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계서원(默溪書院)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9호

서수용/한국고문헌연구소 소장

묵계서원(55.0×38.0cm)                                                                                  Oil on Canson Paper

묵계서원은 안동시 길안면 묵계1리 소지명으로 선항(仙巷) 또는 선당(仙塘)에 자리 잡고 있다. 마을 이름이 바로 신선이 사는 곳인데, 그곳에 가보면 그윽한 풍광으로 인해 '신선 동부(洞府)'라는 생각이 든다.

묵계서원은 일반에는 안동김씨 보백당 김계행 선생을 모신 서원으로 알려져 있다. 보백당은 성종 대의 저명한 조정 대신이었으며 청백리에 녹선되었을 뿐 아니라 이조판서의 증직과 불천위의 명(命), 그리고 정헌(定獻)이라는 시호도 내려 안동 본향 출신 안동김씨의 두겁조상이 된 분이다. 서원 주변으로 보백당 선생의 종가와 그 지하의 일가들이 성하게 세거(世居) 하고 있는 것 역시 이곳이 현조(顯祖)인 보백당 선생을 시축(尸祝)한 곳이라는 인상을 풍기기에 충분하다.

그 종가의 18대 종손으로 김해동(金海東)이라는 당대에 저명한 어른이 집을 지키고 계셨고, 그 맏아들로 김주현(金胄顯)이란 이가 나서 경상북도 교육감이라는 중책을 맡기도 했다.

김주현 교육감 시절 경상북도 초중등 교육계에는 도의교육(道義敎育)의 열풍을 진작(振作)시켰는데, 이 또한 청백리가(淸白吏家)의 종손으로서의 가학(家學)에서 나온 정책이 아닌가 한다.

권준 화백이 그린 묵계서원도를 보면서 서원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함에 감회가 새롭다. 묵계서원 복설을 위해 노심초사했던 묵계문중의 큰 어른이었던 김진동(金晉東)씨가 생각나서다.

김진동씨의 사위가 안동 경안여자정보고등학교에 근무하고 있는 권석환씨인데, 필자의 7년 선배라는 인연도 있다. 김진동씨는 선현의 후예다운 품격을 지닌 분이셨다. 청빈한 삶이었지만, 유가(儒家)에서 갈고 닦은 그 분의 유래가 있는 필법은 일가(一家)를 이루어서 향중에서 무수한 봉청과 찬사를 받은 바 있다. 그러함에도 한 번도 글씨에 대한 자부를 하거나 불편해하는 기색을 외인들에게 보이지 않았다.

필자가 편집을 맡았던 안동향교지(安東鄕校誌)의 표지 글씨는 물론 안동향교 석전(釋奠) 홀기(笏記) 일체를 해정(楷正)하게 써서 주시기도 했다. 어느 날엔가 댁으로 김 선생님을 찾아뵈었더니, 읍청루라는 현판 글씨를 쓰고 계셨다. 그리고 그 얼마 뒤에는 보백당 선생의 신도비 비문 글씨를 쓰시고 나서 감회에 젖은 모습을 보인 적도 있다. 여하튼 안동향교와 묵계서원 복설에 있어서 서역(書役)의 대부분을 담당한 향중의 큰 어른이 김진동씨였다.

고인이 되신 김진동 어른을 생각하며 다시 현판 글씨를 쳐다본다. 사당에는 청덕사(淸德祠), 강당에는 입교당(立敎堂), 루(樓)에는 읍청루(읍淸樓), 문에는 진덕문(進德門), 재(齋)에는 극기재(克己齋)라는 낮 익은 글씨가 아름답게 걸려 있다.

이 작품을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묵계서원 읍청루도다. 정면에 웅장한 규모의 읍청루가 있고 그 오른편으로 동재가, 왼편으로는 재사가 살짝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서원 1층 기둥 사이 공간으로 살짝 강당인 입교당 모습도 짐작할 수 있게 되어 있다. 날렵하게 적당히 들린 기와지붕은 그 위로 눈이 시리도록 푸른 하늘과 둥실 떠 있는 구름이 절묘하게 어울려 상쾌한 느낌이다. 

