대 삼산동을 찾아보았다. 근대라 함은 일제 강점기에서 6.25 전쟁 이전까지다. 내가 만난 사람들이 기억하는 안동 삼산동은 대부분 1960년대부터였다. 오래 그곳을 지키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더 늦기 전에 우리 시대 이야기를 기록할 필요성이 느껴졌다. 그래서 삼산동 근현대 이야기로 폭을 넓혔다. 네이버 지도에 나타난 삼산동 구역 드론으로 본 삼산동 (제공 구자을) 삼뭇들, 삼뭇돌, 삼산동 삼산동은 안동시보건소 앞에서 동쪽으로 삼뭇들, 장거리들이 있어서 삼뭇돌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조선 시대에는 태사묘 앞에서 내려오며 이 지역에 망호루, 제남루, 문루 등 누각이 서 있었다. 망호루 옆에 객사가 있고, 객사 앞에 내삼문이 보인다. 안동부 당시 안동의 수령이 제남루 앞에 많은 백성들을 모아 놓고 죄인을 다스려 백성들에게 일벌백계一罰百戒의 교훈을 일깨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종루가 있는 거리라 하여 종로라 불렀다. 현재 신한은행 앞 차 없는 거리에서 중앙파출소에 이르는 통로를 말한다. 2019 광복절 삼산동 문화의 거리 (서미숙) 3.1 독립운동의 성지, 삼산동 신한은행 앞 일제 강점기에는 신한은행 앞에서 옛 스쿨서점 방향으로 난 도로를 본정통으로 불렀다. 본정은 일제가 잠식한 거리, 일제의 경제 수탈기구가 모여 있었던 곳이다. 금융조합, 대구은행안동지점, 식산은행 등이 있었다. 삼산동 신한은행 앞은 3.1운동의 성지다. 신한은행 앞은 이상동이 혼자 만세운동을 했던 곳이다. 이상동은 석주 이상룡 동생이다. 임청각은 태어나면서부터 유학을 공부했던 집안이지만 그는 1906년 기독교를 수용했다. 이상동은 영양 석보면 지경리에 가서 주로 포교활동을 했다. 남좌현 지사가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 바로 인근 소산동에서 포교를 하고 교회를 지었던 분이다. 1919년 3. 13. 안동에서는 처음으로 만세를 불렀다. ""너희들은 멸망할 것이다. 우리는 독립할 것이다.""외치며 단독으로 만세운동을 했다. 종이로 태극기를 만들어 흔들었다. 기독교인들이 논의를 하다가 검거되는 바람에 단독으로 하게 되었다. 태극기를 종이에 그려서 흔들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 다음 장날 3. 18일에 그곳에서 다시 대규모 집회가 열렸다. 안동교회에서 태극기를 준비해서 기독교 인사들이 서쪽에서 들어오고, 송천동에서 동쪽 유림들이 동문동을 지나 물밀 듯이 들어오고, 북쪽에서는 예안에서 밤 세워 전날부터 걸어왔다. 그 전날 예안에서는 안동지역 대규모 3.1운동이 본격적으로 일어난 곳이다. 현재 도산면 서부리 선성산에서 만세를 시작한다. 교회 쪽에서 오고, 면사무소 직원, 유림들이 각각 세 갈래로 모여서 대규모 만세운동을 했다. 구금자를 석방하라며 관청들이 몰려있던 지금의 웅부공원으로 가서 시위를 하다가 40여명의 순국자가 나오기도 했다. 일제는 일본국경일 때마다 일장기 계양을 강요했다. (사진으로 보는 근대안동. 서문당) 안동읍성 (사진으로 보는 근대한국, 서문당) 삼산동을 지키는 사람들 동인당 한의원 (서미숙) #2대에 걸쳐 운영하는 동인당 한의원 동인당은 2대에 걸쳐 한의원을 운영중이다. 작고한 부친 권오규 원장은 1918년생이다. 일제 강점기부터 태화오거리 근처에서 한약방을 하다가 삼산동 우체국 건너편으로 이사했다. 권기종 원장 (1956년생)이 병원에 딸린 집에서 살 때 광제병원에서 태어났으니 그 이전에 삼산동 시대를 맞이한 셈이다. 부친은 88세로 생의 마지막 날까지 일을 하다가 밤에 돌아가셨다. 복 많은 어른이다. 슬하에 13남매를 두셨다. 7남 6녀 중에 위에 형들은 약사, 유도선수, 건축가가 되었다. 동인당 한의원 권기종 원장 (서미숙) 부친의 권유로 넷째인 기종 씨가 한의학을 공부하여 가업을 잇게 되었다. 늘 한 곳에 갇혀서 진료하니 좀 답답하다고 한다. 편안한 인상에 조용조용 말하는 분위기가 한의사에 어울리는 분이다. 2004년 12월까지만 해도 동인당 한약방 1층은 부친이, 2층은 아들이 각각 진료를 봤다. 부친의 후광에 가려져 빛을 못 보던 시절도 있었지만, 침은 아들이 책임졌다. 지금은 경안약국 자리까지 매입하여 한의원을 확장 했지만, 찾는 환자 수는 예전 같지 않다. 요즘 비싼 인건비를 감안하면 환자가 많아도 감당하기 어렵고, 혼자 진료하기엔 적정수준이라니 다행이다. ""막상 공부해보니 한의학은 매력적인 학문이다. 다만 정부에서 뒷받침이 안 되고, 양의사들 파워가 세어서 기를 못 펴고 있는 실정이지요. 한방을 모르는 양방 의사들은 무시하고 미신화하니까. 심지어 젊은 사람들은 한약 먹으면 간이 나빠진다는 편견을 갖고 터부시한다. 옛날부터 한약을 먹어온 사람이 자식 데리고 꾸준히 찾는다."" 한약은 양약에 비해 비용부담이 크기에 의료보험제도 개선이 필요한 실정이다. 현실적인 문제가 해결되고 삼산동 터줏대감 동인당이 오래 그 자리를 지켰으면 하는 바람이다. 작고한 부친 권오규 원장이 붓으로 쓴 처방전 ⓒ서미숙 작고한 부친 권오규 원장은 처방전을 붓으로 썼다. 지금도 부친이 쓴 처방전을 보관중이다. 부친이 사용하던 오래된 약장과 아들(현재 원장) 약장이 나란히 자리한다. 오래된 약장에 지금도 하수오 등 약재를 보관한다.슬하에 아들 형제를 두었지만 한의학을 하라고 권하지는 않는다. 그래도 며느리나 친척 중에서라도 가업을 이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권기종 원장은 중학교 때까지 삼산동 동인당 한의원 1층에서 살았다. 고교와 대학시절은 서울로 갔지만 졸업 후에 다시 삼산동으로 돌아왔다. 지금은 용상동에 거주하지만 근무시간은 내내 삼산동에서 보낸다. 부친이 쓰던 약장 (서미숙) 동인당 한약방 앞이 예전엔 비포장 도로였다. 소달구지가 지나다니고, 소 지르메에 똥통을 싣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길에 소똥이 밟히기도 하고, 가끔 말도 다녔다. 지게에 솔잎을 지고 팔러 다니는 사람도 있었고. 갓 쓰고 한복 입은 어른들이 많이 지나다녔다. 길가에 리어카 짐꾼들이 햇볕을 쬐며 쭉 늘어서 있었다. 당시 짐 싣던 분이 요즘 동인당에 오기도 한다. 그는 1968년 5월 18일 밤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안동시 운흥동 <문화극장>에 수류탄 폭발사건이 일어난 날이다. 휴가 나온 육군 하사가 애인의 변심에 앙심을 품고 극장에 수류탄을 투척하여 수십 명의 사장자를 내었다. 즉사 5명 부상자 44명이나 되는 대형 사고였다. 동인당 바로 옆이 시내 유일한 외과였던 <광제병원>으로 가는 작은 골목이었다. 환자를 업고 바삐 가는 사람들을 목격했다. 경회루가 있던 자리는 현재 윤가네부대찌개 ⓒ서미숙동인당을 중심으로 왼쪽으로 <경안약국>, <노라 양장점>, <창신당>,그리고 코너가 구멍가게였다. 구멍가게 옆에 당시 유명한 <8.15제과점>이었다. 조흥은행 옆 왼쪽코너에 <클레오파트라> 옷가게, 다음이 <스쿨서점>, 학용품을 팔던 <광문사>, 코너에 <영창피아노>가 있었다. 스쿨서점 맞은편에는 <수미사>란 양복점이 있었다. 동인당 오른쪽 코너엔 철물점 <대창사>가 있었다. 대창사 옆 골목 안에는 유명한 중국 요리집 <경회루>가 자리했다. 당시 외식이라면 <경회루>에 가서 짜장면을 먹거나 잔칫날 구 시장 <해동식당>에서 불고기를 먹었다. 동인당 바로 맞은 편에는 <안동우체국>이었다. 지금은 그 자리가 삼산동 우체국이다. 삼산동 우체국 옆 코너엔 일식요리점 <공주식당>이었다. 공주식당이 사라지고 교학사가 들어섰다가 최근 몇 년째 가게가 비어있다. -삼산동에 오래 살아보니 어떠신지요? ""예전에 구시장이 번화할 땐 시장 가깝고 편리했는데 요즘은 외곽지로 도시가 확장되면서 다소 불편해졌다."" 그에게 삼산동은 고향이자 안식처이다. 어릴 적 눈이 오면 눈 속에 연탄재 넣어 친구들과 눈싸움하던 추억이 서린 곳이다. 그는 삼산동을 떠나면 불안할 정도로 삼산동 토박이다. #일공공일 김옥현 ""그때만 해도 시계기술은 우주과학만큼이나 대단하게 생각했던 시절이었죠."" 김옥현 사장(69세)은 예천 보문이 고향이다. 열여덟에 시계기술을 배우러 안동시 삼산동 <남방상사>를 찾았다. 신한은행에서 서쪽 통로 당시 <광문사> 맞은편에 가게가 있었다. 당시엔 시계와 안경을 함께 취급했다. 안경과 인연이 되려고 그랬을까. 시계 배울 자리가 없어 안경을 익혔다. ""처음에 안경기술을 배운다고 했을 때 주변에서는 시시하게 생각했다. 그런 걸 일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1968년 3월, 현재 일공안경 자리에 있던 남방상사에서 김옥현이 렌즈메터기로 안경도수를측정하는 중이다. 가게주인 아우는 신시장에 <남방시계점>을 열고, 형님인 민병필씨가 지금 일공안경점 자리로 옮겨서 <남방안경점>을 했다. 그때 남방안경점에서 점원으로 일했다. 남방 안경점에서 일하던 시절의 김옥한 (제공 김옥한) 처음엔 먹여주고 재워주면서 월급 600원을 받았다. 6개월 후에 800원으로 인상되었다가 그 뒤에 1,300원을 받았다. 옷이 귀해서 주인이 입던 옷을 얻어 입었다. 명절이 되면 티셔츠를 선물 받기도 했다. 그렇게 경력이 쌓였다. 그간 모은 돈과 본가에서 논을 팔고 소를 팔아 지원을 해주었다. 당시 소 40마리 시세로 <남방안경점>을 인수하기에 이르렀다. 스물다섯에 가게주인이 되었다. 전 주인이 <남방안경점> 상호를 못 쓰게 했다. 아우가 하던 <남방시계점>에서 안경을 취급했기 때문이다. 하는 수 없이 <동방안경>으로 바꾸었다. 그 자리에서 묵묵히 외길을 걸어왔다. 정밀한 기기를 다루는 만큼 그는 세심하고 철저하다. 업무일지는 기본이고 개인 일기도 날마다 쓴다. 업무일지 여백에 안동 사투리 메모가 빼곡하다. 안경 맞추러 온 고객들이 일상으로 쓰던 말을 바쁜 일과 중에도 꼼꼼히 기록해놓았다. 개인정보가 담겨 일지 원본을 공개할 수는 없지만, 재미있는 사투리 몇 개를 옮겨본다. ""안경 쓰면 첩에 집에 간 것 긋다."" ""내가 87이래. 나이 많은데 전좌 보고 잘 복키는거 ..."" ""안경이 작꾸 내리왓사"" ""호부레비 뒤따라 옥까봐 식겁했다"" ""옛날에 여무까시라고 백내장 비슷한거 있었는데 걷어내는 의원을 만나야 되는데..."" ""얄브제라? 했다 잘 안보이드라"" ""본방치기 한 동네 남자와 결혼"" ""마커 18금이껴"" 김사장은 사라져가는 것에 관심이 많다. 오래된 책과 사진도 수집한다. 지금까지 수집한 스크랩북이 수십 권이라 한다. 보여준 파일에는 안경 쓴 유명인들 사진이 많다. 정작 그는 사진 찍히는 걸 사양했다. 2019년 11월 현재 일공공일 안경점 (서미숙) 프랜차이즈 바람은 안경이라고 예외가 아닌가 보다. 2002년1월 9일 상호를 <일공공일>로 바꾸었다. 일공공일은 전주에 본부가 있으며 전국적으로 400개 이상 가맹점을 둔 업체다. 현재 가게 면적은 예전의 다섯 배 크기로 늘어났다. 김사장 외에 직원이 세 명이다. 43년째 함께 일하는 직원이 있는가 하면, 딸 김남씨도 안경학을 전공하고 합류했다. 넷째 아들도 안경학과 재학 중에 군에 입대했다니 얼마나 든든할까. 앞으로 자녀들이 가업을 이어갈 테니 <일공공일>은 삼산동에서 건재할 것이다. # 안동우체사-부산우편국 안동출장소-안동우편국-안동우체국-안동우체국 삼산동 분점-삼산동우체국 왼쪽 삼산동우체국ⓒ서미숙 휴대전화와 이메일과 택배가 없던 시절, 우체국은 우리 생활과 더 밀착되어 있었다. 군대에서도 휴대전화를 사용하는 요즘 청춘들은 상상도 못하겠지만, 19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전화가 없는 집이 많았다. 시외전화를 하려면 우체국이나 전화국에서 시외전화를 신청하고 상대방과 연결시켜 주는 교환원이 있었다. 펜팔이 유행했던 그 시절, 잡지에는 펜팔을 원하는 주소가 즐비했다. 밤새 손편지를 써서 빨간우체통에 넣던 기억 하나쯤은 묻어둔 장년층이 많을 것이다. 우편 집배원이 빨간자전거를 타고 집집마다 배달을 다녔다. 편지를 부치고 답장을 기다리며 설렘 가득하던 그 시절이 그립다. 크리스마스 캐롤이 울려 퍼지는 연말연시가 되면 성탄카드와 연하장을 부치러 오는 사람들로 우체국이 성시를 이루었다. 요즘 우체국은 편지보다 택배와 금융기관으로 무게중심이 옮겨졌다. 추석과 음력 설날 무렵이면 택배 선물배달로 더 분주하다. 안동의 체신업무는 1895년 12월 07일 <안동우체사>로 출발했다. 1902년 6월 10일 <부산우편국 안동출장소>로 바뀌었고, 1907년 6월 12일 <안동우편국>으로 개칭했다가 1950년 1월 12일 <안동우체국>이 되었다. 과거엔 안동우체국이 지금의 삼산동 우체국 자리에 있었다. 1984년 안동우체국이 당북동으로 이전하고 안동우체국 삼산동 분점이 되었다가 이듬해 <삼산동 우체국>으로 개칭했다. # 대구은행 안동지점-조흥은행-신한은행 어느 도시를 가더라도 핵심 상권에 금융기관이 자리한다. 일찍이 삼산동엔 신한은행을 중심으로 무진회사(현재 삼산동 우체국 자리)란 일제의 고리대금업체가 있었다. 1916년 4월22일 안동군 부내면 동부동에서 주식회사 대구은행 안동지점으로 개점했다. 1941년 7월 1일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동군 안동읍 본정 3정목 114로 주소가 변경되었다. 1943년 한성은행과 동일은행의 합병으로 인하여 주식회사 조흥은행 안동지점으로 되었다. 1947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안동군 안동읍 삼산동 114로 주소가 변경되면서 삼산동이란 동명을 쓰게 되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본격적으로 안동 지역에 금융기관의 각 지점들이 생기기 시작했으며 1973년 안동농업협동조합이 업무를 시작했다. 사진으로 보는 근대 한국, 서문당 조흥은행 1989년 안동법원 출장소 개점홍보 현수막을 내걸었다.(제공 조흥은행) 1950년 7월29일, 6.25 전쟁으로 일시 휴업을 했다. 1950년 11월 11일, 원점포는 소실되고 동문동 446-3 지점장 사택에서 영업을 재개했다. 1951년 삼산동 114로 신축이전한 건물이 오늘에 이른다. 행정구역 개편으로 1963년 경상북도 안동시 삼산동 114로 주소가 변경되었다. 도로명 주소 도입으로 안동시 중앙로 41이 현주소이다. 이렇듯 신한은행은 우리나라 근대사와 맥을 같이했다. 신한은행 안동지점 2019년 11월 20일 (서미숙) #삼산동 성결교회 성결교회는 2019년에 66주년을 맞이했다. 1953년 10월 20일 교단 십자군 제 3전도대에 의해 안동시 삼산동 136번지에서 천막을 치고 장기 부흥 중에 본부의 보조로 192평의 대지를 구입하고 설립한 교회이다. 설립유공자는 천세광목사, 이성봉 목사이다. (출처: 사진으로 보는 안동 성결교회 60년사) 안동성결교회 (출처 : 사진으로 보는 안동성결교회 60년사) 66주년 맞이한 안동성결교회 (서미숙) # 안동에 칼라사진 시대를 연 성광칼라 성광칼라는 삼산동의 아이콘이다. 만주에서 사진관을 하던 형 이인홍의 영향으로 이인호가 1963년 안동에서 처음으로 <성광사>란 사진관을 열었다. 초기에는 사진 재료도 팔았다. 이인호 사장은 자식이 없었다. 성광사에서 직원으로 일하던 서대교 씨가 양자 들다시피 했다. 1970년대에 서대교 씨가 인수하여 <성광칼라>로 상호를 바꾸었다. 1980년부터 성광칼라 사진 기사이자 책임자로 근무했던 남성진 씨가 1999년에 인수하여 23년째 3대 대표이다. 현재 아들이 사진영상학과를 졸업하고 4대를 이을 준비를 하며 출근 중이다. 성광칼라는 경북 북부지역 처음으로 칼라 현상을 시작했다. 아날로그로 암실 작업을 하던 시절에는 밤늦게까지 일을 해야 할 정도였다. 1990년대 후반 남대표가 인수받을 무렵이 성광칼라 전성기였다. 졸업시즌이면 필름 사러 오는 사람들이 줄을 섰다. 과자 사놓고 기다리던 때가 있었다. 차츰 필름이 자취를 감추고 디지털시대로 바뀌면서 판도가 바뀌었다. 작품사진이나 특별한 용도가 아니면, 사진을 파일로 보관하고 모니터에서 보는 걸로 만족하는 추세이다. 서사장이 남사장 외가 쪽 친척이다. 칼라사진을 처음 현상한 성광사 (출처 : 사진으로 보는 20세기 안동의 모습) 3대를 이어가는 성광칼라 (제공 성광칼라) -삼산동에 살아보니 어떠신지요? ""옛날에는 삼산동이 최고 상권이었는데, 시내가 죽어가니 많이 처졌지요."" -앞으로 삼산동이 어떻게 되길 바라는지요? ""주거지역 지어주고, 주민이 있어야 장사가 되지, 외지 사람 상대로만 장사하면 상권에도 신경을 덜 쓰게 된다. 상권이 살아나려면 인구가 늘어나고 지속적으로 구도심을 살려줘야 한다."" 성광칼라는 점포와 주택이 안쪽으로 연결되어 있다. 상주하는 주민이다 보니 동네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삼산동이 옛날의 영화를 다시 찾을 해법은 없는 걸까? 삼산동을 기억하는 사람들 삼산동 고우네 의상실 권오걸 사장 #삼산동의 산 역사 권오걸 권오걸 씨는 이천동 출신이다. 석수암 앞에서 살았는데 농사가 힘들어 기술을 배우게 되었다. 서울에 가서 오전엔 라사라, 국제복장, 오후엔 노라노 식으로 치열하게 양장 기술을 배웠다. 큰누이가 경비를 대주었다. 디자인공부, 재단을 배우고 이대 앞에서 재단사 보조를 거쳐 고향으로 내려왔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의상실에서 옷을 맞춰 입었다. 1970년대 안동에 의상실이 120여개나 있었다고 한다. 그는 19세 때 삼산동 우체국 앞 <노라 의상실>을 거쳐 1972년에 <유 의상실>로 내 가게를 시작했다. 중고생들의 교복을 주로 만들었다. 까다로운 여학생들의 비위를 맞춰가면서 교복 잘하는 집으로 소문이 났다. <하얀집> 재단사, <동아양장점> 미싱 재봉도 했다. 1976년부터 삼산동 삼방사 옆에서 <고우네 의상실>을 열었다. 만19년간 호시절이었다. 안동 시내 멋쟁이들은 대부분 그가 만든 옷을 입어봤을 것이다. 나 또한 결혼 예복으로 만든 검은 정장은 아직도 갖고 있다. 논노, 코롱, 기성복 나오면서 맞춤옷은 사양길로 접어들었다. 그때부터 기성복으로 전환했다. 맞춤을 하다가 기성복을 팔기만 하니까 처음에는 무지 수월했다. <헌트><쉐인>< 휠라클래식> 순으로 품목을 바꾸어가며 삼산동에서 오래 버티었다. 삼산동에서 집을 팔든 임대를 하든 권사장 한테 자문을 구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는 삼산동의 산 역사이다. 덕분에 어디 가서 누굴 만나면 어떤 정보를 얻을 수 있는지도 꿰고 있었다. <고우네 의상실> 시절 권오걸씨는 옥류관 자리에 살았다. 그전에는 옥류관 자리가 ‘참사랑’예식장이었다. 이웃에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보고 들은 이야기가 있겠다 싶었다. ""현재 안동호텔과 안동관 자리에 광제병원이 있었다. 허박사가 병원을 하셔가지고 재산을 많이 일구었다. 자제들도 잘 되어 국제변호사도 있고, 교수도 있고, 의사도 있다. 허동섭 씨가 몸이 아팠어요. 일본인가 미국인가 가서 치료를 하고 제2 인생을 사시니까, 자제들도 잘 사니까 어른 마음대로 하라고 해서 장학재단을 만들었다. 혼자 안동호텔 2층에 수발하는 사람 두고 기거하시다가 98세까지 살다가 돌아가셨다."" # 광제병원과 호연장학회 1960년대 광제병원 (호연장학회 제공) 생전의 허동섭 박사 (호연장학회 제공) 광제병원 설립자는 의학박사 허동섭 許東燮이다. 원래 일본사람이 지어서 사용하던 2 층 적산가옥이었다. 한국전쟁 때에는 미 군정청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휴전 직후에 허박사가 불하받아서 개보수하여 병원을 그 자리에 개원하였다. 한국전쟁 직후 1953 년경 부터 1978 년 경까지 운영했으며, 개설된 진료과는 외과, 산부인과였다. 특이한 점은 일찍이 X선 장비도 도입하여 골절 등의 정형외과 진료도 했다는 것. 입원실이 20에서 30실 정도 규모였다. 병원 입구는 지금 삼산 우체국 앞 도로에서 안동호텔로 들어오는 쪽에 있었다. 1960년대 광제병원 의사와 간호사(호연장학회 제공) 1985 년 5 월, 유지를 받들어 재단법인 호연 장학회를 설립했다. 초기에는 고등학생과 대학생 반반 정도, 지원대상은 안동시 관내에 있는 고등학교로 부터 졸업생 중 대상자를 추천 받아서 면접을 통하여 선발한다. 지금은 한해에 5 ~10 명 정도 대학생 중심으로 지원한다. 장학금 재원은 허박사께서 그간 운영하시던 광제병원 건물을 헐고 신축한 안동호텔 건물로부터 나오는 임대료와 기금에서 나오는 이자 수입을 주재원으로 한다. 광제병원 가족들 1060년대 (호연장학회 제공) 옛 광재병원자리 안동호텔 (서미숙) #옛 <삼방사>주인 김건종 1949년생 김건종 씨는 의성김씨 집성촌 내앞 마을이 고향이다. 8남 2녀 중, 9남매가 모두 서울에 산다. 셋째인 그이만 안동에 살며 선산을 지킨다. 그와 삼산동은 일찍부터 인연이 깊다. 그의 선친(고 김시박)이 삼산동 삼방사 자리에 일찍이 터를 잡았다. 6.25 사변 후 1950년대 초반 선친이 건물을 매입하여 <상공주식회사>를 설립해서 당시 사옥으로 사용했다. 인쇄업을 하다가, 문경 시멘트 경북북부지구 총판대표이사였던 부친은 2대, 3대 무소속 경북도의원을 지냈다. 부친과 삼촌 김경종이 <상공인쇄소>를 운영했다. 통학하기 힘든 시절이라 중학교 때부터 안동 시내로 왔다. 삼방사 자리 뒤에 한옥이 있었다. 당시는 그 한옥이 삼촌댁이여서 자취를 하면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훗날 삼촌으로부터 한옥을 매입하여 결혼 후 그 집에서 살았다. 학교를 졸업하고 삼산동 140 ? 5, <상공주식회사>가 있었던 부친의 건물에 1973. 3. 3. <삼방사>를 개업했다. 1973년부터 2000년까지 29년간 삼방사란 문구점을 운영했다. -문구점을 하게 된 계기가 궁금하네요. ""아버지가 안동에서 의성 김가 우리 일가가 하지 않는 업종을 찾아봐라. 찾아보니 다 있는데 문방구가 없어. 우리 조상이 선비인데 학자들한테 필요한 게 지필묵이다. 그래서 문방구를 시작하게 되었지요."" 한편 김건종 씨는 (77~91) 국정교과서주식회사 안동공급소장을 맡아 일년에 100만권씩 공급하느라 갈빗대가 세 대 부러질 정도로 힘들었다. 무시로 (가마니로 포장된 = 허적대기 포장)포장된 교과서는 당시는 박봉의 봉급과 공급 경비를 받았다. 학자는 못 되었지만 학생들에게 필요한 공책 팔고 책 나르는 일을 했다. 삼방사 한옥에서 살던 시절 김건종 가족과 처남 김영훈 (사진제공 김건종) 연탄난로를 피우던 초창기 삼방사 내부, 사진 속 남매는 성인이 되었다. 아들은 지금 삼산동 문화의 거리 3층에서 만화카페 벌툰을 운영한다. 80년대 삼방사 앞에서 기념촬영한 막내동생 김순종 (사진제공 김건종) 작은 문구점으로 시작해서 1984년 부친으로부터 그 건물을 구입했다. 33세에 건물주가 되어 건물을 신축했다. 삼방사를 개업하고 나서 문구점 관리는 부인이 주로 맡다시피 했다. 이후 삼산동의 <마켓 21>부터 <베스킨라빈스> <CNA (상공인쇄소 자리)> 까지 건물을 사들여 임대업을 한다. 아들이 건물관리를 하고 노후를 보내며 뒤를 봐주는 편이다. 1988년 삼방사 건물 개축당시 모습, 삼방사 옆에 고우네 의상실, 톰보이, 동방당 안경점 간판이 보인다. (사진제공 김건종) 도시재생사업으로 환경개선을 한 문화의 거리 ⓒ서미숙 천만광광객 유치를 위한 플래시몹 (서미숙) ""삼산동이 다운타운이 된 것은 교학사 자리, 농협지부 자리에 예전에 버스터미널이 있어서였다.""고 김건종씨는 회고했다. 문화의 거리가 차 없는 거리가 되면서 인근 상인들은 오히려 피해를 보는 쪽이 많다고 한다. 차가 지나다니지 않는 거리는 접근성이 떨어져 매출에는 지장이 있는 모양이다. 김건종씨에게 삼산동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우마차가 다닐 때 소 엉덩이에 소똥 떨어질까 봐 가마니를 받히고 다녔다. 삼방사 맞은편 가게였던 대구전기 함동훈 씨 부친이 먼지 날지 말라고 날마다 길에 물을 뿌렸다.""고 한다. # 삼산동에서 멋 부리고 놀았던 이상호 탈 쓰나 안쓰나 똑같다는 이상호 선생 (서미숙) 사람의 끼는 타고 나는 모양이다. 인간문화재(하회별신굿탈놀이보존회 69호 백정 역) 이상호 씨는 삼산동에 대한 추억이 많다. 1945년 해방동이다. 남부동에서 태어났지만 주로 삼산동에서 놀았다. ""다섯 살 때부터 구두 신고 가죽가방 메고 남부동에서 삼산동을 거쳐 대건 유치원에 다녔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이 목성동 성당에 신부님으로 오셨다. 안동초등학교 시절부터 연극도 하고 끼가 다분했다."" 아들 셋 낳아 놓고 아버지는 6. 25 때 좌익으로 몰려 경찰에 잡혀가서 돌아가셨다. 연좌제 때문에 공부할 생각도 안했다. ""예전에는 사장 뚝을 중심으로 해서 구시장 쪽에 사는 아들은 멋쟁이고, 맘보바지, 나팔바지입고 살았고, 야바위꾼 모이는 거는 베전 골목 부근에 많이 모였지."" 안동중학교에서 열린 시민체육대회에서 트위스트 추던 이상호, 사진 왼쪽 첫번째 경안고등학교 시절에는 양복점에서 제일모직 바지 맞춰 입고, 흰 운동화 대신 백구두를 신고 폼잡았다. 당시 삼산동에는 구두점이 많았다. ""'국제양화점'이 중소기업은행 앞에 있다가 삼방사 옆으로 옮겼다. 김창현이 서울 가서 수제구두 만드는 기술을 배워왔는데 안동 시내 건달들은 국제양화점 구두를 다 신었다."" 삼산동 조흥 은행 뒤에는 <경일식당>이란 한식집이 있었다. 그곳은 이상호 선생 조모님 언니가 운영했는데 갈비탕을 주로했다. ""세멘 거랑이라 그랬어요. 안동시청 앞에서 어개골까지 흘러가는 하천을 안동의 세느강이라고 했지요. 맘모스 뒤쪽으로 해서 남부동 우리 집(최유근 안과 맞은편, 당시 대동식당) 앞으로 흘러갔죠. 비오면 반도 가지고 고기도 잡고 그랬어요."" ""6.25사변 전에는 농협에서부터 대구은행 뒷길로 해서 맘모스제과 뒤쪽에 큰 거랑이 홈플러스 앞쪽으로 흘러갔다. 농협자리가 버스 터미널인데 삼환여객 하나 뿐이었다. 삼환여객 버스도 우리집(남부동 최유근안과 맞은편으로 당시 대동식당 ) 앞으로 해서 지금 홈플러스(당시 철도국) 앞을 거쳐갔다. 오가다로 원동기 돌리듯이 손으로 돌려서 시동을 걸었다."" 버스터미널은 중소기업은행 자리로 이전했다가 홈플러스 자리를 거쳐 현재 송현시대를 맞이했다. <대구전기> 옆에는 70년대 중반 안동에서 유명한 <8.15제과점>이 있었다. 맘모스 제과점이 생기기 전에 중고생들의 데이트장소였다. 80년대 중반에는 <대구전기> 옆에 숙녀복과 잡화를 주로 취급하는 <신라백화점>이 있었다. 삼산동 대구전기상회 4층서 1970년 9.12 개국한 안동문화방송(출처:안동문화방송 30년사) 1970년 9월 12일, 안동시 삼산동 99번지 대구전기상회(현재 중앙시네마 맞은편) 건물 4층에서 안동방송이 첫 전파를 발사했다. 처음에는 AM 라디오 중심이었다. 당시 2,3,4층을 임대해서 5년간 방송업무를 수행했다. 1971년 한국문화방송의 가맹사가 되면서 안동문화방송으로 상호를 바꿨다. 1975년 9월부터 남문동 145-3, 대구은행 건물 3층은 1985년 태화동 신 사옥 으로 옮길 때까지 약 10년 가까이 MBC의 애환이 서린곳이다. 1980년 언론 통폐합과 함께 ㈜문화방송의 계열사로 변경되면서 오늘에 이른다. (출처 : 안동문화방송 30년사) 1970년대 후반 '별이 빛나는 밤에'란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이 인기 있었다. 시그널 뮤직만 나와도 가슴 떨리던 시절이었다. 이상호는 1980년경 안동 MBC 1기 전속가수로 활동했다. 돌아가는 삼각지, 비 내리는 명동거리 등 배호 노래를 주로 불렀다. MBC에서 성우를 해보라고 해서 매주 일요일 아침 가십 프로그램에 출연해서 광복 20년 연속 소설 낭독도 했다. mbc 가수 시절 희방사 야유회. 왼쪽 기마 앞에 선 이상호와 안동 MBC상징(출처:안동문화방송 30년사) 군대에서도 연예단 소속이었다. 1972년부터 탈춤을 시작한 그는 타고 난 춤꾼이다. ""춤 춰가지고 디다는 소리는 안 한다. 안동 친구들이 날 보고 저 새끼 돌았는 놈이라 그래. 가수나 연예인 하면 돈이나 벌겐데. 재주도 좋은 놈이 저거 한다고."" 돌았다 카던 말던 내 혼자 끝까지 해보면 안되겠나 싶었다. 하도 그카니까 나중에 친구들이 그래. ""니는 탈 쓰나 안쓰나 똑같다."" #삼산동에 활기를 불러오는 사람들 예술영화 전용관 중앙시네마 (서미숙) 예술영화 전용관 중앙시네마 중앙시네마는 삼산동 문화의 거리 자존심이다. 예술영화전용관으로 안동 사람들의 문화 갈증을 해소해주는 오아시스 같은 존재이다. 2000년 8월에 정사영씨가 개관한 극장을 2014년 2월부터 한태희 씨가 인수했다. 예술영화 전용관으로 바뀐 건 2009년 부터이다. <워낭소리>가 인기를 끌면서 사람들이 독립영화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독립영화 살리고 영화진흥공사를 영화진흥위원회로 바꾸면서 독립영화관 지원사업, 예술영화 지원사업이 진행되었다. 한 대표는 경기도 포천에서 태어나 충청도 보은에서 자랐다. 청주에서 살다가 1994년 KT 발령을 받고 안동에 정착하게 되었다. 2009년 12월 퇴직하고 시민단체 활동하면서 중앙시네마를 알게 되었다. 당시 공동체 영화, 시류에 민감한 영화 같이 보기 운동을 하면서 <우리 학교> <서해 여기>등 북한 관련 영화도 상영했다. 전 주인은 중앙시네마와 구시장 안에 진성극장을 같이 운영했다. 2004년 안동에 멀티플랙스가 들어오면서 단관영화관은 문을 닫는 시점이었다. 중앙시네마 내부 (사진제공 중앙시네마) ""안될 줄 알았어요. 그래도 해야겠다. 예술영화 전용관이라 예술영화지원사업이 있으니까 이런저런 시도를 해볼 수도 있고, 큰 이득은 없지만, 손해 보지 않고 현상 유지할 수 있으면 의미 있는 일이란 생각으로 시작했지요."" ""박근혜 정부 초기에 이명박 정부의 <천안함 프로젝트>란 독립영화를 상영 못하게 하는데 했어요. 그랬더니 ""지원 사업에서 탈락되어 2014년 첫해엔 손해를 봤죠. 2,500만원 사비가 들어갔어요. 2015년 <다이빙 벨> 상영으로 예술영화 전용관 지원 사업이 없어졌어요. 그러자 왜곡 현상이 생긴 것이죠. 영화 상영할 곳이 없어지자 2016년 유통배급 지원 사업으로 계약을 갱신했습니다."" ""2017년 정부 바뀌고 문화정책이 다시 안정적으로 돌아간 셈이죠. 문 닫을까 하던 중 사회적기업 운영으로 가기 전 단계인 사회적 기업 육성가 사업이 생겨 여기까지 오게 되었죠."" 최근 예술영화전용관운영 지원 사업으로 감독을 초대하고, 테마별 영화상영과 기획전, 시나리오 입문과정도 해왔다. 내년에는 영화제작사업 일환으로 영화비평, 단편영화 제작교육 등 계획 중이다. 좋은 영화를 상영하는 예술영화 전용관이 가까이 있는 것만으로도 늘 감사한다. 아날로그 시대에 사용하던 영사기는 장식품으로 밀려났다. ⓒ서미숙 #집밥이 땡기는 날은 태함식당 골부리국 할머니의 손맛으로 만든 밑반찬과 골부리국 (서미숙) <태함식당>은 집밥이 땡기는 날 가는 단골집이다. 중앙파출소에서 뒤에서 임치순 할머니가 53세부터 19년째 운영 중이다. 한결같이 단아한 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맵짜다. ""내 금소 동네서 컸잖니껴. 안동포 나는 동네. 어릴 적에는 골부리 넣고 된장도 찌져 먹고, 친정엄마한테 골부리국 끓이는 거 배웠지요. 처음에는 소머리 곰탕도 하고 닭 볶아주고 해 보이 술집도 밥집도 아닌 것이 어중간해. 석 달 만에 치워 부랬어. 그때부터 골부리국 한 가지만 해."" 반찬도 모두 할머니가 손수 만든다. 정갈한 밑반찬과 계절별로 나물 반찬을 준비한다. 사계절 빠지지 않는 매뉴가 콩가루 무쳐 찐 부추 무침이다. 토속적인 맛을 잊지 못하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다. 점심시간에는 인근 직장인들이 몰려온다. 입소문을 듣고 할머니들이 곗날에 찾기도 한다. 서른둘에 혼자되어 아이들 키우느라 힘들었다. 안동역 앞에서 여인숙을 했다. 돈 빌려줬다가 떼이는 바람에 신경 써서 큰 병을 얻었다. 쉰한 살에 직장암 수술을 받았다. 병원에서 원장이 움직이라 해서 태함식당을 시작했다. 그때 내 죽었다 생각하고 골부리국 가격을 한 번도 올리지 않았다. 골부리국전문 태함식당 (서미숙) 가격이 착한 대신에 한 그릇은 팔지 않는다. 둘 이상은 함께 가야 할머니도 상 차린 보람이 있다니 기억할 일이다. 막내아들(43세)이 요즘 와서 도와준다. 앞으로 가게를 이어받으려고 배우는 중이다. ""아침 7시 전에 나와서 준비하면 11시 반부터 점심 장사를 해요. 골부리국 떨어지면 문 닫아 부래. 요즘 국을 사가는 사람이 얼매나 많은 동, 저녁에는 일찍 문 닫는 날이 많애. 일요일도 쉬지 않고 문을 연다."" 주방에 데쳐놓은 얼갈이배추와 파가 선명한 녹색이다. 거기에 부추와 골부리를 넣고 밀가루를 풀어 걸쭉한 맛을 낸다. 할머니는 음식은 재료가 좋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모쪼록 대를 이어 삼산동 맛집으로 자리매김하길 바란다. ""오래 해야 된다고 손님들이 그꾸 나싸. 6시 내 고향에도 세 번이나 소개하라 그는 데 아(안) 했어."" #삼산동 유감 문화의 거리에서 서점이 사라지다 한 때 삼산동에는 조흥은행(현 신한은행)을 중심으로 <스쿨서점>과 <교학사>가 나란히 같은 통로에 있었다. 스쿨서점이 삼산동 중앙파출소 옆 버스승강장 앞으로 옮겼다가 2011년 끝내 문을 닫았다. 그때만 해도 충격이었다. 시내에 나가면 가끔 들러 잡지라도 뒤적이던 아지트가 사라져 몹시 허전했다. 50년 전통의 서점, 교학사도 어느 날 삼산동에서 자취를 감추었다. 어떤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교학사 서점 자리는 몇 년째 비워져 있다. 새로 옮겨 간 곳은 남부동으로 규모가 많이 축소되었다. 교학사는 55년째다. 장사숙 사장이 1965년 예천에서 창업해서 하다가 안동으로 와서 47년 하셨다. 장남 장우영이 5년 가까이 부친을 도왔다. 장사숙 사장이 돌아가시고 2010.11부터 처남 손질걸 씨가 인수했다. 2018.6월 남부동으로 이사했다. 문화의 거리에서 50년이 넘은 서점이 사라지는데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11월 11일 서점의 날이다. 제1회 때 그는 문 닫아야 할 서점을 살리고, 지역 서점을 지켰다고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받았다. 몇 년째 비어있는 교학사 서점 자리 (서미숙) 서점이 온라인 업체에 이길 수 없다. 책방 하나 없는 도시는 너무 삭막하다. 젊은 친구들이 책을 너무 안 읽는다. 책 사러 오는 분들은 연세가 있고 책 읽는 게 몸에 밴 분들이다. 교학사 손대표는 ""오십 년이 넘는 가게를 찾아서 스토리를 만들면 자부심을 가지게 되고 시에서는 표시를 해주자.""고 제안했다. 몇 집 건너 빈 점포 우려했던 것이 현실이 되었다. 삼산동을 돌다 보니 도심공동화가 피부로 느껴진다. 삼산동 핵심 신한은행 앞에 세 코너가 몽땅 비었다. 가게 유리마다 임대문의만 잔뜩 붙어 있다. 어쩌다가도 아니고 몇 집 건너이다. 삼산동 전체를 파악하면 숫자가 꽤 된다. 현재 가게를 유지하고 있는 사람들도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지금 있는 사람들도 전부 나가고 싶을 걸요."" 도시재생사업을 한답시고 혈세를 쏟아부어도 효과는 미미하다. 이를 어찌할 것인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러다가 유령의 도시가 될까 두렵다. 임대ⓒ서미숙 임대ⓒ서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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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안동의 원도심 삼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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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안동의 북쪽 관문 북문동을 돌아보다
