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윤병구 [1880~1949] |
1905년 7월 12일, 선생은 미국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러일강화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해 달라는 내용의 청원서를 제출하고자 이승만과 함께 워싱턴으로 가서 직접 청원서를 전달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미국 정부는 일본과 비밀조약을 체결해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를 묵인한 후였다.
1907년 8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한국특사로 활동한 이상설과 이위종, 이준 열사의 자결 후 뉴욕에 도착했을 때, 박용만의 주선으로 선생도 이들의 외교활동에 합류하게 되었다. .
이후 선생은 해외 한인들의 단결과 민족운동의 방향을 논의하였고 합방반대운동을 전개하였으며 1912년 11월 대한인국민회 제2대 중앙총회장에 당선되어 각 지방을 순방하며 한인들에게 독립정신을 일깨우기 위해 노력 하였고, 3·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이를 미주 한인사회에 널리 알려 독립운동의 열기를 북돋았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하자, 도미 후 46년 만인 1949년 3월 14일, 이승만 대통령의 초청으로 고국에 돌아 온 선생은 중남미를 비롯한 대한민국정부를 승인한 우방국 방문 친선외교 및 한미간의 새로운 협약이 필요함에 따라 한미협약 작성의 중책을 맡아 밤새도록 혼신의 힘을 기울이다 1949년 6월 20일 아침 갑자기 쓰러져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자료제공 : 안동보훈지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