삼십 여 년 전 묵계서원을 찾았을 때의 첫인상은 '삭막함' 그 자체였다. 선현을 배향한 묘우도 마련되어 있지 않았고 그러함에도 강당 머리에 묵계서원이라는 현판이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앞으로 우뚝한 문루도 서 있었지만 동서재(東西齋)며 주사(廚舍)는 아직 마련되지 못한 상태였다. 본래 서원으로 운영되다 훼철을 당하면 사당과 강당, 동서재, 문루 등 제반 건물을 부수게 된다. 현판을 떼서 사가에 보관하거나 위패를 땅에다 묻어야 했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강당에다 서원를 서당(書堂)으로 고친 현판을 걸어서 유지하기도 한다. 그런데 묵계서원의 경우는 훼철된 묘우를 복원해 위패를 봉안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서원이라는 현판을 걸고 있었다. 그것은 예법에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는 훼철된 호계서원(虎溪書院)의 경우에서도 동일하게 볼 수 있는 유림의 잘못이었다.

묵계서원은 일반이 아는 바와 같이 보백당 선생만을 배향한 서원이 아니다. 이 서원은 청명직절(淸名直節)로 이름난 조선시대의 두 선현을 함께 배향한 서원이다. 이 두 분은 모두 문과에 급제해 조정에 나아간 고급관료일 뿐 아니라 학문과 인품으로 인해 생전과 사후에 모두 존경을 받았던 선현이었다. 필자가 이들에 대해 특히 청명과 직절로 이름 한 것은 두 분 모두가 청백리에 녹선 되었기 때문이다.

두 분 모두는 연조가 오래고 사화와 병화를 여러 차례 겪은 때문에 그 학문의 면모를 엿보기엔 남은 저술이 턱없이 부족하다. 그래서인지 두 분 모두는 후대에 이르러 실기(實紀)의 형태로 문집이 발간되었다. 응계옥선생실기와 보백당선생실기가 그것이다.

그중 한분인 응계 옥고 선생은 보백당 보다 49년 선배였다. 청덕사에는 세종 당시의 이름난 신하였던 옥고(玉沽:1382, 우왕8-1436, 세종18)라는 이를 함께 모셨다. 그의 자는 대수(待수), 호는 응계(凝溪)로 감무(監務)를 지낸 사미(斯美)의 아들이다. 일찍 부친을 여의고 모친의 가르침을 따라 야은(冶隱) 길재(吉再) 선생의 문하에 나가 학문에 힘썼다. 정종 원년(1399)에 18세로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집현전에 들어갔고, 정언, 정랑, 장령과 안동통판, 대구부사에 이르렀다. 55세에 세상을 떠난 뒤 사림에 의해 이 서원에 배향되었다. 이것이 선생에 대한 간략한 이력이다.

응계 선생은 보백당과는 달리 안동 출신은 아니다. 그러함에도 이곳과 인연을 맺은 것은 선생이 33세 당시에 안동부를 다스리는 소임인 통판에 임명되면서 부터다. 그는 연소한 나이로 영남의 큰 고을인 안동에 부임해 선정을 폈다. 기록을 보면 태종14년(1414) 8월에 부임해 태종17년(1417) 2월에 떠났으니, 3년에 가까운 재임기간이었다. 

선생은 경남 김해에서 태어나 18살에 문과에 급제했다. 소년등과(少年登科)를 한 셈이다. 그 이력을 보면 야은(冶隱) 길재(吉再)의 문인(門人)이라는 대목이 주목된다. 이러한 학연은 간단한 것이 아니다. 선생이 성균관의 교수가 되어서 제생들에 대한 교도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는 것과, 박팽년 성삼문 같은 이가 모두 당시 성균관의 생도로 그의 교화를 입었을 것이라는 것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는 이력임에 분명하다. 선생은 지방 관료로서도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는데, 5년간 대구고을을 맡아서 선정을 베풀었고 청덕비가 서문 밖에 세워졌다.