- 태사묘와 장터가 있는 북문동 골목의 시간 안막동에서부터 천리천을 거쳐 낙동강으로 흘러들던 물길이 지나고, 안동읍성 북문 문루가 있었고, 고려의 흔적이 새겨진 태사묘와 장터가 있는 북문동 골목의 시간 속으로 들어가 다시 돌아본 북문동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안동시 북문동 지적도. 북문시장이 들어서기 전으로 북문동 구역과 태사묘, 자혜의원(현 안동의료원), 안동시청(현 안동시보건소) 위치가 표시되어 있다. 안막동에서부터 신안동, 북문동을 지나 천리동으로 흘러내려가던 천리천 물길이 표시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79년의 안동시 북문동 일대 지적도 (출처:국토정보지리원) 북문동은 안동시 중구동에 속하는 동네로 조선 후기에는 안동부 북부에 속하던 지역으로 1947년 해방이 되고 일본식으로 변경했던 동 이름을 삼산동, 서부동, 북문동, 옥정동, 율세동, 신세동, 법흥동, 동문동, 동부동, 운흥동, 남문동, 남부동, 천리동으로 세분하면서 북문이 있던 곳이라 하여 특별히 북문동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북문동이라는 지명은 이곳이 안동부 읍성 안에 속했던 동네로 북문 문루가 있는 곳이었음을 알려준다. 영가지에 따르면 안동읍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안동부내 읍성은 돌로 쌓았는데 둘레가 2,947자이고 높이는 8자이고 안에 우물이 18개소, 도랑은 2개소, 못은 5개소였고 성의 4 곳에 문루가 있었다. 태사묘 옆 담장을 따라 안동의료원 쪽으로 올라가는 길 끝쪽 약국 앞에서 북문읍성의 표식을 만날 수 있다. 북문읍성 표지석과 함께 바닥에 읍성지도가 인장처럼 새겨져 있다. 북문읍성 표지석 ⓒ이미홍 북문읍성 표지석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안동의료원이 있다. 1912년에 자혜의원으로 문을 열었다. 지역민을 위한 의료 시설 확충과 지역의료 발전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경상북도가 전액 출자해 설립한 북부지역 공공의료기관으로 거듭난 도립안동의료원은 한 자리에서 100년이 넘는 시간을 안동사람들과 함께 하고 있다. 안동군처와 자혜의원 사진(유리건판. 1915 국립중앙박물관) 북문동에서 100년의 역사를 이어온 경북도립안동의료원 ⓒ이미홍 고려 속의 안동을 만날 수 있는 태사묘 북문읍성 표지석이 있는 지점에서 안동의료원을 등지고 골목을 따라 내려가면 태사묘담장과 만난다. 북문동의 터줏대감이라 할 수 있는 태사묘는 고려 태조 왕건이 후백제 견훤과의 병산전투에서 왕건을 도와 견훤을 물리친 권행, 김선평, 장길 삼태사를 기리기 위해 건립되었다. 태사묘 대성전 안에는 고려를 개국하고 왕이 삼태사의 공을 치하하고 세 성씨를 내린 흔적들이 중수기에 기록되어 있다. 태사묘 안 보물각은 삼태사가 아닌 홍건적의 난 때 노국공주와 함께 안동으로 몽진을 왔던 공민왕과 고려왕실의 흔적을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유물을 보존·전시하기 위한 '보물각'이 1963년에 건립되었다. 태사묘 본당 대성전 (유리건판 1915년, 국립중앙박물관) 시내 북문동 도심 골목에 자리하고 있는 태사묘는 삼태사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묘, 즉 사당이라는 말이니, 도심 골목 안에 역사적 위인을 위한 추모공간을 세운 것이다. 안동부라는 지명과 함께 고려시대로부터 이어져내려온 이 골목의 역사성을 보여주는 태사로의 시작점이기도 하다. 태사묘 깊숙한 안쪽에 삼공신을 모신 사당이 있고 삼태사의 묘정비와 위패가 모셔져 있다. 삼태사의 위패를 모시고 향사하는 것이 태사묘의 첫 번째 존재이유일 것이다. 태사묘가 생긴 이래로 오늘까지 삼태사의 후손들이 그 일을 면면히 이어오고 있다. 태사묘에 관해 설명하고 있는 정제 권정찬 ⓒ이미홍 권태사의 후손으로 오랫동안 태사묘 일을 봐왔던 권정찬 선생을 만나러 태사묘를 찾아간 날, 중구동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으로 태사묘 앞 골목길이 속까지 깊이 파헤쳐져 바닥이 드러나 보였다. 태사로 골목에 전선을 땅속으로 묻는 지중화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이 태사로 거리를 재생한다고 동의서를 받으러 왔더라고요. 우선 불편해도 감수를 해야지요. 담장 낮추는 것에도 삼성 대표들이 동의를 했고요."" 태사묘가 있어서 붙여진 거리 이름 태사로에 대한 자부심과 책임감이 함께 있는 셈이다. 시청에서 근무하면서 태사묘를 자주 드나들게 되면서 퇴직 후 자연히 권씨 문중 어른들에게 눈도장이 찍혀 태사묘 일을 이어받아 하게 되었다는 권정찬 선생은 태사묘에서 첫 번째로 공을 들이는 일이 향사라고 했다. ""향사를 올리는 것이 후손들이 하는 가장 중한 일이지요. 세 성씨의 후손들이 같이 준비해서 향사를 올리는데 전국 각지에서 후손들이 태사묘에 모여 선조들 앞에 고하는 자리이기도 하지요. 향사를 무사히 잘 치르고 나면 그해 가장 큰 일을 마친 셈이지요."" 태사묘 대성전에서 고지기와 이야기하고 있는 권정찬 ⓒ이미홍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집안 어른들 중에 삼태사와 태사묘 내력이며 보물각에 얽힌 이야기들을 낱낱이 꿰고 있는 분들이 계셔서 참 좋았는데, 그 어른들이 돌아가시고 난 후로 태사묘를 제대로 지켜나가는 일이 후손들에게 점점 쉽지 않은 숙제가 되고 있다고 말하며, 상주하는 관광해설사 분에게 열쇠를 받아 잠겨있던 문들을 열어주었다. 태사묘 사당 문을 여는 태사묘 해설사 ⓒ이미홍 알고 보면 태사묘는 삼태사만의 공간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왕건을 도와 고려의 시작을 함께한 삼태사의 이야기를 품은 공간과 홍건적의 난 때 몽진하여 안동에 70여일을 머물고 간 공민왕과 왕실 가족들의 이야기가 담긴 보물각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두 공간을 나누는 작은 문이 사이에 있어 중문을 넘어가면 보물각이 자리한다. 고려 공민왕이 내린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태사묘 보물각 ⓒ이미홍 대성전과 사당 공간이 삼태사의 공간이라면 보물각은 공민왕의 공간인 셈이다. 공민왕 일행이 몽진을 와서 70일을 머물며 홍건적의 난을 물리치고 상경 하면서 왕실을 보필한 고창 백성들을 치하하고 왕실 물품들을 하사했으니, 보물 제451호로 일괄 지정된 공민왕의 교지와 관모, 옥관자와 200여점에 이르는 물품들이 보존, 전시되고 있다. 관광해설사가 상주하고 있어 누구라도 신청을 하면 문을 열어줄 뿐 아니라 해설까지 곁들여 들을 수 있다. 웅부공원이 지척이고 시내 어디서도 접근이 어렵지 않으니 볕 좋은 날 잠시 시간을 내어 보물도 구경하고 고려와 안동의 오랜 내력을 해설로 들어보면 좋을 것이다. 태사묘 열 골목안 두 번째 집에 살던 기억 고향이 예안면 귀단리 고통인 임옥순은 1948년 생으로 이웃 동네에 살던 이문원과 혼인을 하고 아들 형제를 낳았다. 처녀 때 안동읍내에 자취를 하며 미용학교를 다녔고 혼인을 하고 난 후에 시내로 나와 살아서 60년대와 70년대 북문동의 모습을 많이 기억하고 있었다. 옥순씨가 미용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분수대 지나 버스터미널까지만 포장이 되어 있고 북문동 다리가 있던 지금 시청 그 위쪽으로는 다 비포장 흙길이었다고 기억한다. 처녀 때 다닌 안동미용학교 졸업식 사진 ⓒ임옥순 ""미용학교 다닐 때 북문동 버스터미널서 집까지 버스를 타도 한 시간이 넘는 거리였어. 여자애들이 늦게 다닐 수도 없고 해서 방을 얻어 자취를 하면서 미용 배우러 다니고 했지. 멋 내는 것에 흥미도 많을 나이인데다 머리를 만지는 걸 배우니까 재미있었지. 배워서 언니 머리, 친구들 멀리 다 만져주고. 그런데 미용학교 마치고 얼마 안 있다 시집가는 바람에 미장원 일을 하지는 않았어."" 결혼을 하고 이사도 여러 번 다녔다. 옥야동에서도 살고 당북동 쪽에도 살다가 북문동으로 와서는 태사묘와 담장 하나를 사이에 둔 바로 옆 골목에 집을 얻어 살았다. 재건운동본부에서 마을금고 만드는 일을 했던 남편 이문원 ⓒ임옥순 ""옛날 태사묘 바로 옆 왼쪽 골목에 집이 있었어. 애들 아버지가 그때 분수대 쪽에 있던 국민운동재건본부에서 마을금고 일을 하고 있어서 그쪽에 집을 얻은 거지. 골목 안 두 번째 한옥집이었는데 태사묘 하고 담장 하나로 이웃하고 있어서 우리집 툇마루에 서면 담장 너머로 태사묘가 다 보였어. 태사묘에서 제사 지내고 하는 것도 다 보였지. 애들이 태사묘 잔디가 깔린 마당에도 많이 가서 놀았어. 큰애가 세발자전거 타고 가서 세워놓고 시청 앞 분수대에 들어가 물놀이 하고 있는 걸 잡아온 적도 있어."" 옥순씨 바로 옆집이자 골목안 첫 번째 집은 총을 팔던 총포사여서 엽총을 든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었고, 그 골목을 따라 가면 북문시장이 나왔다. ""그 샛골목 따라 쭉 가면 북문시장이랬어. 그때는 복개를 하기 전이랬는데 개천둑 양쪽으로 가게들이 있었어. 분수대에서 올라가면서 왼쪽으로 목욕탕, 이발소가 있었고 이쪽에 국수가게, 기름방, 식육점 그런 게 있었어. 북문시장에 국수 사러 가다가 골목에서 바바리맨 만나서 기겁하기도 하고 그랬어. 그때는 버스터미널도 북문동 다리 있는데 있었어. 집에 갈 때 거기서 덜컹거리는 버스 타고 집에 가고 했던 기억이 많지."" 태사묘 잔디밭에서 놀던 옥순씨네 아들 형제. 1970년대. ⓒ임옥순 북문동 살면서 가장 기억나는 일로 옥순씨는 연탄파동을 꼽았다. ""그때 연탄파동이 났어. 석유파동이 어떻고 하더니 동네 연탄보급소마다 연탄이 떨어져서 돈 들고 가도 연탄을 못 사는 거야. 파동이 나니까 동사무소에서 연탄 배급표를 줬어. 큰애는 걸리고 둘째는 들춰 업고 동사무소 가서 배급표 받아서 안동연탄공장으로 갔어."" 당시 연탄공장은 강원도에서 기차로 실어오는 석탄을 받아서 만들었기에 대부분 역 근처에 있었다. 연탄공장 가서 배급표를 주면 연탄 백장을 실은 리어카가 한 대 따라나왔다. ""연탄 배달하는 아저씨가 연탄이 무거우니까 쉬지도 않고 빨리 가. 나는 애를 업고 하나는 손에 끌다시피 하면서 연탄리어카 따라잡던 게 지금도 기억이 나지."" 그 연탄공장 자리는 그 뒤 북문동에 있던 버스터미널이 옮겨가 안동버스터미널이 되었고, 그리고 지금은 그 자리에 다시 대형마트가 들어서 있으니 강산이 몇 번이나 변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연필스케치로 옥순씨가 그린 자신의 얼굴 ⓒ임옥순 연탄파동이 났을 때 배급표를 들고 연탄공장에 가서 연탄을 배급받았던 옥순씨는 남편의 직장 따라 북문동 골목을 뒤로하고 대전으로 갔다가 서울로 가서 서울사람이 되었다. 서울에 살면서는 고추파동을 겪었는데, 서울서도 동사무소에서 배급표를 받아 고추상회에 가서 한 집에 몇 근씩 달아주는 대로 고추를 받아서 그해를 났던 기억이 있다. 사람과 물자가 흔하다고 해도 서민들이 사는 모습이야 어디라도 별다르지 않더라 했다. 태사로에서 고려의 거리를 꿈꾸는 사람 1987년에 KBS 안동방송국으로 발령이 나면서 북문동에서 30여년을 살아온 강점용은 1946년 생으로 경남 진주 함양이 고향이다. TV문학관을 찍으며 전국을 다니면서 안동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북문동 태사로에서 30년을 살아온 강점용 ⓒ이미홍 ""제가 77년도부터 하회를 들락거렸어요. 내가 들락거리던 그때만 해도 하회에 초가집에 하인들만 살았어요. 기와집에 있는 사람들은 문을 잠가 놓고 다 외지로 나가 있고 관리자만 남아 있었어요. 그래서 내가 TV문학관 할 때 하회마을에 가서 촬영을 많이 했어요. 그때만 해도 집집이 문을 열어보면 등잔이며 병풍이며 골동품들이 가득 했어요. 촬영을 위해 전국을 다녀봤지만 안동이 제일 역사성이 깊더라 이거예요. 역사적 장소와 이야기가 안동만큼 많이 남아있는 곳이 없어요."" 태사로와 웅부공원이 잘 보이는 도시재생센터 1층에서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태사로의 역사성에 대한 이야기부터 꺼내는 강점용씨다. ""여기 안동예식장 자리가 있는 이 태사로 거리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고려시대 역사를 증명하는 태사묘가 있고, 여기 웅부공원 자리가 조선시대 안동부가 있던 장소고 맹사성이 심었다는 부신목이 있지요. 그리고 이 길을 따라 쭉 나가면 임청각이 있습니다. 임청각은 우리 근대 역사를 말해주는 상징적인 공간입니다. 그래서 저는 10년 전에 태사로 거리를 조성할 때부터 임청각을 꼭 넣어야한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동네 사람들이 의외로 임청각을 멀리 생각하더라고요. 별개의 자리라고 생각하더라 이겁니다. 임청각이 우리 역사를 말해주는 근대고 그리고 월영교가 뭐죠? 스토리를 입혀 현대에 만든 다리죠. 이 태사로에서 월영교까지 고려에서, 조선, 근대, 현대까지 이렇게 시대 순으로 장소들이 놓여져 있는, 그런 곳이 세계적으로 여기 말고 없습니다."" 북문동 사람들이 태사로 고려의 거리 재현을 위해 왕실의 복장을 입고 있는 모습 ⓒ강점용 안동이 역사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 옛날부터의 역사적인 뿌리가 튼튼히 자리 잡고 있는 것이 안동이고 그리고 그 출발점이 태사로라고 그는 생각한다. 고창전투가 실제 있었고 놋다리밟기, 차전놀이의 발원지가 다 이곳과 연관이 있다. 왕건하고 견훤하고 싸웠던 역사가 증명하고 있는 원 뿌리가 있고, 노국공주와 공민왕이 남긴 유물도 있고, 놋다리밟기, 차전놀이 같은 민속놀이도 있기 때문이다. 전국에서 고려와 관련된 역사적 유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곳인 태사로를 사람들이 찾아오는 태사로로 만들고 싶은 것이 그의 꿈이자 도시재생센터를 중심으로 진행되는 중구동 태사로 재생사업의 큰 줄기라고 한다. 그런데 꿈이 현실이 되기까지는 시간이 걸린다. 그가 북문동에 둥지를 튼 이래로 오래전부터 생각해왔던 일이지만, 한 사람의 개인이 노력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었다. 다행히 안동예식장 자리에 도시재생센터가 들어서면서 태사로에도 조금씩 변화가 생기기 시작하고 있다. 고려의 거리 이야기도 먼 일이 아니게 되었다. 그런데 태사로 골목 안 사람들이 그 일을 다 반기는 것은 아니다. 모든 일에는 그늘이 있는 법이었다. ""집 가진 세대주 입장하고 세입자 분들하고는 생각이 다른 것도 많지요. 이렇게 재생사업을 해서 이곳에 사람들이 찾아오기 시작하면 임대료 오르고 세입자들이 쫓겨나는 사태가 온다 이거지요. 임대로 내며 장사하는 사람들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지요. 저도 아내하고 이 골목 안에서 오래 추어탕 장사를 했지만 상인들 입장에서는 해도 걱정, 안 해도 걱정인 거지요."" 도시재생센터에서 바라본 부신목과 회나무가 있는 태사로 웅부공원 ⓒ이미홍 ""요즘도 여기 아침에 산책을 나와 보면 아침마다 저 부신목 앞에서 기도하는 할머니가 있어요. 신령한 나무, 신목이라는 거지요."" 퇴직을 하고 아침이면 동네 산책을 하는 그저 평범한 시민이지만 태사로 조성사업을 하면서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나서서 주민들을 설득하고 다니며 안 들어도 될 말도 듣지만 그래도 이 거리의 역사성을 살리는 것이 결국은 다 같이 잘 사는 길이라고 그는 생각한다. 친구가 보내준 모친이 했던 진주 함양 동문식당 사진. 사진 오른쪽 기와지붕 건물이 동문식당이다. (출처:함양군청) 그가 안동방송국으로 부임해 방송국에서 일을 할 때 부인은 북문동 골목 안에서 시어머니로부터 전수받은 추어탕 장사를 시작했다. 집을 구할 때 북문동 골목 안에 있는 집을 택한 것도 이유가 있어서였다. ""우리 어머니가 진주 함양에서 추어탕을 했어요. 그리고 서울 가서 형수님이 물려받아 하다가 형수 돌아가시고 우리 집사람이 이어받아서 했어요. 그러다가 내가 안동으로 오면서 여기 북문동에서 집사람이 추어탕집 문을 연 거지요. 경상도추어탕이라고 붙인 이유는 경상도하고 전라고하고 추어탕 만드는 게 달라요. 경상도 추어탕은 생채를 풋내가 안 나게 바구니에 으깨서 넣고 전라도 추어탕은 무청을 삶아서 넣어요. 그리고 툭바리가 달라요. 경상도 툭바리는 아래 위가 같아요. 남성적인 느낌이랄까, 그런데 전라도 툭바리는 하관이 좀 빠졌어요. 좀 더 여성적이지요."" 그의 모친이 함양 동문식당에서 추어탕을 할 때 전라도 남원에서는 샛집추어탕이 유명했다. 당시 두 집이 추어탕으로 양쪽 지역에서 알아주는 양대 맛 집이었던 셈이다. 그런 만큼 어머니의 손맛을 이어받은 경상도추어탕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미꾸라지도 전라도는 평야가 많으니까 미꾸라지가 크고 납닥하고, 경상도는 산이 많고 개울이 좁다보니까 미꾸라지도 잘고 동글동글해요. 습생도 다른데 미꾸라지가 야행성인데 전라도 미꾸라지는 잡아넣어 놓으면 그냥 자지만 경상도 미꾸라지는 동그랗게 몸을 말고 똬바리를 틀고 머리를 틀고 있어요. 미꾸라지는 활동성이 좋은 게 맛이 더 있는데 경상도 미꾸라지가 더 많이 움직이고 훨씬 더 맛이 있어요."" 전라도 사람들이 그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는 그렇게 보고 배웠다. ""추어탕 할 때 가을 '추(秋를)' 쓰는데 추어탕을 원래는 가을에만 먹었기 때문이에요. 왜냐, 속배추가 있어야 하니까. 가을배추속이 고소하잖아요. 그냥 야채를 삶아서 쓰면 맛이 없어요. 제피도 우리는 지리산에서 나는 것을 쓰고 추어탕을 담는 툭바리도 고향의 흙으로 만든 걸 가져와요. 추어탕은 툭바리에 먹어야 돼요. 그래서 우리 집은 배달을 안 해요. 음식은 옮겨서 먹으면 맛이 달라요. 그릇도 다르고, 그리고 와서 그곳에서 먹어야만 보이지 않는 마늘이며, 제피며 그 속 재료의 맛을 제대로 즐길 수가 있어요."" 골목 안으로 들어가야 맛볼 수 있는 경상도식 추어탕 집 ⓒ이미홍 그는 아들 며느리에게 추어탕 가게를 물려준 지금도 마늘을 자신이 직접 의성에 가서 눈으로 보고 사서 가져온다. ""추어탕에 갈아 넣을 거니까 사실 떨어진 거나 됫박을 까서 파는 마늘 사오면 가격도 더 싸지만 마늘이 단단하게 제대로 붙은 걸로 접으로 매달린 걸사요. 마늘 사러 30년 동안 같은 집을 가요. 처음 그 집을 선정할 때도 가업을 이은 집을 찾아서 갔어요. 가업을 이은 집은 어른들들 때부터 이어온 명성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소홀히 하지 않거든요. 처음에는 내가 바가지를 좀 썼어요. 30년 지난 지금은 내가 가면 가장 좋은 마늘을 가장 좋은 가격으로 줘요. 그리고 그 입소문이 안동까지 와요. 그 사장은 마늘 하나를 사도 떨어진 거는 안사고 그리 사가더라고요."" 광고가 따로 필요 없이 재료 하나를 구입하는 것에서부터 어머니 때부터 해온 기본을 지키는 것, 그것을 아는 사람들이 경상도추어탕을 찾아온다고 그가 며느리와 아들을 앉혀놓고 늘 하는 말이다. 점용씨 모친이 남한테 맡기지 말라고 했던 쪽과 주걱 ⓒ이미홍 경상도추어탕 집은 골목 밖에서 보면 간판이 잘 보이지 않는다. 골목 바로 앞에 와야 그제야 간판이 보이는 집이다. 소문 듣고 물어물어 찾아오는 집, 추어탕은 그렇게 골목 안에 찾아들어가 먹는 음식이라고 그는 말한다. 부인을 도와 추어탕 식당을 하면서도, 항상 보이지 않는 거에 더 신경을 쓰라던 어머니가 하신 말씀을 잊지 않으려고 노력했다고 한다. ""우리 어머니가 내한테 또 뭐라 했냐 하면 장사를 할 때 쪽을 남한테 주지 마라 그랬어요. 쪽이 국자를 말하는데, 국 하나 푸는 데도 정성이 중요하다 그거지요. 옛날에 하숙할 때 하숙집 밥을 먹으면 반찬이 많은데도 집에서 먹는 거하고 맛이 달라요. 정성이 들어가는 게 다른 거지요. 그리고 국을 뜰 때 손님을 보고 떠라 그래요. 목이 굵고 짧은 사람은 많이 먹으니까 밑에 무거운 걸 떠 줘야 잘 먹었다고 그래요, 목이 가늘고 긴 사람은 가벼운 걸 좋아해요. 그러면 위에 가벼운 걸 떠줘야 좋아해요. 우리 어머니한테 배운 거지요. 쪽을 남한테 주지 마라는 그 말 속에 그런 정성이 들어 있어요. 이상하게 어릴 때 배운 건 잘 안 잊혀져요. 대학가서 배운 거나 사회에 나와서 배운 건 다 잊어버렸는데 어릴 때 들은 건 지금도 기억나요."" 형제들 중에 막내였던 점용씨는 학교에 갔다 오면 힘들게 장사하는 어머니를 도와 국솥에 불을 떼곤 했다. 그때 어머니에게 들은 것들을 잊지 않고 기억하며 사는 것, 경상도추어탕이 삼대째 이어지고 있는 바탕인지도 모른다. 세벌식타자기가 있는 시청 앞 행정서사 사무소 북문동 분수대 앞에서 보건소를 지나 목성교에서 시청 쪽으로 꺾어들어 조금만 걸어가면 시청 정문을 살짝 비낀 자리에 김일수 행정사무소가 있다. 김일수씨는 1935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네 살이 되던 해 부모님 손을 잡고 귀국선을 탔고 청송군 현서면 화목에 일가가 정착을 했다. 화목에서 학교를 마친 후 면사무소에 취직을 해서 호적 관련 업무로 행정 일을 하다가 1970년대에 시험을 치고 행정서사가 되었다. 행정서사 김일수 ⓒ이미홍 일수씨는 서른 살 무렵에 현서면에서 월곡면으로 가게 된다. 장터 앞에 자리를 잡았는데 잡고 보니 면사무소 바로 앞이었다. ""안동댐 되기 얼마 전일 거래. 내가 미질로 들어간 게. 월곡면 미질1동에 가서 살고 있는데 면장이 불러서 일 좀 도와달라고 그래. 당시 월곡면사무소 면장이 권한섭 면장이었는데 그분이 그전 청송 화목 살 때 내가 면에서 행정 일을 본 걸 알았어. 수몰 앞두고 민원이 하도 많아서 감당을 다 못하니까 책상을 하나 주고 호적 일을 맡겨서 무보수로 우선 일을 도와주고 있었어."" 그런데 그때 안동군에서 행정감사가 나왔는데 당시 김상도라고 고향 선배가 안동군에 행정과장으로 왔는데 월곡면으로 사무감사를 나왔다. ""청송 화목 살 때 앞뒷집 살아서 잘 아시는 분인데 나를 보고 깜짝 놀래. 한참 이야기를 듣더니 내보고 뭐를 하고 싶노? 그래. 당시 면서기 전형시험이 있었어. 면서기를 할라나? 하고 싶은 거 이야기를 해보라 그래? 나는 면서기 공무원은 몸서리가 나서 안 할라니더. 행정서사를 하고 싶니더 그랬어."" 당시에는 면 단위에 행정서사가 한 사람만 배정되었는데, 그때 월곡면에는 이미 행정서사가 있었다. 그런데 도청 행정과에 오래 근무해서 지역단위로 행정사 정원을 한 사람 더 받을 수 있는 방법이 있다고 했다. 안동군에 한 사람을 더 받아서 월곡면에 정원을 1명 더 주는 것이었다. 고향 선배의 도움으로 그동안 호적계에서 일한 경력이 인정이 돼서 서류를 제출하고 행정서사 자격증을 발급받게 된 것이다. 일수씨는 그길로 호적을 떼러 그전에 일하던 청송 현서면 면사무소로 갔다. 소사로 일하던 면사무소에 행정서사 자격증 발급 때문에 서류를 떼러 간 그 발걸음이 얼마나 일수씨는 행정서사가 되고 장가를 들었다. ""미질 갔을 때가 서른 안짝 되었을 때야. 그때 아직 장개를 안 갔을 때래. 나는 장개를 늦게 갔어. 애들이 2남 1녀인데 중매로 혼인했지. 안에는 이름이 이정숙인데 내보다 열 살이나 아래지. 친정이 청주야. 집안 어른이 중매했지."" 집이 면사무소 바로 앞 장터 쪽에 있었다. 그동안 면사무소에서 무료봉사만 하다가 자격증을 받고 집에 사무소를 차린 것이다. 면에서 문을 열고 나오면 바로 건너에 행정서사 일을 보는 일수씨네 집이 보였다. ""면소 일을 그만두고 행정서사 일을 한 거지요. 면에서도 일이 많고 또 서류 같은 거 만들어야 하는 거 있으면 보내고, 다 우리집으로 일을 보러 오는 거예요. 면소 바로 앞이다 보니 일이 많았죠."" 수몰을 앞두고 보상이며 이전이며 등기며 일을 봐주며 주민들과 얼굴을 익혔던 일수씨는 장터사람들이 정산으로 이주를 할 때 같이 짐을 싸서 정산으로 갔다. ""수몰되면서 면사무소가 정산으로 가서 예안면사무소가 됐어요. 나도 정산으로 올라가서 그때 일을 많이 했어요. 면사무소하고 장터 들어선 그 일대가 다 밭이던 곳이다 보니 분할해서 지목변경 하는 것부터 건축하고 등기하고 일이 많았어요. 그전에 보상 타는 거부터 이주해서 집 짓는 거까지 행정서류가 오죽 많니껴? 행정서사가 하나뿐이라 그걸 전부 내가 다 했어요. 이주자금 타는 것도 내 손으로 다하고요."" 김일수씨가 지금도 사용하는 오래된 세벌식타자기 ⓒ이미홍 정산에서 수몰주민들의 이주가 마무리되고 안정이 되어가면서 일수씨는 안동으로 나오게 된다. 태화동에 집을 얻고, 법원이 있던 동부동 한양아파트 상가에 사무소를 열었다. 시내에 나와 사무실을 차렸을 때도 단골 중 월곡 사람들이 많았다. ""나와서도 옛날 월곡면 살았던 사람들이 많이 찾아왔어요. 자식들 일로 찾아오는 경우가 제일 많아요. 출생신고, 전적 신고, 아들 딸 개명, 내가 그 자녀들 연령 정정도 많이 해줬어요. 공무원 시험 볼려고 하는 젊은 사람들이 주로 정정 많이 했지. 고등학교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 치려고 보니까 만 나이가 모자라는 거라. 요즘은 병원에서 태어나면 자동으로 출생신고가 되지만 그전에는 출생신고 제때 안 된 사람이 많던 때라 나이 정정 하는 사람이 많았죠. 지금 여기 시청 직원들 중에도 더러 있어요. 그때 내가 나이 정정해준 이들이 다른 데 근무하다가 시청으로 들어온 그 사람들이 지금 연령대가 최하가 계장인데 내 보면 고맙다고 그래요. 어른 때문에 잘 벌어먹고 사니더, 애 둘 놓고 잘 사니더, 그래 인사하는 사람도 있어요."" 동네에서 아기가 태어나거나 총상이 나면 반장, 동장이 출생신고와 사망 신고할 것들을 모아서 면사무소에 가서 대신 신고를 하던 시절이었다. ""월곡서 일할 때 임동 장날 나가면 임동면사무소에서 동네 동장들이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때는 동장들이 출생 신고, 사망 신고 같은 일을 모아서 한꺼번에 면에 가서 대신 신고하고 그랬어요. 출생 날짜 적은 거, 나이 정정 적은 거를 주머니에 넣고 장에 왔다가 술 한 잔 하는 바람에 잃어버리고 있다가 나중에 한꺼번에 하느라 제 날짜가 아닌 경우도 많고, 이름 적어준 걸 잃어버리거나 기억을 못하면 생각나는 대로 적어 넣어서 한자 뜻이 잘못 바뀌기도 하고 그런 게 많았지요 뭐."" 몇 번을 고쳐 쓰고 있는 타자기와 전화기 한 대로 온갖 행정 민원을 해결해온 김일수 행정서사ⓒ이미홍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이 남편 호적 잘못된 거 바로잡으러 온 부부래요. 남편이 성이 임동 중평 류씨인데 강원도 가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다가 주인집 딸하고 결혼을 했어요. 근데 군대를 가려고 주인집 성인 박○○로 호적신고를 해서 나중에 태어난 아이들도 그 성을 따랐고요. 자식들도 다 장성하고 앞으로 더 늦기 전에 남편 본래 성도 찾아주고 자식들 위해서라도 뿌리를 찾아주고 싶다고 부인되는 사람이 왔더라고요. 여기 면사무소 찾아가고 강원도 면사무소 찾아가고를 몇 번을 했어요. 그래 결국 본래 호적으로 정정이 왰어요. 버스 타고 먼 길을 오가고 했지만 나중에 그분들이 좋아하며 고맙다고 몇 번이나 인사하는 거 보니까 마음이 참 뿌듯하더라고요. 그게 지금도 기억에 남아요."" 돈 받고 일하고도 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듣는 것은 그만큼 진심으로 일을 봐줬기 때문일 거다. 몇 평 안 되는 좁은 사무실에 전화기 한 대, 그리고 책상 위에 놓인 오래된 세벌식 타자기가, 남 해코지 하는 일은 돌아보지 않고 성심으로 손님들 일을 봐줬던, 행정서사 김일수가 걸어온 시간들을 묵묵히 대변해준다. 안동시군 통폐합 하고 시청 청사 이전할 때 일수 씨도 시청 앞 지금의 자리로 이전을 했다. 처음 이전을 할 때만 해도 일거리가 많았지만 전자정부가 되고 컴퓨터로 앉아서 클릭 한 번으로 대부분의 서류를 주고받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다. 자연 행정서사 사무실을 찾는 사람도 줄어들고 있다. ""안동댐 만들 때도 일이 많았고 80년대, 90년대 때도 일이 많았어요. 시군통합 되면서 새로 고치고 바뀌고 하는 게 많다보니 그때도 서류 일이 많았어요. 그런데 요즘은 웬만한 거는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서류 떼고 다 하니까 일이 별로 없어요. 나이 정정 하는 일이나 호적 정정, 개명 그런 일들이지. 한양 아파트 쪽에 있다가 시청 새로 짓고 난 뒤에 여기로 왔는데 요즘은 그저 소일삼아 나와서 문 열어놓고 몇 시간 앉아 있다가 들어가는 거지요."" 시청 앞 김일수 행정서사 사무실이 있는 시청 앞 골목 풍경 ⓒ이미홍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에 손님이 문을 열고 들어와 고소장을 써 달라고 한다. ""고소장은 안 씁니다. 다른 데 가보세요."" 그 소리에 두 마디도 안 듣고 거절을 하고 손님을 돌려세운다. ""시청 앞에 있으니까 문 열고 들어오는 사람들이 그래도 더러 있어요. 혼인신고 하는 요새 신혼부부들 중에 신랑 신부가 어려운 한자 이름 잘 몰라서 오는 경우도 있고, 잘못된 호적 밝히려고 오는 사람도 있어요. 또 많이 하는 게 시골 산골짜기 땅 산 서울사람들 농지취득자격증명서 같은 서류 대신 발급받아주는 거래요. 지금도 서울서 땅 사러 많이 오지만 안동댐 되고 난 뒤로 외지 사람들이 와룡 도산 쪽으로 산이나 골짜기 밭까지 서울사람들이 와서 많이 샀어요. 외지서 일일이 왔다갔다하기 힘드니까 우리 같은 사람에게 위임하는 거지. 그런데 요즘 문 열고 들어오는 사람 중에 고소장 써달라는 게 제일 많아요. 그런데 나는 그런 건 일절 안 받아요."" 고소·고발은 상대가 있는 일이라 누구 한 사람은 가해자 만들거나 피해자 만드는 일이라 잠깐 서류 한 장 써주면 5만원을 벌 수 있지만 그거 벌자고 남 못할 일 할 수는 없다는 일수씨는 일이 있으나 없으나 집에서 자전거 타고 나와서 문열고 있다가 손님이 영 없으면 좀 일찍 들어가기도 한다. 평생 김일수 행정사의 발 노릇을 한 자전거가 시청 앞 김일수사무소 옆 한쪽에 기대어 세워져 있으면 안에 사람이 있다는 뜻이다. 천리천의 복개와 번성했던 북문시장 안동댐이 준공될 무렵을 전후해서 천리천 복개사업이 진행되었다. 그리고 안막동에서 북문동 앞을 지나 낙동강으로 흘러들던 개천 양옆으로 가게들이 들어서 장이 섰던 북문장은 복개천을 중심으로 천막들과 가게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새롭게 형성되어 5일장이 번성하고 늘어나는 주민수와 더불어 상설시장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거기에는 안동댐 건설이 마무리되고 1976년부터 담수를 시작한 안동댐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이주를 했는데 보상을 넉넉하게 받아 대도시로 떠난 일부를 제외한 많은 사람들이 인근 지역이나 안동 시내로 이주한 영향도 한 몫을 했다. 시내에서 북쪽 방면에 위치한 와룡면, 예안면, 도산면 일대의 수몰민들도 안동 시내로 나와 터전을 잡았는데 태화동, 평화동 일대와 법흥동 일대에 자리를 잡은 이들도 많았지만 고향에서 나오는 길목인 북문동, 율세동, 신안동 쪽에 터를 잡고 둥지를 튼 사람도 많았다. 농사 대신 먹고 살 길을 찾던 이들이 시장 안에 자리를 잡고 장사를 시작했고, 시장 입구에 버스정류소가 있어 안동 장날이면 와룡면, 예안면, 도산면 일대에서 장보러 나온 사람들로 북문시장은 성시를 이루었다. 파는 이들과 사는 이들이 서로 고향사람들 소식을 나누기도 했다. 북문시장 전경 ⓒ임덕자 북문시장을 살리고 싶은 시민광장 맛집 주인이야기 북문시장 시민맛집광장 주인 임덕자 ⓒ이미홍 안동시 녹전면이 고향인 임덕자는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녹전에서 다니고 여고 진학을 하면서 안동으로 나왔다. 언니는 경안여상을 다니고 덕자씨는 안동여고를 다녀서 같이 자취를 하면서 북문시장에서 칼국수도 먹고 붕어빵, 찐빵 같은 주전부리들을 사먹었던 추억이 많다. 그때 북문장에 병아리며 강아지, 토끼 등을 집에서 길러 장날에 새끼들을 가져와 파는 동물시장도 유명했다. 햇살이 따뜻한 봄날 오후 노란병아리 앞에서 발을 떼지 못하다가 병아리를 사들고 가던 초등학생들이 있었고, 갓 태어난 강아지의 귀여운 눈망울에 동동거리던 여학생들도 있었다. 시골에서는 부업으로 동물들을 길러 장날 나와서 팔았고, 마당 있는 집이 대부분인 시절이라 아이들이 있는 집에서는 강아지를 많이 사갔고, 직접 낳은 달걀을 먹기 위해서 중병아리를 사다가 키우는 경우도 적지 않았던, 마당이 있고 골목 안 삶이 있던 시절 이야기다. 교복을 입고 있는 중학생 시절의 덕자씨 ⓒ임덕자 안동댐에서 엄마와 고등학교 다닐 무렵 엄마와 안동댐에 간 덕자씨 ⓒ임덕자 덕자씨가 안동에서 대학을 들어갔던 그해는 아시안게임이 있었던 해였다. 대학1학년이었던 덕자씨는 서울 구경도 할 겸 자원봉사로 등록을 했고 아시안게임이 열리던 10일간 자원봉사를 마치고 난 후, 서울에서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동안 우물안 개구리로만 살았다는 걸 그 열흘 동안 세계에서 온 젊은이들을 만나고, 서울 학생들을 보면서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왜 내가 안동에서 학교를 꼭 마쳐야 하지? 라고 생각한 거죠. 그래서 자원봉사단 단장님을 졸졸 쫓아다니면서 취직시켜 달라고 졸랐어요. 우선 돈을 벌어야 서울에서 살 수 있으니까요. 그렇게 해서 들어간 곳이 고려여행사였어요. 여행사 직원으로 10년을 일했죠."" 그 시기동안 남편을 만나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았다. 그러다가 시어머니가 거동이 힘들게 되면서 집을 정리하고 시댁이 있는 전북 김제로 내려갔고, 농사꾼이 되었다. 김제는 들이 넓었고 논이 많았다. 자연 쌀이 넘쳐났다. 김제로 내려갈 무렵의 덕자씨네 가족 ⓒ임덕자 ""저도 시골 내려갔으니까 농사를 지었죠. 그런데 아는 분이 토마토 농장을 하는데 자꾸 토마토를 가져다 먹으라고 주는 거예요. 토마토 값이 떨어져서 출하를 많이 못하면 이웃과 나눠 먹으라고 몇 박스를 주고 그래요. 그래서 제가 ‘그냥 공짜로 나눠줄 거면 내가 가져가서 한 번 팔아보겠다고 하니까 토마토를 실어주면서 팔아서 트럭 한 대에 7만원만 달라고 그래요. 그걸 싣고 전주시내 아파트 단지에 가서 팔아서 30만원을 벌었어요."" 