선생은 또한 경연에 입시해 경학(經學)을 강론할 만큼 비중 있는 학자이기도 했다. 세종16년(1434, 선생 53세)에 사헌부 장령 당시 경연에 입시해 경전을 강론했다. 서원 건물의 상량문을 지은 제산 김성탁은 응계 옥고 선생의 학문에 대해, '학구천인(學究天人)'이라는 평을 헌사했다. 학문은 천인(天人)을 두루 통찰하였다는 의미인데, 여기서 천인(天人)이란  천리(天理)와 인성(人性)의 준말로, 곧 성리학을 말한다. 이는 당대를 대표한 관인이며 학자였던 제산(霽山) 김성탁(金聖鐸)에 의해, 응계 선생이 도입 초창기인 성리학(性理學)을 철저하게 연구한 학자였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다.

선생은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그래서 선생에 대한 인물평은, '관직에 있을 때는 청백하였고 조정에 있을 때는 정직하였다'로 정리 된다. 학문과 절조를 갖춘 관인(官人)이라 해도 청백리에 녹선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 씨족에서 한분이 나기도 어려운 것이 청백리이다. 청백리는 자손 대대로 이를 명예롭게 여길 뿐 아니라 후손들은 국가적인 예우도 함께 받았다. 향년 55세로 세상을 떠났고 경상도 군위현에 장사지냈다.

선생은 군위 고을 어랑골에 터를 잡아 살면서 그 산수의 아름다움을 좋아해 '응계주인(凝溪主人)'이라고 자호했다. 집 주위에 영귀대(詠歸臺), 조어기(釣魚磯)가 있고 집 주변 좌우에는 석대(石臺)와 암정(巖亭)이 있었다. 안빈수도(安貧守道)하는 삶을 살았다.

선생의 전책(殿策, 책문)과 시권(試券)은 전쟁 중에도 보존되어 있었으나 후대의 화재로 소실되었다 한다. 직강 김계광(金啓光)이, "일찍이 그 책문을 읽어보았더니 의리(義理)를 정밀하게 드러내고 우뚝하게 논사(論事)의 체계와 품격이 다만 과거의 글이 될 뿐 아니라 세상의 글 잘하는 선비라 해도 따를 수 있는 이가 드물 것이다. 참으로 덕이 있는 사람이라야 말이 있다는 것이다."라 한 것으로 보아 소년등과를 했음에도 수준 높은 학문과 문장력을 겸비했던 분임에 분명하다.

이는 아마도 여말선초의 삼은(三隱) 중의 한분인 야은 길재의 문하에서 터득한 학력 때문이 아닌가 한다. 구재(鳩齋) 김계광(金啓光, 1521-1675)은 생원과 진시 그리고 문과에 모두 합격한 풍산 소산(素山)마을 출신 관료요 학자였다. 안동의 전주류씨 도헌(陶軒) 류우잠(柳友潛)의 외손자다. 그는 또한 청음 김상헌과 학사 김응조의 문인이기도 하다.

묵계서원 창건과 유지에는 갈암(葛菴) 이현일(李玄逸) 선생의 셋째아들인 밀암(密菴) 이재(李栽)의 힘이 적지 않았다. 밀암은 75세의 부친을 모시고 신사년(1701, 숙종27) 3월 이곳을 찾았고 그 3년 뒤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보낸다. 당시 갈암은 유배에서 풀려났으나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상태로 묵계와 수십리 떨어진 안동 임하현 금소리에 우거하고 있었다.

금소(琴韶)는 안동 안기역의 지휘를 받는 역(驛)이었다. 금소를 출발해 길안현(吉安縣)을 거쳐 묵계에 당도한 갈암 이현일이 지은 시는 다음과 같다.