그걸 계기로 동네 시간이 있는 부녀회 동생들 몇에게 같이 토마토를 팔아보지 않겠느냐고 하니 남편들이 타던 트럭이 있는 부인들 셋 집이 하겠다고 나섰다. 트럭마다 전주 시내를 수소문해서 팔 곳을 정해줬다. 그때 같이 토마토 장사를 시작했던 사람들은 다 부자가 됐고 지금도 김제에서 유통업을 하고 있다. 토마토를 팔면서 보니 김제에는 쌀이 지천이고 이웃한 논산에는 딸기, 토마토가 지천이었다. 두 지역의 농민회 사람들을 모아 지역협동조합을 만들었다. 김제 사람들은 딸기와 토마토 같은 싱싱한 제철 과일들을 좀 더 싸게 구입할 수 있었고 논산 사람들은 주식인 쌀을 더 저렴하게 공급받을 수 있으니 모두가 환영이었다. 조합원인 농민들도 지역주민들도 이득이고 판로 확보도 되니 일이 점점 커져서 대도시 직거래도 했다. 그때고 지금이고 무슨 일을 해도 혼자 잘 먹지 않고 남들하고 같이 잘 먹고 사는 게 좋다는 게 덕자씨의 지론이다. 북문시장 시장들을 바꾸고 싶은 마음으로 꽃을 키우는 덕자씨네 가게 ⓒ이미홍 2015년 덕자씨는 엄마를 모시고 고향인 안동으로 왔고, 서부시장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그런데 다음해 안동은 길안댐으로 시끄러웠다. 그리고 환경운동 활동가이기도 한 덕자씨는 그때 ‘길안천지키기범시민연대’ 간사 일을 맡고 있었고, 길안천을 지키기 위해 시청 앞에서 185일 동안 1인 시위를 했다. 그러면서 잊혀졌던 북문시장을 다시 보게 되었다. 시작은 시위를 시작하기 전이나 끝난 후에 배가 고파 밥을 사먹으러 시장 안으로 들어가면서부터였다. 시장 안에 들어갔는데 문 열린 밥집이 없었고, 먹을 만한 식당도 없었다. 오래 전 드나들었던 활기 넘치던 북문시장을 알았던 덕자씨는 충격을 받았다. 제대로 된 식당이 없는 것은 그렇다 치고, 가게들에 천막들이 여기저기 쳐져 있었다. 다니는 사람도 별로 없고 썰렁한 데다 천막이 쳐진 시장 안은 70년대의 모습 그대로 멈춰 서서 세월 속에 방치돼 낡아가고 있는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그리고 몇 번 더 들어와보니까 시장 안 모습이 눈에 들어오더라고요. 낡고 허름한데 옛날 골목들이며 가게 자리들이 그 모습 그대로인 거예요. 하루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시청 바로 앞인데 어떻게 이럴 수 있지? 밥장사만 해도 제대로 먹고 살 수 있을 텐데, 70년대 그대로의 모습을 잘만 정비만 해도 살 길이 보일 텐데, 진짜 안타깝더라고요."" 생각하면 곧바로 행동으로 옮기는 게 덕자씨 스타일이었다. 지역구 시의원들도 만나고 시청 다니는 고향 선배들한테도 물어보고 다녔다. 아니 왜 북문시장을 저렇게 그냥 두느냐는 거듭된 물음에 돌아온 답은 상인회가 없어서 개인 점포들을 상대로 지원해주기도 쉽지 않고 사업을 추진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고 했다. 상인회가 있으면 그런 것들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냐고 했더니 그렇다고 했다. 상인회를 만들면 환경개선사업을 지원해주겠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해 12월, 덕자씨는 시장 안으로 들어갔다. 시청에서 가까운 입구 쪽 점포를 임대해 식당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시장 어르신들을 만나고 다녔어요. 제가 총대를 멜 테니 시장상인회 만들자고 설득하러 집집마다 다녔어요. 그런데 시장 분들이 다들 좋다고 하시는 거예요. 이제 시장이 더 죽을 것도 없다고, 천막만 걷어내도 좋겠다고, 뭐라도 해보자고 하시더라고요. 상인회 만들어서 등록하고 그 다음해 봄에 시장 환경개선사업 신청을 해서 예산을 받았어요."" 그 예산으로 비가림막 설치를 했다. 그리고 간판도 교체했다. 그러나 시설이 조금 정비된다고 당장 시장이 살아나는 것은 아니었다. 고령의 상인들이 대부분이라 무언가를 선뜻 바꾸거나 받아들이는 것도 쉽지 않지만, 어떻게 할 줄 몰라서 못하는 부분도 많았다. 식당 일에 아름다운 재단 프로젝트 공모사업으로 진행하는 영풍제련소 현장모니터링과 기록 활동도 겸하고 있어 시장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애를 쓰지만 사실 시간도 모자라고 모르는 것도 많다 보니 한계가 있다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래도 실망하지도 포기하지도 않고 열심히 길을 찾아보고 사람들을 만나고 같이 살 궁리를 한다. 시장을 살리기 위해 장흥시장을 찾은 북문시장 시장상인회 사람들 ⓒ임덕자 ""저는 무슨 일을 할 때 한 사람만 제대로 미쳐도 뭔가 된다고 봐요. 북문시장에서는 제가 미쳤어요."" 지난여름에 처음 만났을 때 덕자씨가 했던 말이다. 서울서도 살고 김제서도 살고 안동에서도 살았는데, 다른 곳보다 안동이 전국에서도 먹고살기가 힘든 곳이더라고요. 물산이 풍부하지도 않고 공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사람이 많은 것도 아니고, 그렇다보니까 같이 열심히 해서 같이 잘 살자고 하는 그런 게 약하더라고요. 공유하고 나누면서 같이 잘 살아야 신이 나잖아요. 북문시장 일에 열심인 걸 보고 어떤 사람들은 뭔가 돈이 되니까 이익이 도니까 하는 거지 그런 말들을 해요. 국밥봉사를 하고 있으면 젊은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요즘 시장에 저런 거 다 지원받아 하는 거지 그래요. 그런데 덕자씨는 그런 면에서 떳떳하다. 돈 때문에 사람들 사이가 틀어지거나 잘못된 오해로 북문시장 살리기가 잘못되지 않게 하기 위해 덕자씨는 상인들을 설득해 지원금을 상인회 통장으로 받지도 집행하지도 않았다. 시청 담당자가 집행을 하면 거꾸로 감시를 상인회에서 하고 있다. 시에서 북문시장 상인회를 믿고 시장 활성화 사업을 적극 밀어주는 것도 그렇게 형성된 신뢰감 때문이다. 그런 덕자씨를 힘들게 하는 건 사실 그런 것들보다 시장 안에서 벌어먹고 사는 것에 대한 안동 어른들의 고정관념이다. ""우리 엄마 아시는 분이 지나가다가 제가 장터에서 국밥 파는 걸 보셨나봐요. 장터에서 국밥 파느라 고생하더라고. 우리 엄마도 저한테 멀쩡하게 직장 다니며 돈 잘 벌 수 있는데 장터에서 국밥판다는 소리 듣기 싫다고 그러기도 했어요. 그래도 저는 열심히 땀 흘리며 시장 사람들하고 같이 일하는 게 좋아요."" 장터에서 국밥봉사도 하고 팔기도 하는 덕자씨와 북문시장 부녀회 사람들 ⓒ이미홍 여름 지나고 가을에 문턱에 들어서는 10월에 장날 풍경을 찍으러 다시 갔을 때 덕자씨는 시장 부녀회원들과 장터에서 국밥을 팔고 있었다. 직접 지은 농산물을 북문시장에 팔러 오는 이들에게는 국밥을 무료로 나누어주었다. 나머지 시장 상인들과 손님들에게는 국밥 한 그릇에 3천원을 받고 팔았다. 장터 인심이 묻어나는 국밥이라 더 따뜻하고 든든한 한 끼였다. 파는 사람들이 늘어나면 물건을 사러 장을 찾는 사람들도 늘게 마련이었다. 시장 안에 전을 펴는 노점상들에게 이름과 전화번호가 적힌 명찰을 만들어 목에 걸어주십사 했다. 그리고 그 아래에는 팔려고 가지고 나온 물건의 생산지와 품목을 적었다. '○○○ , 010- ****- ****, 와룡면 태자리, 깨, 고추, 도라지' 명찰이 곧 국산 농산물인증카드였다. 파는 사람들이 밭에서 직접 기른 농산물이라는 것을 소비자들이 알게 하기 위함이기도 했고, 그 분들을 상인회 외 북문시장의 별도 회원으로 등록하는 의미이기도 했다. 처음에 열 몇 명이던 노점상들이 국밥봉사를 시작하고 명찰 인증제를 하면서 지금은 57명으로 늘어났다. 불과 한 두달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이분들을 포함해서 와룡, 예안, 도산의 농민들과 함께 조합을 만들어 로컬푸드사업단을 조직해서 직거래장터 사업을 할 구상을 하고 있다는 덕자씨가 사실 처음 북문시장에 오면서 하고 싶었던 것은 시장 안 아지매들하고 장터 먹거리 조합을 만드는 것이었다. ""묵 잘 만드는 아지매도 있고, 손두부 잘 만드는 아지매도 있고, 막걸리 잘 담는 아지매도 있어요. 이분들하고 마을조합 만들어서 묵하고 손두부 만들어 팔 거예요. 그걸 하려면 교육을 먼저 받아야 하는데 세 분이 내년에 저하고 같이 교육 받기로 했어요. 두부 만들어서 시장 안에서도 팔고 안동역 앞에 가서도 팔고 할 거예요."" 북문시장에서 장사하는 시장 사람들이 열심히 해서 시장도 살리고 돈돈 많이 벌어서 다같이 잘 사는 것이 덕자씨 마음이다. ""뭘해도 여기 시장 사람들하고 같이 만들어서 같이 잘 살고 싶고, 농사 힘들게 짓는 분들 농산물도 같이 팔아서 같이 잘 살고 싶지 저 혼자 궁리해서 혼자 잘 살고 싶지는 않아요. 그런 거는 왠지 신이 안 나요."" 장날이면 만날 수 있는 북문장 난전 아지매들 장날이면 시장 안 삼거리 공터에 아침 일찍부터 자리를 잡고 보따리를 푸는 아지매들이 있다. 농사지은 나물이며 곡식을 가지고 장보러 오는 난전 아지매 장꾼들이다. 장터 골목 안쪽 담벼락 앞에 전을 펴고 도라지와 생강을 비롯한 채소들을 파는 오금자 아지매는 와룡 태자리서 농사를 짓는다. 명찰을 보고 안 내용이다. 태자리서 온 오금자 아지매 ⓒ이미홍 11시가 한참 넘은 시간이었는데 손님을 한 사람이라도 놓칠까봐 여태 국밥을 못 먹었다며 국밥 솥이 있는 천막 쪽을 연신 보시더니 점심시간이 되어 국밥봉사가 끝날까 걱정이 되는지 잠깐만 자리를 지켜달라며 도라지는 5천원, 생강도 5천원, 고추는 3천원, 배추, 쪽파는 2천원이라고 가격을 말해주고는 국밥을 먹으러 갔다. 그런데 그 사이 할아버지 손님이 왔다. 보더니 대뜸, 주인은 어디 갔냐고 묻는다. 국밥 먹으러 잠깐 가셨다 하니 가지 않고 좌판 앞에 서신다. 어설픈 여인네 대신 좌판을 지키고 계시는 모양새다. 간판도 없는 장사지만 단골이신 듯 했다. 좀 있자니까 또 장에 나온 할머니 두 분이 길가다 앞에 서는가 했더니 묻지도 않고 세 분이서 이야기를 나눈다. 지난 장에는 뭘 샀는지, 점심은 자셨는지 주거니 받거니 하고들 계시는데 오금자 아지매가 왔다. 장사가 못 미더워 국밥 한 그릇을 받아서 들고 오신 거였다. 그제야 어르신이 등 뒤로 감추고 계시던 빈 포대자루들을 건네신다. 자연스럽게 받는 아지매, 그리고 스스럼없이 남의 도라지 농사, 생강 수매 걱정을 하는 할매들, 물건을 사지 않는 날이라도 안부는 묻고 가는 정이 남아있는 것이 북문장날 풍경이다. ""올해는 도라지와 생강이 잘 됐니더. 도라지 한 바가지 가지고 가소."" 해서 한 손에 카메라를 옮겨들고 오천원을 치르고 도라지를 샀다. 도산면 의일리에서 농사짓는 오천댁 ⓒ이미홍 도산 의일리서 온 아지매는 이름을 묻자 친정이 와룡 오천이라 오천댁이라고 했다. 집이 의일리 중에서도 물가에 가까운 곳으로 안동댐이 만들어질 때 살고 있는 집 바로 아래까지 물이 차올랐는데, 집은 수몰되었지만 토지는 잠기지 않아 남아서 평생 농사지어서 북문장에 내다 판 역사가 오래 되었다. 오천댁 아지매가 이날 가져온 건 끝물 고추와 나물이었다. 북문장 고추장사 이국주 ⓒ이미홍 이날 장에는 김장철이 다가오고 있어서인지 고추장사 아주머니도 보였다. 올해 78세인 이국주 아지매는 스물다섯에 행상을 시작했고 본격적으로 고추장사를 한 지는 30년이라고 했다. 아주머니가 처음 고추장사를 시작했던 당시만 해도 북문시장은 장날 새벽이면 전국의 상인들이 돈다발을 들고 고추를 사러 찾아오는 알아주는 큰 장이었다. 몇 백만 원, 몇 천만 원이 오가는 경우도 많아 경찰이 지키고 서기도 했다고 한다. 요새는 장사가 그럭저럭 겨우 먹고 살만한 정도이다. 씨앗가게 장갑순 할매 ⓒ이미홍 북문시장에서 씨앗가게 장갑순 할매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다. 1930년 경오년생인 할매는 율세동으로 이사 와서 장사를 시작한 이래로 북문시장서 평생을 보냈다. 한나절 앉아 있어도 씨앗은커녕 고무줄 한 다발도 못 팔 때도 많지만 집에 있으면 심심해서 나온다고 했다. 보통은 시장 안 그릇 철물점 앞이 고정석이지만 장날은 노점장터로 자리를 옮긴다. 옆에 앉은 오천댁 아지매와 자식 이야기도 하고, 물 건파는 것보다 오래봐 단골이 된 할매들이 장에 나오면 얼굴 보는 그 재미가 좋아서 오늘도 장에 나와 봤다며 웃는다. (글/이미홍 lmh337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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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안동의 북쪽 관문 북문동을 돌아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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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향교골 명륜동 이야기
- - 사람을 밝히는 동네 명륜동- 상가와 주택으로 형성된 작은 마을 2019년 안동예천 근대기행은 생생한 르포취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다룬 <구술생애사>와 안동과 예천 두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사의 근간이 되는 '마을'을 테마로 한 <우리 마을 이야기>를 그려낼 예정입니다. 두 번째 <우리 마을 이야기>는 향교골 안동시 명륜동입니다. -편집자 1. 1990년~1996년 1990년 2월 4일 일요일, 흐리고 약간의 비 차에 몇 가지 짐을 싣고 오는 내내 불안에 휩싸였다. 곧 새 생활이 시작 될 테니까. 명륜동 338-28번지 1통 4반. 자취할 집은 아주 작고 초라하다. 엄마는 어쩌다 이런 집을 찾아냈을까… 주인은 할아버지 할머니 내외이시고 안동여고 3학년인 언니 두 명과 중학교에 입학하게 될 남자애 한 명이 이 집 별채에 살고 있다. 세 명은 한 방을 쓴다. 동생과 내가 있을 방은 집의 규모에 비하면 큰 편이다. 새 장판이 깔려져 있고 도배지 여섯 롤이 구석에 세워져 있다. 책상과 찬장, 옷장은 내일 사기로 했다. 내일 엄마와 동생이 가버리고 나면 얼마간은 나 혼자 남게 된다. 낯선 학교와 아이들, 처음 해보는 자취 생활, 모든 것이 두렵고 불안하다. 얼른 토요일이 오고 봄방학이 왔으면…. 빨리 어른이 되고 싶다. 1990년 2월 5일 월요일 새벽에 여러 번 깨었다가 잠들었다. 결국 6시 30분에 일어났다. 연탄불이 꺼져서 집 앞 구멍가게에 가서 번개탄을 사왔다. 겨우 불을 살리고 걸어서 시내로 나가보았다. 우연히 경안고등학교에 다니는 친구 도철이를 만났다. 경안여자상업고등학교에 다니는 현주도 보고 숙자 언니도 보았다. 어쩌면 안동이란 곳이 생각만큼 낯설지만은 않은 곳일지도 모르겠다. 9시 넘어서 새로 맞춘 교복을 입고 엄마와 함께 전학 하는 학교로 갔다. 학교는 시내를 조금 벗어난 언덕에 자리하고 있었다. 개학날이라서 아이들은 모두 청소를 하고 있었다. 담임선생님께 인사만 드리고 다시 명륜동 자취방으로 돌아왔다. 영경이와 함께 동생을 버스터미널까지 걸어서 바래다 주었다. 그 옛날의 자취방 ⓒ신준영 고등학교 1학년을 마칠 즈음 의성에서 안동으로 전학을 했다. 이전에도 가끔 안동에 올 기회는 있었다. 시내 중심가의 아디다스, 나이키 대리점에서 운동화나 양말을 사 신기도 하고 맘모스 제과점, 코끼리 분식점, 스쿨서점, 교학사, 삼방사에 들러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짐을 싸들고 살러 온다는 것은, 그것도 내가 나의 보호자가 되어서 낯선 방, 낯선 사람들에게 나를 부리워 와야 한다는 것은 상당한 두려움과 불안이 따르는 일이었다. 그렇게 명륜동과의 인연은 시작되었다. 명륜동(明倫洞)은 안동시청과 대구교육대학교 안동부설초등학교, 국도 35호선인 퇴계로를 따라 형성된 상가들, 그리고 그 사이의 주택들로 구성된 작은 동네다. 1931년 4월 1일 안동읍제 실시에 따라 안막동의 일부를 분할해 이곳에 있던 안동향교의 강당인 명륜당의 이름을 따서 향교골, 즉 명륜정 1정목이라고 했다. 1947년에는 일본식 동명 변경에 따라 명륜동으로 개칭하였는데 향교가 있던 자리는 명륜동 344번지로 안동의 대표적인 명당자리로 유명하다. 안동향교는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는데 당시 대부분의 문서도 함께 분실되어 정확한 연원은 알 수 없지만 1361년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했을 때 '복주향교에 봉안'하였다는 기록이 있어 그 즈음으로 추정한다. 1983년 향교복설추진위원회가 발족되어 송천동에 터를 잡아 1986년 중건하였다. 안동의 교육기관 거의가 이 향교 터에서 문을 열었다. 1933년 안동공립농림학교 설립을 시작으로 1942년 5월에는 4년제 안동공립고등여학교를 설립하여 같은 해 10월에 옥야동으로 교사를 신축, 이전하였는데 이는 안동여자중학교와 안동여자고등학교의 전신이다. 1947년 7월에는 안동사범학교가 설립되었고 1962년 3월에는 도립 안동농업초급대학으로 개편 되었다가 1965년 3월에 안동교육대학으로 다시 개편되었다. 안동교육대학은 1978년 2월에 국립 안동초급대학으로 개편되었고 1979년 3월에 다시 4년제 국립 안동대학교로 승격되었다. 1983년 2월에 제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같은 해 3월에 송천동으로 이전하였다. 1991년 안동시청이 이 자리에 청사를 지었다. 2019년에는 안동시의회 건물이 신축되었다. 현재의 안동시청 ⓒ신준영 현재의 안동시청 ⓒ신준영 안동시청 앞 표지판에 안내된 지도 명륜동에서 1990년 2월부터 1996년 늦가을 까지 6년여를 살았다. 이후로는 한 번도 찾아간 적이 없었던 그 골목, 그 집, 그 방은 대신 가끔 꿈에 나타났다. 지난 달력을 정갈하게 찢어서 그 달의 공과금을 적어주시던 주인 할아버지의 섬세한 손과 그보다 연상이었던 피부가 곱던 할머니, 방주인이 자주 바뀌던 별채와 토마토가 익어가던 마당의 텃밭, 바지랑대를 높이 세우던 빨랫줄, 마룻장을 들어내야 나타나던 연탄아궁이, 수시로 창호지를 뚫고 들어와 머리맡에 앉던 달빛과 알 수 없는 그림자들. 연탄 냄새와 응달 냄새로 깊고 서늘한 골목을 통과해야 그 집에 닿을 수 있었다. 골목을 통과하는 동안 세 채의 집을 지나가야 하는데 마지막 집에는 학교에 다니지 않아 보이는 내 또래의 여자 아이를 비롯해 여럿의 형제가 늘 큰 소리를 냈다. 다투는 듯도 보였고 어쩌면 늘 그렇게 크게 말하는 습관이 있는 듯 보이기도 했다. 그 집 앞엔 대용량 토마토케첩과 식용유가 툇마루 위에 쌓여 있었다. 어느 날은 다른 동네에서 개조한 손수레에서 핫도그를 팔고 있는 그 집 식구들을 본 적이 있다. 잘 아는 얼굴이었지만 아는 척 할 수 없었다. 서로가 그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주변에는 중학교 동창 여럿이 자취를 하고 있었다. 당시엔 경안여자상업고등학교가 아직 신안동에 있을 때였고 경일고등학교와 길원여자고등학교도 명륜동에서 가까웠다. 친구들과 선후배들을 길에서 자주 마주치곤 했다. 자취방 사정들은 대동소이했다. 방 한 칸에 간이 부엌이 딸린 정도였고 화장실은 외따로 떨어진 공용 화장실이었다. 중학교 때 체육선생님이 안동으로 전근 와 계셨는데 선생님의 자취방도 신안동 산 위에 줄줄이 늘어선 집들 중에 하나거나 명륜동의 대로변 상가에 딸린 작은 방 한 칸이거나 그랬으니까. 아침이면 얼굴이 뽀얀 아이들이 노란 모자를 쓰고 남색 체육복을 입고 언덕을 올랐다. 명륜동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한 대구교육대학교 안동부속국민학교 학생들이었다. 아이들의 손엔 악기가 들려 있곤 했다. 대구교육대학교 안동부설초등학교는 1956년 4월 1일에 안동사범학교 부속국민학교로 개교했다. 1966년 3월 1일에는 안동교육대학 부속국민학교로 개교했으며 1978년 3월 1일에는 다시 대구교육대학교 안동부속구민학교로 개칭했다. 2001년 3월 2일에 대구교육대학교 안동부설초등학교로 개칭하여 현재에 이른다. 2. 1956년~1968년 안동사범병설부속국민학교와 안동사범병설중학교, 안동교육대학 출신 권부옥(1947년생) ""중앙국민학교에 다니다가 안동사범병설부속국민학교가 신설되면서 그리로 옮겼어요. 시험을 봐서 들어간 거 같아요. 당시에 교육에 관심을 가진 부모들이 아이들을 부속국민학교에 보냈어요. 우리 집도 그랬지만 돈이 있어서 보낸 건 아니에요. 새로 생기는 학교니 교육적으로 우수한 학교일 거라는 기대가 있었지요. 우리 집이 신안동에 있어서 학교 다니기도 편하고 그래서 그랬는지 3학년 때 학교를 옮겼어요. 단발머리를 하고 있었던 기억, 서후까지 송충이 잡으러 걸어간 기억이 있어요. 그날은 하루 종일 수업도 없이 송충이를 잡았어요. 쥐 잡은 증거로 쥐꼬리도 잡아오라 그러고 했던 시절이니까. 1960년 2월에 내가 2회로 졸업했어요. 그리고 그 친구들이 대게 그대로 안동사범병설중학교에 입학했어요. 내가 13회인데 안동사범학교가 없어지니까 안동사범병설중학교도 2학년 때 없어졌어요. 그래서 우리는 공부는 거기서 하면서도 안동중학교 졸업장을 받았지. 남녀공학만 다니다가 안동여고에 들어갔는데 여자학교에 적응이 잘 안되더라고요.(웃음) 그러다가 안동교육대학이 생겨서 시험 쳐서 들어갔어요. 1968년에 졸업해서 첫 발령을 와룡 이하 문청국민학교로 받았지. 시내서 와룡까지 기차로 통근했어요."" 안동교육대학 교정 3. 1974년~1976년 안동교육대학 졸업생 장국수(1956년생) ""1974년 3월 5일 입학해서 1976년 2월 16일 졸업했어요. 12회가 마지막 졸업생인데 내가 10회야. 한 학년에 우리는 300명, 위는 400명, 우리 아래는 200명. 지금 안동시청 본관 자리에 학교 건물이 있었어요. 나는 학도 호국단을 했는데 당시는 교원이 부족할 때라서 교육대학에 들어가면 군에 안가고 학교 다니면서 소정의 군사 훈련을 받는 것으로 군에 가는 걸 갈음을 해주지. 여름 방학 때 36사단에 가서 1학년 때 3주, 2학년 때 3주 교육을 받고 하사 계급장을 받아요. 의무적으로 학교에 5년간 근무를 해야 해요. 만약 근무를 안 하면 다시 군에 가야했어요."" 안동교육대학 교정 안동교육대학 교정 학생군사교육단 수료증 1976년 안동교육대학 제10회 졸업기념 앨범의 첫 장과 기념사진 ""당시에 전공반이 10개 반이었는데 반 별 30명씩 300명이야. 도덕교육연구반, 국어교육연구반, 사회교육연구반, 산수교육연구반, 자연교육연구반, 체육·무용교육연구반, 음악교육연구반, 미술교육연구반, 실과교육연구반, 초등교육연구반 이렇게 열 개 반이지요. 남녀 비율은 남자가 180명, 여자가 120명쯤 된 거 같아요. 나는 체육·무용교육연구반이었어요. 음악반은 아무래도 악기를 잘 다루고 체육반은 달리기나 기계체조 같은 운동을 잘하고. 나는 기계체조를 했어요. 미술반은 그림에 소질이 있었겠지요. 학교 뒤에 연못이 있었어요. 그 앞에서 그림도 많이 그리고 했어."" 교내 체육대회 교내 체육대회. 뒤로 시내 전경이 보인다. 체육연구반 활동 ""학교 가서 입학시험을 쳤어요. 면접 볼 때 음치는 아닌지, 피아노는 칠 수 있는지 신체검사도 하고. 당시 교문은 지금 시청 입구 그대로예요. 동아리 연구 활동, 문학의 밤, 시낭송, 작품 활동, 대학축제인 명륜제도 생각이 나고. 명륜제 때는 반 대표로 노래자랑에 나가서 2등인가 한 기억이 있어요. '춘향아 울지 마라'하는 노랜데 제목이 기억이 안 나네."" 학교에 가서 입학시험을 치렀다. 입학시험 1974년 입학식 ""농촌 봉사활동도 청송 어느 산골로 나간 기억이 있어요. 전국교대체육대회에 체조 선수로 출전도 했어요. 학교 다니면서 가장 힘들었던 건 그림 과제였는데 일주일에 8절지에 두 장씩 의무적으로 그려 내야 했어요. 잘못 그리면 '불가' 판정이 나요. 나는 그림 실력이 없어서 졸업하는데 애를 먹었어요. 풍금도 애국가 4절을 4부로 쳐야 됐고. 우리 안동교육대학이 우수한 점은 현장에 나가면 아이들을 좀 더 잘 교수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서 예체능 쪽에 상당한 비중을 두고 교육 시켰다는 거예요. 팔방미인이 되도록 말이죠."" 체육회 활동 mbc에서 실황중계했던 교내 음악대회 1974년 3월 21일 명륜체육대회 행사 후 뒤풀이 중인 학생들 RNTC 군사훈련 청송으로 갔던 농촌봉사활동 ""당시에 학교 주변 모습을 떠올려보면 북문시장은 형성이 되어 있었는데 학교 주변에 가게는 흔하지 않았어요. 구내식당이 있었고 둘레둘레 자취생들이 많았어요. 지금은 복개됐지만 신안동에서 내려오는 큰 도랑이 있어서 건너 다녔어요. 안동의료원 뒤쪽 북문동에 특히 자취생들이 많았어요. 나는 학교 수업만 열심히 듣고 다녀서 대학 문화라든가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 별로 없어요(웃음). 학교 졸업하고 첫 부임지는 의성 안평면의 도옥초등학교예요. 지금의 시청 옛 자리에 안동교육대학이 있어서 많은 교사가 배출이 된 까닭에 우리나라 인재 배출에 큰 역할을 했다고 봐요."" 졸업사진 졸업증서 졸업앨범 편집위원 4. 1995년~2019년 현재, 2차선 도로와 4차선 도로 사이 명륜주유소, 대신종합건설 김명자(1954년생) 김명자 ⓒ신준영 명륜주유소 ⓒ신준영 ""옥야동 영호초등학교 후문 근처에 살다가 1995년 1월 15일에 명륜동으로 이사 왔어요. 옥야동 살던 어느 날 남편에게 외식을 하자고 졸라서 웅부공원 옆 선미식당에서 국수를 먹었어요. 그러고 나서 시청 근처로 구경 가자고 또 졸랐지. 시청 앞 어디쯤에 서서 저 건너에 보이는 저 집이 매물로 나왔다는데… 하고 남편에게 넌지시 얘기했어요. 안풍기계 사장 집이었어요. 남편이 그 집이 안동 부잣집인데 좋지 안 좋나? 하더라고요.(웃음) 그래서 그 집을 사서 이사를 하게 됐지요. 문 열어놓고 수리할 적에 사람들이 안이 어떤가 하고 구경을 할 정도로 튼튼하게 잘 지은 집이었어요. 밖에서 보면 2층인데 안에 들어가면 4층이었어요."" 1997년경 명륜주유소 짓기 전 주택에서 뒤로 보이는 대문이 1999년에 도로에 편입되었다. ""명륜주유소 건물이 있는 여기가 일제강점기 때는 사방관리소가 있던 자리예요. 사방관리소 사무실을 리모델링해서 검도장으로도 쓰다가 잠시 태평양 횟집이 들어오기도 했고. 또 여기에 안전카서비스센터가 있었어요. 지금 우리 집 옆에 있는 새마을금고까지가 사방관리소가 있던 자리예요. 1999년경 집 앞 도로가 2차선에서 4차선으로 확장 되면서 도로변 상가들이 뜯어지고 없어지고 신축되고 했어요. 4차선이 되면서 거리가 완전히 바뀌었지요. 우리도 한 100여 평이 도로에 편입됐어요. 도로 확장 되면서 대문이 편입이 됐거든요. 그래서 안전카센터를 사서 대문을 옆으로 돌렸어요. 2000년도에는 검도장 자리에 태평양 횟집이 잠시 들어섰을 땐데 그 집도 그때 샀어요. 2002년에서 2003년에 걸쳐서 명륜주유소 건물을 준공 했고요. 네 필지 전체가 사방관리소 자리였지요."" 사방관리소가 있던 자리에 명륜주유소와 명륜새마을금고가 들어섰다. 2003년 명륜주유소 개업 안내장 ""지금 동물병원 자리에 대우전파사가 있었는데 건물을 지어서 옮겨갔어요. 그게 지금의 대우철물, 대우공구예요. 그 아래에 북문세탁소가 있었고 교대(시청) 앞쪽은 주산학원, 고려지업사 옆에 영화장품, 명륜문구사, 금홍문구사, 수산낚시, 한양미용실, 북문유리점 등이 있었지요. 정일목욕탕은 우리 이사 온 후에 지었어요. 북문마트도 우리 오고 나서 지었고. 우리가 주유소를 연 이유는 우선 주변에 주유소가 없었고 만약에 자식들이 물려받게 된다면 주유소 마당이라도 쓸고 기름이라도 넣으면서 노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 했어요. 또 기름은 썩지 않으니 재고가 생겨도 문제없다 생각해서 주유소를 개업한 거지요. 처음 6개월은 제가 직접 운영해봤는데 그것 참 어렵더라고요. 당시에는 카드도 안 쓰던 때라 달로 외상을 끊어 줬어요. 학원이고 어디고 거래처 텄다고 좋아했는데 수금하러 가면 폐업하기도 하고 번호판 떼 가라 하기도 하고. 어려워서 손들고 세를 줬어요. 아무나 하는 거 아니더라고요."" 명륜동 전경 ⓒ신준영 명륜동 전경. 왼쪽으로 신축한 안동시의회 건물이 보인다. ⓒ신준영 ""처음 이사 와서 보니 도로변 좌우로 상가들이 쭉 늘어서 있었어요. 남의 동네에 살러 왔으니 여기 사람들과 섞여야지 하고 마음먹고 있는데 이웃에서 나보고 모임에 나오라고 해서 나갔어요. 원래 있던 모임인데 내가 나가서 이름을 ‘숙녀회’라고 지었어요. 지금은 일곱 여덟 명 남았어요. 그때 모임에 한양미용실, 북문세탁소, 민정칼라, 대우전기, 성희미용실, 영화장품, 고려지업사, 수산낚시, 북문시장 안 떡방앗간집 등 스물 세집이 있었어요. 매달 한 번씩 모였어요. 나이 많은 사람, 젊은 사람 한데 섞여 있었어요. 그때는 매월 만원씩 모았는데 지금은 이만 원씩 모아요. 한 달에 한 번씩 모여서 밥도 먹고 일 년에 한 번 정도는 여행도 가는데 중국 장가계도 갔다 왔어요. 이름이 정확히 '명륜동 숙녀회'지요. 매월 25일에 모여요. 각자 집에 잔치 있으면 서로 부조하고 오고 가면서 정을 내요. 처음 이사 왔을 때는 옛날 거리 모습 그대로였어요. 1999년에 도로 확장 되면서 이사도 많이 가고 모습이 바뀌었지요."" 명륜동 전경. ⓒ신준영 명륜동 전경. 멀리 목성동성당과 법상 상일아파트 등이 보인다. ⓒ신준영 5. 1983년~2019년 현재, 명륜동 숙녀회 고려지업사 김현숙(1959년생), 김재택(1958년생) 고려지업사 김현숙 ⓒ신준영 고려지업사 김재택 ⓒ신준영 ""남편(김재택)은 1980년부터 도로 건너 지금의 동물병원 자리에서 고려지업사를 운영했어요. 1983년 결혼할 때부터 여기서 살았고요. 1999년에 도로가 2차선에서 4차선으로 변경되면서 2000년도에 이 건물을 지어서 이사를 왔어요. 장안카메라가 옆집이었는데 카메라 대여도 하고 그랬어요. 영화장품 할인코너도 옆에 있었고요. 맞은편 효성이발관 옆에 초대 시의원을 지낸 안상하 씨가 하던 북문세탁소가 있었어요. 그분은 명륜마을금고 이사장도 역임 했고요."" 1985년 무렵 고려지업사 부근 1985년 무렵 고려지업사 부근 1985년 무렵 고려지업사 부근 ""숙녀회에서 중국 장가계도 가고 울릉도도 가고 제주도도 가고 했어요. 참 재밌었지요. 2011년 10월 6일 중국 장가계 단체 사진에 회원들이 쭉 있어요. 건어물 가게인 진보상회 옥순희, 효성이발관 건물주인 이미옥, 대왕수퍼 박춘선, 영화장품 이준필, 고려지업사 김현숙, 민정칼라 송종숙, 화장지와 세제를 취급하던 길도상사 임종길, 수산낚시 박옥남, 한양미용실 권순옥, 명륜주유소 김명자 모두 들어있네요. 내가 이 모임 총무라서 이름을 다 기억해요. 명륜동 모임은 1990년경부터 시작됐어요. 35호선 도로를 따라 올라가며 양쪽 가게 주인들이 회원이고요. 제주도 갔을 때 사진에는 대우전파사 신혜숙, 북문시장 안 떡방앗간 하나 엄마, 영화장품 이준필, 이미옥, 진보상회 옥순희, 민정칼라 송종식, 중대장 부인, 박미경, 새성희미용실 박성자, 대왕수퍼 박춘선, 수산낚시 박옥남, 북문세탁소, 길도상사 임종길. 고려지업사 김현숙 이렇게 다 들어있네요. 이때만 해도 아가씨 같지요.(웃음)"" 명륜동 숙녀회에서 간 중국 장가계 명륜주유소 김명자(왼쪽), 고려지업사 김현숙 ⓒ신준영 ""상가 말고 주변 한옥들 중에는 하숙집이나 자취방들이 많았어요. 경안여상이 이 근처에 있을 때니까. 지금은 손자 손녀도 있는데 이 사진 속 우리 아이들보다 손자 손녀가 더 커요. 아들은 1984년생, 딸이 1986년생인데 당시 집 밖에서 노는 모습을 이렇게라도 찍어놔서 거리 모습이 남아있네요."" 1980년대 중반 고려지업사 부근 1980년대 중반 고려지업사 부근 1980년대 중반 고려지업사 부근 1980년대 중반 고려지업사 부근 6. 2019년 현재 해결되지 않는 빚진 마음이 발길을 옮기게 했다. 오래 앓아온 막연한 서러움과 그리움의 정체를 알 것도 같았다. 외따로 희미한 별처럼 가족에게서 분리되어 나왔던 최초의 공간과 시간이 머무는 곳, 명륜동은 내게 그런 곳이다. 응달의 온도와 냄새를 알게 했고 그 길 끝에 몸을 웅크려 세상을 향한 도약을 준비하던 작은 방 한 칸이 풀잎으로 엮은 둥지처럼 숨겨져 있던 곳. 그 안에서 음악을 듣고 편지를 쓰고 글을 읽었다. 명륜동은 변한 거 같지 않지만 골목골목 돌아보면 참 많이 변했다. 암호처럼 날아오는 삐삐 문자에 답하기 위해 줄 서서 기다리던 공중전화 앞 구멍가게에는 원룸 건물이 들어섰다. 대나무 깃발이 높이 솟아있던 어느 집 마당에는 대신 태극기가 펄럭인다. 피아노 소리가 들려오던 언덕 위의 집은 카페로 변신했다. 언덕도 사람과 같아서 시간이 쌓일수록 키를 낮추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 즈음 자취방이 있던 그 골목 앞에 섰다. 시간이 멈춘 듯 골목은 그대로다. ⓒ신준영 그 시절 골목 입구에서 치르던 나만의 의식을 생각해냈다. 바라는 것이 있으면 반대의 결과를 먼저 떠올리는 것, 가령 기다리는 편지는 오지 않았을 것이다… 하는 식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겠지, 살아계신다면 백 살은 넘으셨을 테니까. 그 집은 대문이 닫혀 있거나 허물어지고 없겠지, 하고 생각하며 나름의 의식을 치렀다. 의식을 치르고 나면 예측했던 결과가 나왔을 때 실망하는 마음이 덜하다. 물론 그 반대의 결과가 나오면 행운을 얻은 듯 기쁨 또한 더한 것이 된다. 시간이 멈춘 듯 골목은 그대로였다. 녹이 슨 녹색 대문은 굳게 닫혀져 있었다. 그 때 어디선가 본 듯한 남자가 툇마루가 있던 그 집에서 나와 말을 걸었다. ""무슨 일이세요? 아, 옛날 주인은 다 돌아가셨죠. 집도 팔렸는데 지금은 아무도 안 살아요. 빈집이에요."" 남자의 집 안에서 개가 사납게 짖는다. 들어갈 땐 몰랐는데 나올 때 보니 개 짖는 집 옆집은 불탄 흔적 그대로 안이 훤히 드러난 채 비어있다. 하얀 레이스 커튼만이 멀쩡한 채로 유리문 안쪽에 조용히 걸려있을 뿐. (글/ 신준영 5longgol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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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향교골 명륜동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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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 '나의 일생' 예안면 아키비스트 권상길
- 선성 사람 권상길의 '나의 삶 나의 인생'기록과 스크랩은 일상, 전직 신문기자 2019년 안동예천 근대기행은 생생한 르포취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다룬 <구술생애사>와 안동과 예천 두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사의 근간이 되는 '마을'을 테마로 한 <우리 마을 이야기>를 그려낼 예정이다. 다섯 번째 <구술생애사>의 주인공은 안동시 도산면 동부리에 사는 86세의 권상길 씨다. 스크랩북 가득 걸어온 이력을 차곡차곡 모아둔 권상길 씨의 삶의 여정에 동행해 본다. 권상길 ⓒ백소애 예안면의 기록가, 권상길 예안면 동부리에 사는 권상길 씨는 '호모 아키비스트'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이쪽 동네 어른들한테 '아키비스트' 얘기를 할 땐 말을 아주 잘~해야 한다. 잘못 하면 '아나키스트'로 들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권 선생님, 진정한 아키비스트세요."" ""뭐라카노"" ""권 선생님, 기록을 정말 잘 남기셨다구요."" ""암, 그거 하난 내 자신하지."" 1960년대 구 예안 서쪽방향 ⓒ권상길 1960년대 구 예안 동쪽 방향. 뒤로 고통마을 가는 길이 보인다. ⓒ권상길 농꾼, 면서기, 정미소 사장, 신문지국을 운영한 신문기자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했다. 그 와중에 동장, 선거관리위원장, 의용소방대, 중대 소대장 등등 정부와 기관 단체에서 하는 업무에 적극적이었던 흔적을 보노라면 그는 경상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보수적인 가장이 틀림없다. 그리고 저녁식사 중 정치뉴스를 보다 서로 언성을 높이게 되는 우리네 아버지일 가능성도 농후하다. 그러나 그는 해방과 전쟁, 지독한 근현대의 울퉁불퉁한 비포장도로를 묵묵히 걸어온 성실한 사나이다. 자신의 삶의 과정을 기록하고 스크랩하여 모아놓은 권상길 씨의 공식적인 출생년도는 1936년, 그러나 실제로는 올해 86세다. 총기가 남다른 그이지만 자식들의 성화와 걱정에 이태 전, 운전면허를 반납했다. 지금은 처분한 자동차 대신 3륜 바이크를 몰고 서부리 시내를 누빈다. ""내가 34년생이래요, 올케로는. 호적에 늦게 올라갔니더만… 나이 먹은 지금은 어제 일도 잘 모르는데 옛날 일은 꽹해요."" 어제 일도 기억나지 않는다는 그가 수십 년도 넘은 이야기를 술술 꺼내놓았다. 근현대사의 굵직굵직한 사건을 몸소 겪은 나이 아니던가. 고향은 예안면 귀단1리 고통마을이다. 공민왕이 몽진 때 지나갔다 하여 '높으신 분이 지나간 마을'이라는 '고통' 출신이다. 그가 해방 때의 기억을 풀어낸다. 예안공립국민학교 3학년 통지표 ⓒ백소애 해방과 전쟁 ""월곡 미질동에 고모가 살고 있었거든. 우리 할머니가 그 고모를 항상 좋아했단 말이래. 고통마을에서 미질까정 한 20리가 넘어. 할머니하고 그 길을 걸어서 갔더니 아이고, 울 고모가 아를 나놓고 있는 기라. 그래 고모가 출산을 하고 있는데 더 있을 수도 없고, 할매가 집에 가자 캐서 그 길로 다시 돌아 왔는 기라. 근데 집에 오니깐에 아버지가 뭐 허연 광목에다가 먹으로 뭘 막 기래. 그래 그게 뭐니껴 그러니깐, 생전 못 봤던 거거든. 야야 태극기 기린다. 태극기를 기려가지고 낼 자(장) 간다. 만세 부르러 장에 내려간다, 그 카시더라고. 그럼 그런갑다 하는데, 해방이 되었다고 캐. 내가 해방이 뭔동 아나, 해방이라는 거는 일본이 졌단다. 하니 할매 가 큰일났다, 일본이 지면 미국놈들이 와가지고 우리 코 꿰가 댕긴다는데 어야노, 이랬다마. 우린 교육을 그래 받았거든. 그땐 일본말로 베이에이 게끼메스(미영격멸). 이 말이 뭐냐면 미국놈 영국놈 찔러 죽이자 이카면서 총검을 가지고 우리 국민학교 때도 그런 교육을 받았다고."" 1955년경 귀단리 고통마을 ⓒ권상길 예안장까지는 걸어서 10리였다. 아버지의 만세를 직접 보진 못했으나 소년 권상길의 일상은 원하지 않게 격동의 세월 속에 포함되었다. 안동중학교 재학 당시에는 교육을 위해 시내로 이사를 나왔다. 식구는 아버지, 어머니, 형, 권상길 씨로 단촐했다. 안동중학교에 재학 시절부터 신문배달을 했는데 경향신문 안동지국에서 신문을 받아 학비를 벌곤 했다. 전쟁이 한창 때인 1950년 7월 29일 때의 일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한다. 지금의 안동시청 부근 향교골 친구 집에서 놀고 있는데 천주교 성당에서 방송이 나왔다. ""안동시민 여러분, 안동시민 여러분! 3일간만 남하(南下)하십시오!"" 친구들과 웅성거렸다. ""야, 남하가 뭐로?"" ""몰따 뭔 말인동""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 당시 살던 안흥동 신시장 배전골목 집으로 부리나케 달려갔다. 아버지랑 어머니가 열심히 보따리를 싸고 있었다. 그도 옆에서 책을 싸니 아버지가 ""야야 그쿠 무거운 건 못 가간다. 우선 먹을 쌀하고 입을 옷이나 갖고 가야지 딴 건 아무것도 무거워 못 가간다.""고 해서 책도 버려두고 7월 29일에 피난을 나섰다. ""야단이 났지. 안동교를 건너가는데 그 광경이야말로 참 기가 막혀. 급하니께 뭐 보자기에 쌀 이고 온 사람들은 엎어지면 깨부고 말이 아니랬어. 밀리고 밀치고 그러이 성질 급한 사람들은 물을 건넜지. 7월이니 강물이 얼매나 불었겠어 근데도 막 건넜어."" 안동과 대구를 잇던 유일한 다리였던 안동교는 권상길 씨가 건넌 3일 후인 8월 1일 폭파되고 만다. 한국군과 국제연합군을 지휘하던 미8군사령부가 북한군의 낙동강 도하를 지연시키기 위해 낙동강 방어선을 기획하고, 8월 1일 한국군에게 낙동강을 건너 남하한 뒤 안동교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내렸기 때문이다. ""9월엔 어디서 피난을 했나 하면 저 하양역 밑에 청천이라는 곳이 있었어. 청천역이 있는데, 그 청천역 뒤가 안심면 내곡동인데 거기에 우리 어머니 고모가 살고 있었어. 그래 그 고모가에서 피난을 했어. 그러다 9월 30일에 다시 올라왔거든. 안동 안흥동 배전골목 집까지 걸어서 오니 그때가 10월 6일이라. 와가지고 내가 젤 처음 찾은 게 책이래. 책을 찾으니 있나 어디? 다 타부리고 없는기라. 남은 거라곤 그저 쇠 쪼가리 옹기 쪼가리뿐이라. 그래가지고 다시 예안면 귀단동 우리 고향으로 갔어. 거기를 가니 우리 삼촌, 할머니 이래 살고 있는데, 쌀을 좀 달라 하니 쌀이 없어. 인민군에게 전부 몰수당해서 없다 이래. 가정 형편이 할 수 없으니 내가 고등학교를 못 갔는 기라. 1951년에 안동중학교를 졸업하고 그때 우리 동기생들이 마뜰에 가서, 벽돌을 벗겨가지고 안동고등학교를 지었어. 지금은 저짜 정하동으로 갔지."" 3일의 남하는 두 달여가 되었다. 피난을 갔다 안동시내에 도착하니 10월 6일이었다. 무릉재에 올라오니 빨간 벽돌건물로 된 학교가 그대로 있어서 다행이다 했는데 가까이 와보니 형체만 있고 속은 다 폭격을 받아 부셔져 있더란다. 안동 시내가 70% 이상이 폐허가 됐지만 안동교회는 멀쩡했다. 서악사 광감루에서 공부를 하니 너무 비좁아 학교에서 교회를 빌려 교회에서 3학년 공부를 하고 1951년 7월 18일, 여름에 졸업을 했다. 총 4개 반이었는데 동반, 서반, 남반, 죽반으로 반을 나누었다. 북반은 없었다. '북'반 이 아닌 '죽'반이라 불렀는데 아마 시대적 상황 때문이 아닌지 추측해볼 뿐이다. 60명씩 4개 반 모두 240명이었는데 피난 때 생사를 모르는 친구들이 많았다. 당시 학도의용군에도 40명이 지원했다고 한다. 1951년 7월 안동교회에서 찍은 안동중학교 1회 졸업사진. 앞줄 다섯 번째 오른쪽 네 번째가권상길 씨 ⓒ권상길 교사에서 다시 학생으로 그리고 해병대 입대까지, 쉴 틈 없는 청년기 함께 졸업한 동기들이 진학할 고등학교를 짓고 있을 때 권상길 씨의 기분은 어떠했을까. 공백의 기간 동안 마침 예안 동계초등학교 공민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사범학교를 나와야 교사를 했을 때니까 그는 '강사'였던 셈이다. 공민학교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한 학생들을 가르치던 곳이었다. 동계국민학교 교사 신분증명서 ⓒ백소애 ""글때 동계국민학교라고 있었어. 거기 공민학교라는 게 부설로 생겨서 거서 학생을 가르쳤어요. 지금은 폐교됐지. 예안면 태곡동인데 지금도 학교는 그대로 있어. 그때 학교를 못간 애들이 내 또래 비슷해. 내보다 조금 작게나… 아-들 국문해득을 다 시켰어. 그러자니 말을 아주 많이 했거덩… 교사질 하이 배가 고팠어, 허기가 져. 에너지 소모가 커서. 잠깐 하긴 했어도 힘든 일이야."" 그러다 예안고등학교가 설립되면서 입학하여 1회 졸업생으로 졸업을 했다. 못다 한 고등학교 공부를 하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병역이 해결됐지만 이후 실제 나이 스물다섯에 해병대에 입대하게 된다. 진해에서 훈련 받고 포항 가적도 등지에서 활동했다. 사관과 신사. 1959년 여름, 휴가를 맞아 도산서원을 찾은 권상길(왼쪽) 씨. ⓒ권상길 ""내가 해병대 77기라. 어디 나가면 선배는 별로 없어, 마구 후배지. 지금은 아마 1000기가 넘었지 싶어. 당시엔 자부심이 대단했지. 헌병이 검문을 해도, 우리는 무기를 갖고 있어도 건드리지 않았어. 그럴 때는 괜시리 어깨 힘도 들어가고 자부심을 느꼈어. 뭐 결혼을 하고 갔을 때라 다 보고 싶었지만 맹 애들 어마이가 제일 보고 싶었지. 군에서 '화랑'이라는 담배가 나오거든, 내가 담배를 안 태워. 그걸 하나둘 모아놨다가 집에 와서 아부지 드리면 되게 좋아했어. 휴가 한번 나오면 이동하는 시간이 많이 걸렸어, 힘든 거 같지? 웬걸, 이동하는 게 좋았어. 군용열차가 주로 밤에 있거든? 안동서도 밤 9시쯤 올라가고 청량리서도 9시쯤 가는데, 한두 명만 타놓으면 하나는 끝에 앉고 하나는 중간에 앉는데 그 중간에 육군은 못 앉아 갔었지. 늦게 올라가도 자리가 있었거든. 중간에 척 하니 앉고 가고… 그땐 좀 그런 게 있었어."" 해병대 행정병으로 타자를 쳤던 그는 국문학을 좋아해 국문학 독본과 고전을 즐겨 읽곤 했다. 1960년대 후반 수몰 후 동부동 지금 집터 마당에 지은 동부정미소 ⓒ권상길 동부정미소 1963년쯤 시작한 정미소(방앗간)는 1980년대에 그만두게 되었다. 수몰로 물이 들고난 후에도 동부리 지금의 집터에 새로 지어 꾸려온 정미소는 가계가 자리 잡게 된 계기도 됐지만 몸이 골병 나게 된 계기도 됐다. ""저 밑에서 정미소를 하다가 75년도에 수몰이 되가지고 지금 우리 마당으로 옮겨 지어서 하다가 고마 치아뿌랬어. 서부동에 정미소가 하나 있었고, 우리 동부동에는 다른 이가 정미소를 지을라고 하는데 터를 못 구했더랬어. 그런데 내가 한다 그러니 동네에서 선뜻 주는 기라."" 1965년쯤 물 들기 전의 동부정미소 ⓒ권상길 1965년쯤 권상길 씨 내외에게서 용돈을 갈취(?)하는 큰 딸과 막내 딸 ⓒ권상길 예부터 마을의 우물가, 정미소, 이발관, 미용실은 모든 동네 소문의 근원지요 요긴한 정보가 오가는 곳이자 마을 사람들의 사랑방이나 다름없었다. ""요새는 쌀 10키로, 20키로 이렇지만 그때는 80키로 랬다고. 가마니에 넣으면 엔간한 사람 몸무게보다 더 나가는 걸 번쩍번쩍 들었으니 골병이 나지. 건강할 때 너무 자신했어. 내가 지금 현재 인공관절을 양쪽 다 넣었거든. 성소병원에서 2010년도에 했어. 사진을 보면 인공관절이 닳아서 한쪽으로 닿여. 뼈과 뼈가 데이면 되게 아퍼. 건강관리는 건강할 때 해야 돼."" 1963년 월천서당 강변에서. 예안면 면서기로 근무 당시 자바라 카메라로 찍은 사진.소산병원 원장, 지서장 면장, 조합장 등 예안면 삼계출장소 개소식 후 낙동강변 달애(다래)월천서당 강변에서 포즈를 취한 지역 유지들의 모습. ⓒ권상길 신문기자로 활약하다 제대 후 예안면 면서기로 잠깐 일하게 되면서 각종 행사장을 카메라를 들고 누비게 된다. ""집에서 약품 하이버라고 있어. 요새 사진관에 물어보면 하이버를 타면 원판에 형체가 나타나. 그래 되면은 어느 정도 됐다 싶을 때 증착기에다 담가버려. 담가 보면 딱 고만 화면이 스톱되지."" 자바라 카메라를 들고 찍은 사진에는 예안면의 기록이 현상되어 있다. 그가 살아온 삶의 다양한 이력 속에서도 당시 흔치 않은 직업인 신문기자가 단연 눈에 띈다. 어려서부터 사진 찍기를 좋아했던 그에게 운명처럼 다가온 직업이 아닐 수 없다. 1962년 경향신문을 시작으로 이후 매일신문, 영남일보 지국을 운영했고 동시에 자연스레 기자로도 활동했다. 그는 당시 거래했던 장부를 아직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1964년 경향신문 신문기사. 권상길 씨가 직접 쓴 기사, 낙동강 아홉구비 내려오는 예안면 서부리 낙동강 기슭에는 조선시대 왕실에 은어를 잡아 올리기 위해 저장해둔 석빙고가 있다는 내용.(자료제공: 권상길) ""매일신문, 영남일보 할 적에 독자들 구독료 받던 장부래. 옛날 장부지, 거래장이라고도 할 수 있고. 보자, 77년도에는 그때 월 구독료가 400원, 600원 그래 할 때야. 구독료 받고 본사에서 나오는 영수증을 띠주곤 했지. 당시 이 지방 유지들은 싹 다 알았지. 그래도 볼 만하니 보지, 무식꾼이 어디 신문을 보겠나… 구독자도 꽤 됐어."" 신문 구독료 장부 ⓒ백소애 양조장, 이발소, 미장원, 면장, 서울사진관, 신흥가구점, 예약약국… 1960년대 시내라는 것은 예안장터를 말하는 것이다. 토박이부터 기관장까지 유일한 '미디어'의 창구였던 신문으로 예안의 소식통이자 기록가가 되었다. ""당시엔 보도증으로 기사를 무료로 실어줬지. 젤 처음에 경향신문 지국을 하고 그 다음에 매일신문을 했어. 중앙지하고 지방지하고 두 개를 했어. 나중에 영남일보 지사장 권오인 씨라고 우리 일간데, 영남일보를 지국을 하면 어떻겠노, 해서 영남일보를 맡았지. 전국적으로 경향신문을 많이 봤어. 예안에서 타지에 가 있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그 사람들이 고향 오면 나를 갖다가 향토예비군이라 그랬거든. 나는 고향을 안 떠나고 항상 고향에 있었고 또 고향의 소식을 경향신문에 많이 냈으니… 경향신문을 타지에서도 많이 본다고 했어. 출향인들이 고향 소식을 보기 위해서 신문을 본다카이 나도 보람이 컸지."" 연애 반 중매 반, 우리가 빠지는 인물은 아니지 동부리 권상길 씨 댁을 방문했을 때 부인 엄원조 씨는 재봉틀을 밟고 있었다. 50여 년 전에 9천원에 월부로 주고 산 아이디알 미싱은 아직도 건재하다, 마치 부부처럼. 당시 매일신문 예안지국을 경영하던 권상길 씨가 그나마 형편이 좀 되어서 구입한 것이다. 이 재봉틀로 해마다 아이들 옷을 직접 지어 입혔다. 동갑내기 옆지기 엄원조 씨 ⓒ백소애 ""우리 둘 다 실지로는 갑술생이야. 1934년 갑술년에 안동에 홍수가 범람해 영호루가 떠내려갔잖아. 난 2년 늦게, 마눌님은 1년 늦게 호적에 신고했지. 옛날엔 그런 일이 숱했으이. 할마이는 어렸을 적에 저 아부지 따라 일본 갔다가 해방되고 나왔어. 가까운데 살았으이 얼굴 정도는 알았지. 실제 나이 열아홉 동갑에 결혼했거든. 동네서 대놓고 연애는 못하고, 처삼촌 되 니하고 우리 아버지하고 친구 간이거든. 사우 삼자, 며느리 삼자 했지. 뭐 사실 우리 동네서 우리 할마이도 여자로선 잘 생겼고 나도 남자로선 안 빠졌지."" 부리부리 선이 굵고 진하게 생긴 남자와 동글동글 귀엽게 생긴 여자의 만남이었다. 젊었을 땐 누구 엄마, 임자, 여보 그렇게 불렀다. 1950년대 권상길, 엄원조 부부 ⓒ권상길 ""지금은 할마이라 그러지. 자기는 영감이라 그카고. 성질이 우린 반대야. 임자는 A형이고 나는 O형이거든. 저기는 성질이 굉장히 세밀하고 먼지도 하나 있음 안 되고, 안 그래도 오늘 손님 온다고 이불도 막 개놓고… 내야 까짓 노인방인데 뭘 그래 하지만서두. 싸워보기는 했지만도 싸워봐야 칼로 물 치기라, 암 것도 아니지. 집 사람이 세게 나오면 내가 입을 다물지. 싸워봐야 이웃에 남사스럽고 아-들 보기 영 아니어서 안 싸우지. 내가 말을 안 하면 조금 지나면 누그러져."" 은륜 친목회 무릉 야유회. 가장 행복했던 시절. ⓒ권상길 은퇴하고는 우리 집 옆에 전지가 한 600평 됐던 거 그걸 경작했지. 농사일도 손 놓은 지가 한 3년? 이젠 몸이 예전 같지가 않아서 슬슬 다 내 손에서 떠나보내고 있어. 일평생 중에 제일 즐겁고 행복했던 시절을 묻자 그는 딱 3초도 고민 않고 바로 대답했다. ""오도바이 친목회 '은륜 친목회'라고 있어요. 은륜은 은빛 바퀴라는 뜻이야. 부부 동반으로 속리산도 가고 고은사도 가고 할마이 태워가지고 여럿이 한 십여 대 됐나? 열 쌍 정도 되는 사람이 맘 맞아서 열심히 놀러 댕겼지. 암산 보트장에 가서 보트도 젓고 애들도 젊고 우리도 젊고 좋았어. 아주 즐거웠던 시절이었어."" 지금은 벌써 해체됐지만 젊은 시절 거침없이 도로와 산과 강, 좋은 사람들과 좋은 곳에서 보냈던 기억이 선하다. ""그러다 95년쯤 티코 사고 다음에 노란 마티즈, 은색 마티즈… 그렇게 몰다가 자동차도 은퇴했지."" 그의 청춘과 함께 했던 바이크 ⓒ권상길 새로운 것 배우기를 두려워 말라 예안에 속했다가 도산에 속했다가 귀단에 살았다가 서부리로 갔다 안동댐 수몰로 서당골로 그러다 또 동부리로, 사연 많고 이동 많은 삶속에서 그는 돌이켜보면 자신의 삶이 그다지 권장할 게 못되는 삶이라고 말한다. ""뭐 하나 제대로 한 게 없니더만. 여기저기 다니니까 사람 꼬라지가 안돼. 내가 줏대가 없나봐. 요즘엔 젊은 사람들한테 그케요. 뭐 하나만 똑바로 잘하면 되고, 한 직장을 가져도 그것만 꾸준히 하지 나처럼 이것저것 하다가는 이도저도 아니게 된다고."" 많은 일 중 가장 적성에 맞았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하여튼 뭔가 많이 했고 많이 기록하고 그랬소만!"" ⓒ백소애 ""그 당시에 할 적에는 다 내 적성에 맞는 거 같지. 신문할 적에는 신문이 맞고 정미소 할 적엔 정미소가 맞는 거고, 다 맞으니까 그래 했지. 하기 싫으면 다 치왔지. 너무너무 복잡해. 생활이. 아 다섯이 키우는데 내가 그쿠 나대니 부모 노릇을 올케 못했어. 연년생도 있고 줄줄이 복작복작하니 살았어. 첫째는 바로 밑에 동생 때문에 젖도 제대로 못 먹였어… 공납금도 한꺼번에 나가서 밀리기도 하고. 지금 봐도 미안치 뭐. 세상에서 제일 맘대로 안되는 게 자식이랑 날씨 잖어."" 그는 총기가 있을 때 자필로 또렷하게 유언장 작성도 미리 해놓을 참이다. 근 몇 년 전엔 무릎에 인공관절도 넣었고 백내장 수술도 하고 이 치료도 하고 이래저래 탈나는 데도 많다. 개인병원은 물론이고 성소병원, 안동병원도 꾸준히 다니지만 마지막엔 안동의료원으로 가야한다고 말한다. 왜 의료원으로 가야하냐고 의아해하자 그가 말하길 ""거서 죽어야 아-들 댕기기가 쉬워."" 그의 실용유머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수몰이 되고 얼마 안 되는 수몰 보상금을 받고 사람들은 '여기서 300리 밖을 나가라'고 했다. 300리 밖을 나가야 그 돈을 가지고 뭐를 좀 살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실제로도 고향을 떠난 사람들이 성공한 사례가 많다. ""하여튼 뭔가를 많이 했어. 했는데 성공한 건 하나도 없어."" 성공의 사전적 의미 중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목적한 바를 이루는 것'이고 또 하나는 '거룩한 공적'이다. 후자까지는 안 되더라도 그는 전자를 이루었다. 호기심 많고 열정적이었던 그의 삶은 자신의 메모지에 적어둔 말과 그 결을 같이 한다. '새로운 것 배우기를 두려워 말라.' (글/ 백소애 sodoor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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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 '나의 일생' 예안면 아키비스트 권상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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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 혹독한 삶의 시련, 글로 위로하다 안동시 일직면 광연리, 권영숙 시인 이야기
- - 70에 첫 시집을 낸 할머니 시인- 파란만장 그 세월 '참 재밌다 그지'- 거친 풍파 헤치고 야생화처럼 피어난 삶 권영숙(75) 할머니 ⓒ정형민 2019년 안동예천 근대기행은 생생한 르포취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다룬 '구술생애사'와 안동과 예천 두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사의 근간이 되는 '마을'을 테마로 한 '우리 마을 이야기'를 그려낼 예정입니다. 네 번째 '구술생애사'의 주인공은 안동시 일직면 광연리에 사는 권영숙 할머니입니다. 칠십 넘어 첫 시집을 낸 할머니의 삶은 '시' 그 자체입니다. 거친 풍파를 헤치고 야생화처럼 피어난, 사랑에 용감했고 시에 몰두했던 권영숙 할머니의 삶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편집자 일직면 광연리 ⓒ정형민 여든을 바라보는 내가이제 첫발을 딛습니다.60억 인구 중의 미미한 존재지만무엇이 되고 싶었습니다. 나의 내부에 참답게 관용을 못한 채평생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쓰든 달든 나만의 길,아름다운 동화처럼 그저 그립습니다. 2018년 봄 - 권영숙 시집 <참 재밌다 그지> 서문 일직면 광연리 사는 권영숙 할머니. 70대 할머니가 되어서 첫 시집을 내신 분이라는 얘기를 듣고, 올해 개봉한 다큐멘터리 '칠곡 가시나들'이 떠올랐다. 그러니까 내 뇌는 스스로 권영숙 할머니에 대한 선입견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할머니가 되어서 뒤늦게 시를 배우고, 시집을 내셨나 보다.' 인터뷰 약속을 잡기 위해 전화를 하면서 어떤 호칭을 사용할까 참 고민이 많았다. 권영숙 시인, 시인 할머니, 할머니, 어르신…. 낯선 어른을 뵙는 일은 참 어렵다. 다행히 첫 통화에서 낯선 만남에 대한 두려움이 많이 없어졌는데, 통화 말미에 시인께서 해주신 말씀이 따사로이 내 마음을 어루만져 주었기 때문이다. ""여보세요, 권영숙 시인… 선생님이세요?"" ""예, 글니더."" 사투리를 구사하는 투박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내가 사는 봉화 산골 동네의 옆집 할머니랑 얘기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저는 오지 다큐를 찍는 정형민 감독이라고 합니더. 어르신에 대한 글을 쓰려고 하는데, 인터뷰 날짜를 잡으려고 전화드렸습니더. 저도 11년 전에 봉화로 귀촌해서, 어머니랑 함께 살고 있습니더."" ""아이고 효자시네. 어머니까지 모시고……"" ""아닙니더. 결혼도 못 하고 아직 어머니 옆에 있는 불효잡니더.""""그런 게 중요한가? 하루하루 행복하게 살면 그게 최고지."" 사실 할머니의 답변에 많이 놀랐다. 주변에 계신 어른들은 한결같이 ""빨리 결혼해서 어서 아기를 낳아야지.""라는 말씀을 하셨으니까. 아주 짧은 대화였지만, 처음에 가졌던 선입견이 완전히 없어져 버렸다. '보통 할머니들과 많이 다름!' 갑자기 내 마음은 권영숙 할머니와의 만남에 대한 기대로 설레기 시작했고, 할머니한테서 삶에 대한 소중한 지혜들를 얻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첫 만남은 안동향교회관에서 이루어졌다. 매주 목요일과 금요일에 소학을 배우러 안동향교회관에 나오신다고 하셨다. 솔직히 첫 모습부터 남다르셨다. 체구는 작았지만, 허리도 꼿꼿하고, 작은 배낭을 멘 모습에서 활기와 정열 같은 게 느껴졌다. 할머니께서 점심을 먹고 집으로 가자고 하셔서, 일직면 읍내에 들렀다. 할머니는 자꾸 불고기를 먹자고 하셨는데, 한눈에 보아도 손님 대접을 하시려는 게 분명했다. 내가 몰래 밥값을 계산해도 야단을 맞을 것 같아서 머리를 굴렸다. ""어머니, 불고기가 드시고 싶습니꺼?"" ""귀한 손님이 이렇게, 아니 오셨는데, 그래도 맛있는 걸 대접해야지요."" ""그럼 저는 간단히 먹으면 좋겠습니더. 제가 저녁에 약속이 있어서 고기를 먹지 싶습니더."" ""그러니꺼? 그러면 정식 먹을까요?"" ""네, 정식이 딱 좋겠습니더."" 시인 할머니를 만나기 전부터 아주 궁금했던 게 있었다. 일직면에 산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나는 제일 먼저 권정생 선생님이 떠올랐다. 일직면에 권정생 선생님도 일직면에 사셨으니, 권영숙 할머니와 어떤 인연이 있지는 않을까? 일직 권영숙 할머니 댁 ⓒ정형민 일직 권영숙 할머니 댁 ⓒ정형민 늘 동경했지만 끝내 만나지 못했던 권정생 선생 우리 집안 어른이지요. 우리 마을에 권씨가 50명쯤 살아요. 권정생 할배가 일직면 조탑리에 사셨잖아요. 근데 내가 선생님 살아생전에는 우리 집안인 줄 몰랐어. 제일 가까운 집안인데 몰랐다니까! 돌아가시고 나서 뒤늦게 알았지. 내가 그것도 모르고… 정생이 할배 부친은 옛날에 우리 집에 와서 더러 밥도 자셨는데, 굉장히 못살았어. 그때 우리 집은 밥은 먹고 살았기 때문에 그 할배가 더러 오셨어. 어른이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간이 털썩 내려앉더라꼬. 우리 집안 어른인 줄 몰랐을 때도 늘 뵙고 싶었지. '몽실 언니'가 테레비에 나오고 그라니까, 우리 일직에 저런 유명한 분이 계시는데 언젠가는 한번 그 할배를 만나봐야겠다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남편 없이 사니까 내 삶이 얼마나 힘들어. 막노동판에 가서 일 마치면 해가 빠지제. 또 그 할배 있는 마을이랑 우리 동네는 왕래하기가 참 힘들어. 조탑이 옛날에 엄청 깡촌이라서 차가 잘 안 갔다니까. 그래가 못갔다카이. 그래서 내 마음이 안 좋아. 살아생전에 한 번이라도 봤으면 좋았을 텐데. 그 할배가 젊었을 때부터 몸이 아팠잖아. 폐 질환을 앓다가 또 복막이랑 방광까지 그 세월을…그래서 내가 저 할배는 저렇게 아픈 몸으로도 글을 쓰는데 나는 도대체 뭐 하는기고 싶어서 늘 마음속으로 동경했지. 그런데 우리 모친도 정생이 할배 돌아가신 그해 5월에 돌아가셨어요. 그래서 장례 때도 못 가봤지. 어머니를 잃은 슬픔에 잠겨 있었거든. 권영숙 할머니의 방. 머리맡 서랍장에 권정생 선생 사진과 모친과 함께 찍은 사진이 놓여있다 ⓒ정형민 어느 날 일직면 공공근로일을 하게 되었는데, 정생이 할배 집 일을 시키더라고. 한 달 동안 했어. 조탑동에 가서 환경미화하고, 방문객들 맞을 준비하고, 꽃밭 만들고, 코스모스 심고, 메밀 갈고 홍초 심고... 하여튼 멋지게 만드는 거야. 그때 우리가 벽화도 그리고 일을 했거든. 그렇게 갈 수 있는데, 내가 왜 한 번도 할배한테 못 찾아갔는가 싶더라고. 살아 계실 때 할배를 봤으면, 내 인생이 더 빨리 달라졌을지도 몰라. 그때는 시를 쓸 생각은 안했지만, 그래도 혼자서 주절주절 글을 계속 쓰려고 했었거든. 쓰려고 하는데, 글은 잘 안 되고... (웃음) 막 그러면서 살았지. 정생이 할배는 정신력이 놀라워. 책을 얼마나 많이 쓰셨는지, 나중에 도서관에 가니까 할배 책이 그만치 많은 걸 알았지. 동화 쓰기가 진짜 힘들잖아요. 그 불편한 몸으로도 아이들 생각하면서 그렇게 많은 책을 쓰신 걸 보면, 진짜 역사적인 인물이지. 정작 당신은 홀로 그렇게 아프고 힘들게 사시고, 남을 위해 잘 살게 해주고 떠나셨잖아요. 권정생 동화나라에서 ⓒ정형민 어디까지 왔나 세월에 배 띄워오니 순풍만 아니더라허허벌판에 모가 깨진 마음이 웃습니다 놀란 꿩처럼 휘둥그래 뜬 생각이아직은 살아 있다는 긍정을 가져봅니다 한순간의 일도 낮잡아 잊어버리는잎 진 꽃입니다접혀진 투박한 나이테는옹졸하게 시샘까지 합니다 희망을 가져보아라붙잡아보고 싶어도 손 새에 빠지는 모래알 같습니다 냉골에 들기 전까지뇌세포의 포말을 또렷이 하기 위하여신의 로고스를 찾아도 봅니다 나는 내가 뭣을 해야 되는지도어벙벙해지며해목은 어머니 사진만 자꾸 꺼내봅니다 - 권영숙 시집 <참 재밌다 그지> 부잣집 딸인 어머니, 농림학교 수재였던 아부지 우리 엄마는 임하면에서 부자집 딸이었어요. 논만 4백 마지기에 집 대지가 6백 평이었어. 어머니가 한 살 연상이셨어요. 외할아부지가 엄청 부자였지만, 여자가 공부하면 바람난다고 어머니를 학교에 안 보내셨다니까. 그런데 아부지가 농림학교를 나왔는데 소문난 수재였거든. 그래서 아부지가 평범한 집안 출신이지만, 아부지한테 엄마를 시집을 보낸 기라. 우리 집도 대가족이었는데, 위로 오빠가 있고, 내가 둘째 그리고 남동생, 그 밑으로 쭈루룩 딸만 넷 그렇게 7남매였지요. 내가 1945년 12월 24일에 태어났는데, 그때는 다 출생신고를 늦게 했잖아. 하지만 아부지가 면사무소에 근무하셔서, 내가 태어나자마자 바로 출생신고를 했어요. 어릴 때 외갓집에 가면 하인들도 있고, 큰 괘종시계가 당당 울리고, 재봉틀도 있고 집안에 온갖 화초가 피어 있고 선인장까지 있었으니까, 진짜 부자지요. 그런데 우리 엄마가 아부지한테 시집와서 고생이란 걸 처음 해본 거지. 엄마는 가난하게 사실 때에도 몸에 한 줌 흐트러짐이 없었어요. 아침에 일어나면 머리에 동백기름 바르고. 사람들 눈에 교만하게 보일 정도였어. 우리 집도 부자였는데, 아홉 살 때까지 머슴한테 업혀 댕겼어. 그때 집에 목화밭이 있었는데, 목화 수확할 때면 할매가 꼭 날 데리고 갔지. 그럼 나는 밭고랑에 혼자 놀다가 목화 가시에 긁혀 피가 나면 엉엉 울었지. 나의 아픔은 나의 아픔은 사랑덤빌 줄도 모르고구할 줄도 모르고어리석게 오랜 기다림으로쫓아오기만 기다리는 바보그대를 꿈꾸며나를 노래해 달라눈물 흘리며바보처럼어리석은 행복을 기도하며하염없는 기다림 속에그대의 음성에 귀 기울이며눈물 뿌린 시간을 보내는바보로 남으리라 - 권영숙 시인의 오래전 일기장에서 일직고등공민학교 시절. 왼쪽이 권영숙 할머니 전쟁이 끝난 후 나타난 낯선 남자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6.25가 터지고, 우리도 소달구지를 타고 의성까지 피난을 갔어. 의성에서 소도 내버리고 그때부터 청도를 지나서 밀양까지 걸어갔지요. 그때 내가 6살이니까, 발이 엄청나게 부어올랐어. 그러다가 밀양에서 오빠까지 잃어버렸어요. 그런데 할매랑 엄마가 엄청 울었제. 아부지도 장남이라고 얼마나 예뻐했겠노. 다행히 오빠가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니까 자기 이름은 쓸 줄 알잖아요. 그래서 아부지 이름을 부르고 다니니까, 누가 데리고 왔더라고. 그런데 오빠를 찾자마자 아부지가 붙들려 가버렸어. 헌병들이 막 호루라기를 불면서 검문을 하는데, 우리 아부지가 외동이니까 집안을 지켜야 했거든. 그래서 친척 할배들이 우리 아부지는 붙잡혀 가면 안 된다고 엄마 치마 밑에 숨으라고 했지. 그때 엄마가 여동생을 임신해서 배가 산처럼 불룩했는데, 거기 숨으면 우쨌겠노? (웃음) 하여튼 아부지는 막 화를 내시더라고. 사나이 대장부가 군대에 가야지, 여자 치마 밑에 왜 숨노 하면서……. 그래서 당당히 붙잡혀 가버렸어. 군대를 갔다가 왔는데 전쟁이 나서 또 끌려가신 거야. 그래서 아부지가 전쟁에서 살아 돌아올지 알 수 없으니까, 엄마는 나를 오빠 따라 학교에 일찍 넣었지. 그런데 내가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학교에 갔다 오니까 얼굴이 누런 남자가 마루에 앉아 있더라고. 속으로 얄궂어 보이는 저 남자가 누굴까 생각했지, 내가 아부지를 못 알아봤어. 그때 간디스토마에 걸려서 얼굴이 누렇게 돼서 돌아왔더라고. 엄마가 개를 얼마나 잡았는지 몰라. 그래서 겨우겨우 살아나셨어. 아부지가 간간이 군대 끌려가서 겪었던 얘기를 해주셨어. 총살당할 뻔했다가 살게 됐다고. 전투가 한창 벌어졌는데, 산에서 굴러 떨어져서 뒤에 혼자만 남게 되셨대. 다행히 산을 헤매다가 부대를 찾았는데, 탈영병이라고 총부리를 딱 겨누더라네. '아! 이제 죽었구나' 생각하셨는데, 마침 거기 책임자가 농림학교 후배였는기라. 그래서 그 후배 덕분에 총살을 면했지. 아부지는 팔에 총 맞은 자국도 있었어. 전투하다가 총알이 팔을 관통했거든. 일직고등공민학교 시절. 기차를 타고 수학여행 가는 길 전쟁이 끝나고 아부지는 다시 면사무소에서 근무하셨는데, 아부지 간호한다고 집안 살림이 많이 기울었지. 그래도 참 멋쟁이셨어. 일직면장도 오래 하시고…. 그때는 학교 마치면 면사무소에 놀러 가서, 인쇄하는 롤러를 가지고 장난도 많이 쳤지. 아부지가 면장 선거 나갈 때 논밭까지 다 팔아버렸어. 그래서 내가 학교도 제대로 못 다녔어요. 그때 중학교 입학금이 3,300원인가 했는데, 입학금이 없어서 안동 읍내에 있는 중학교에 합격은 했는데 못 갔어. 집안 살림도 어려웠지만, 오빠가 사범대학에도 가야 되고, 밑에 남동생도 있으니까. 그래서 놀다가 동네에 있는 일직고등공민학교에 조금 다녔어. 인가가 없는 학교였는데, 그때만 해도 학교에 늦게 들어가는 사람들이 많아서 나보다 5살 많은 학생도 있었어요. 일기장을 꺼내본다 ⓒ정형민 노을 누가 사랑을 하다서쪽 하늘에 걸어둔 건가다 못한 정애타는 불꽃인가그래서 그리움이 목말라그토록 발갛게 타나 눈물 젖은 너속 오빈 마지막 적선에갈대밭 함께 불탄다피라미 떼만 반짝반짝노을 춤추는여울살 물 구르는 소린백사장 붉고 고운 이마에어둡살이 앉으려니물새야너는 또 왜 달떠 우는가 - 권영숙 시집 <참 재밌다 그지> 반대를 무릅쓰고 한 결혼 부모님의 결혼 반대, 그리고 삭발 초등학교를 일곱 살에 들어갔어. 옛날에 오빠나 언니한테 책을 물려받잖아요. 그래서 1년 일찍 학교에 들어갔어. 그때는 학교도 멀고, 공부하기 싫어서 맨날 울었어. 학교까지 10리 길이었거든. 왕복 20리. 학교 안 가고 철둑에서 맨날 놀아뿌러. 그럼 엄마가 부지깽이 들고 막 쫓아 와. 그럼 울면서 도망가고, 할매 치마폭에 숨고 그랬지. 난 어릴 때도 내내 혼자 놀았어. 그때는 같은 성 아니면 같이 안 놀아줘. 같은 집안사람 아니면 안 놀아준다니까. 원래 고향 마을(일직면 원리)에는 권씨들이 없었어. 그래서 초등학교 4학년 때 여기 광연리로 이사를 했지. 여기는 권씨 집성촌이거든. 그런데 학교가 더 멀어졌어. 왕복 30리나 됐지. 지금 사는 이 집을 아부지가 동네 어른들하고 직접 지었어. 큰 기와집을 뜯어서 소달구지에 싣고 옮겼지. 작은 짐들은 지게로 옮기고. 옛날에는 원래 살던 집을 뜯어서 새집을 짓곤 했다꼬. 초등학교 4학년 때 광연리로 이사하고 나서부터 우리 주인(남편)을 봤어요. 나보다 두 살 위 동네 오빠였는데, 같은 학교 한 해 선배였지요. 우리 오빠랑 같은 학년이었는데, 오빠가 공부를 잘했거든. 그래서 공부 못하는 우리 아저씨를 상대도 안 하더라고. 그래도 나는 우리 아저씨가 참 좋았어. 사람이 참 착했거든. 그때 우리 신랑 등에 타고 개울도 많이 건너다녔어. 맨날 물 건널 때 업어주곤 했어. 그러다가 우리 주인이 가슴 속에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나 봐. 그런데 나는 아예 아닌기라. 우리 집하고 그 집하고 너무 차이가 나니까. 그런데 아저씨가 우물가에 쪽지를 갖다 놓으면 내가 잽싸게 챙겼지. 다른 사람이 보면 절단날 일이제. 어쨌든 어릴 때부터 만났으니까 나도 결혼을 해야 하는갑다 생각했는데, 부모님이 정말 반대하는기라. 그래서 우리 아저씨한테 시집 안 보내주면 죽어버린다꼬 내가 내 머리를 빡빡 밀어 버렸어. 그러면 다른 데 중매를 못 설 테니까. (웃음) 그때는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네. 그때 나랑 선을 봤던 남자가 대학 교수가 됐는데, 지금은 퇴직했을끼라. 그 사람이 우리 집안 동생한테 묻더래. 나랑 선봤던 그 아가씨는 지금 어떻게 사느냐고. 그래서 내가 그 사람 지금 다마내기(양파) 까면서 하루 3만 원 번다캐라 그랬지. 우리 아저씨가 나한테 혈서를 써서 마음을 고백할 정도로 날 열렬히 사랑했어요. 결혼하고 나서도 고생을 말로 다 못할 정도로 많이 했지만, 그래도 우리는 한 번도 안 싸웠어. 우리 아저씨가 정말 착하고 순딩이었거든. 가끔 내가 화를 내도 늘 나를 안아주었어. 할머니를 열렬히 사모했던 남편 김동혁 어머니(배성화)와 함께 오! 사랑이여 피맺힌 사랑이여당신의 마음이 가버렸나내 마음이 가버렸나 저 멀리시냇가아지랑이 아롱거리며살랑이는 봄바람을 타고 당신의 사랑은나의 귓전에 와 닿았지너를 사랑했노라고무척 사랑했었다고 허지만지금은찢기우는 눈물이마음을 찢는아픈 사랑을 낳았지 오! 