유묵계서당(遊默溪書堂)

賓主東南美 손님과 주인은 동남의 이름난 이

江山絶勝區 이곳은 강산의 빼어난 곳이라지

登臨風日好 여기 올라 조망하니 날씨도 좋을시고

造物不猜吾 조물주가 우릴 시기하지나 않을지

거두절미하고 갈암은 묵계서당의 아름다운 풍광을 담담하게 노래했다. 이는 그림으로 설명하면 해맑은 색으로 그린 수채화와도 같은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갈암은 이조판서 직에 있다가 당파의 와류에 휩쓸려 수년간 남북의 극지를 오가며 유배라는 참담함을 맛본 심신이 극도로 피곤한 상태였다.

그런 자신이 잠시나마 신선이 사는 마을이라는 묵계의 선항을 찾아 응계 옥고와 보백당 김계행이라는 선배를 만나 정신적인 교감을 통해 위로하고 위안 받는 시간을 가졌을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담담한 시어를 구사하고 있어 그 수양의 깊이에 감탄할 따름이다.

묵계서원은 서원 묘우에서 봄가을로 받들고 있는 유림들의 향화(香火)를 통해서 그 명맥이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필자는 한편으로 안동 김씨 보백당장학문화재단(이사장, 김주현)의 활동을 눈여겨보게 된다. 서원의 설립 목적은 크게 선현을 높이는 것과 인재를 양성하는 것에 있다. 오늘날의 서원의 위상은 어떠해야 하나? 존현(尊賢) 즉 춘추로 배향한 선현에 대해 제사를 받드는 일 역시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그 보다 인재를 양성하는 일은 거의 그 기능을 멈춘지 오랜 경우가 허다하다.

서원은 현대화의 길을 부단히 모색하기도 한다. 도산서원 부설로 만든 선비문화수련원을 통한 교육 사업은 오늘날 서원의 위상을 보여주는 모범적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병산서원에서 부정기로  실시하고 있는 사회교육 역시 하나의 좋은 사례일 수 있다. 여기에 더해 1993년부터 보백당의 후손들을 중심으로 시작한 보백당장학문화재단의 장학 사업은 또 다른 서원교육 현대화 운동의 모범사례로 알고 있다.

묵계서원에서 묵(默)자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주역 계사에 보면, '침묵하여도 이를 알고, 말하지 아니하여도 믿는다' 즉 묵이성지(默而成之) 불언이신(不言而信)이라는 문자가 있다. 묵이성지라는 것은 성인이 후인들을 가르치기 위한 방법이었다.

공자의 말씀을 담은 다른 문자도 있다. 중용장구(中庸章句) 제27장에 보면 "나라에 도가 있을 때에는 그 말이 몸을 일으키기에 족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그 묵묵함이 몸을 용납하기에 족하다(國有道 其言足以興 國無道 其默足以容)" 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을 퍽 의미심장하다. '묵묵함으로 용납된다'는 것은 곧 '도가 없는 시대' 즉 '무도한 시대'라는 말이다. 도가 없는 시대에 어떻게 처신해야 할까? 명철보신(明哲保身)해야만 자신은 물론 자손에게로 대를 이을 수 있다.

이 문구를 읽으면서 보백당 선생의 일생을 생각해보았다. 선생은 관인으로서 성종 대를 거쳐 연산군 시대를 살았다. 그러나 연산군 시대에 무고한 관료와 선비들은 졸지에 무오사화(戊午士禍)라는 횡액을 당하게 된다. 점필재 김종직과 교유했다는 사실만으로 점필재 당인(黨人)으로 분류되어 목숨까지 잃을 위기와 맞닥뜨렸던 보백당은 그동안 향리로 물러나 쌓았던 '묵묵함'으로서 그 시대의 광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다.

현대를 살아가는 이로서 묵계서원을 찾게 되면 꼭 이 서원의 명칭인 묵이라는 글자에 대해 깊이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