맑았던 그 사랑이여!어릴 때 꾸밈없었던 그 사랑이여 (중략) - 권영숙 시인의 오래전 일기장에서 국제염직에 다니던 시절의 남편(앞줄 왼쪽). 문래동 판자촌 생활 결혼반지도 못 주고받았어. 내가 스물넷이고, 신랑이 스물다섯이었지. 그때 너무 가난하니까, 반지 값으로 돼지 새끼를 한 마리 사서 그걸 살림 밑천으로 시작했지. 그렇게 그래저래 살다가, 신랑이 국제염직에 다녀서 서울로 올라갔어요. 영등포 문래동이랬어. 그런데 세상에나 올라가 보니까 여기 거지는 거지도 아니야. 다 쓰러져가는 판자촌에 완전히 진창이더라고. 영등포 그 둑에서 살아가는 삶이. 그런 데서 몇 년을 살았다니까, 맨날 눈물 찔찔 흘리면서. 거기 강서구 화곡동이 그때는 전부 다 논이었어, 목동까지. 강둑에 나가서 새우도 잡으러 다녔지. 쪼깨난 새우가 억수로 많았어. 그리 살아선 도저히 안 되겠더라고. 멸치 장사도 하고 떡 장사도 하다가 그때부터 내가 담배에 손을 댔어. 내가 내 삶을 못 받아드리겠더라고. 너무 형편없이 사니까. 얼마나 못살았는지 설명하기도 힘들어. 엄청 작은방에 연탄불 피워서 겨울을 나고, 수돗물도 사람들이 물통 들고 가서 10원, 20원 주고 사서 먹었다니까. 주인집에서 수돗물까지 팔아먹고 살아. 서울에 있을 때 첫째를 낳았는데, 겨우 돌 지난 애를 방에 남겨두고 문을 잠가 놓고 일하러 다녔거든. 옛날에는 여의도에 공군부대가 있었는데, 거기서 일하면서 그렇게 울고불고 살았어. 다다미방이 추우니까 애(장남)는 맨날 설사하제, 도저히 살 수가 없어. 그래서 안동으로 내려와 버렸지. 우리 아저씨한테 나는 다시는 서울 안 간다고 그랬어. 나 혼자서 애기를 데리고 친정에 와부렀지. 그런데 우리 아저씨도 빚만 늘고 생활이 안 되니까 안동에 내려왔지. 두 아들 규완, 규진과 함께 우리 동네 뒷산이 문중 산이거든. 그래서 농사를 지으려고 거기를 개간하기 시작했지. 우리 아저씨가 얼마나 부지런한지 몰라. 밤에도 초롱불을 들고 가서 일하는기라. 그러다가 초롱불이 꺼지면 컴컴하니까 집에 돌아왔는데, 그게 새벽 한 시고 그랬어. 그렇게 뒷산을 일구었지. 그때는 개간할 때 우리 애를 포대기에 싸서 밭에 데리고 갔어. 그때만 해도 봉화 재산에서 호랑이가 애기를 물어갔다는 소문이 들릴 때였거든. 근데 내 친구가 봉화로 시집을 갔는데, 진짜 눈앞에서 호랑이가 이웃집 애를 물어가는 걸 보고 식겁을 했대. 그래서 친정으로 다시 왔어. 그때는 우리 동네도 늑대 같은 짐승들이 잘 내려왔어. 그런데 애를 포대기에 싸서 밭에 데리고 가서 겁도 없이 일했다니께. 사실 내가 몸이 너무 약해서 거의 일을 못 했거든. 그래서 이웃에서 내가 농사일도 안 한다고 뒤에서 욕을 많이 했어. 그래도 우리 주인은 늘 나를 감싸주었지. 그렇게 착한 사람이었어. 님이 가신 뒤 오늘은이렇게 느꼈습니다나뭇가지 끝마다맺힌 아름다운 쪼그만수정 구슬을 보아도내게는 서럽게만느껴집니다하얀 가지의 노래마저도서럽게만 느껴집니다지상의 가지가지모든 것들이예전에 몰랐던 서러움으로 가득 찹니다 - 권영숙 시인의 오래전 일기장에서 남편의 은사님과 함께 죽을 고비 앞에서 일기를 쓰다 내가 농사일은 잘 못 했지만, 새마을운동은 열심히 했어. 서울에서 내려오니까 농촌이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꼬. 그래서 정말 열심히 뛰어다녔어. 내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좋아하나 봐. 지금은 목소리가 이렇지만, 그때는 사람들 마음을 휘어잡는 목소리였어요. 일직면 새마을 부녀회장으로 일을 참 많이 했지. 연탄을 팔아서 부녀회 기금까지 마련하면서 앞장섰지. 그래서 청와대 가서 훈장까지 받았어요. 새마을운동 야유회. 오른쪽에 검은 양장차림 새마을부녀회장 시절. 뒷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가 할머니. 열심히 살다 보니까 그래도 밥술이라도 뜨게 되더라고. 그런데 막내(규영)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나서 내가 많이 아프기 시작했어. 정말 죽을 만큼 힘들었어. 계속 어지럽고, 길을 가다가 쓰러지기도 하고. 병원에서도 원인을 모르더라고. 그래서 별 방도가 없으니까 기도원에 들어가게 됐어. 무언가 의지할 것이 필요했지. 기도를 하니까 머리가 조금씩 맑아지는 것 같더라고. 그래도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까, 삶이 허무해지는기라. 그래서 내 삶의 흔적이라도 남기려고 일기를 쓰기 시작했어요. 그게 막내딸 초등학교 4학년 때였지. 안녕, 내 사랑 살림이 조금 좋아지니까 우리 주인이 비닐하우스를 세워서 고추 농사를 지었어. 안동에서 제일 처음으로. 그래서 우리 주인이 영농우수상도 타고 그랬지. 멜론도 하우스에서 재배했는데, 연탄불을 피워서 멜론을 키웠어. 그렇게 살림이 좋아지니까 우리 주인이 포크레인을 사면서, 이제 자네 고생 안 시킬께 그러더라꼬. 안동에 골프장이 들어온다고 하면서, 있는 돈 없는 돈 다 털어서 제일 비싼 포크레인을 샀지. 그래서 완전히 거지가 돼 부렀지. 그것 때문에 우리 주인이 나락(벼) 장사한다고, 나락을 나르다가 허리를 다쳤는데…… 수술 받다가 갑자기 세상을 떠났어. 그게 1998년이지. 우리 주인이 쉰여섯 살 때. 혼자서 살아야 하니까, 뭐든 해야 했지. 내가 쓰레기 매립장 공사장에도 나가서 일했어. 매립장의 하루 까마귀 때 우글거리는기분 나쁘게 우는 곳쓴 무더기가 왜 저렇게 많을까사람들은 단 것을 다 먹고쓴 것만 토해 내는가벌 떼, 파리 떼는 너무 많이우글거려, 단맛을 찾으니징그럽기 그지없다 더러움 무더기의 무질서 위에유리 못 찔릴까두려움 안고엄마들의 기적의 가슴을연출하는 삶을 엿보며넘어가는 석양 언덕에 서니인간의 긍지에 가슴이 저리다. - 권영숙 시인의 오래전 일기장에서 젊은 시절 등 떠민 아들의 미국행 1998년 그해 2월에 우리 아저씨가 세상 떠나고, 8월에 둘째 아들이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어. 원래 우리 주인이 아이들한테 너희들은 우리처럼 고생하지 말고, 큰 나라에 가서 잘살아보라고 했거든. 그래서 장례식 치르고 집에 있는 걸 다 터니까 1,600만 원이 나오더라고. 그걸 쥐어서 보냈지. 애가 공항에 가서 안 간다고 하면서 막 울더라고. 그래서 더 나은 세상에 가서 공부하면, 뭐든 할 수 있을 거라고 등을 떠밀었지. 그런데 6개월이 지나니까 돈이 뚝 떨어졌대. 돈을 벌면서 공부를 계속 하려고 해도 학비도 안 되더래요. 그래서 공부를 포기하고, 청소일을 시작했대. 그렇게 엄청 고생을 했는데 지금은 자리를 잡았지. 그래서 형도 데리고 가고. 형은 미국에 늦게 갔는데도 빨리 성공했지. 동생보다 돈을 더 많이 벌어. 지금은 아들들이 엄마가 참 그때 잘 보내셨다고 해. 그런데 내가 처음 미국에 나갔을 때는 정말 펑펑 울었어요. 어느 해 눈 오던 날 환갑 때쯤 미국 있는 아들한테 갈라고 비자를 낼라 하니 돈이 있나? 주인이 빚만 2천만 원 남겨 놓고 가서 그 빚을 갚는다고 10년이나 걸렸어. 노동판에 나가서 품 팔아서 빚을 갚고 있을 때였는데, 그래도 무리를 해서 아들을 보러 갔어. 둘째를 8년 만에 보고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 그때까지 진짜 눈물로 세월을 보냈으니까. 통화도 하기 어렵잖아. 미국 가서 만나기 전만 해도, 아들이 미국서 부자 돼서 잘 사는 줄 알았어. 근데 가보니까 흑인 빈민촌에, 다 쓰러져가는 오두막 같은 데 사는 기라. 방도 없이 거실에 매트리스 하나 깔고 전기장판 켜고 살더라고. 내가 진짜 깜짝 놀랬어. 막 눈물이 쏟아지는데 펑펑 울었어. 그래서 내가 아들한테 집에 가자고 그랬어. 그래도 한국 가서 살면 이것보다는 낫지 않겠냐 했지. 그런데 아들도 울면서, 이제껏 고생했는데 이렇게는 못 간다 하더라꼬. 그때 미국서 5개월 있다가 왔어. 곁에 한국 아가씨(며느리)가 들어가서 같이 살고 있더라꼬. 며느리가 참 고맙고 착해. 한국에서 대학까지 나왔는데... 나는 며느리한테 자존심 상하지 않으려고 10만 원짜리 속옷을 사서 입고 갔어요. 그런데 며느리는 10달러에 5개짜리 속옷을 사서 입고 지내더라고. 그래서 할매도 아닌 젊은 네가 왜 이런걸 입노 했더니, 자기가 미국에 멋 내러 왔느냐고 하더라고. 아이들 훌륭하게 키우려고 미국에 온 거지, 자기들 호강하러 온 게 아니라고 하잖아. 내가 그 말 듣고 깜짝 놀랬지. 딸만 둘인데 공부를 참 잘해. 애들이 1학년 때부터 내내 일등이래. 할머니의 책장 ⓒ정형민 1984년 일기장. 막내 규영 씨가 선물했던 카네이션 ⓒ정형민 버려진 매트리스 깽하게 달린 하늘가을 아파트 앞외로워 떠는 듯도 해 보이는버려진 매트리스아직은 유년이구나 뗏목처럼 둥둥 떠오는 생각알라바바 댄디 마을 표정찬물사발에 간장만 타서누렇게 부황 뜬 얼굴 비친 물마실 때가 언제였던가?참한 솔 껍질 벗겨 울리던떪은 송구죽 미국 글자 그대로 아름다운 나라애배처럼 말고 부유한 나라에 잘살아 보거라애비 뜻에 따라 주립대 들어간 아들학비로 중단하고궁궐 같은 르네상스 호텔 근무하나흑인촌 싸구려 집을 빌려청설모가 밤새도록 푸른 달빛을 넘나들며건반처럼 두드려대는 천장매트리스 두 개 휠터 한 개그것도 쓰레기장에서 구한 것이라고 하는 아들 아! 가난!이 지구상 어디를 가도 가난이 있구나버럭 무릎이 휘청거렸다학부 나온 며느리에게하도 면목이 없어어떻게 이렇게 사느냐화장기 없는 입술괜스레 어머니 속을 끓게 하네요 - 권영숙 시집 <참 재밌다 그지> ""죽기 전에 시집이라도 한 권 냈으면 싶었어"" ⓒ정형민 시골 할매가 시를 배웠지 서울 딸네 집에서 8년쯤 지내다가 작년 11월에 내려왔어요. 내가 외손주를 돌봐주었어. 이제 4학년인데, 손주랑 떨어지니까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 처음에 서울 올라가서, 손주만 보면서 집에 있으니까 심심하잖아. 그래서 책이라도 보려고 도서관에 갔어요. 그런데 도서관 직원이 내가 시골에 살아서 책을 못 빌려주니까, 딸을 데리고 오라 하더라고. 그래서 딸을 데리고 갔더마 책을 빌려주는기라. 거기서 딸이 내 자랑을 했지. 우리 엄마는요, 시골에 살아도 톨스토이도 읽고, 까뮈 전집도 읽는다꼬. 나는 평생 책 한 권도 못 사봤어. 형편이 안 되니까. 그래서 쓰레기장에 버려진 걸 주워서 집에 가져오고. 공공근로 같은 일 하면서 책을 많이 주웠어. 권영숙 시집 '참 재밌다 그지', 소울앤북, 2018 ⓒ정형민 그때 딸애 얘기를 듣고, 도서관 직원이 시를 배울 생각이 없느냐고 묻더라꼬. 그래서 시창작반에 들어가서 유종인 시인한테 시를 배웠지. 그리고서 죽기 전에 시집이라도 한 권 내야겠다는 생각에 두 아들한테 돈을 3백만 원씩 받았어. 처음에 111편을 유 시인께 들고 갔더니, 너무 많다고 60편으로 잘라버리더라꼬. 그리고 출판사를 소개받아서 시집을 냈는데, 몇 년 지나고 내 시집이 우수도서로 선정됐다고 천만 원을 지원해 주는기라. 그래서 출판사에서 나한테 백만 원을 주고, 나머지 돈으로 또 시집을 인쇄했지. 거친 풍파 헤치고 야생화처럼 피어나 권영숙 할머니를 마주한 감회를 어찌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마치 폭풍우 속에 피어 있는 한 송이 야생화를 본 것 같기도 하고, 거친 풍랑이 치는 바다로 거침없이 배를 몰고 나가는 강인한 어부를 만난 것 같기도 하다. 일직면 광연리 마을에는 일흔다섯의 나이에도 여전히 꿈을 놓지 않고 작가의 길에 들어선 할머니가 산다. 꽤 많은 얘기를 나누고, 거친 손으로 쓴 시와 일기들을 읽어본 지금, 나는 권영숙 할머니를 '권영숙 시인'이라 부르고 싶다. ""잘 가시우"" ⓒ정형민 권영숙 시인의 시집 <참 재밌다 그지>를 필독하기를 권한다. 시집을 읽는 내내, 어느 유명한 시인의 시집을 읽는 것처럼 탄성이 절로 나온다. 시를 배우기 전에 일기장에 써놓은 시들도 세상에 나왔으면 좋겠다. 야생의 생명력을 물씬 풍기며 마음을 울린다. 일기를 담은 수필집도 출간될 예정이라니 몹시 기다려진다. 출판사에서 일기장을 많이 챙겨 갔는데도, 집에는 아직도 일기장이 아주 많이 남아 있었다. 조심스레 일기장을 펼쳐들었는데 가슴이 하염없이 먹먹해진다. 눈물을 훔치며 할머니의 일기 두 편으로 글을 맺는다. (글/정형민 makalu21@naver.com) 오래된 일기 中 ⓒ정형민 오래된 일기 中 ⓒ정형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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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 혹독한 삶의 시련, 글로 위로하다 안동시 일직면 광연리, 권영숙 시인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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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번성했던 옛 고을 '용궁현'을 찾아서
- 2019년 안동예천 근대기행은 생생한 르포취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다룬 '구술생애사'와 안동과 예천 두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사의 근간이 되는 '마을'을 테마로 한 '우리 마을 이야기'를 그려낼 예정입니다. 첫 번째 '우리 마을 이야기'는 번성했던 예천 용궁면으로 떠나보기로 합다. -편집자 용궁읍내 ⓒ정형민 # 용궁 유랑기 예천군에서 가장 유명한 곳을 꼽자면, 용궁면의 회룡포와 용궁 순대국밥이 아닐까? 2000년에 회룡포가 TV 드라마 '가을동화'의 촬영지로 유명세를 치르면서, 용궁 순대국밥도 덩달아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용궁은 그보다 훨씬 오래전부터 많은 사람이 몰려들던 아주 크고 유서 깊은 고을이었다. 그 기원을 돌아보면, 고려시대를 거쳐 신라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시대에 축산현 혹은 원산현으로 불리다가, 고려 현종 3년(1012년)에 용궁군으로 개칭되었고, 조선 태종 13년(1413년)에 용궁현, 1896년에 다시 용궁군이 되었다. 그리고 1914년 구읍면과 신읍면만 용궁면에 남아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필자는 이번에 구읍면과 신읍면이 있던 읍내 마을을 중심으로 용궁을 유랑해 보았다. 916번 지방도. 예천군 지보면 ⓒ정형민 대동여지도(1861년, 출처:규장각). 중앙에 '용궁'이라고 적혀있다. 한적한 지방도로를 타고 안동에서 예천으로 넘어간다. 가을 들녘 풍경이 참으로 평화롭다. 첫 목적지인 낙동강 변에 자리 잡은 '삼수정'으로 향한다. 쌍절암 생태숲길에서 ⓒ정형민 올해 화창한 어느 봄날, 문경으로 이어진 지방도로를 따라가다가 '낙동강 쌍절암 생태숲길'이라고 적힌 안내 표지판을 보고 만나게 된 곳이다. 강변 언덕 위에 자리 잡은 삼수정에 올라서니, 옛날 선비들이 무시로 찾아와 멋진 시를 읊던 모습이 그려진다. 삼수정 바로 앞에 웅장한 회나무 한 그루가 3백 년 가까운 세월을 안고 서 있고, 좌측 들녘에 소나무 군락지에 백로와 왜가리 떼들이 여여히 앉아 있다. 삼수정 ⓒ정형민 삼수정, 풍양면 청곡리에 있다 ⓒ정형민 삼수정은 오월이 가장 좋다. 뜨락에 야생화들이 만발하다. 제비꽃, 냉이꽃, 애기노랑토끼풀, 민들레… 긴 겨울을 이겨내고 꽃을 피운 어린 생명들을 살피며 작은 뜨락을 사뿐사뿐 거닐어 보라. 왼쪽으로 강물이 굽이 돌아가면 삼강주막으로 연결되고, 그 너머 용궁 읍내가 자리 잡고 있다. 옛날 삼강 나루에서 배를 타고 강을 건너서 용궁 읍내 시장으로 가고,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먼 길을 떠나기도 했다. 그 시절에는 마을 사람도, 보부상도, 소도 함께 나룻배를 탔고, 삼강주막에서 짐을 풀고 국밥 한 그릇에 막걸리 한 잔 마시며 세상 소식을 듣곤 했다. 풍양면 삼강리의 삼강나루(출처: 강문화전시관) 왼쪽부터 황목근, 후계목, 정자가 나란히 섰다. ⓒ정형민 천연기념물 제400호 황목근 ⓒ정형민 용궁 여행의 최적기는 역시나 가을이다. 들녘에서 노랗게 익어가는 벼가 바람에 넘실대고, 길옆으로 코스모스가 한들한들 춤을 추고, 하늘까지 청명함을 뽐낸다. 용궁 읍내에 들어서기 전에 오백 살이 넘으신 '황목근' 어르신을 먼저 뵙는다. 긴 세월 용궁 읍내를 지키며 터줏대감으로 살아온 팽나무다. 2000년에 종합토지 소득세를 납부했고, 황목근이라는 이름자까지 있으니 용궁에서는 가장 고령의 어르신이다. 그래서 정월 대보름이면 자정에 당제를 지내고, 7월 백중날에는 나무 아래에 모여 잔치를 벌인다. 곁에는 아직 약관도 되지 않은 '황만수' 씨가 후계목으로 지정되어 무럭무럭 커가고 있다. 용궁가축병원... 낡고 오래된 가게가 있는 용궁읍내 ⓒ정형민 이화세탁소... 낡고 오래된 가게가 있는 용궁읍내 ⓒ정형민 수다방... 낡고 오래된 가게가 있는 용궁읍내 ⓒ정형민 # 토끼와 거북이의 시간, 용궁역 미리 말하자면 용궁 탐방은 참으로 흥미진진하다. 한 마을이 이렇게 많은 감동과 이야깃거리를 간직하고 있을 줄 몰랐다. 제일 먼저 몇 십 년 세월의 모습이 공존하는 거리가 눈에 들어온다. 동아당약국 사거리를 기점으로 용궁역이 있는 서쪽으로 옛날 모습이 많이 남아 있어서, 타임머신을 타고 1980년대로 돌아간 듯한 기분이 든다. 가축병원, 세탁소, 전파상, 다방, 신발 가게, 자전차방, 당구장…. 몇 십 년의 역사를 간직한 가게들이 마을 거리를 여전히 지키고 있다. 4~50대라면 초등학교 다니던 코흘리개 시절로 돌아가 손에 20원을 쥐고 '뽀빠이'랑 '자야'를 사러 달려갈 때처럼 가슴이 설레지 싶다. 일신전파사 ⓒ정형민 용궁당구장 ⓒ정형민 용궁읍내 풍경 ⓒ정형민 그런데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배부터 든든히 채워야 하지 않겠나? 이곳에 와서 용궁 순대국밥을 먹지 않는다면 정말 손해나는 일이다. 용궁 순대국밥은 육수에서 깊은 맛이 나는 것이 특징인데, 여기에 연탄불에서 익힌 오징어 불고기를 함께 곁들이면 정말 좋다. 그래서 인터넷 블로그에 오징어 불고기가 단연 최고라는 글을 종종 볼 수 있다. 여행객들은 방송을 통해 잘 알려진 단골식당이나 박달식당을 많이 찾지만, 읍내 곳곳에 용궁 순대국밥을 파는 식당들이 꽤 많다. 필자도 순대국밥과 오징어 불고기로 배를 채우고, 먼저 용궁역으로 발길을 돌린다. 용궁역이 읍내 서쪽 끝에 자리 잡고 있는데, 밥을 먹은 후 소화도 시킬 겸 걸어서 방문하기에 좋다. 그런데 막상 용궁역을 본 첫 느낌은, 한 마디로 묘하다! 용궁역 ⓒ정형민 용궁역에서 만난 김연숙(왼쪽 두번째), 김연주(왼쪽 세 번째) 자매 가족 ⓒ정형민 용궁이란 이름 때문인지 별주부전의 주인공들을 테마로 한 기념물과 벽화가 역을 장식하고 있다. 필자는 옛 용궁역의 모습이 잘 복원되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지만, 아이들이 꽤 좋아할 것 같기도 하다. 아니나 다를까? 어디선가 시끌벅적한 소리가 나서 바라보니, 3대로 이루어진 대가족이 화기애애하게 역사를 둘러보고 있다. 정겨운 모습이 보기 좋아 역사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어드린다. 요즘 보기 드문 대가족이다. 알고 보니 자매인 언니 김연주 씨와 동생 김연숙 씨가 가족을 대동하고 모였다고 한다. 동생네 가족은 가까운 상주에서, 여동생네 가족은 멀리 서울에서 내려왔다. 명절이 아닌데도 가족들이 함께 다니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용궁역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온 가족이 와서 기념 촬영을 하기에 참 좋은 곳이다. 그런데 모두 열 명이 모였다는데, 남자 어르신 세 분이 사라지고 없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 어르신들이 소리 없이 사라지는 모습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용궁시장 ⓒ정형민 장날이면 어깨를 부대끼고 다닐 정도로 북적였던 용궁시장 ⓒ정형민 # 호시절의 용궁을 기억하는 시장제유소 용궁역을 구경한 후 향수를 자극하는 거리를 지나 용궁시장으로 이동한다. 걸어서 5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다. 구한말까지만 하더라도 '용궁현(당시 용궁군)'은 지금의 용궁면뿐만 아니라 풍양면, 지보면, 개포면, 그리고 의성군 신평면과 문경시 영순면을 포함할 정도로 큰 고을이었다. 하지만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예천군에 편입되면서, 구읍면과 신읍면 지역만 용궁면에 속하게 되었다. 197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용궁 장날에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한다. 우시장도 아주 유명했는데 안동, 상주, 영주, 문경에서 소와 상인들이 몰려들었다. 기차도 타고, 버스도 타고, 나룻배도 타고 용궁시장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옛날에는 용궁 우시장에서 소를 사서 한양까지도 몰고 갔다고 한다. 지금은 없어졌지만, 그 시절에는 극장도 있었다. 이곳 어른들께 용궁 장날에 대한 기억을 물어보면 대답이 한결같다. 시장제유소 ⓒ정형민 ""너무 사람들이 많아서 어깨를 부대끼지 않고는 다닐 수가 없었지."" ""서울의 만원 지하철 타봤나? 그 모습이랑 똑같았다니까."" 하지만 지금 옛 용궁시장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다. 옛날에는 평소에도 사람들이 많이 찾았지만, 이제 오일장이 서도 손님보다 물건 파는 상인들이 더 많다고 한다. 그나마 용궁시장의 옛 모습이 조금 남아 있는 곳이 '시장제유소'다. 용궁 시장 안에 자리 잡은 '시장제유소'는 단골식당과 함께 방송을 통해 유명세를 가장 많이 치른 곳이다. 40년 전통을 자랑하는 곳으로 알려졌지만 사실 그 역사는 훨씬 더 길다. 참기름집을 지켜온 임숙자 사장님의 증언에 따르면, 1980년에 가게를 인수했다고 한다. 그때 참기름집을 하시던 분이 할머니였다고 하니, 이 참기름집의 역사는 40년에 몇 십 년을 족히 더해야 하리라. 대를 이어가고 있는 시장제유소 ⓒ정형민 사장님은 참 마음씨 좋아 보이는 인상으로, 낯선 이방인을 다정하게 맞아주었다. 방송에 많이 출연한 탓도 있겠지만, 원래 천성이 그러해 보였다. 조심스레 나이를 여쭈어보니 50년생이라고 하여 많이 놀랐다. 진짜 동안인데, 방송에 출연했던 사진을 보니 연예인처럼 모습이 자연스럽다. 그런데 산골 출신이란다. 혼례 후 용궁시댁에서 젊은 날의 임숙자 사장 23살 때 인접한 문경의 산골짜기 제일 높은 동네에서 용궁으로 시집을 왔다. 그렇게 세 살 위의 남편(이영형)을 만나 2남 1녀를 낳고 지금까지 참기름집을 하고 있다. 2009년에 가게가 '1박2일'에 나오면서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됐지만, 여전히 손님이 끊이지 않는 이유는 전통적인 방식을 고수해서 기름이 훨씬 고소하기 때문이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기름 짜는 값으로 3되에 5천 원을 받고 있다. 한때 남편이 술을 많이 마셔서 근심이 컸지만, 지금은 제유소 일을 돕고 있는 막내아들(이성일 씨)이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주변에 좋은 아가씨 좀 소개해 주시구려!"" 1960년대 용궁 들녘 # 가업으로 대를 잇다. 성일 씨는 6년 전 서울에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제유소 일을 돕기 위해서 내려왔다. 이제 성일 씨가 '시장제유소'의 대표직을 수행하고 있고, 사회복지학을 공부해서인지 지역을 위해 좋은 일도 많이 한다. 필자가 제유소를 찾은 날, 멀리 서울과 수원에서도 기름을 짜러 왔다. 방송 덕분에 세간에 알려져서 장사가 더 잘 되겠다고 하니,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방송에 나가서 멀리서 주문도 오고 장사가 잘되기는 해도 그래도 옛날이 좋았어. 그때는 영주에서도 사람들이 완행기차를 타고 왔지. 기차표가 오백 원이었어. 손님이 많아서 밤새며 기름을 짰지. 그때는 시장이 번성해서 참 좋았는데, 지금은 시장이 죽어 버려서 너무 안타까워."" 그래도 태풍이며 홍수도 없는 용궁이 좋은 동네라고 말한다. ""농사가 잘되잖아. 그럼 됐지 뭐, 옛날보담 살기도 좋아졌고."" 그러면서 또 역시 우리 어머니들은 나이가 들어도 자식 걱정뿐인지 ""근데 그렇게 방송에 출연을 많이 했는데, 중매 서는 전화 한 통이 없네."" 용궁극장 간판을 그리던 아저씨가 '시장제유소' 간판 글씨를 써주었다고 한다. 극장이 없어지고 그 자리에 교회가 들어선 지도 세월이 꽤 지났다고 하니, 이곳 간판이 용궁극장과 연결돼있는 유일한 유산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시장제유소'는 성일 씨가 가업을 잇고 있으니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시 오일장에 사람들이 몰려들고, 시장에 계시는 모든 분이 즐겁게 장사를 하시는 날이 오기를! 용궁시장의 산 역사, 문화당 ⓒ정형민 # 역사 속으로 곧 사라질 문구점 '문화당' 용궁시장 입구 쪽에 오래된 간판 하나가 눈에 띈다. 필자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코흘리개 시절, 학교 앞에 있던 문구점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채 세월을 거스르고 서 있다. 가만히 가게를 들여다보니,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노총각 정원(한석규)이 아버지(신구)로부터 물려받은 초원사진관이 오버랩 된다. 하지만 문화당에는 아흔이 넘은 어르신만 계신다. 서종교 옹의 지난 세월 얘기를 들어 보았다. 어르신은 상주 출신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하신 후, 고향인 함창면에서 면 서기로 공무원 생활을 하다가 그만두고 옆 동네인 문경 점촌으로 이주했다. 그때가 30대 초반 무렵인데, 그곳에서 서점을 운영하던 친구 분의 권유로 용궁에서 서점을 열게 되었다고 한다. 용궁으로 건너와서 바로 가게를 여셨으니, 그 세월이 50년을 훌쩍 넘었다. 용궁에서 가게를 하다가 할머니를 만났는데 결혼식도 올리지 못했다고 한다. 50년 세월을 함께 살다가 5년 전 할머니께서 먼저 세상을 떠났다. 어르신은 돋보기가 없어도 책을 읽으실 만큼 시력은 좋지만, 귀는 많이 안 들린다 한다. 보청기가 있지만 불편한지 사용하지 않아서, 대화를 위해서는 계속 소리를 질러야만 했다. 4~50년 전에는 물건을 하러 자주 서울이나 대구를 왕래했는데, 대구로 갈 때는 강변까지 가서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너 차를 탔다고 한다. 문화당 서종교 사장님 ⓒ정형민 안타깝게도 60년 가까이 용궁을 지켜온 문화당이 사라질 날도 멀지 않았다. 연로하신 데다가 손님들 발길이 끊어진 지 오래여서 곧 가게 문을 닫을 예정이다. 어르신은 오랜 세월 서예를 해오셨는데, 국내는 물론이고 대만에서도 전시회를 열었다. 필자가 방문한 날에도 며칠 뒤 문경에서 열리는 전국 백일장 대회에 참석할까 고민 중이었다. 어르신의 앨범을 구경하는데, 그 흔한 젊은 시절 사진이 하나도 없다. 어르신 연배의 세대가 그렇듯, 일제 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치는 격동의 세월은 사진 한 장 찍기도 녹록치 않았으리라. 결혼식도 올리지 못했던 할아버지는 자녀들이 성장한 후에야 제주도로 뒤늦은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2007년 만파루에서 삼일절 기념식 축사를 하는 모습 뒤늦게 간 제주도 신혼여행. 왼쪽에서 두 번째 제주도 신혼여행 때. 50년 세월을 함께 살다 5년 전 세상을 떠난 아내 #동학세대 어르신이 남긴 말씀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시게""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가 어르신께 바라시는 일이 있는지 여쭸다. 그런데 되려 내게 한 말씀 툭 던지길, ""젊은이, 젊을 때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시게."" 어머니가 내게 해주는 말씀이랑 똑같다. ""아들아, 세월 잠깐이다.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아라."" 평소 어머니가 말씀하실 때는 깊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어르신이 같은 말씀을 하시니 두 분 세대의 힘겨웠던 삶이 투영된다. 겪어보지 못했던 그 무게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그렇다. 우리네 부모님들은 폐허가 된 이 강토에서 자식들 뒷바라지하느라, 온몸을 내던져야 했다. 당신들께서 하고 싶은 것 다 참으며 온 삶을 희생하셨다. 그렇게 젊고 고왔던 청년과 아가씨는 할아버지가 되고, 할머니가 되어 버렸다. 결국, 우리에게 던지는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사시게.""는 당신들의 흘러가 버린 세월에 대한 회한이오, 동시에 헌신적인 삶에 대한 당당한 고백인 셈이다. 1989년 대만의 서예국제교류전에서. 가운데가 서종교 옹 서예 이야기를 이어가던 어르신이 문득 질문을 던진다. ""동학 알지? 최수운 어른, 최시형 어른, 들어봤지?"" 어르신은 오랫동안 동학 활동을 하셨다고 한다. 고향인 상주의 동학 교당이 1924년에 설립되었으니, 동학의 성장과 쇠락을 지켜보았다. 평생을 함께했던 가까운 친구들도 모두 동학에 몸담았다고 한다. ""이제 아무도 없어. 선배들도, 친구들도 아무도 안 남았어. 이제 나뿐이라네."" 예천군 용궁면 읍내에 가면 ‘문화당’이 있다. 곧 사라질 운명에 처한 문화당 문구점을 살릴 수는 없을까? 아니, 문을 닫기 전까지 가게에 남아 있는 문구품이라도 다 팔 수 있으면 좋겠다. 어르신, 건강하십시오! 카페용궁의 최대한 사장 ⓒ정형민 카페용궁 정원 ⓒ정형민 # 토박이가 가꾸는 소박한 '동네 박물관' 다시 큰길로 나와 조금 걷다 보니 '카페 용궁'이라는 간판의 글씨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커피 한 잔도 생각나고, 가게 앞 원목에 쓰인 '동네 박물관, 잿마당'이라는 문구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들어서니 중후한 신사분이 가게를 지키고 있다. 길에서 보는 것과 달리, 가게는 정말 컸다. 뒤쪽으로 예쁜 마당과 함께 대문이 따로 있다. 가게는 두 칸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한 칸에 장식돼 있는 옛날 사진과 옛 지도가 용궁의 역사를 한눈에 보여준다. 소담한 마당에는 예쁜 꽃이 피어 있고, 한쪽으로는 민속품들이 자리 잡고 있다. 눈길을 사로잡았던 '카페 용궁' 글씨는 문화당 어르신께서 써주셨다고 한다. 1970년 무렵 용궁면 철길에서. 학창시절의 최대한 사장(가운데) 회룡포가 내려다보이는 비룡산에서 용궁에서 태어나고 자란 최대한 사장님은 용궁농협에서 35년을 재직한 후 정년퇴직했다. 갑자기 집에만 있으니 답답하고 무료해서, 사모님과 함께 카페를 열었다. 카페를 열기까지 우여곡절도 많았는데, 주변에서 모두 반대했다고. ""이 시골 마을에 카페를 열면 찾아오는 손님이 있겠느냐고 모두 미쳤다고 했죠."" 1978년 용궁면 농협 저축장려 캠페인 농약방이 있던 건물을 새로 단장해서 카페를 열었다. 설계에서부터 인테리어 소품까지 직접 했는데, 그 모습이 용궁 읍내와 잘 어울린다. 처음에는 사모님만 바리스타 자격증이 있었는데, 곧 사장님도 바리스타 자격증을 땄다고 한다. 도시적인 디자인에 이름도 멋지게 지을 법도 한데 사장님은 용궁에 그저 좋은 카페 하나 열어서, 주민들과 여행객들에게 맛있는 커피 한 잔 대접하고 용궁의 역사를 알려주고 싶으셨나 보다. 그래서 가게 이름조차 '카페 용궁'으로 족했으리라. 그는 읍내에 있는 만파루나 용궁현청 건물이 제대로 관리되지 못해 안타까워했는데, 덩그러니 건물만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용궁의 역사를 소개하는 작은 전시관이라도 마련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동아당약국 ⓒ정형민 # 용궁의 감초, 동아당약국 카페에서 나와 '동아당약국'을 찾았다. 문화당과 함께 용궁 읍내에서 아주 오래된 곳이다. 옛날에는 다 그랬듯이 처음에는 '동아당약방'으로 문을 열었다. 마을 분들의 얘기에 따르면, 읍내에서 최고령에 속하는 강대진 어르신(94세)께서 시작하셨는데 지금은 요양 중이라고 한다. 그럼 누가 약국을 지키고 있을까? 약국에 들어서니 중년의 여성분이 흰 가운을 입고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강대진 어르신 얘기를 꺼내니, 시아버지라고 한다. 용궁면에서 시장제유소나 월오정미소와 같이 2대에 걸쳐 가업을 이어받는 곳처럼 이곳은 며느리가 약국을 지키고 있었다. ""첫 딸 임신했을 때 용궁에 왔으니까, 제가 약국을 한 것만 해도 30년이 넘었어요."" 시부모님이 했던 세월까지 합치면 50년은 훨씬 넘었다는 얘기다. ""제가 처음 여기 왔을 때 약방에 뒤주처럼 생긴 금고가 있었어요. 장날에는 손님이 너무 많아서 시어머님이 중간중간 돈을 꾹꾹 눌러주곤 하셨어요. 그만큼 용궁에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때는 바로 옆에 버스 정류장이 있어서 사람들도 많이 지나다녔죠."" 대구에서 10대와 20대 시절을 보냈으니, 어쩌면 김손희 약사는 용궁 읍내의 지난 3~40년 세월을 객관적으로 지켜보았던 산증인이라는 생각이 든다. 시아버지의 약방을 물려받아 대를 잇고 있는 며느리 김손희 약사 ⓒ정형민 ""진짜 시골이 되어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요. 그런 거 있잖아요. 마을의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 같은…. 아기들 약이 거의 나가지 않아요. 그만큼 젊은 사람들이 없다는 뜻이에요."" 그는 가끔 용궁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문화생활을 제대로 할 수 없는 게 제일 답답하다고. 그래서 컴퓨터를 켜놓고, 손님이 없을 때는 유튜브 영상을 보거나 음악을 들으면서 답답함을 해소한다. ""우리 나이가 되면 어디로 떠나기도 쉽지 않아요. 막상 서울에 가도 사람 살 곳이 아닌 것 같고… 그냥 이렇게 적응을 하며 살아요. 세월이 더 지나면 그래도 지금이 좋았던 시절이 아닐까 상상하면, 그게 참 두려워요."" 김손희 약사의 마지막 말이 용궁이 처한 상황을 단적으로 대변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용궁뿐만 아니라 한국의 모든 시골 마을이 똑같은 현실을 마주하고 있다. 조금 무거운 마음을 안고 백 년이 넘었다는 용궁초등학교로 향한다. 100년 넘은 역사를 간직한 용궁초등학교 ⓒ정형민 # 용궁의 긴 역사, 용궁초등학교 용궁초등학교는 용궁면사무소 옆에 자리 잡고 있는데, 제일 먼저 '개교 100주년 기념'이라고 적힌 큰 기념비가 눈에 들어온다. 1912년에 용궁공립보통학교로 개교했으니, 107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개교 당시 교장은 일본인이었고, 일제강점기 동안 일본인 학생들이 함께 공부했다. 1954년 졸업앨범 속 학교 전경(제공: 용궁초등학교) 단기 4289년(1956년) 졸업앨범 표지(제공: 용궁초등학교) ""용궁공립보통학교 시절에는 조선인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이 함께 학교를 다녔다. 하지만 조선인 학생들은 지금의 중학교 자리에서 공부를 하고, 일본인 학생들은 지금의 초등학교 자리에서 공부를 했다.""(용궁초등백년사) ""예천과 점촌 사이에 위치한 용궁은 학생들이 집중되는 교육 중심지였다. 개포, 유천, 지보, 풍양, 산양, 영순, 산북 등지의 많은 학생들이 용궁공립보통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꿈을 키웠다.""(용궁초등백년사) 독립지사 장진우 기념비 ⓒ정형민 용궁공립보통학교는 용궁의 독립운동사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용궁 지역의 3.1운동은 용궁공립보통학교를 빼고는 논할 수가 없다. 기미년 3.1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퍼져나갈 때, 용궁의 독립운동가들과 용궁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은 4월 12일에 용궁 장터에서 만세운동을 벌이기로 계획했다. 하지만 거사가 있기 전날 주동자들이 체포되면서 수포로 돌아갔고, 대부분 징역이나 태형을 선고받아 큰 고초를 겪었다. 용궁초등학교의 솔밭에 자리 잡은 독립지사 장진우 선생의 기념비를 돌아본 후 마지막 목적지로 발길을 돌린다. 길에서 우연히 만난 이희상 어르신 ⓒ정형민 # 면사무소 앞에서 만난 백발의 선비 학교에서 나와 만파루로 가려는데, 면사무소 앞에 범상치 않아 보이는 어르신이 보인다. 백발의 수염을 늘어트린 이희상 어르신은 여주이씨 매원공파 종손으로 풍양면에 있는 선산을 지키며 살고 계신다고 한다. 올해 일흔두 살인 어르신은 한학에 조예가 깊으신데, 필자를 보자마자 유학의 중심이 되는 '보본반시(報本反始)' 정신을 강조하셨다. ""자네는 우리 정신문화의 핵심이 뭐라고 생각하나? 보본반시라네. 내가 이 땅에 태어난 것은 국가와 조상의 은혜로 비롯된 것이니, 내가 이 땅에 있게 된 것을 감사하게 여기며 은혜를 갚는 백성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 어르신의 입에서 안동과 예천 출신 유학자들의 이름이 줄줄이 등장한다. 서애 유성룡, 학봉 김성일, 서산 김흥락… 어르신은 세 살 때부터 할머니 슬하에서 성장하셨는데, 할머니의 부친이 독립지사인 이규홍(1851~1918) 선생이라고 한다. 이규홍 선생은 김상태 의병장, 석주 이상룡 선생과 함께 경북북부지역의 의병 활동에 동참했고, 이상룡 선생이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전개할 때에는 군자금까지 대었던 용궁 출신의 독립운동가다. 어르신의 말씀은 유학과 일제강점기를 거쳐 어린 시절 이야기로 이어졌다. ""옛날에는 연필 한 자루를 구하려면 계란 한 꾸러미를 들고 가서 바꾸었네."" 어려웠지만 참 정이 많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는 밥을 굶으면 이웃집에서 걱정하니까, 끼니를 거르지 않는 척 일부러 불을 때서 굴뚝에 연기를 피웠지. 그때는 이웃과 함께 밥도 나눠 먹고 친구들과 도시락도 같이 먹곤 했었지."" 어르신은 마지막으로 '충즉진명(忠則盡命)'이라는 가르침을 가슴에 새겨주었다. ""효도는 마땅히 있는 힘을 다해야 하고, 나라에 충성할 때에는 목숨을 바쳐야 한다는 뜻이네."" 말씀을 듣는 내내 얼굴에서 열이 났다. 지방에 살면서도 지역의 역사에 대해 무지한 것도 부끄럽고, 꽃다운 나이에 독립 만세를 부르다 온갖 고초를 겪었던 선조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먹먹하고, 어머니를 생각하니 불효자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면사무소 앞 정자에 앉아 잠시 과거로 여행을 하고 온 느낌이 든다. 면사무소에 볼일을 보러 들어가시는 어르신을 한참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나 서둘러 만파루로 향한다. 만파루. 용궁면을 내려다보는 언덕 위에 있다 ⓒ정형민 만파루 ⓒ정형민 독립운동기념비 ⓒ정형민 # 황목근이 지키고 선 용궁 만파루는 원래 구읍이 자리했던 향석리에 있었는데, 조선 중기에 대홍수로 향석리가 물에 잠긴 후 용궁현 관아와 함께 지금의 자리로 옮겨 세웠다. 하지만 1945년에 낡아서 무너졌는데, 1987년 용궁면 주민들이 고장의 정신적 뿌리를 되찾자는 뜻으로 힘을 모아 복원하였고, 지역 출신의 독립운동가들과 3.1운동을 기리는 독립운동기념비를 함께 세웠다. 독립운동기념비 앞에서 묵념을 올리고, 누각 앞에 서니 용궁 읍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기미년 그날의 하늘은 어땠을까? 오늘처럼 푸르른 하늘이 조국 강토를 지켜보지 않았을까? 용궁향교 ⓒ정형민 황목근 가는 길 ⓒ정형민 황목근 ⓒ정형민 황목근에서 바라본 들녘 ⓒ정형민 용궁이 고향은 아니지만, 며칠 용궁을 둘러보는 사이 정이 많이 들었나 보다. 마치 40년 전 내 고향 의령읍내로 돌아가 명절에 거리를 돌며 마을 어른들께 인사를 드린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래서 그런지 아직 동네를 한참 더 돌아다니고 싶다. 계절이 바뀌면 꼭 다시 오고 싶다. 문화당 어르신의 허약하지만 부드러운 손을 붙잡고 인사부터 올리고, 읍내와 시장을 휘 돌아보고, 뜨끈한 국밥도 한 그릇 훌 말아먹고, 따듯한 커피도 마시고, 터줏대감 황목근 아래서 바람 소리도 듣고, 만파루에 올라 푸르른 하늘도 마주하고 싶다. 그때는 문이 잠겨 밖에서만 바라보았던 용궁향교도 제대로 둘러볼 수 있으면 좋겠다. (글/정형민 makalu21@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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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마을 이야기] 번성했던 옛 고을 '용궁현'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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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 ""아무것이 할배 장개 잘 들었다."" 예천군 호명면 박호녀 할매 이야기
- 호명면 밀양박씨 박호녀 할매의 파란만장한 삶 사람들은 말한다. 지나가는 노인 아무나 붙잡고 물어봐도 소설책 몇 권 분량의 이야기가 나온다고. 격동의 시대를 살아온 세대이니 그럴 법하다. 동시대를 관통한 사람들 가운데서도 치열하게 세상과 맞짱 뜬 여장부를 만났다. 스무 살에 아이 업고 보따리 장사 시작해서 입으로 말할 수 있는 장사는 다 해봤다는 박호녀 할머니다. 장사도 이문만 남기지 말고 베푸는 장사를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굽이마다 지나온 발자국이 우리 근대사와 많이 겹친다. 박호녀 할머니 ⓒ서미숙 호명면 밀양박씨 여식이라 박호녀 박호녀 할머니는 1932년 경북 예천군 호명면 오천리에서 태어났다. 일곱 살 때 일본 오카야마로 건너갔다. 아버지(박돌이)가 탄광에 광부로 일하러 갔기 때문이다. 엄마와 삼남매(오빠, 여동생)가 함께 갔다가 해방되던 해 돌아왔다. 막내 동생은 한국에 와서 태어났는데 여동생과 13년 터울이다. 일본에 머무는 6년간 내내 전쟁을 겪었다. 당시 일본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에 열을 올리며 식민지 야욕을 불태울 때가 아니던가. ""딴 거는 기억 안 나고 피란 댕긴 거만 기억나. 산속으로 갔어. 오까야마겐 구메군 요시오까무라, 거도 촌이래. 그때는 따라다니는 거라고 다니고 아무것도 몰랐어. 비행기 소리가 나면 산으로 올라가고 해제 사이렌 불면 내려오고, 우리 있는 데는 폭탄은 한 번도 안 던졌어. 집은 나가야 사택이라고 기다랗게 생겼어. 화장실도 있고 방이 세 개였지. 탄광에 일하러 오는 사람들 살라고 지은 모양이래. 아버지는 아침 8시에 나가고 오후 다섯 시 반이면 돌아왔어. 땀났을 땐 매란 없고 집에 오마 목욕 가야지. 만날 너무 힘들게 사께네, 미안타 불쌍타 공부 열심히 해야 성공한다 그랬어. 엄마도 식당에서 일했고."" 일본 가서 6개월 정도 있다가 요시오까 소학교에 입학했다. 2학년 때 속이 안 좋아서 몸이 퉁퉁 부었다. 보는 사람마다 죽는다고 했을 정도다. 1년 3개월 정도 학교를 쉬었다. ""엄마가 함바집에 가서 오래비 생일이라 소고기를 구워 먹었는데 그 길로 아가 아픈 것 같다고 얘기를 했어. 배를 사다가 숟가락으로 긁어 주라 해서 두세 숟가락 먹었는데 조금 있으니 숨이 탁 터지는 것 같애. 그걸 먹고 잠이 들었어. 그래서 살아났어."" 공부가 그렇게 하기 싫었다고 한다. ""숙제 해오라 하면 글자 크다끔하게 써서 장수만 채운 게 생각나. 4학년 다니다가 해방되어 돌아왔지."" 박호녀 할머니 가족이 살았던 일본 오카야마(출처:구글 지도) 내 좋으마 다 좋아 ""일본 친구들과도 잘 어울렸어. 처음엔 말이 잘 안 통해 조센징이라 놀리기도 했는데 일 년쯤 지나니까 괜찮았어. 내 좋으마 다 좋아."" 한 반에 마흔네 명 중 한국 아이가 네 명이었다. 친구 중에 안동에서 온 친구와 풍산에서 온 친구가 있었다. 동갑인 친구 한 명은 이름도 기억한다. ""마쓰모도 세끼순이라고. 그 친구를 나중에 어쩌다 딱 한 번 만났어. 마흔 가까이 되었을 때지 아마. 우리보다 더 늦게 일본으로 갔던 친구인데. 예천 포목점에 옷감 끊으러 갔는데 암만 봐도 보던 사람 겉은데 싶어 물으께네 맞다 그래. 깜짝 놀랬지 뭐. 그때만 해도 20년 넘어 만났으니까. 이야기하는 음성 듣고 알았어."" 해방되어 서둘러 귀국하느라 그랬을까? 아니면 당초에 노동을 착취하려는 음모가 있었던 걸까? 아버지가 탄광에서 일하고 받은 월급을 저금해놓고 찾지도 못하고 왔다니. 귀국 후에도 고단한 삶은 계속된다. ""고향에서 못 살아 서울 답십리 가서 사는데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아야 했어. 아부지는 톱 미고 댕기며 나무 썰어야 되고, 오빠는 연탄공장에 댕기고, 나는 열네 살부터 성냥공장에 댕겼어. 성냥공장에 1년 반, 그다음에는 양말 짜고 수건 짜는 공장에 가서 2년 반 동안 숱한 고생을 했어. 엄마는 양말 짜 놨는 거 집에 가져와서 시야게(꿰매기)하고, 장갑 목 따는 부업해서 돈 벌고."" 동생은 어려서 아무것도 모르고 온 가족이 일을 했다. ""답답하니까 공장에 갔다 와서 천자책을 한 번씩 들따보곤 했어. 일본에서 한자를 배웠기 때문에 한글도 천자책 놓고 그 밑에 가나 있어서 나 혼자 배웠어. 지금도 쌍받침은 어려워. 학교에서 배운 거 써먹는 거는 구구단배께 없어. 구구단은 지금도 외우는데. 내 이름자만 아는 거야."" 고된 서울살이에서 전쟁의 소용돌이로 서울 시절에 대한청년단 활동도 했다. 대한청년단은 우익 청년 단체였다. 8.15 광복 후 조직적인 지지기반이 필요한 이승만 대통령이 1948년 12월 19일에 만들었다. 문화운동, 사상 계몽을 표방했지만 이승만을 지원하는 정치활동에 치우쳤다. 전국 조직으로 단원이 200만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열여덟 살이었는데 입단하고 4개월 만에 단장을 시켰어. 나보다 나이 많은 사람들도 있었는데. 1반에서 5반까지 70명이 한 조였어. 동장이 젊은 사람들 모집해서 아침저녁으로 한 시간씩 가르치고 배우고 그랬지. 열다섯 이상부터 서른다섯까지 의무적으로 가야 했거든. 아침에 모이면 운동장 한 바퀴씩 돌고 노래 부르고. 뭔 날 되면 차 타고 시가행진하고. ‘물리치자 공산당, 깨트리자 3·8선, 대한민국 만세’ 구호도 외치고."" 할머니는 아직도 대한청년단에서 불렀던 노래를 기억한다. 3절까지 있어 가사가 앞뒤로 살짝 꼬이기는 했지만 한창 때 불렀던 그 노래를 차분하게 다시 불렀다. 양양한 앞길을 바라볼 때에혈관에 파도치는 애국의 깃발높고 넓은 사나이 마음생사도 다 버리고 공명도 없다들어라 우리들의 힘찬 맥박은가슴에 울리는 독립의 소리 서울살이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열여덟에 6.25를 만나 칠월에 인민군 뒤따라 내려왔다. ""서울서 호명 오는 데 20일이 걸렸어. 구십 난 조모를 데리고 아버지, 엄마, 우리 삼 남매까지 여섯 식구가 같이 왔어. 원주로 해서 문막으로 제천, 단양으로 걸어왔어. 한 동네서 이틀 밤만 자면 인민군들이 오빠와 나를 붙들러 와. 숨어숨어 오느라고 도망을 다녔어. 산에 나무가 없어 빨갛고 작은 파닥 솔뿐이래. 노루가 지나가도 보이고 개가 지나가도 보이고. 그래도 낮으로 걸어야 해. 밤에는 안 보이니까."" 처음에 피란 올 때는 많은 사람이 한꺼번에 움직였다고 한다. ""나중에는 자기 고향 찾아가느라 뿔뿔이 흩어졌어. 산중에 들어가 외딴집 마당에서 자기도 하고. 먹는 거는 그 집에서 감자 삶아주면 먹고, 보리밥이라도 해가 주면 먹고, 강원도 땅이라서 옥수수도 삶아주면 얻어먹고 그랬지. 빈주먹으로 내려와서 주는 대로만 먹었어."" 시어머니와 남편 신사출 청송 주왕산에서 남편과 친척들. 아래 우측이 박호녀(사진제공: 박호녀) 상이군인이 뭔지도 모르고 고향 호명에 정착해 살다가 중매로 결혼했다. 스무 살 각시와 스물일곱 신랑이었다. ""남의 집 사는 거 보고 내 입 하나 던다고 갔는데, 신랑은 좋은 사람 만났는데 생쥐 볼 같은 것도 없어. 쌀 한 도배기도 없어. 없는 걸사 금방 결혼하고 군에 가버려 가주고, 1월에 결혼하고 11월에 군에 갔어. 지금도 그 생각만 해도 벌벌 떨리."" 신랑은 군대 생활 8개월 만에 부상을 당해 제대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때는 상이군인이 뭔지도 모르고 신청할 줄도 모르고, 육군본부가 어딘지 면에 가서 물으이 아무도 모른다 하고. 칠십이 넘어 우리 막내딸하고 육군본부를 찾아갔어. 사람 옷을 벗겨놓고 보이께네 매란 없거든. 그때사 신청해가지고 6개월 연금 타 먹고 돌아가셨어. 오토바이 타고 들에 가는데 뒤에서 차가 와가주 밀어버렸어. 맨날 둘이 댕겼는데 그날따라 콩 타작 한다고 내가 안갔디만 ……."" 그렇게 황망하게 영감님을 보냈다. ""병원에 물리치료 하러 가서 누웠는데 어떤 할머니가 ‘잘못하면 칠팔월에 가면 그믐께 아야 그고 죽을 수도 있다’ 그는 걸 귀 밖으로 들었지. 돈 20만원 주면 막음을 해주껜데 그드라고. 속으로 이 할마이야 죽는 걸 어예 아노, 했는데 칠월 넘기고 팔월 초나흘에 죽었어. 내가 육십 아홉이었으니까 영감은 칠십 여섯이었지. 난도 죽는다 소리 들어서 영감 먼 옷 해놓고, 내 해 해가주 틀바늘에서 실도 안 끊었는데 가버렸어. 삼베 끊어가주고 내 손으로 할 때 해놓는다고 했던 게……."" 오천 개고개재에서 수양이모 딸과 함께. 곱게 한복을 입은 박호녀(사진 : 박호녀 할머니 며느리 김경순) 30대 초반 호명 오천마을 골목에서. 뒷줄 맨 왼쪽이 박호녀(사진제공: 박호녀 며느리 김경순) ""우리 친정 할머니가 아들도 딸도 없이 아버지 하나밖에 없었거든. 손자 손녀들도 불면 날세라 쥐면 꺼질세라 귀하게 키웠는데 고생시키면 안 된다고 그래서 참말로 소리 한 번 안 질렀어. 어쩌다 내가 화를 내면 나가버렸어."" 할머니 댁 기둥에는 국가유공자유족댁이란 명패가 붙어있다. 그때가 2001년이다. 몇 년 전만해도 보훈회관 미망인들 모임에 출근 잘하고 모범이 된다고 표창패를 받았다. 이제는 거동이 불편해 모임에도 탈퇴했다. 국가유공자 명패 ⓒ서미숙 국가유공자유족 표창패 ⓒ서미숙 슬하에 자녀는 육남매를 두었다. 딸 둘 아들 넷이다. ""셋째 아들은 차 사고로 먼 데 가버렸고, 아들 하나는 농사짓고, 둘째는 객지로 댕기고, 서울 어데 가 있다는데. 막내아들은 장개도 안가고 혼자 댕게. 나이가 하마 오십 일곱인데. 맏딸은 대구 있고 막내이는 안동 있어. 막내 딸은 지가 잘해서 대학을 나왔고 다른 아들은 모두 중학교 댕겼어. 아이들은 말썽 안 부리고 잘 컸어. 남의 것 욕심내지 말고 올바르게 살아라, 싸워도 이길라 하지 말고 한 찰 맞아라, 했지. 그래가 우리 아-들은 싸울 줄도 몰래."" 2009년 모범 국가유공자유족으로 예천군수 표창패를 받았다.(사진제공: 박호녀) 보따리 장사부터 안 해본 장사가 없어 사는 게 너무 힘들어 세월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른다고 한다. 스무 살에 젖먹이 업고 보따리 장사 시작해서 서른두 살까지 인근 마을마다 가가 방문했다. ""예천시장에 가서 풍기인견도 떼오고, 아들 난닝구 같은 거 가지고 댕기고, 과자도 가지고 댕기고. 죽으나 사나 머리에 이고 다니느라 무르팍을 못 써서 몇 년 전에 기어이 수술을 했다. 학용품 장사, 호떡 장사, 풀빵 장사, 우동 장사, 중화요리, 국밥집까지 …."" 입으로 '뭔 장사' 말할 수 있는 장사는 거의 다 해봤다 한다. 24살 때 질부가 여경이어서 호명장날 지서 앞에서 만나 찍은 사진이다. 아기를 안고 있는 이가 박호녀. 마을 부인회에서 선몽대 나들이. 뒷줄 맨 오른쪽이 박호녀(사진제공: 박호녀 며느리 김경순) ""보따리 장사할 때 제일 멀리 간 곳이 풍북 괴정이래. 맏딸 업고 보따리 이고 어느 집에 갔는데 점심을 먹고 있었어. 주인 할머니가 ‘새댁이가 아까지 업고 장사하러 왔네. 요즘은 신랑이 군에 가면 다 죽는데 시집가라’며 보따리를 뺏어부래. 마을에 사람도 좋고, 거 가면 배도 안 곯는다고, 어른들 마음씨도 너그러운 집 있는데 권해 주께 그래. 하도 분해서 조밥 주는 거 먹지도 않고 보따리 뺏어가 돌아왔어. 무서워서 벌벌 떨리고 대문을 어떻게 넘고 왔는지도 몰래. 내가 적었기(겪었기) 때문에 다리한테는 마음 아픈 소리 생전 안 해. 지금도 근처에 가면 생각나고 평생 안 잊어 부래."" 닭계장을 주로 했던 호명우체국 옆 삼오식당. 예비군 훈련을 받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국수도 공짜로 삶아주던 정이 있었던 시절의 박호녀 이문만 남기지 말고 베푸는 장사를 해야지 호명면 우체국 옆 도로변에서 있던 집을 잇대어 삼오식당도 한참 운영했던 호녀 할머니. ""옛날엔 사람들이 점잖았어. '아지매 여 술 한 잔 부 주소' 그만 난 그냥 안 있어. 끝까지 거절하면 물러나지. 이 근방에 내 모르는 사람이 없어. 지금도 만나면 아지매 국수 삶아주는 거 먹어가 생전 안 잊어뿐다 그래. 예비군 훈련받으러 오마 배고프다 그만 국수 1관쓱 사다 삶아서 공짜로 멕이고 그랬거든. 내가 너무 고생했기 때문에."" 할머니는 장사도 이문만 남기지 말고 베푸는 장사를 해야 한다고 한다. 가게 할 때 하루 일당만큼만 벌면 문 닫아 버리고 집안일을 하거나 밭에 가서 농사를 했다. 제일생명 다니던 시절의 박호녀, 46세 생일을 사무실에서 함께 했다. 그뿐이 아니다. 마흔여섯에 보험회사에 들어가 십 이년을 다녔다. ""제일생명에 들어갔어. 인제는 회사 이름이 바뀌었어.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어떻게 했나 싶어. 한글도 잘 모르는데 이름 정도는 쓰고 계산은 빠르니까. 일 년 댕기고 안댕길라 카이 또 데릴러오고 해서 십 년이 넘었어."" 그 와중에도 고부간의 갈등이 있었던 모양이다. ""내 속 썩은 건 하늘이 알고 땅이 알지. 가장 속 썩은 건 시어머니한테 애문 소리 들었을 때였어. 돈 벌어서 만날 친정에 다 갖다준다고 그랬거든."" 그럴 때면 콩팥에 가서 풀을 뽑으며 스트레스를 해소했다. 할머니가 밖에서 일하는 동안 남편은 농사를 지었다. ""다리를 절면서 남의 밭 도지 얻어 서숙 농사지어 조밥도 못 먹고 죽 끓여 먹었어. 없는 살림에 식구 열하나가 먹고 살자니. 혼자 있는 시숙과 그 딸까지 거두었거든. 결혼하드메로 의용군 가서 다쳐 불구자 된 시숙을 평생 데리고 있었어. 6.25 때 인민군에 붙들려 갔다가 섬에서 의용군이 됐어. 못 걸어서 가매에 태워서 데리고 왔어. 겨우 걷기는 걷는데 일도 못해."" 시숙모는 그런 남편과 딸을 두고 가버렸다 한다. ""오두막집에 방 한 칸, 부엌 한 칸 그랬지 뭐. 장사해가주 계하고 해서 돈 좀 벌어가주 방 한 칸, 가게 한 칸 해서 우동 장사하고, 좀 더 벌어 가게 딸린 지금 사는 집을 마련했지. 보험회사 그만두고는 농사짓고 누에도 쳤어. 우리 대소가에서도 꼽힜어. 대단타고. 방동댁이 겉으이 없다고. 내가 데면데면이 살았으면 이래 못살아. 아무것이 할배 장개 잘 갔다 소리 마이 들었어. 얘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해."" 마을회관 가는 길 ⓒ서미숙 할머니 별명은 무던이 ""마을회관에서 내 별명이 있어, 무던이. 아무리 농담하고 욕하고 싫은 소리 나쁜 소리해도 안 탄해. 항상 웃고 살아. 노인회 사람이 45명인데 입이 전부 각각 지끼잖아. 그 말 다 들으려면 쓸개 있으면 못살아. 쓸개 없이 살아야지."" 할머니 덕분에 마을에 따로 사는 큰아들은 농토도 제법 되고 밥은 먹고 산다고 했다. 아침 식사는 집에서 하고 점심 저녁은 경로당에서 주로 드신다. 경로당에서 날마다 함께 식사하는 분이 셋이다. 집 앞 평상에는 늘 이웃 할머니들이 모인다. 맨 왼쪽이 박호녀 ⓒ서미숙 ""내가 고생해 벌었거나 말거나 아들이 넉넉하게 사니까 마음이 넉넉하잖애. 군에서 나온 쌀이 떨어질라그만 아들 시켜서 마을회관에 쌀 한 포 갖다 놓고, 미주 끓이라고 콩을 열닷 대 줘서 삼년 째 그 장 먹고, 고춧가루도 닷 근씩 빻아 놓고, 가을 되면 김치도 큰 통으로 한 통씩 해놓고, 다마네기도 만 원 주고 한 포 사니까 한 포 더 줘서 갖다 놓았고. 내 마음대로는 베푼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할머니가 해주오씬데 진짜 양반이래. 내가 노력해서 다리- 주는 거는 좋아 그고, 그런 거 봐 가주고 내가 그래."" 지난날 당신이 어렵게 살아서 할머니는 어려운 사람의 심정을 잘 헤아린다. 단짝인 최상연 할머니가 거들었다. ""치매(마)를 입었으이 여자지요. 남자래. 여군자래."" 박호녀 할머니 댁의 무화과 ⓒ서미숙 ""별 것 아닌 내 인생도 뭐 얘기가 되나부지? 무화과처럼 그저 열리면 좋지!"" ⓒ서미숙 무화과처럼 주렁주렁 열린 삶, 이 정도면 됐다 ""실제로 내가 많이 아파. 엉치도 아프고 앉았다 일어나면 쩔쩔매야 되고, 허리도 아파서 유모차 없으면 다니지도 못해. 기억력도 자꾸 떨어지고. 돌아서면 잊어버려. 아프다 그마 남이 알아줘요? 아프다 소리 안 해. 남 듣는데 자꾸 아프다 그마 듣기 싫에 그래. 헌디라도 나면 아픈 줄 알지. 남 보기는 말가니까 유식이네 할매는 아픈 데 없는데 뭐 그래."" 오로지 아이들 가르치고 배 안 골리기 위해서 열심히 살았다. 낫 놓고 기역자라도 가르치려고. ""지금은 아무 생각이 없어. 후회스러운 것도 없고 하고 싶은 거는 다했어. 가난하게 사이께네 남 주고 싶은 거 주고. 가고 싶은 곳도 없고, 먹고 싶은 것도 없고, 냄새도 못 맡은 지 오년 째래. 하고 싶은 것도 없고 아무 욕심이 없어. 이제 댕길 때 다 댕겼어. 내 발로 못 댕기면 다 댕긴 거야. 더 살았으면 싶은 생각도 없어. 이제 안 아프고 사다 죽는 거. 그래도 회관에 가보면 구십 넘은 할매도 아이고 저거 먹었으면 좋을 따, 저기 가고 싶다 그러는 사람도 있어."" 하도 힘들게 살아서 하나도 생각이 안 난다던 호녀 할머니. 말문이 열리자 조곤조곤 옛이야기가 꼬리를 물었다. 그래도 장사하며 아이들 키울 때가 좋았다고 한다. 그때는 당신 자유로 살았으니까. 절대빈곤에서 벗어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일했던 호녀 할머니야말로 우리 근대사의 묵묵한 영웅이 아닐까. 호녀 할머니 집 장독대 옆에 무화과나무가 무성하다. 20여 년 전 부산에 사는 딸이 아파서 다녀왔다. 그때 동래에서 한 줄기 얻어와 물에 담갔다가 심었는데 잘 살았다고 한다. 할머니의 삶도 그렇다. 비록 젊은 시절에 활짝 꽃피우지는 못했지만, 할머니 노력이 헛되지 않아 무화과처럼 주렁주렁 결실을 맺었다. 그 열매는 후손들이 거두게 될지언정. ""이찌지꾸가 일본 물견이래. 꽃 안 피고 바로 열매 달려. 여기는 생전 구경 못했는데 처음 봤어. 내가 가져와서 이 동네에 퍼뜨렸어. 이제 다 지꼈어. 이상 무.""(글/ 서미숙 doragise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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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 ""아무것이 할배 장개 잘 들었다."" 예천군 호명면 박호녀 할매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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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 와룡 농사꾼 구정회 땅이 해코지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며···
- 2019년 안동예천 근대기행은 생생한 르포취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다룬 <구술생애사>와 안동과 예천 두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사의 근간이 되는 '마을'을 테마로 한 <우리 마을 이야기>를 그려낼 예정입니다. 두 번째 <구술생애사>의 주인공은 와룡면 가구리 농부 구정회 씨입니다. 농민운동가로 활발한 활동을 해온 그의 삶 속에 가톨릭농민회의 역사가 담겨있습니다. 땅이 해코지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는 구정회 씨의 치열했던 시절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봅니다. -편집자 구정회 ⓒ신준영 함평 고구마 사건의 대표적인 기록 사진으로 1978년 4월 24일 시위 현장이다.아래 왼쪽에 앉은 사람이 구정회 씨며 당시 유행하던 재건복을 입고 있다. 바로 앞에 앉은 흰옷 차림이 서경원 씨다.(사진제공:한국가톨릭농민회) 현대 농민운동의 효시 '함평 고구마 사건' 기록 사진 속 인물, 구정회 1976년 고구마 수매를 둘러싼 전남 함평군 농민들의 피해보상 투쟁 활동인 일명 '함평 고구마 사건'은 현대 농민운동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지역 농민들의 단순한 피해보상 운동으로 시작된 이 투쟁은 가톨릭농민회 등의 참여와 각계 인사의 지지 및 기도회 등으로 전국적인 이슈가 됐다. 1978년 4월까지 진행되면서 1979년 안동지역에서 있었던 '오원춘 사건', 뒤이어 일어난 'YH 여공사건', 각종 대학시위와 부마사태로까지 영향을 끼쳐 우리나라 농민운동사는 물론 민주화 운동사에서도 기억될 중요한 사건으로 남았다. 해방 후 민이 관을 이긴 최초의 사건이었다는 점에서도 역사적 의의가 크다. 이 사건의 대표적인 기록 사진 중 한 장에 모습을 남긴 사람이 안동시 와룡면 가구리에 살고 있는 구정회 씨다. 당시 현장에서 투쟁을 벌인 구정회 씨를 만나 그 배경과 정황을 들어보았다. 평생을 고향에서 가톨릭 신자로, 땅을 일구는 농민으로 살며 농민 권익을 위한 활동과 민주화 운동도 함께 해온 그의 인생 여정을 구술 기록으로 남기고자 한다. 할머니 권분금 말가리다, 안동 천주교 세례대장 첫 장에 기록되다. 저는 본관은 능성이고 이 지방에 알려진 문단공(백담 구봉령) 14대손으로 1951년 9월 19일 여기 가구 2리 192번지에서 났어요. 6·25 때지요. 지금은 외딴집인데 그땐 서너 채가 더 있었어요. 모태신앙이고 1952년 김수환 추기경이 대구교구 안동본당 신부님으로 계실 때 유아 세례를 받았어요. 두 살 까지 여기 살다가 등 너머 이웃 동네로 갔어요. 거기가 촌에 인구가 많았기 때매 상당히 번잡했어요. 우리가 거기서 구멍가게를 했어요. 국민학교 2학년 때 쯤 다시 이리로 살러 왔는데 50년대 말 60년대 초라서 상당히 어려웠어요. 우리는 토지도 없었고 소작농이었고. 할아버지 대에 초창기 가톨릭 신자 분이 우리 할머니한테 오셨어요. 할머니(권분금 말가리다, 1889~1940) 기억으로는 청송 진보 쪽에서 오셨다는데 확실한 신분은 모르겠고 추측인데 가톨릭 박해 받은 후손이었던가 봐요. 그 분이 워낙 선비 집 출신이라 아는 게 많고, 어떤 연유로 선비 집으로 팔려가다시피 하다가 탈출한다는 것이 우리 집, 할아버지한테로 오게 됐어요. 아버지는 삼남 일녀 중 막내세요. 그때는 변변한 교육 기관도 없고 해서 우리 할머니가 손수 글도 가르치고 한문도 가르치고 하셨어요. 할아버지는 기술자였어요. 석수, 대정(대장간 일), 목수 세 가지를 하셨어요. 그때부터 가톨릭 집안이 됐어요. 없이 살다보니 부친은 일제강점기 때 가족들 데리고 궁여지책으로 만주로 가셨어요. 할머니는 만주에서 돌아가셨어요. 제적부를 보니까 만주국 빈강성 진가툰이라는 곳인데 사촌 누나가 거기서 태어났어요. 거기서는 땅이 넓어서 농토는 얼마든지 가질 수 있었는데, 팔아도 돈이 안 되고 또 어머니는 추워서 도저히 못 살겠다 하시더라고요. 2~3년을 거기서 살다가 해방 전에 돌아왔어요. 아버지는 다시 일본으로 광부로 징용 돼서 가서 2년 정도 살다가 탈출에 실패하고 해방 되서 오셨어요. 우리 큰누님이 해방 되서 와서 났으니까. 그 후로도 소작으로 있었지요. 아버지는 1922년생, 큰 형님이 1942년생이니까 아버지 열아홉 살에 혼인을 하셨나 봐요. 할머니가 워낙 가톨릭 신심이 깊어서 막내며느리(구정회 씨 어머니)도 신자인 며느리를 봤나 봐요. 안동천주교 최초의 세례대장 첫 장에 우리 할머니가 기록돼 있다 그래요. 우리 어머니 처녀 때 사진이 있어요. 목성동 안동교구가 있기 전에 대구교구 안동성당이었겠지요. 그 성당이 일제 때 사방관리소 맞은편 둔덕에 있었다 그래요. 지금으로 치면 북문통 대우공구 뒷 둔덕인데 그 앞에서 찍은 사진이래요. 그 사진 원본을 우리 집에 보관하다가 어머니가 돌아가시면서 안동교구청에 기증 했어요. 우리 어머니는 열두 살인가 처녀 때고 우리 외가 식구가 다 들어있는데 안동에서 독실한 신자 집안이었어요. 아마도 안동 전체 신자가 그 사진에 나온 사람들뿐일 텐데 우리 숙모(仲母-둘째 큰어머니)가 거기 들어가 있더라고요. 우리 할머니가 상주 청우리에 살던 신자 며느리를 봐서 성당에 보냈나 봐요. 할머니는 그날 같이 못 가셔서 사진에 없어요. 서신부(서벨라도 신부)님이 전근 가면서 찍은 사진인데 우리 어머니는 아직 시집도 오기 전이었고요. 할머니하고 친구인 이웃 사람이 거기 나왔고 사진에 동그라미 친 게 내가 어머니 말씀 듣고 그려 놓은 거예요. 외삼촌은 일본 가서 행방불명되었고요. 1939년 5월 28일 서벨라도 신부 송별 기념으로 찍은 사진이다.어머니 임옥란(당시 12세로 결혼 전), 이모 임금란, 외할아버지 임순근, 외할머니 김분순, 숙모 김복순, 외숙부 임동일, 숙모의 이웃 지점돌 등의 이름이 보인다. 송정중학원에서 사사로 배운 중학 과정 1959년 사라호 태풍 때가 국민학교 1학년이었는데 정통으로 와룡국민학교로 지나갔어요. 학교가 내려앉아서 선생님 서너 분이 돌아가셨어요. 교실도 없죠. 운동장에 있던 그 큰 수양버들, 플라타너스도 다 넘어가고, 흙으로 지은 교실 두 칸만 남고 나머지는 전부 땅에 붙었더라고요. 9월 며칠인가. 와룡국민학교 학생이 천 명이 넘었어요. 선생도 죽고 없죠, 교실도 없죠, 고등학교 이상 나온 관내 사람들을 차출해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교실 없이 판자때기 같은 걸 운동장 구석구석에 깔아놓고. 그러니까 공부가 옳게 될 리도 없었어요. 그때는 국민학교 2~3학년만 되도 공부는 뒷전이고 집에 오마 농사 일 해야 되고. 전부 손으로 농사짓고 학교만 갔다 오면 꼴 베고 소먹이고. 형제들도 많고 봄 되면 땟거리도 떨어져서 세 끼 중 두 끼는 죽 쒀먹는 시대였으니. 초근목피 시대였죠. 출세를 시키기 위해서 뭘 하고 그러지도 못했어요. 중학교를 30프로도 안되게 갔어요. 안동·경안·경덕 세 군대 중학교가 있었는데 그때는 시험 쳐서 갔어요. 학교 진학을 위해서 별도로 방과 후에 공부를 시켰다고요. 처음엔 나도 학교를 가기 위해서 좀 하다가 집도 워낙에 가난하고···. 그해(1964년)만 입학시험을 국어, 산수만 쳤어요. 박근혜가 중학교 들어갈 때라 박정희가 특명으로 시험을 국어, 산수만 보게 했다고요. 우리 전에도, 우리 후에도 그런 예가 없어요. 그때는 고등학교 보내는 이상으로 중학교 보내기도 힘들었다고요. 그래서 나는 국민학교 밖에 안 나왔는데 그래도 국민학교 때 공부는 상당히 잘하는 편에 속했다고. 이 마을에 상급학교에 못 간 애들이 워낙 많았어요. 그래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대학교를 졸업하고도 직장을 못 구하고 있는 사람들이 동네에 몇이 있었어요. 그 사람들이 뜻이 맞아서 중학교 과정을 가르쳤는데 '송정중학원'이라고. 가정집 사랑방에 모여서도 하고 여름에는 우송정(友松亭)이라고 지 씨 정자가 있는데 거기서도 배우고, 한 2년 동안 중학 과정을 배웠지요. 오전 서너 시간만 하고 그 외엔 농사일을 했어요. 그때는 헌책방이 워낙 성업을 했어요. 헌 책이 전 과목에 2백 원인가 했다고. 신시장 사장둑에 헌책방이 죽 있었어요. 거기다 내다 팔면 서점 주인이 수집해서 되팔고. 교회 서적도 옛 표기로 된 거, 내 어릴 때는 많았어요. 옛날 성경이 다 있었는데 이사를 하고, 집을 새로 짓고 하니 다 없어지고 지금은 '성경직해'라고 한 권만 남아있어요. 어렸을 땐 신앙생활을 착실히 했지요. 1964년 4월 12일 여동찬 르베리에 신부(가운데)에게 영성체 성사를 받았다.뒷줄 왼쪽 학생 중에서 다섯 번째가 구정회 프란체스코. 집안에 내려오는 '성경직해', 표지가 떨어진 것을 큰아버지가 보수해서 보고 어머니가 이어서 보셨다. '성경직해' 표지 안쪽에 큰아버지 이름이 적혀있다. 인근에서 처음으로 고추 모종에 성공하다. 60년대 중반쯤 중학교 과정 할 때 그때는 고추를 집에서 토종 씨를 떨어서 전부 직파를 했어요. 요즘처럼 모종하는 법을 몰라서 못했지요. 그래서 수확이 상당히 늦고 가을에 한창 고추가 열릴 만하면 서리가 와서 아깝고. 그때 이웃 가구 1리에 일제 강점기 때 농림학교를 나온 채소 농사를 잘하는 분이 있었어요. 그 당시엔 여기 사람들이 상상도 못하는 양배추 재배도 하고 토마토 재배도 하고. 가서 어깨 너머로 보곤 했어요. 그때는 비닐이 안 나오던 시대라서 그 분은 온상 틀을 짚으로 엮어서 땅을 파고 틀을 해서 유지(油紙), 문종이에 들기름이나 기름을 적셔서 양배추 씨를 내고, 토마토 씨를 내서 모종을 한 번, 두 번 하고 하더라고요. 쭉 지켜보다가 비닐 첨 나왔을 때 직파하던 고추씨를 가지고 모종을 내서 빨리 따도록 해보자, 그 시도를 했지요. 그때 집에 있던 뭐를 훔치다시피 해가지고 돈을 장만했어요. 비닐이 첨 나왔을 때는 상당히 두꺼웠어요. 그때는 교배종 종자도 안 나왔고요. 1971년경 새해 아침에 가구 2리 본가 헛간 앞에서 국민학교 5학년인 여동생, 조카와 함께. 안동에 럭키 지업사라고 국민은행 맞은편에 있었는데 거기 가서 두어 발 구입해서 창을 짜가지고 했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인근에 고추씨를 구입하러 가니까 그때는 개량이나 교배종 씨가 없고 전부 촌에 집에서 자가 채취해서 농사지을 땐데, 중앙종묘사에서 나온 건데 가게 주인이 풋고추로 이걸 가져가서 모종을 내보라고 해요. 그때는 종자 씨를 전부 다 80~90프로를 일본에서 수입해서 팔았다고요. 요새처럼 봉지로 안 나오고 깡통으로 한 홉씩 들어있는 풋고추 개량종이라고. 12월 말에서 1월 쯤 한겨울에 땅을 파고 1센티미터 간격으로 조파를 해요. 고추씨는 파종해가지고 발아해서 처음 이식할 때 까지가 1개월 걸려요. 그때는 포트에 할 줄 모르고 세 번 이식을 했어요. 풋고추를 처음 해서 밭에 옮겨 심어서 성공을 했거든요. 그전에 성공한 사람이 있었는지는 모르겠고 이 근처에서는 내가 젤 먼저 성공한 걸로 알아요. 안동 시내에 풋고추 하나도 없을 때 채소 점에 풋고추를 포대에 담아가지고 팔러 다녔으니. 그러다가 재미를 붙여서 가지, 토마토, 고구마도 하고. 내가 기억할 때는 비닐이 첨 나왔을 때니까 7~8년 후에 흥농종묘가 생기고 불암하우스 풋고추라는 게 생겼거든요. 풋고추로 조금 돈이 되고 토마토 해서 돈이 되고 했어요. 1972년 제주도 정방폭포 앞에서 군대 가는 대신 시작한 제주도 이시돌 목장생활 그러다 스무 살이 가까워 오니 군대를 가야 되잖아요. 우리가 군대 갈 때 자원이 제일 많았어요. 50년생부터 52년생이 거의 52년으로 호적이 돼있어요. 전쟁 통이라 출생신고를 제때 못하니. 저도 호적은 52년생으로 되어있지요. 안동군청인가 신체검사를 하러 갔는데 사사로 중학과정은 했지만 어쨌든 국민학교 졸업생은 전부 다 보충역 예비역으로 바로 편입시켜 버렸어요. 그래서 농사는 상당히 열심히 지었어요. 평소 다른 사람은 군대도 가는데 평생에 객지 생활도 한 번 해봐야 되겠다, 그런 마음을 갖고 있던 차에 1972년쯤 부산에 큰누나 집에 놀러 갔다가 어떤 기회로 제주도 여행을 단독으로 가게 됐어요. 만원을 가지고 500원짜리 지폐 스무 장을 은행에서 바꿨어요. 그때 남영호가 침몰 된지 얼마 안 된 뒤라서 부산, 제주를 왕래하는 제주호 라는 작은 배가 있어요. 부산 영도다리 밑으로 갈 정도로 작은 배였어요. 나룻배도 한 번 못타봤는데 열 네 시간을 걸려서 제주 사람 하나, 부산 사람 하나 하고 얘기를 하면서 갔어요. 배에 좌석이나 침실 있는 일등석은 몇 칸 안 되는데 침대 방에는 외국인들이 탔고, 바닥에 융단 비슷한 게 깔렸고 전부 앉아서 갔어요. 배 멀미가 심하니 아예 한구석에 양동이를 갖다 놔요. 얘기 나누며 가던 사람 중 하나가 가축 장사를 하는 제주 사람인데 거기 가거든 이시돌 목장이라는 데를 한번 가보라 그래요. 그래서 제주도를 돌아보면서 이시돌 목장을 가봤어요. 가톨릭에서 아일랜드 신부가 와서 개척한 덴데 당시에 여기는 경운기도 한 대도 없는 동넨데 거기 가니까 트랙터가 70~80대 되고 상상도 못할 정도로 앞서 가던 대단위 목장이었어요. 연수원은 호주에서 지었고요. 전국의 실습생을 받아서 교육시키는데 거기도 둘러보고요. 허허벌판인데 그때는 집도 이상하고 규모는 워낙 크고 시간이 없어서 다 못 봤어요. 거기 압도 돼서 다른 사람은 군대도 가는데 군대 간 셈 치고 여기를 와봐야겠다 싶었어요. 목장 구경을 한 바퀴 다하고 만원으로 일주일을 보냈는데 제주시 해봐야 그때는 농촌 마을이고 제주 시내에 큰 호텔은 칼호텔 하나뿐이었고요. 시장에 순대국밥을 일행 셋이 먹으러 갔는데 순댓국 한 사발, 밥 한 그릇에 백 원 받았어요. 한라산에 등반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혼자 서귀포에서 제주시 까지 횡단하는데 장비도 없이 배낭 하나만 메고 등반을 했어요. 올라가는데 하루 종일 걸려서 백록담에서 하룻밤을 자고. 그때 마침 텐트 친 사람이 하나 있어서 다행이지 사람 못 만났으면 죽었을 거예요. 내려오는데도 하루 종일 걸렸어요. 집으로 와서 군대 간 요량하고 이시돌 목장에 가봐야 되겠다, 다만 일 년이라도 연수를 받아봐야 되겠다 싶어서 이시돌 센터 주소를 알아서 연수원에 실습생으로 가는 법을 서면으로 계속 문의를 했지요. 교회 본당 신부 이상의 추천을 받아 신청을 해보라고 하대요. 그때 안동 본당에서 문화회관 신축하고 동부동 성당으로 갓 나갈 때라 본당 신부가 또 안계셨어요. 그래서 무엄하게 교구청으로 가서 두봉 주교님 면담을 했어요. 교구장이 추천할 사안이 아니고 좀 있으면 동부동에 신부님이 발령이 나서 계실거니 거기 가서 받아라 하시더라고요. 그때는 예비군에 바로 편입되어 예비군 훈련을 계속 다닐 때죠. 그래서 이길준 신부님께 추천을 받아서 가게 됐어요. 작년에 45년 만에 다시 거기를 갔다 왔어요. 제주시 한림읍 금악리, 지금도 있는데 그 연수원은 피정센터로 변했더라고요. 1973년 8월 11일에 받은 주일학교 교사연수회 수료증. 제주 이시돌 목장에 가기 직전이다. 제주도에서 해안선 방위 근무를 하다. 오일쇼크도 나고 하던 73년도 10월에 제주 이시돌 목장으로 갔어요. 제주도는 따뜻한 줄 알았는데 농장은 중산간이라 추웠어요. 돼지, 소, 양 사육…. 나올 무렵에는 농기계 교육을 받았는데 온 겨우내 실습을 했어요. 목장 측에서는 워낙 규모는 크지 사람은 없지 하니까 노동력을 얻을 수 있고. 전국에서 온 실습생이 50~60명 되고 전체 200명 정도는 연수원에서 직원과 함께 기거를 했어요. 호주, 아일랜드, 미국의 원조로 이루어진 거고 연수 조건으로는 거기로 주민등록을 옮길 것, 본인이 원하면 직원으로 채용 될 것, 이런 게 있었어요. 주소를 옮겨놨으니 74년 4월 쯤 제주도로 입영 영장이 나왔어요. 안동서 예비군 훈련까지 받고 사격까지 다 했는데…. 제주도는 보충역 제도가 없었어요. 지금 생각하니 4.3 사건 때문인지 자원이 적어서 그런 거 같기도 하고. 한 해 전에 우도 무장간첩 사건이 일어나서 제주도 해안선 전체를 방어는 해야겠는데 제주에 자원은 없지, 제주에 주민등록 된 사람은 무조건 입영 시켜서 제주도 지역 방위를 시켰어요. 그래서 진짜로 군대에 가게 생겼지요. 연수원에 들어간 지 6개월 만에 입영 영장 받고 제주 해안선 방위 근무를 했어요. 자원이 없으니 육지 사람도 차출해서 비행장 경비도 서게 했어요. 논산을 제2훈련소라고 하잖아요. 제1훈련소는 제주도 모슬포예요. 왜 그러냐면 6.25 때는 전쟁은 났는데 훈련할 데가 없잖아요. 거기서 6.25 3년 동안 60만 명을 길러냈어요. 6.25때 대 선배들이 가서 죽을 고생을 하던 그 자리에서 훈련을 한 달을 받는데 간첩들이 우도에 출몰하고 그랬으니깐 진짜 군사 훈련을 FM 대로 받았지요. 거기가 70년대에는 방위 소집자 단기 군사 훈련장이었으니까 거기서 소집되어 모슬봉 앞 부대에서 송악산으로 15~20리 되는데 매일 훈련을 받으러 다녔어요. 훈련소 안이 작아서 사격이니 각개 전투 훈련이니 할 수 없으니까. 그렇게 한 달 동안 훈련을 받고 목장에 왔는데 오후 5시 되면 해안 경비 나가야 되고 도저히 생활을 못하는 거예요. 수입은 없고 목장에서 그렇게 밤 근무하고 오면 일도 안 되고. 그래서 다시 주민등록을 파서 안동 36사단으로 전속했어요. 여기서 면 호병계, 예비군 중대 복무 요원을 마쳤어요. 1975년 12월 13일에 받은 공소 지도자 연수회 수료증 와룡 천주교회 공소를 짓고 가톨릭농민회를 알게 되다 처음으로 다시 농사일에 전념하면서 한 게 와룡 천주교회를 지은 거예요. 우리 밭에 제가 설계하고 사촌하고 둘이 지었어요. 76년 10월 20일 축성식을 했어요. 그해 방위 근무를 마치고 그 일에만 전념하면서 교구청하고 자주 왔다 갔다 했지요. 자금도 받으러 가야 되고 해서. 우리 윗대부터 교회 기관지를 상당히 오래 봤어요. '경향잡지'도 보고 '가톨릭 신문'도 보고. 교회를 짓고 있으니까 그런 우편물들이 누가 증여해서 오기도 하고 교회 사목국에서 보내오기도 하고요. 사목 자료에 그때가 한창 유신시대라 정의구현사제단이라든가 그런데서 유인물이 빠짐없이 오거든요. 아주 중요한 건 인편으로 오거나 교회서 보낸 이름이 아니고 흔한 여자 이름으로 오기도 하고요. 가톨릭노동청년회(JOC)라고 있었어요. 가톨릭노동청년회가 있다는 건 1975년부터 알았어요. 교회 기관에서 유인물이 자꾸 오고 하니까 관심을 갖고 열심히 읽었지요. 그땐 젊고 고생도 할 만큼 했고 아직 혼자고 팔팔하고. 그런 중에 대구서 가농 대구경북연합회창립준비모임을 어느 날 어느 시에 한다고 가톨릭신문에 유인물이 왔더라고요. 대구가톨릭근로자회관에서 한다고. 그전에 와룡교회 공소를 짓고 문화회관에서 2박 3일 공소 지도자 연수회 하면서 이길재 씨라고 한국가톨릭농민회 창설자를 알았어요. 가톨릭농민회가 창설 된 내용도 알았죠. 성 베네딕도회 왜관 수도원에 수도원장님이 한국 농촌이 후미지고 억압 받고 있으니 깨우치게 해야 겠다 하는데 주위에 공소가 있기는 해도 젊은 가톨릭 신도가 없는 거예요. 그래 일단은 선산, 김천, 구미, 왜관 거기에 농촌 문제라든가 농촌 문제를 인식하고 있는 농촌 교회 신자들을 상대로 섭외를 해서 연합회를 창설을 해보자 한 거죠. 가톨릭 농민회가 노동청년회 안에 있으면서 주교단에 인정을 못 받고 있다가 주교단 산하 교회 공식단체로 1976년에 인준이 됐어요. 워낙 농촌 문제가 심각하니까. 가톨릭농민회 실무자인 이길재 씨, 정연석 씨가 왜관에 와서 주위의 개신교 장로, 권사 등 촌에 상주하고 있는 사람들하고 교류를 하면서 연합회 준비모임을 한다는 내용이 유인물하고 가톨릭 신문에 떴더라고요. 농촌 문제에 대해서 뭔 얘기를 하는가 하고 가보자 싶었지요. 그전에 공소 지도자 연수회 하면서 농촌문제 본질하고 농협문제하고 초창기 농민회 창설 멤버인 정연석 씨한테 강의를 한번 들은 적은 있죠. 그래 솔깃해서 가서 보니 가톨릭농민회 준비한다면서 신자라는 사람은 나 하고 경주 보문동에 사는 조용진 씨뿐이고 다른 사람은 전부 개신교 신자더라고요. 며칠 후에 창립한다고 갔지요. 이사를 뽑는데 회장이 최경수 씨라고 개신교 장로고, 가톨릭 신자인 조용진 씨가 부회장 되고 그 담에 장로 윤정선 씨, 김천 사는 김성순 씨 등이 이사가 됐어요. 초대 총무는 이유인 씨고 맨 마지막에 감사를 누굴 뽑을 것인가 하는데 회원이 몇 안 되고 보니 내가 감사가 됐어요. 되고 보니 안동 지역에서는 나 밖에 간 사람이 없었어요. 그렇게 1977년 초에 한국가톨릭농민회 대구경북지구연합회가 창립 된 거죠. 축사를 대구교구에서 하는데 준비 모임을 그 날 저녁에 했어요. 조용진 씨 하고 나하고 그 앞에 내 걸 문구를 뭘 쓰겠나 하고 서로 머리를 맞대는데 내가 '농촌 농민 권익 옹호가 농촌 복음화의 지름길이다.'가 어떤가 하니 좋다 그래요. 교회 냄새가 물씬 난다고. 초기 농촌 운동은 농민 권익 하고 농협 민주화였어요. 창립 축사를 두봉 주교님이 하셨는데 중앙정보부에서 낸 책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소수의 의견도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되고 자세히 들여다보고 지향을 생각해봐야 된다고. 이네들이 쓴 책에도 이런 내용이 있는데 오늘 이렇게 출범하는 가톨릭 농민회, 아주 소수지만 일부의 깨어난 사람들이 부르짖으려고 한다, 숫자는 적지만 앞으로 큰일을 해나갈 것이라는 그런 축사를 하셨어요. 그 다음부터는 금방 출범했으니까 거의 한 달에 한번 모임을 대구서 했어요. 이사들과 함께 감사도 연석회의 명목으로 이 여관 저 여관 다니면서 참석했지요. 1978년 즈음 공소 회장 시절 주일 오후에. 뒷줄 맨 왼쪽이 오원춘 사건 특별 기도회 후 구속되었던 와룡농협직원 장성규 씨, 오른쪽 맨 뒤가 구정회 씨, 맨 오른쪽 한복을 입은 분이 어머니 임옥란, 모자 쓰고 앉은분이 아버지 구영서 씨다. 1976년 안동문화회관에서 있었던 가톨릭농민회지도자교육 후, 두봉 주교, 정호경 신부, 황영화, 이길재, 최병욱, 이상국, 오원춘, 우영식, 조용진, 박구훈 등이 보인다. 대구경북연합회 시절로 안동협의회가 생기기 전이다. 두 번째 줄 제일 왼쪽이 구정회 씨다. 안동가톨릭농민회 태동 이야기 회의를 한 일 년 동안 계속 하던 중에 '농민문화'라는 전국지를 발행하는 이석태 기자를 안동교구청에서 자주 만났어요. 그분이 항상 두봉 주교님 원고를 받으러 왔거든요. 농촌문제에 관한 얘기를 많이 나눴죠. 그때 사목국장 신부님이 정호경 신부님이셨는데 신부님께 ""대구경북가톨릭농민회가 명색이 가톨릭농민횐데 지금 개신교농민회에 가깝습니다."" 그러니까 ""농촌지역인 안동부터 빨리 회원을 늘려서 연합회를 했으면 좋겠습니다."" 하는 말씀을 글로 써서 드렸죠. 그러고 나서 전담 직원을 뒀어요. 정재돈 이란 분을 춘천에서 불러와서 농촌 사목국 전담부를 신설했어요. 그때 함평 고구마 사건이 진행 중이었죠. 가톨릭농민회가 JOC, JAC에서 나오면서부터 정식 주교회에 인준을 받게 됐잖아요. 함평 고구마 사건이 인준을 받고 바로 옳게 터뜨린 사건인 거죠. 인준을 받고 전담 농촌사목 부서가 생기고 정식적으로 교육도 안 빠지고 농촌 공소 회장이라든가 공소 지도자 연수회를 교회 주관으로 했어요. 농촌 문제라는 거에 대해서 강의를 끼워서 한두 시간씩 문화회관 아니면 상지전문학교에서 했어요. 강사는 농촌 문제에 대해서는 정연석 씨가 아주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강의를 했어요. 농촌 문제를 확실히 인식하게 하고 농민을 의식화 시키는 게 농민운동이거든요. 그래서 문제인식을 한 시간 끼워놓고 그랬었는데 이제는 농촌농민운동 연수회를 3일 동안 농촌 공소 지도자들을 모아 놓고 본격 시작하면서 배용진 씨, 점촌에 황영화 씨, 쌍호에 우영식 씨, 풍천에 김덕기 씨라든가 공소 회장급, 지도자급하고 농촌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하고 전담으로 교육을 계속 시키는 과정을 거쳐서 가톨릭농민회 대구경북연합회 안에 안동교구협의회로 갈라지기 시작한 거죠. 안동연합회 생기기 전에 협의회가 있었는데 그 시기에 함평 고구마 사건, 주교회 인준을 받고 평신도 사도직 신심단체로 되면서 직접 함평 고구마 사건에 개입하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각 연합회가 생기기 시작하는 거지요. 대구경북연합회 생기고 나서 마산교구연합회, 원주교구연합회 창립 총회할 때는 임원으로 참여도 했어요. 1977년 즈음 수원에서 크리스천아카데미 농촌사회교육 수강 당시. 정재돈 씨 추천으로 교육을 받았다. 왼쪽 흰 셔츠 입은 사람이 구정회 씨. 장상환, 이우재, 황한식 씨 등이 보인다. 함평 고구마 사건 현장에서 찍힌 사진 한 장 그러다가 교계의 거대한 배경을 믿고 함평 고구마 사건에 적극 개입한 거지요. 함평 고구마 사건 대책위원장 하던 서경원 씨가 보통 사람이 아니에요. 노태우 정권 때 국회의원하면서 이북에도 갔다 오고 했지요. 전국적인 가톨릭농민회연합회가 결성이 되고 난 뒤에 전국의 농민회원들이 다 모였죠. 그때는 시위를 한다든가 모임을 함부로 못하던 시절이에요. 교회 종교 활동을 기도회라는 명목으로 언제 어디서 한다는 얘기만 하고 각 연합회로, 협의회로 통보만 왔지. 가고 싶은 사람은 모여라 하면 자발적으로 참가하는 거죠. 나는 명색이 임원이고 하니까 함평을 가게 됐죠. 그때 우리 본당 새 신부님으로 들어오신 오성백 신부님이라고, 그 신부님께 같이 가자고 청했지요. 서대구에서 차를 타고 광주에 가니까 정재돈 씨, 오원춘 씨, 대구경북연합회 권종대 씨 다 와 있어요. 전국에서 다 왔지요. 오전부터 시작해서 종일 기도모임을 했어요. 노금노 씨라고 하루 종일 종탑 밑에서 방송을 했어요. 내용을 외부로 알리지를 못하니까. 거기가 어디냐면 광주북동성당인데 맞은편에 시외버스 터미널이 있었어요. 그런데 광주 사람들도 그때는 별로 관심이 없더라고요. 신자들 일부만 관심이 있고. 함평 고구마 사건 당시 (사진제공: 한국가톨릭농민회) 전국적으로 모인 농민들이 한 5백 명은 넘지 싶어요. 그때 녹음을 내가 가져간 녹음기로 다 했었어요. 공공칠가방만한 건데 나중에 회원들한테 들려주기도 하고. 시위를 하러 나가려고 북동천주교회 정문에 도열을 해서 터져 나가려 하는데 이 숫자의 몇 배 되는 경찰부대 즉 해골부대가 새까맣게 몰려와가지고 나오기만 나오면 긴급조치로 바로 붙들어 넣으려고 하는 거죠. 몇 배가 막는데 시위하러 나갈 수가 없으니까 못나가고 성당 안에 들어와서 짚으로 짠 가마니를 낫으로 타서 성당 앞에 깔고 앉았어요. 해질 무렵 쯤 그늘그늘 할 때예요. 이제는 시위를 하려 해도 도저히 안 되고 하니 단식을 하기로 한 거죠. 노금노 씨가 더 이상 정력을 뺏기지 말고 무기한 단식에 들어갈 것이다 하고. 좀 일찍이 집에 갈 사람은 이쪽으로 몰리고 단식 할 사람은 남고. 그런데 그 중에 안동 교구에서는 권종대 씨, 정재돈 씨, 김천에 김성순 씨, 나 그렇게 넷이 남아서 단식을 하게 됐어요. 성당 마당 앞에서 가마때기 타개면서 우리는 죽어도 해결을 보고 간다, 죽으면 저 가마때기에 싸여서 시체로 나가겠구나! 이래 생각했죠. 그런데 이 사실을 딴 데 어느 언론에도 방송을 안 해요. 마이크 스피커 방송으로만 외부로 흘러나갔지. 단식할 자리를 다 만들어 놓고 앉을 즈음 본당 신부님한테 광주 CBS 기독교 방송 거기에서 이런 사실을 뉴스를 해줄 테니까 들어보라고 사전에 연락이 왔습디다. 그래 실지로 라디오를 트니까 유일하게 나오더라고요. 피해 보상을 안 해주면 관철 될 때까지 투쟁에 들어간다고. 단식하고 누워 있는데 오성백 신부님이 보낸 대건 신학교 학생 20~30명이 와서 인사하고 얘기를 들어주고 갔어요. 그날 저녁 캄캄한데 지붕에 사람이 한 둘이 있더라고요. 우리가 들락날락 하면서 봤어요. 누구냐고 그러니까 소스라치게 놀라대요. 남의 모임을 보려면 정식으로 보지 왜 지붕에서 내려다보느냐 하니까 그런 게 아니고 밤에 추울까봐 이불 담요 몇 장 가지고 왔다 그래요. 나는 아직도 미스터리로 남는 게 그 사람들이 교우라서 우리를 위해서 실지로 이불 주러 왔는지 아니면 기관원에서 뭔 얘기하는지 들어보러 왔는지 아직 구분이 안가요. 그러고 또 한 가지 일어난 일은 방송하는 소리 때문에 시내 정류소 부근이 시끄러우니까 누가 그랬던지 전원을 차단시켜버렸어요. 외부로 방송을 못하게요. 이웃 시민들이 전기 안 들어온다고 우리한테 막 항의를 했어요. 그래 급하게 건전지 전기로 전환시키고 한전에다가 전기를 안 넣어주면 원성이 한전으로 간다고 하니까 즉시 또 전기를 넣어줘요. 그날 저녁부터 단식을 하는데 주관하는 사람이 대번 단식을 하면 안 되니까 우유 작은 거 한 팩하고 빵 한 개 하고 우선 먹고 내일부터 단식하자 하면서 우유 하나, 빵 한 개를 나눠 주더라고요. 그런데 누군가 일어나서 이거 뭐 양식하는 거냐? 단식하는 거냐? 그러니 받은 사람은 먹고 그 말한 사람은 안 먹고 단식 시작 되고. 나는 먹었어요(웃음). 대번 단식하면 안 되고 서서히 해야 된다 하면서. 그 이튿날부터 진짜 물만 먹고 시작하는데 이틀, 삼일 째 되니까 배가 덜 고프더라고. 교우들은 보니까 농민들이 아칠 하니까. 전부 불뚝 농민들이 와가지고 가마때기 펴놓고 반은 일어나 앉았고 반은 누웠고 하니 물만 준다 하니까 물 대신 일부러 숭늉을 주더라고요. 누룽지를 만들어서 밑에 가라앉히고 공급을 해주더라고요. 나는 한 삼일 굶으니까 정신이 더 맑아지고 깨끗해지더라고요. 그때 같이 단식한 사람은 대구, 안동에서 권종대 씨, 나, 정재돈 씨, 김성순 씨 네 사람이고 본부 임원들은 거의 다고. 그런데 사일 째 되니까 눕는 사람도 많고 포기하고 싶을 만큼 힘들더라고요. 오 신부님이 안동 오셔서 이런 사실을 알려서 그때 전국구역 사제단의 지도 신부님이면서 안동교구 신부님이셨던 류강하 신부님하고 정호경 사목국장 신부님이 함평으로 파견 돼서 오셨어요. 이미 내용은 알고 있었지만 현장 사정을 들어보라고요. 사일 째 되는 날 밤에 단식 현장에 오신 거예요. 닷새 되는 날 아침에 권종대 씨하고 나하고는 단식 중단하고 신부님들하고 동행해서 나왔어요. 사제와 동행해서 나오면 연행 되거나 체포되는 건 면하잖아요. 1978~9년 즈음 동생, 아버지와 함께. 가운데 구정회 씨가 입고 있는 옷이 함평 고구마 사건 당시 입었던 자주색 재건복이다. 가톨릭농민회 안동교구연합회가 창립되다 함평 고구마 사건 피해 보상액이 309만원인가 그랬죠? 적은 돈이지만 잘 해결이 됐으니 농민운동사에 전무후무한 사건이었죠. 농민이 무슨 힘이 있겠느냐 하다가 탄력을 받아 본격적으로 농민운동도 세가 확산 되는 거지요. 안동교구 내에도 분회가 여럿 생기고 교육도 체계적으로 되고 파견 교육도 가고요. 파견 교육 중에 개신교 쪽에서 하는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회교육 연수원이라고 있었어요. 이우재 씨, 황한식 씨, 장상환 씨 등이 실무를 맡아 했어요. 그때부터 나는 농사일 반은 팽개치고 그 일에 전념했지요. 1978년 12월 27일이 가톨릭농민회안동교구연합회 창립일이었어요. 연합회창립모임을 하면서 나는 협의회 위원도 하고 그래도 열심히 혼자서 뛰고 그랬는데… 임원 선출을 하는데 전부 다 모였을 거 아닙니까? 그런데 이상한 게 임원 뽑는데 이사도 없이 감사를 미리 뽑는 법이 없잖아요? 이사를 뽑지도 않고 회장, 부회장도 안 뽑고 감사부터 뽑는데 나를 지목하더라고요. 나는 실지로 대구경북연합회에서 2년 동안 감사를 해봤기 때문에 내키지 않았어요. 감사는 실무진들이 활동을 다 해 논 뒤데 잘했다 못했다 평가하는 거잖아요. 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임원을 뽑는데 감사 선출부터 부치더라고요. 벌써 사전에 얘기가 되어있었는지 어떤지. 젤 앞에 나를 내세우더라고. 그래서 어쨌든 감사를 맡고 연합회가 창립이 됐어요. 이사를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사정이 그렇게 됐다고 정호경 신부님께 그런 말씀을 드렸더니 ""아이고. 그만치 했으마 됐고 니는 이제 농민회 좀 쉬고 장가나 가라. 농민운동은 니 같이 그크러 여기저기 쫓아다니고 개신교에서 하는 크리스천 아카데미 교육도 며칠씩 갔다 오고 그케 쫓아다니 봐야 농촌이 니 때매 변화 되는 거도 아니고 당장 변화될 게제도 아니고 니 아랫대가 있다 해도 아랫대에 가서도 농민운동이란 게 그렇게 쉽게 빨리 바뀌는 게 아니다. 아랫대에 아랫대 가서 조금 빛을 볼지도 모르니까 좀 쉬고 고마 장가가라."" 그러시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지금까지 다닌 게 진짜 힘만 들고 진만 뺐지 싶은 게 아, 그래서 그런 거구나 싶어요. 아, 이거는 진보적으로 발전해가는 운동이라는 거, 사람이 깨이고 의식화 되면 앞으로 나아가는 건 틀림없다, 산에서 돌을 바닥으로 옮기려면 처음 굴릴 때가 힘들지 이 정도 됐으면 저절로 굴러갈 것이다, 하고 회의를 느끼기 시작한 거지요. 1979년 안동교구연합회 시절 처음 농민교육 받을 때로 두봉 주교와 정호경 신부, 정재돈, 이길재, 권종대, 오원춘 씨 등이 보인다. 맨 뒷줄 왼쪽 첫 번째가 구정회 씨. 오원춘 사건 안동교구 특별기도회 홍보를 담당하다 그때(1979년 6월 8일에) 약혼을 했어요. 아내는 삼녀일남 중에 장녀고 부친은 월남하셨는데 영주 풍기서 살고 갓 신자 되신 분이랬어요. 그러던 차에 청기 감자 사건이 터졌어요. 함평 고구마 사건 이후로 농민회가 활성화가 돼서 뭔 문제만 있으면 곧 해결될 줄 알고 농민운동이 활발히 전개가 될 때지요. 여러 분회들도 생겨나고요. 함평 고구마 사건도 그렇고 영양 청기 감자 사건도 그렇고 농협 민주화하고 관계가 깊어요. 농협이 왜 그리 문제가 생겼냐 하면 그때까지만 해도 농협이 협동조합이 아니고 관의 하수죠. 국제적인 유례가 없는 농협 임직원 임면에 관한 임시조치법 이라는 거로 묶여서 임면하는 곳 눈치 보고 일할 수밖에 없잖아요. 농협중앙회장은 대통령이 임면하고 시도지부장은 도지사가, 단위조합장은 시장·군수가 임면하고. 자발적으로 직원을 채용한다든가 해야지 협동조합의 뜻에 영 배치되거든요. 농민운동 아니었으면 임면임시조치법이 아직까지 있었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양대 사건이 터지면서 밝혀나가는 거죠. 그 농협민주화 교육을 담당한 이길재 씨, 장상환 씨 두 분 공이 커요. 오원춘 사건은 청기 농협에서 공급한 감자 씨를 파종했는데 싹이 안 나니까 피해 보상 해 달라 하고 감자 씨를 캐서 증거물로 연합회에 가져 오고 이사회에 이의를 재기하고 피해보상 운동 하려고 드니 정보기관에서 그때 5월에 납치를 한 거죠. 모심기 개시 하고 한참 농사철인데 농사짓는 사람이 사라졌다 돌아왔으니…. 그 얘기를 정재돈 총무한테 상세하게 울릉도에 납치 되어 갔다 했던 모양이래요. 그래서 세상에 알려졌죠. 그 유인물을 내가 돌렸어요. 문제가 생긴 거지. 그 문제를 풀려고 드니 애초부터 정보기관에서는 싹을 잘라야 되니까. 농민회에서는 그걸 두고만 볼 수 없지요. 회원들이 그런 일을 당해도 그냥 둬버리면 내부터도 운동한 사람은 계속 요주의 인물로 찍혀가지고 그 같은 테러를 당할 거 아닌가 하는 맘이죠. 그러니까 농민들이 교계에서 들고 일어난 거지. 나도 그만둘까 말까 하던 찰나에 그런 사건이 터지는 바람에 내 일이 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전에 제주도 갈 때 조르듯이 두봉 주교님한테 졸랐죠. 두봉 주교님은 프랑스에서 오셨으니 프랑스혁명에 대해서도 그렇고 그만큼 공부를 많이 하셨을 거 아닙니까? 이 문제에 대해서도 잘 해결해주실 거라고. 이 납치 사건은 농사짓는 사람이 한참 5월 초중순 경에 바쁜 때인데 없어졌다가, 지금은 내 혼자 놀러갔다 왔다 그러지만 그렇게 갔다 올 사람도 아니고 또 그때 고추 농사를 많이 했기 때문에 고추 모종하고 해야 될 때거든요. 우리 농민회 회원들도 앞으로 이런 일 당하기 십상이니까 주교님이 협조해가지고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해달라고 부탁드렸어요. 주교님이 아무 말씀도 안하고 고개만 끄덕끄덕 하시더라고요. 알았다고. 전국농민회에서 이 사실을 배포하면서 정호경 신부님하고 정재돈 씨는 사실이 아닌 것을 발표했다고 긴급조치 위반이라고 연행된 상태였거든요. 정보부에서는 납치를 안했으며 자기대로 놀러 갔다 온 걸 가지고 사실이 아닌 걸 유포했다고. 전국본부에서 전국적인 기도회를 8월 6일 날 목성동 성당에서 하기로 하고 8월 1일인가 2일부터 전국 임원 연수회 기획을 했어요. 가톨릭상지대학 본관에서. 전국의 연합회 이상의 임원들은 전부 다 참가하기로 하고 교육 내용은 강사 초빙도 있었지만은 농촌문제의 본질이라는 강의 제목 하에 임원이면 어디를 가서도 전부 강사가 될 수 있도록, 어디 농사단체에 가서도 농촌문제의 본질 강의를 해박하게 할 수 있도록 4일 동안 특별 연수회를 했어요. 간간이 초빙 강사로 그때 당시 서울대학 해직 교수라든가 이우재 씨, 백기완 씨도 왔어요. 강의를 4일 동안 들어가면서 한 시간 동안 원고 다섯 장인가 여섯 장인가, 농촌 문제의 본질, 부락 개발론 까지 전부 베꼈고 두 시간 하는 정연석 씨 농촌문제 강의를 한 시간으로 요점을 추렸어요. 한 시간 동안 좌중 앞에서 그 원고대로 칠판에 뭐를 그리든지 말을 어떻게 하든지 간에 정연석 씨가 홍길동이면 전부 다 홍길동을 만들 판이지요. 그 강의를 4일 동안 하고 8월 6일이 마지막 날이 되도록 그렇게 잡았어요. 거기 겹쳐서 안동교구는 안동 연합회 전체 연수회를 거기서 했고, 4일 동안은 전국 임원들, 연합회 이상 임원들은 강사 실습 연수회를 했고 6일 날 전부 합류하도록 그렇게 기획을 해가지고 6일 날 전국 회원이 모이기로 하고 본의든 본의 아니든 안동 연합회 회원이라든가 전국 연합회 임원들은 8월 6일은 극비에 전국 기도회를 하도록 했지요. 김수환 추기경님이 참석하기로 하고 교계에서 극비리에. 나도 처음에는 몰랐지요. 나도 8월 4일쯤 알았지. 특히나 안동에서 정보가 새 나갈까 싶어 4일쯤 되니까 몰래 알려주더라고. 안동에 지리를 아는 사람이 내 밖에 없으니까 나한테 얘기를 했겠지요. 거기에 전라도에서 온 사람들, 경남, 원주, 춘천에서 온 사람들, 서울은 (기도회를) 노동계에서나 이런데서 알고 오는 사람들, 안동에서는 교구 연수회 하러 왔지. 기도회 온 거는 아니거든요. 그런데 다 합류해서 대거 주교단에서 대전교구, 전주교구, 원주교구, 김수환 추기경님, 한 이삼십 명 되는 사제단하고 주요 손님 몇하고 8월 6일에 특별기도회를 한 거예요. 그 준비를 할 사람이, 지리도 잘 알고 하는 사람이 안동에서는 나 밖에 없으니까 내 보고 총무를 하라 그러더라고요. 교육 받을 사람들이 안 보여서 찾아보니 전국 임원들, 회장급들만 가톨릭상지대 셀린관 여자기숙사 옥상에 전부 모여 있더라고요. 그래 올라가려고 하니 못 오게 하더라고. 정보가 새나갈까 봐. 나는 어느 정도 알고 있는데… 뭐 때문에 그러는지. 당일은 머리띠 제작할 광목 사러 포목 집에, 또 광목을 재단하러 안동 광문사라고 교구청에서 전담으로 문구를 사서 쓰는 문구점이 있는데 거기를 갔어요. 거기 가야 종이 절단하는 기계가 있었어요. 긴급조치 하에서는 기도회를 하더라도 교문 앞에는 못나가거든요. 함평 고구마 사건 이후로 그렇게 세게 하고 이겨도 밖으론 못나갔단 말이래요. 그런데 이번엔 밖으로 나가보자 하고 결의하고 전략 전술을 짠 거지요. 신시장 철물점에 가서 큰 대나무를 사가지고 적당한 길이로 잘랐어요. 한 둘이 대나무를 잡으면 뜯겨가지고 잡혀 가니까 그걸 여럿이 쥐고 밀고 나가게 준비하고 머리띠 준비하고. 서너 시 되고부터 원주, 춘천에서 부터 긴급조치 구속 됐다 나온 사람들, 민청학련에 연류 됐다 나온 사람들, 의식이 있는 사람들이 와서 오늘 저녁부터는 양반 고을 안동에도 복음소리 울려 퍼지겠구나! 그랬지요. 나는 심부름 했어요. 페인트 사러 가고 대나무 사러 가고 포목 사러 가고 포목 절단 하러 문구사에 가고. 교구청에 늘어뜨리는 걸개 글씨를 성당 종탑 앞마당에서 서너 명이 썼어요. 큰 글씨는 광고 회사 사람들이나 쓰는 건 줄 알았는데 내 보고 큰 붓을 들고 쓰라 해서 교구청에서 부른 대로 썼어요. '교구청 난입자는 처단하라.'라고. 기도회가 끝나고 긴급조치 하에서 최초로 시위를 외부로 나갔어요. 지금 보건소 자리가 그때는 시청이랬거든요. 시청에서 군청 사이, 중파(중앙파출소) 있는데 까지 촛불 행진을 했어요. 유신정권 하에서 기도회이면서 교회 바깥으로 첨으로 나간 거지요. 경찰이 워낙 숫자가 많고 해서 농민회원들이 대나무 작대기를 짜서 들고 이중 삼중으로 밀고 나가니까 하나씩 떼 내지도 못하고. 그 뒤로 성직자들, 수녀들, 신자들 나가고. 나는 그 위에 종탑에 방송실에 있었어요. 당시에 내가 일제 소니 녹음기를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 기도회 할 때 김수환 추기경님 강론을 그 녹음기로 녹음했어요. 추기경님 강론이 굉장히 거셌었어요. 할 말 다 하시는 거지요. 농민들을 왜 용공으로 모느냐 하고. 그때는 사진기도 귀하고 녹음기도 아주 귀할 때거든요. 일일이 속기를 하는 사람도 없고. 그때 내가 사진기도 빌려 있었고. 본부에서는 조그만 녹음기가 있었는데 이상국 씨가 내 것이 성능 좋다고 녹음하라고 하더라고요. 기도회 때 성당 안팎에 사람이 많았어요. 삼사십 명 주교단 제대에서 추기경님이 강론하시는데 잡소리 들어간다고 홍보부장이 제대 마이크 앞에 녹음기를 갖다 놓으라 그래요. 녹음테이프가 40분짜린데 이만한 녹음기를 들고 그 많은 사람들 보는 앞에 추기경님 가까이 첨 가봤지요. 제대 위에 녹음기를 갖다놨는데도 추기경님 개의치 않으시고 그때부터 더 세게 강론을 하셨어요. 왜 이러십니까? 박정희, 왜 이러십니까? 하고 굉장히 나무라고 야단치는 억양이었어요. 30분이면 끝날 줄 알았는데 자꾸 길어지네. 찰카닥 하고 끝났을 거 아니래요? 뒷부분은 말씀이 얼마간은 잘라졌어요. 강론을 복사해서 문자로 바꿔야 하니까 본부 홍보부에서 부장하고 내 하고 그 이튿날 작업을 했어요. 강론 끝나고 들고 와서 들어보니까 딴 사람이 얘기하는 건 다 녹음됐어요. 그때 기억나는 게 이재오 씨라고 알잖아요? 당시 국제 엠네스티 한국지부장이랬어요. 김수환 추기경님 따라 내려와서 미사 마치고 연설하는데 한국 정치가 삼일 정치냐? 석유가 왜 삼일 치 밖에 없느냐 박정희는 물러가야 합니다! 긴급조치는 폐지되어야 합니다! 하더라고요. 그때 그런 말 하면 전부 긴급조치 위반 감이거든요. 그 이튿날 바로 구속 됐잖아요. 그런 내용 까지 다 녹음 했는데 추기경님 그 중요한 말씀이 잘라져 버렸으니…. 녹음은 잘 됐더라고요. 요만큼 틀고 글자로 베끼고. 나하고 본부에 이상국 씨하고 홍보부장하고 셋이서 문자로 바꿔서 교구청 내려 보내면 이양이 타이핑 해가지고 활자화를 했어요. 녹음 된 거만 내려와 가지고 그 이후에 건 구할 수 없느냐 그러니까 교구청에서 참석한 외국 신부님이 소형 녹음기로 전문을 녹음한 걸 구해주더라고요. 그래서 활자를 다 만들었지요. 그때 사진도 엄청나게 찍었어요. 사람 얼굴이 너무 많이 찍혀서 인화하거나 유출되면 참석했던 사람 다 불려갈 것이다, 위험하다 그래서 본부에서 일괄 관리를 했어요. 주교님하고 그날은 시위에 성공했는데 다음날부터 매일 밤 기도회를 했었거든요. 회원들은 안 나가고 큰 강당에서 농성을 하고 있고 확성기로 방송도 하고. 그 다음부터는 신자들 저녁 미사하고 예배드리러 나가는 데 시위 할 줄 알고 못나가게 했어요. 주교님하고 맞닥뜨려가지고 시위하는 게 아니고 집에 가게 해달라고. 그런데 우리는 위에 지시로 절대로 못 내보낸다고 하고. 그러다 나중에는 하나하나씩 풀어줬는데 그런 내용도 찍었거든요. 서경원 씨 머리에 피 흘리는 사진도 있었고…. 그 필름이 나중에 들으니까 원주로 가서 전부 다 인화 작업을 했다하더라고요. 사진을 얼마나 찍었는지 활동사진처럼 돌려볼 정도였다고. 기도회 끝나고 전국 농민회 임원들을 비롯해서 한 삼십 여명 남아서 보름 넘게 더 농성을 하다가 전부 다 연행 안하는 조건으로 안동 농성을 풀었어요. 그런데 그전에 기도회 마치고 나오다가 안동에서는 유일하게 농협 직원이던 장성규 씨가 연행되고 타 지역 농민회원 6~7명도 연행이 됐어요. 그러고 각자 뿔뿔이 다 흩어졌는데 그날 기도회 이후로는 아, 이렇게 시위를 해도 되는구나 싶어서 더 크게 시위를 했어요. 그 담에 전국 단위 기도회를 전주 중앙성당에서 했지요. 나는 뭣 모르고 전국 기도회 한다니까 기도회라는 기도회는 다 찾아다니면서 구출 작전을 하는 거지요. 석방하라! 하고. 더 이상 농민회 활동 안한다 하다가 그런 일이 터지는 바람에 더 신나서 돌아다녔지요 뭐. 전주에서도 워낙 사람이 많으니까 오원춘 씨 어른을 전주에 모시고 갔었어요. 대구 오원춘 씨 재판하는 데는 기본적으로 갔고요. 진짜 전국 기도회에서 그렇게 응원하고 했는데 처음 재판할 때는 오원춘 형제는 이전에 이미 납치가 됐어도 양심선언을 해가지고 내가 말한 거는 사실이고 이후로는 내가 무슨 말을 하든지 상관하지 마라 했기 때문에 재판이 바로 될 수가 없지요. 시키면 시키는 대로 불판이지요. 세뇌시키는 대로. 대구 지법에 재판 내도록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전국 기도회도 열심히 다녔어요. 안동에서 한 대로 그렇게 시위 하면 되더라 싶어서 전주서도 중앙성당에서 전동성당까지 야간 시위가 이뤄졌어요. 8월 6일부터 시작해가지고 전국에서 기도회를 했어요. 그러자 YH 사건 터지고 부마사태(부마민주항쟁) 터지고. 노동계에서 일어나고 하니까 8월 6일 날 시발해가지고 그해 박정희가 죽음으로써 끝난 거죠. 유신정권이 그해 10월 26일로 막을 내린 거지요. 오원춘 사건 재판 과정을 지켜보다 오원춘 씨 사건 삼차 공판까지 나도 참석 했어요. 재판할 때 회원들이 많이 갔어요. 전국 임원들 거의 다 갔다고요. 만에 하나라도 오원춘 씨가 바른 말을 해서 거기서 뒤집어 지면은, 옳게 뒤집어 지면은 유인물 뿌리고 들고 일어나려고요. 그런데 영 뭐……. 인권 변호사가 둘인가 셋인가 여기서도 가고 1차 때는 두봉 주교님도 가시고. 인권 변호사가 겨우 얻어낸 게 딱 한 가지예요. 반대 심문하는데 오원춘 씨 검사 심문하는 데는 쉬러, 놀러 울릉도 갔다, 그런 식으로 자꾸 질문하고 그렇다 또 그렇다 하고 납치하고 정 상반된 걸로 계속 재판이 이끌려 가고 마지막으로 변호인 측 심문하는데 그 변호사가 오원춘 씨 어디 아픕니까? 왜 그래 힘이 없어요? 하니까 아유, 아픈 데가 많애요. 허리도 아프고 팔도 아프고 몸만 비틀만 아파요. 하더라고요. 왜 그렇게 아픈 데가 많겠어요? 약물로 당했는지, 얼마나 당했으면 얼굴이 하얀 게 본색이 아니더라고요. 그래 유도심문 조금 한 거 밖에 성과가 없고. 수녀님들하고 다들 전국에서 그만큼 기도회도 하고 시위를 했으니 바른 소리 한마디 할까 싶어 기대 했었는데 영 안 좋으니까 성직자들도 모였다 다 흩어지고요. 첨 재판할 때 하루 종일 하는데 창으로 바로는 볼 수가 없죠. 피고인석이 있고 재판관이 있고 방청석은 이쪽에 있으니까 오원춘 씨가 우리는 못 보지요. 대구 지법이 엄청 커요. 큰데도 거기 꽉 차고 첨에는 방청권 없이 아무나 다 들어갔어요. 오원춘 씨 얼굴이라도 보려고 창을 열어놨는데, 재판관 있고 피고인석 있고 그 사이에 창이 있어요. 창을 요래 열고 얼굴을 보니까 미안하다는 뜻인지 안다는 뜻인지 상종을 많이 했기 때문에 재판을 하다 말고 날 보고 눈인사를 하고 이러더라고요. 나는 눈짓으로 이래 하고. 그 다음 공판에 가니까 못 보도록 그 창을 탁 막았더라고요. 막고 방청권을 배부를 하는데 한 쉰 장 정도밖에 안주더라고. 성직자 몇 장, 내가 얻은 건 열 장 밖에 안 됐어요. 교구 김욱태 사무처장 신부님이 방청권을 배부 받아서 전국 농민회 회원들 쓰라고 주시더라고요. 전국에서 모여 있는데 누구는 주고 누구는 못 주고 할 수 없어서 내하고 같이 간 사람들도 못주고 나는 내 한 장만 가지고 전국 본부 회장한테 다 줘버렸지요. 그래 본부 회장이 아홉 장을 가지고 그 다음부턴 전략을 짰어요. 임원들이 멀리 전국에서 방청하러 오는데 법정 한번이라도 보고라도 가라고. 열 장을 가지고 처음에는 회원 열이 들어가잖아요. 그 다음에는 한 30분쯤 있다 그 증만 있으면 방청 하다가도 화장실도 가고 들락날락 할 수 있으니까 그 증을 가지고 다음 농민회원들한테 넘겨주는 거예요. 어떻게 재판하는지만 보고 20~30분 있다 넘기고. 재판을 하루 종일 해요. 점심시간 휴정해서 점심 먹고 와서 또 하고. 변호사라든가 성직자들은 점심을 우리하고 같이 먹었는데 물을 안자시더라고요. 화장실 안 가려고. 그렇게 해서 멀리서 온 사람들 다만 삼십분에서 한 시간씩 다 보게 했지요. 방청권 열 장 가지고. 그 다음 부터는 방청권을 주고는 팔에다 시퍼런 돼지비계에 급수 도장 찍듯이 찍었어요. 이 사람 외에는 방청 못하도록. 그런 와중에도 그해 약혼 상태여서 11월 5일로 결혼 날짜는 나있었어요. 그때 전두환이 들어서서 모든 청첩장, 부조를 절대 금지 시켰어요. 간소화, 절약 한다고요. 청첩장을 못 만드니 교구청 이양이 친척들한테 하고 알리라고 우편엽서에다가 타이핑을 해주더라고요. 결혼 축하해주러 연락을 받고 전국에서나 안동 관내 분회원들이 왔었어요. 그날이 마침 최병욱 회장 공판일과 겹쳤어요. 9월 15일 있었던 오원춘 사건 2차 공판에서 방청권이 없다고 못 들어가게 하니까 문을 두드렸다고 법정모욕혐의를 적용했어요. 회원들이 오전에 결혼식에 온 걸 정호경 본당 신부님인지, 류강하 신부님인지 여기는 좋은 자리고 거기는 응원이 필요한 자리니 그리로 가라고 보내시더라고요. 그래서 사진에는 회원들이 몇 안 찍혔어요. 10·26으로 유신이 막을 내리고 정호경 신부님이 풀려나고 긴급조치가 해지가 되고 나니까 정재돈 씨도 나오고 오원춘 형제도 12월 8일 석방됐지요. 1979년 11월 5일 안동문화회관 대강당에서 결혼식을 했다. 농민회 활동을 같이 하던 사람들과 함께. 안동연합회 창립 후 서서히 농민회 활동에서 멀어지다 안동연합회가 생기기 전 협의회 차원에서 함창 본당에서 추수감사제를, 전국 감사절을 크게 했어요. 그런데 안동협의회에서 제일 중점적으로 한 것이 하나는 농민 의식화, 즉 쌀 생산비 조사였어요. 내가 농사지었는데 얼마나 소득이 있는가, 수지타산이 되는가 하는 생산비 조사 사업하고 또 하나는 농협 민주화 운동으로 강제 출자 반대, 출자는 왜 해야 되며 농협은 어떤 구조여야 하는가 하는 그 두 가지예요. 양대 사건(함평 고구마 사건, 오원춘 사건)이 다 관료적인 하수를 받은 농협이 관련 돼 있잖아요. 그때나 지금이나 농촌문제의 정신적인 문제의 뿌리거든요. 그런 이유로 쌀 생산비 조사 추수감사제를 연합회 창립되기 전에 했었어요. 안동연합회가 창립되고 임원 선출 과정이 앞서 이야기 한 대로 되고 그러니까 내 생각으론 약간 소외감도 있었지요. 또 거기다 신혼 때였는데 집사람하고 같이 대전에서 전국 추수감사제를 하고 오다가 내가 교통사고를 당했어요. 보은재 꼭대기에서 버스를 세우고 내려서 먹거리를 사러 버스하고 버스 사이를 가로질러 가게로 가다가 차에 받혀서 공중으로 붕 떴다고요. 다행히 타박상만 입었지만 그날은 거기서 못 오고 보은 성모병원에서 집사람하고 있다가 왔어요. 죽다 살았지요. 그때는 농민회 총무를 하려는 사람도 많았어요. 81~83년도 까지 우리 애 둘 낳을 때까지는 정말 열심히 활동 했지요. 73년도 제주도 군대 생활부터 76년 시작한 농민회 활동까지 십여 년 동안 담금질하고 운동질 한 거지요. 정호경 신부님이 풀려나와서 안동 농촌 복음화 활동을 외국에 알리고 외국의 원조를 얻어서 1981년에 용상동에 농민회관을 지었거든요. 그때까지 아직 한국에는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았어요. 오원춘 사건 해결이 잘돼서 두봉 주교님이 추방 될 뻔한 것도 교황청에서 추방 안하도록 정치를 하고 또 나폴레옹 훈장도 받으시고. 이제 이쯤이면 내가 아니라도 저절로 굴러 갈 것이다 하고 생각했어요. 또 내 주위에는 같이 활동할 뿌리가 없었어요. 여기서도 내까지 네 사람이 쌀 생산비 조사를 했어요. 함창 조사보고대회 할 때까지도 동행한 사람이 있었는데 이런저런 일로 끝까지 같이 하진 못했어요. 극과 극은 상충하거든요. 그러면서 들어간 게 안동 그리스도의 교육 수녀원이에요. 송현동에 가면 군부대 쪽에 큰 건물이 있어요. 상지대 앞 율세동에 있던 것을 건평 700여 평에 5층 건물을 지어서 옮겨간 거예요. 거기 터 닦기 전부터 다 지을 때까지 관리하면서 여러 일을 했어요. 애들 셋을 데리고 집사람하고 거기 사택으로 들어가 버리니까 농민회 운동하고 자연스럽게 차단이 된 거죠. 내 하는 일이 있기 때문에 못가고 농사 지어가며 일을 하니 또 못가고. 일요일은 수녀님들 태워서 미사 보러 가야 되기 때문에 못가고. 수녀님들을 상지대학까지 출퇴근 시키는 미니버스 기사도 한 일이년 했어요. 그래도 명분 있는 시위나 모임에는 가서 멀리서 봤죠. 저 정도면 내가 없어도 되겠구나 하고. 안계 소몰이 행진이라든가 전두환 말년 노태우 들어설 때 안동 6월 항쟁 직선제 쟁취 시위라든가 그럴 때는 참여했어요. 수녀원에서 일 년 반 정도 있다가 나와서는 아이들 교육이며 농사일에 전념하면서 자연스럽게 농민회 활동과 멀어졌어요. 진짜 농민으로 돌아와서 농사일에만 전념하면서 여태 산거지요. 1987년 1월 8일 송현동 그리스도의 교육 여자 수녀원 신축 당시 관리인으로 근무할 때. 농민회원 칠순잔치를 계기로 30년만에 다시 만난 가톨릭농민회 동지회 그러다가 2015년 7월 27일에 농민회원 ‘칠순잔치’에 참석하면서부터 활동을 다시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농민운동 시작했던 사람들 얼굴 하나라도 보려고 갔지요. 예천 풍양농촌선교성당에서 안동연합회 회원 중에 70살 이상 되는 사람 회갑 잔치를 했다고요. 혹 옛날에 같이 운동했던 사람 하나라도 볼 수 있을까 하고 집사람하고 갔어요. 삼십 몇 년이 지난 뒤에. 그 안에 소식은 잘 모르고 교회 소식지로만 들었지요. 대구경북연합회 창립회 때 온 사람이 한 사람도 없어요. 아는 사람도 없고. 그런데 안동연합회에 처음 농민교육 받을 때 사진이 한 장 있더라고요. 내가 들어있는 사진이. 그 교육 받을 때 옷이 함평 고구마 사건 때 입었던 그 재건복이래요. 정재돈 씨, 이길재 씨도 나오고 정호경 신부님도 나오고 하는 그 사진을 걸어놨더라고요. 얼마나 반갑던지. 칠순잔치 있고 얼마 안 있어 백남기 농민 물대포 사건이 터졌어요. 왜 그 많은 노동자 시위 중에 하필이면 가톨릭농민회냐고요. 가톨릭농민회는 권익운동도 하고 시위를 세게도 안한다고 이제는. 생명공동체하고 우리 먹거리하고 친환경 농사의 근본적인 문제 이거만 하지. 전에처럼 안하는데 왜 하필 백남기 형제가 죽느냐 말이라. 농민회원이 혼수상태에 있다는 그 소식을 접하고 안타까워하고 있는데 처음 농민회를 창설했던 동지들이 전부 다 모이는 동지회에서 그때 당시 임원들한테 SNS로 연락이 왔어요. 전국 동지회 회장은 이길재 씬데 전·현직 농민회원들을 모아서 긴급 동지회를 연거죠. 서울 의과대학 병원 옆에 도산 안창호 흥사단 회관에서 한다고 해서 안동 동지회 회장 배용진 씨, 진상국 씨, 사무실에 강성중 씨하고 실무자 하고 대여섯이 올라갔어요. 가니까 전국 교구에서도 안동 교구가 인원이 젤 많더라고요. 그만큼 농민들이 겁을 먹어가지고. 초창기에 전국에서 봤던 얼굴들 삼십 몇 년 만에 첨 본거지요. 어떻게 하면 이 일을 풀어나갈 것인가 하는 회의를 오후 5시에 시작해서 밤 깊도록 했어요. 서울대 병원 앞에서 미사도 드리고요. 병원 마당 앞에서 상태만 듣고 병실은 못가보고 한 40~50명 모였죠. 가서 보니 겁먹을 것도 아니다 싶어 그 담에 또 각 분회에서 빈소를 지키고 성금도 하고. 안동에서도 백남기를 살려내라 하고 여러 번 시위를 했잖아요. 그러고는 오늘날까지 새로 들락날락거리면서 촛불 들러 가고. 그러니 그때 동지회를 안 하고 전국의 동지들을 안 불러 모았으면 처음에 난 그날만 가고 안 갈라 그랬어요. 그런데 두 번, 세 번 가게 되더라고요. 그 뒤로 한 번도 안 빠지고 교류를 하고. 한겨울에 박근혜 하야 촛불 집회를 안동 조흥(신한)은행 앞에서 했잖아요. 촌에서 한 번도 안 빠지고 차타고 혼자 갔잖아요. 누군지 모르도록 얼굴 안 나타내려고 혼자 갔어요. 간간히 SNS에는 다녀온 사진 올리고. 첨 집회 할 때 가수들이 한영애가 부른 조율을 불렀다고요. 그걸 동영상을 찍어서 SNS에 올리고 시위 하는 것도 올리고. 이듬해 박근혜가 끝날 때까지. 박근혜가 구속되고 난 뒤에 2차 동지회를 안성 미리내 성지 옆에 있는 전국 농업협동조합 임원 연수원에서 했어요. SNS 시작한 계기도 백남기 사건 때 동지회 사진을 찍고 그 사진을 첫 번으로 올리면서 부터예요. 첫 동지회 때는 궁금하던 이병철 씨는 올 줄 알았는데 안 왔더라고요. 오원춘 사건 때 워낙 열성적으로 했고 6월 항쟁을 전국적으로 진두지휘 한 사람이거든요. 시집을 4집인가까지 냈어요. 전국 동지회 회장 이길재 씨도 그렇고 이제는 여든 훌쩍 넘은 분들이 많아요. 동지회 모임에 지금까지 세 번 참석하면서 옛 동지들과 다시 교류하고 있어요. 백남기 농민 물대포 사건을 계기로 2015년 12월 8일 서울 흥사단 회관에서 있었던 첫 전국 가농 동지회에 참석. 왼쪽 두 번째부터 최병욱, 서경원, 이길재, 임봉재. 구정회 씨가 찍어서 SNS에 처음 올린 사진. 생명공학(가축 유전자)을 연구하고 있는 막내 자을 씨가 몇 년 전 귀촌해 함께 살고 있다. 땅이 해코지 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며 함평 고구마 사건 당시 농민들은 이런 구호를 외쳤다. ""농민의 피와 땀이 범벅된 고구마가 노변에서 눈비를 맞고 굴러 밟히는 것은 곧 농민이 짓밟히는 것과 다름없다."" 그 현장에서 찍힌 사진 한 장을 사십여 년 만에 인터넷 검색을 통해 발견하고 SNS에 올렸던 게 계기가 되어 구정회 씨의 초기 가톨릭농민회 활동이 지인들에게 알려졌다. 진땅을 다지며 밟고 지나간 숱한 발자국의 흔적처럼 지워졌을지도 모를 그의 인생 이력들을 다시 끄집어낼 수 있었다. 구정회 씨는 시간이 오래 되어 본인의 구술이 다소 혼돈이 있을 수도 있음을 염려해서 몇 차례에 걸쳐 기억을 더듬고 자료들을 살폈다. 그러나 ""땅을 재산으로 봐서 다툼을 하거나, 무시하거나, 해롭게 해서는 절대 안 된다. 땅이 해코지 한다.""던 정호경 신부님의 생전 말씀 하나는 선명하게 가슴에 새기고 살아왔다. 역사적으로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의 몰락 이전에는 분노한 농민들의 봉기가 있어왔음을 그는 강조했다. 땅은 농민이며 농민은 곧 땅이므로 땅이 해코지 당하지도, 해코지 하지도 않는 세상을 그는 여전히 꿈꾼다.(글/ 신준영 5longgol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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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 와룡 농사꾼 구정회 땅이 해코지하지 않는 세상을 꿈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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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술생애사]고추 팔아 카메라를 산 농사꾼 안동시 임동면 마령리 사는 문병태
- 2019년 안동예천 근대기행은 생생한 르포취재를 통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의 궤적을 다룬 <구술생애사>와 안동과 예천 두 지역의 역사와 문화, 생활사의 근간이 되는 ‘마을’을 테마로 한 <우리 마을 이야기>를 그려낼 예정입니다. 그 첫 번째로 임동면 마령리에 사는 농사꾼 문병태 씨의 삶의 발자취를 따라가 봅니다. -편집자 사람들은 모두 무언가 자신만의 흔적을 세상에 남긴다. 각자가 가진 그릇만큼, 살아낸 이력만큼의 흔적이 세상에 남는다. 저마다의 삶은 비슷한 듯 보여도 다르고, 각자가 살아내는 삶의 결이 다르듯 남겨지는 발자취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세상에는 자기가 걸어온 삶의 결을 따라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사람들이 있다. 호모 아키비스트, 호모 스크립투스……. 흔적을 기록으로 남기는 사람들 말이다. 지극히 주관적이고 개별적인 흔적을 기록하려는 인간의 의지가 그 말 속에 담겨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임동면 마령리에 사는 문병태는 사진으로 흔적을 남기는 사람이다. 자신이 찍은 사진으로 살아온 발자취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임동면 마령2리 사는 문병태 문병태는 1932년생으로 올해 우리 나이로 88세, 집 나이로는 89세다. 임동면 마령 양지마에 살다가 임하댐 건설로 예전 마을이 물에 잠긴 후 마령리 언덕 위에 집을 옮겨짓고 살고 있다. 장가를 두 번 갔고 올해 81세 되는 부인 김순조와 딸 둘, 아들 여섯 팔남매를 두었다. 문병태 어른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임하면 신덕에 사는 문원갑 어른 때문이었다. 책이며 기록에 관심이 많은 원갑 어른과 마동에 있는 남평문씨 재사 모선재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모선재 앞집에 사는 문병태 어른이 찍었다는 사진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집 전화번호 하나만 들고 우선 길을 나섰다. 병태 어른을 찾아가는 길에 들른 중평을 지나 마령1리 마을에서 만난 분들은 ""병태 그 사람 집에 오래된 사진이 더러 있을 거라.""고들 했고, 마령2리 들머리 이식골 동네 정자에 앉아 쉬고 있던 어르신은 ""저 모퉁이 돌면 바로 그 사람 집이지마는 문병태 그 사람은 지금 저기서 농약 치고 있어. 저짜 삼거리서 차를 돌려서 밭으로 가 보든지.""하며 도로 건너 아래 보이는 밭을 손으로 짚어주셨다. 그래서 더운 여름, 태양이 내리쬐는 오후 1시가 넘은 한낮의 시간 고추밭에서 문병태 어른을 처음 만났다. 고추밭으로 찾아가 대뜸 살아오신 이야기를 듣고 싶다 하자니 염치가 없는데 병태 어른이 나는 그런 기록할 만한 인물이 못된다고 손사래를 치신다. 그러다가 혹시 옛날 흑백사진들 찍어놓으신 게 있다고 들었는데 구경 좀 할 수 있느냐고 하자 그제야 얼굴이 펴진다. ""사진이야 보여줄 수 있지. 그러만 좀 있다 집으로 오시소. 약 다 치려면 한 삼십분쯤 더 걸릴 긴데 나중에 집으로 오시소.""한다. 양지마쪽에서 바라본 음지마 문병태 씨네 방앗간.가운데 보이는 건물이 방앗간이고 오른쪽이 살림집, 왼쪽에 이발관이 있었다. 음지마 집 마당 문병태 씨네 가족 그렇게 삼십분 뒤 찾아간 집에서 병태 어른이 찍은 오래된 흑백사진들을 보게 되었고 사진에 얽힌 이야기는 자연스레 병태 어른이 살아온 인생 이야기로 이어졌다. ""나는 사진을 제대로 배운 적이 없어서 그냥 내 맘 내키는 대로 찍고 그랬어요. 나이 들고 요즘 와서 내 딴에는 정리를 한다고 해 봤는데 별로 기록될 만한 게 없어요. 이 사진은 이 사람도 모르게 찍은 거거든요. 나는 사람들이 알게 잘 안 찍었어요. 찍히는 사람도 모르게 찍은 게 많아요. 그런데 작품이 될 만한 의미 있는 사진은 별로 없어요.""라는 말과 함께 병태 어른 손이 사진을 붙여 놓은 낡은 노트를 한 장씩 넘겼다. 그렇게 병태 어른의 사진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내가 처음 카메라를 산 게 열다섯 살 때였어요. 사무카라고 일본에서 나올 때 사가지고 왔어요. 흑백필름 사진 요거는 그 사무카로 찍은 거야. 우리 아부지가 일본에서 살았기 때문에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 열다섯까지 살다 해방을 앞두고 1945년 그해 3월 10일 날 한국에 나왔어요. 일본 교토시 후시미쿠에서 살았어요. 아부지 고향인 안동으로 온 거지요."" 그가 1945년 3월 10일을 지금도 어제 일처럼 똑똑히 기억하는 것은 한국으로 온 그해 그의 생이 극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음지마 골마 집앞에서 막내 아들을 안고 있는 문병태 씨와 두 딸. 왼쪽에서 두 번째가 큰딸 경자 씨. 음지마 옛집 마당. 오른쪽에 모친이 삼던 삼줄기가 걸려 있다 해방과 6.25를 겪으며 어른이 되다. 병태 어른은 열다섯 살 때 마령리로 왔다. 해방되기 다섯 달 전이었다. 그리고 그해 가을 혼인을 했다. ""일본에서 나온 그해 열다섯에 결혼 했어요. 그런데 열아홉에 첫 애 낳고 얼마 뒤에 집 사람이 안동에서 연탄가스 채서 죽었어요."" 일찍 장가를 들어 가장이 된 병태 어른은 돈도 벌어야 했고 한국말도 배워야 했다. 늦깎이로 학교를 가려고 해도 우리말을 모르니 학교를 갈 수가 없었다. ""한국 나왔는데 동생하고 내하고 둘 다 한국말을 하나도 몰랐어요. 엄마, 아부지, 이 정도만 알지 15년을 일본말만 배우고 일본에서 소학교 졸업하고 고등과에 진학해 다니다가 왔는데 한국 와서 졸지에 바보가 돼버린 거지요. 아버지는 그전에 미리 나와서 안동서 사업하다가 망하는 바람에 식구들이 고생을 많이 했어요."" 알아야 면장을 해먹는다는 말처럼 뭐라도 해서 먹고 살기 위해서라도 우선 까막눈을 면해야 했다. 다행히 해방이 되고 이웃동네 마째(마령리 고개 너머에 있던 동네 맛재)에 있던 명작관에서 그동안 잊어버렸던 한국말을 가르쳐주는 강습반이 생겼다. ""명작관에서 가갸거겨 부터 배웠어요. 명작관은 원래 일제 강점기에 목화를 재배해서 면포를 생산하려고 장려하기 위해서 지은 집이었어요. 거기서 해방 후에 우리말과 글을 가르친 거지요. 마재 살던 류씨 어른이 한글을 가르쳤어요."" 그때 15일 동안 배워서 독학을 하다시피 한글을 익힌 탓에 아직도 이응, 니은 받침이 잘 안 된다는 병태 어른은 기역, 치읓 같은 받침이 헷갈린다고 했다. 다행히 일본말이 한자로 되어 있는 게 많아 한문을 좀 알았던 까닭에 밤으로 동네 풍호 어른께 천자문을 배우러 다녔다. ""그 어른이 하늘 천~ 하면 내가 따라 하는 데 한국말이 서툴다 보니 하날 천~ 그러면 '이놈! 하늘 천이지 하날 천이 뭐로?'하시며 혼을 내고 그랬어요. 얼마 못 배우고 야단만 맞다 쫒겨 났어요. 그러다가 군대 갔다 와서 밤으로 이웃 동네 금사홍 씨 증조부 되는 분한테 다니며 한문을 다시 배웠어요."" 제대로 된 공부는 못했지만 그래도 그게 살아오는 데 밑천이 되었다. 지게에 나무를 해서 오는 육촌형님 그의 나이 열아홉에 첫 아이를 낳았고 얼마 안 돼 전쟁이 코앞으로 닥쳤다. 마을에 빨갱이들이 들어온다는 소문이 돌았다. 장성한 남자들은 마을 뒷산으로 피했고 병태 어른도 집 뒤 산꼭대기에 숨어 있었다. 그러다가 전쟁이 일어났고 한국전쟁 기간에 그는 군대에 있었다. ""강원도 군부대서 복무했는데 제대해서 나중에 그때 친했던 동기를 찾아서 만났어요. 내하고 동갑이고 6.25때 화염방사기를 담당했는데 불이 나서 얼굴에 화상을 입었어. 내가 찾아서 만나고 서로 내왕을 했지. 내랑 동갑인데 지금은 죽고 없지."" 그때 생사를 같이 했던 오랜 친구는 먼저 가고 그에게는 국가유공자라는 이름이 남았다. ""우리 누이가 일본에 시집가서 열일곱에 아들 낳고 복막염으로 죽었어. 그 누이 아들이 찾아와 모친 사진을 보고 싶다고 하는 걸 없어서 못 보여준 것이 미안하지. 원래는 누이 사진이 나한테 있었는데 첫 마누라 죽고 나서 일본서부터 그때까지 찍은 사진을 다 태워 없애버려서 예전 사진이 하나도 안 남았어. 두고두고 미안했지."" 그 죽은 누이의 유골을 귀국할 때 가지고 와서 남의 산에 몰래 묻었다. 흔적이 희미해져 무덤조차 찾아주지 못했다고 했다. 용상동 집에 같이 살던 다섯집 엄마들과 아이들 용상동에 집을 짓고 다섯 식구가 살던 시절 병태 어른은 손재주도 좋았고 그 시절 카메라로 사진을 찍은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감각도 있었다. 젊은 시절, 그는 타고난 감각과 손재주를 살려 목수 일을 배웠다. 지금의 부인인 순조 할매와 재혼을 하고 목수 일로 돈을 벌어 식구들을 먹여 살렸다. 대목이 되어 전국으로 집을 지으러 다녔다. ""저 아래 남쪽에서부터 멀리 경기도 안양까지 집 짓느라 전국 안 댕기는 데 없이 다 돌아댕기며 객지생활 많이 했어요. 그런데 마지막에는 결국 뿌리 내린 고향으로 왔지요. 안동 와서 용상동에 터를 사서 집을 지었어요. 집을 짓고 남는 방과 문간방을 달아내어 세를 줬는데 네 집이 세를 들어서 다섯 식구가 한 집에 살았어요."" 그 집에서 10년을 살았다. 다들 고만고만한 살림이었지만 같이 아이들을 키우고 먹을 게 있으면 나눠 먹으며 살던 시절이었다. 용상동 집에 살던 다섯 집 식구들과 아이들 키우며 살던 모습이 사진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우리 집에 세 들어 사는 사람들이랑 이웃인데 여기 애들이 바글바글 하잖아. 우리 첫째 경자가 얼라 때 찍은 사진이래."" 파출소장집 아들딸, 목수집 아이들, 장사하는 집 아이도 그 집 마당 안에서 함께 자랐다. 용상동 집에서 아이들의 여름 물놀이 용상동 살 때 물놀이 간 여름날의 문병태 김순조 부부 당차고 야무졌던 순조 할머니 순조 할머니는 상처한 병태 할아버지와 결혼을 하고 팔남매를 낳았다. ""나는 칠남매 중 첫째래. 여동생 하나 남동생 다섯. 남동생들 다 업어 키웠지. 시집와서 딸 넷, 아들 넷을 여기 경자 놔두고 칠남매 다 공부시켜 시집장가 보냈어. 저 양반은 애들 시집장가 보낼 때 본인이 직접 며느릿감, 사윗감 다 가서 보고 결혼시켰어. 내하고 둘이 가서 멀리서 얼굴 보고 오기도 하고 당신이 미리 선을 보고 결혼시켰어. 다들 탈 없이 잘 살아주니 고맙지 뭐."" 새댁 김순조(오른쪽에서 세 번째)와 동네 부인 다섯이 신랑들 몰래 포항 바닷가 놀러간 사진. 동해안 철책을 지키던 군인이 같이 기념촬영을 해주었다. 젊어서는 신랑 모르게 동네 새댁들을 이끌고 동해바다로 놀러도 갔다. 새댁들이 신랑 없이 멀리 놀러가는 건 상상도 못하던 시절이었다. ""이거가 우리 할마이가 나 모르게 놀러간 사진이래. 내한테 이야기 안 하고 포항 놀러간 거래요. 그때만 해도 옛날 아닙니까? 여자들끼리 간다 그러만 안 보내줬지요."" ""마카 신랑들한테 말 안하고 우리끼리 놀러간 거래. 포항 가서 회도 먹고 바닷가도 가고 경주 가서 자고. 안 보내주니까 우리끼리 그래 갔지. 내가 가자고 그랬거든. 내 따라 다 나섰지. 지금은 하마 팔십 하나지만 그때는 젊었고 놀러는 가고 싶고 한데 신랑이 안보내주니까 말 안하고 갔지."" 몰래 놀러갔다 온 부인 사진도 고이 간직했다 정리해 놓은 병태 어른은 순조 할머니도 인정하듯이 사진이 유일한 취미로 술, 담배도 안 하고 누구처럼 여자 걱정도 안 시켰다. 오로지 시간만 나면 사진기 들고 사방팔방 쫓아다녀서 그렇지 딴 걱정은 시킨 적이 없다고 했다. 그래서 고추 판 돈에서 백오십만원이라는 거금도 선뜻 내어준 것이었다. 식구들 건사 잘 하고 다른 속 안 썩이는 남편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챗거리장터에 간 부인 김순조.새옷을 입고 분과 액서세리를 파는 가게 앞에서 물건을 고르고 있는 모습에 셔터를 눌렀다. 인생의 숨구멍이 되어준 사진 취미 팔남매 키우느라 일도 많이 했고 고생도 했지만 그래도 참 부지런히도 살아낸 세월이었다. 고된 가운데서도 팔남매 데리고 울고 웃으며 그 큰 고개를 무사히 넘어왔다. 인생의 고갯길 그 고된 일상 속에서 한줄기 숨 쉴 구멍이 그에게는 카메라와 사진이었다. ""찍을려고 생각하고 찍는 게 아니고 보고 괜찮겠다 싶으면 그냥 찍었어요. 순간적으로 이거 물건 되겠다 싶으만 찍고 그랬어요. 이유가 없어요, 그저 내 하고 싶어서 찍은 거뿐이래요."" 찍힌 사진을 보면 그 시절 가졌던, 그 사진을 찍었던 카메라를 알 수 있다. 그가 열다섯에 가졌던 첫 카메라 사무카, 두 번째 카메라 미놀타, 그리고 삼성에서 나온 카메라로 찍은 사진들이 각기 그 시간들을 이야기해 준다. 지금 가지고 있는 삼성 콤팩트 디지털카메라는 생일에 자식들이 선물해준 것이다. 다섯 번째 카메라이다. 그 세월에 많은 숫자가 아니다. 그러나 팔십팔 년 살아온 세월 동안 방앗간에, 목수일에, 마령들에서 농사짓는 농부로 살면서 카메라가 그 수명을 다할 때쯤에야 또 다른 카메라를 사서 고된 농사 일 틈틈이 사진을 찍은 병태 어른 입장에서는 결코 작은 숫자가 아니다. 고추 팔아 카메라를 사다 사는 게 넉넉지 않았던 시절이라 취미로 사진을 찍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저 할마이가 내가 자꾸 뭐 이래 찍고 돈도 많이 들고 하니까, 고마 일부러 카메라를 널짜 부랬어요. 내가 그때도 그랬고 아직까지 사진 찍어주고 남한테 돈 일 원 한 푼 받은 역사가 없어요. 어디 갔다 오니까 카메라 케이스가 깨져 있어요. 근데 이거 왜 이렇노? 하니까 실수로 널짜 부랬다고 그래요. 할마이가 일부러 그런 거 알았지만 아무소리 안 했지요."" 담배 조리하는 음지마 동네남자들. 그때만 해도 담배조리 일은 주로 마을 남자들이 했다. 목수 일을 배워 대목이 된 문병태 돈도 돈이고 사진 찍는다고 바깥으로 도는 남편이 원망스러워 그런 것인 줄 알아 한참을 군소리 없이 지냈다. 그렇다고 사진을 찍고 싶은 마음까지 없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그 뒤로 한 2년 카메라 없이 살았지요. 그 뒤로 어디 가면 사진관 가서 돈 주고 카메라 빌려서 가고 그랬지요. 그러다가 한 2년 후에 그래 고추가 잘됐어. 그때 돈으로 백만 원을 주잖아요.” ""백오십만 원 줬잖아요."" ""백만 원 주고 미놀타 카메라를 사고, 망원렌즈를 50만 원 주고 또 샀어요. 150만 원 들여 카메라를 장만한 거지요. 그걸로 찍다가 내 나이가 오십 넘어 육십 다 되어 갈 때 디지털 카메라가 나와서 지금 디지털 카메라만 세 개 째니더. 그거는 카메라가 좀 무거웠지. 미놀타로 필름 사진을 찍다가 삼성에서 디카가 나온 뒤로 디카만 세 개째 바꿨어."" 농사꾼이다 보니 아무래도 흙먼지며 트럭 뒷자리며 환경이 녹록지 않은 탓이었다. 그걸로 내 딴에는 찍어두면 좋겠다 싶은 거, 그의 눈에, 마음에 꽂히는 게 있으면 사진을 찍었다. 이제는 스마트폰이 나와서 휴대폰으로도 찍는다. 지금도 새로 나온 카메라를 보면 욕심이 나지만 참는다는 병태 어른이다. ""다 늙어서 갈 날 얼마 안 남았는데 이제 새로 사서 뭐하니껴? 지금 있는 사진기로도 온갖 사진 다 찍는데요."" 하면서 눈으로 동의를 구하며 맞장구를 치는 것이 병태 어른이 다짐을 주어도 순조 할머니는 안심이 안 되는 모양이다. 그래도 사진 좋아하는 영감이 식구들하고 어디 갔다 온 거며 젊을 적 할매 모습은 물론이고 친정붙이들하고 찍어준 사진이 많아 한 번씩 모이면 옛날이야기를 하며 웃음꽃을 피우곤 한다고 했다. 담배파종기를 들고 있는 총대(작목반장)와 담배 재배 지도사를 촬영한 사진 담배파종기를 들고 있는 총대(작목반장)와 담배 재배 지도사를 촬영한 사진 병태 어른이 사진을 찍는 기준은 물건 되겠다 싶은 결정적 찰나의 순간을 포착해내는 것이다. ""어디 지나가다가도 물건 되겠다 싶으면 순간적으로 찍는 거예요. 진짜 찍고 싶은 거는 비행기가 추락하듯이 뚝 떨어지는 거, 교통사고 같은 찰나의 순간 그런 거지. 그런데 그런 거는 잘 없어. 그래도 순간적으로 내 눈에 들어오는 거, 찰나의 순간, 내가 찍고 싶은 거, 그런 거를 주로 찍었어. 찍히는 사람들 모르게 자연스러운 순간을 많이 찍었어요."" 마당에 곡식을 고르는 할머니와 어린 손자를 멀리서 찍었다. 그의 사진에는 잔칫날 아지매들의 번다한 수다까지 담겨져 있다. 자연스럽게 생활하는 모습을 찍으려고 하다 보니 얼굴이 잘 안 나오는 사진도 많다. 그 대신 병태 어른이 찍은 사진 속 인물들은 자연스럽게 웃고 있는 모습이 많다. 잔칫날 부침개 부치며 웃는 아지매들의 번다한 수다가 있고, 막걸리 한 잔 하며 나누는 새참의 여유가 있고 소낙비 오는 날 부산하게 빨래를 걷는 모습이 눈앞에 생생하다. 다섯 식구가 모여 살던 용상동 시절의 사진은 우리들을 순식간에 그 시절의 어디쯤으로 데려간다. 수몰 전의 양지마와 새터, 골마를 찍다. 임하댐 건설로 물에 잠기기 전 마령2동 음지마 임하댐 건설로 물에 잠기기 전 마령2동 양지마 덕골 임하댐 건설로 물에 잠기기 전 마령2동 이식골. 이식골도 건너 언덕 위로 옮겨 앉았다. 임하댐이 만들어지면서 저지대에 있던 임동면 마령면의 옛 마을들이 물에 다 잠겼다. 물들기 전에는 3개 부락이 살았던 마령2동이었다. 양지마, 새터, 골마. 지금 집에서 강 건너 보이는 곳이 옛 동네다. 다리가 만들어지고 길이 새로 닦이고 마을의 집들이 한 집 두 집 비어갈 때 병태 어른도 옛집과 담배창고를 허물고 그 흙을 가지고 언덕 위 새 터에 보상받은 돈으로 집을 지었다. ""이게 삼십여 년 전이지 싶니더. 임하댐 되면서 집 새로 옮겨지었으니까. 터 닦고 내 손으로 일일이 다 지었지요."" 집 짓는 과정도 사진으로 남겨두었다. 집을 짓기 전 남평 문씨 재사 모선재부터 옮겨지었다. ""원래 종택은 남후면으로 이건했고요. 그래도 양반이라고 구색을 갖추고 조상님께 제사 지낸다고 저 아래 있던 모선재 재사 건물을 내가 이 집 뒤 언덕에 옮겨 새로 지은 거지요. 서까래며 건물이 다 내려앉을 정도로 오래되어서 새로 지었어요. 지금도 시월에 문중 사람들이 모여 제사를 지내지요."" 수몰을 앞두고 손수 집을 옮겨짓고 있는 모습. 새로 놓인 다리 아래로 물이 차오르고 마을 집들이 잠기는 것을 지켜보며 사진을 찍었다. 임동 다리가 놓이고 물에 집들이 잠기는 모습도 사진으로 찍어 두었다. ""이때만 해도 벌써 사진기 가진 사람들이 많아서 내 말고도 당시 사진들이 많을 거래요. 마령 동네 물들기 전 시절의 사진들이 상자 속에 남아 있을 거예요."" 많이 없앴지만 그래도 따로 갈무리해 둔 것 중 유독 기억에 남는 사진이 있다. 마을의 장례사진. 대소사를 가리지 않고 열심히 기록했다. 사진 한 장이 만들어낸 모녀상봉 ""작년에 이 사진 때문에 좋은 일이 있었어요. 가까운 사람 중에 개가를 한 사람이 있어요. 딸이 하나 있었는데 대구로 가서 살다가 어릴 때 소식이 끊겼는데 다 커서 여기로 찾아왔어요. 그때 '너 어매 사진이 나한테 있다' 그러니까 '자식 버리고 간 엄마 필요 없다'고 안 봐요. 재작년 설에 내외가 인사치레를 왔길래 내가 컴퓨터 안에 저장해 놓은 사진을 꺼내놓고 사위하고 앉혀 놓고, '이리 와 봐, 이제는 엄마 사진 한 번 봐도 안 되나?'하며 보여주니까 그래도 외면하고 안 봐요. 그런데 신랑 되는 이가 폰을 꺼내더니 그 사진을 담아 가더라고요. 그 딸이 벌써 오십이 가까워 오는 나이래요. 그런데 얼마 전에 엄마를 만났다고 연락이 왔어요. 그 엄마 사진이 6장이었는데 그 사진들을 담아가더니 찾아간 모양이래요. 만났다고 하더라고. 이게 내가 그래도 카메라 들고 댕겼던 인생에서 보람되는 가장 남는 한 가지 아닌가 싶어."" 모녀 상봉의 계기가 된 사진. 어머니의 시집올 때 사진이 딸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을까. 요즘 병태 어른이 틈나면 하는 일이 사진을 정리하는 것이라고 한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나이가 들면서 흑백사진들은 점차 상하고 흐릿해 지는데다 본인이 죽으면 아는 사람도 없이 쓸모없어질 거다. 큰 자료가 되지는 못하겠지만 다른 사람들이 보고 내용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혼자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옛날 가족사진을 한참 전에 CD로 구워놓은 것도 있지만 컴퓨터 본체 안에 꽂힌 채 들어있는데 고장이 나서 먹통이 되어 뺄 수가 없다고 한다. 다행히 없애지 않고 남아있는 흑백 사진들을 공책에 붙여서 정리를 해놓은 게 있었다. 오래되어 사진 상태가 좋지 않은 것도 있었지만 병태 어른이 정리해 놓은 사진 속에는 마을 사람들과 마을이 살아온 이야기가 있었다. 문병태의 마을 기록_ 마을 잔칫날 문병태의 마을기록_솥뚜껑에 전 굽는 아낙 문병태의 마을기록_새마을운동이 한창이던 무렵 마을 공동작업을 하는 마령리 사람들 취미로 남긴 농사꾼의 생활기록 인터뷰를 마치며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남을 찍어주는 건 좋아해도 본인이 사진 찍히는 건 어찌나 어색해 하는 지 한사코 사양을 하시는 걸 간신히 허락을 얻어 찍었다. 한낮에 농약을 치고 들어와 제대로 씻지도 않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부끄러워 하셔서 흑백 프레임으로 찍은 한 장이다. 임동 챗거리 장터에서 젊은 시절의 문병태 돌아 나오는 길, 그저 사진 찍는 게 좋아서 찍었다는 병태 어른의 말이 마음에 남았다. ""옛날에는 임동면에서 그래도 부자소리 들어야 사진이라도 남아 있고 하지 서민들은 사진 찍어놓고 그럴 생각을 못하던 시절이 있었어요. 그런데 나는 부자도 아니었지만 내가 좋아서 어려운 형편에도 내 돈 써가면서 사진을 찍었어요. 누가 시키면 못하는데 그저 내 좋아서 취미생활로 그런 거지요. 한 가지 내 같은 사람이 찍은 사진은 잘 찍지는 못했지만 전문적인 사진사가 찍지 못한 그런 게 있거든요. 내만 찍는 사진, 그게 사진 찍는 재미가 아닐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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