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고정(太古亭)-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현애리 312, 358(安東金氏北涯公宗宅 경북민속자료 제27호)

서수용/한국고문헌연구소 소장

태고정(55.0×38.0cm)                                                                                     Oil on Canson Paper

태고정이 있던 터전은 본래 넓은 의미로 해석하면 삼당공(三塘公) 김영(金瑛)의 소유였다.

그 집은 이후 태고정(太古亭)이라는 정자를 경영했던 종 증손자(從曾孫子)인 선원 김상용(金尙容, 1561, 명종16-1637, 인조15)에게로 자연스럽게 이전되었다. 그래서 아주 오랫동안 그 후손들의 소유로 내려왔다.

그러나 그 아담했던 태고정은 안동 김씨 뿐만 아니라 역대 제왕까지 즐겨 찾아 선원 김상용 선생의 절의에 경의를 표했고 자연을 감상하며 여러 신하들과 담소하던 장소로 쓰이기도 했다.

아울러 당대를 대표하던 사대부들은 물론 사단(詞壇)의 거벽(巨擘)들은 자신들과 좋은 상대였던 선원 김상용과 청음 김상헌의 후예들과 오랫동안 이곳을 중심으로 해 어울렸다. 태고정은 그래서 단순한 한 개인이나 씨족들이 모여 회합하고 유상하던 곳을 넘어 시대마다 인문학적 기치(旗幟)를 크게 떨쳤던 곳이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국운이 다하고 잇달아 맞은 전쟁과 사회 혼란기를 거치면서 이곳은 급격히 황폐해져 갔고, 이를 보다 못한 안동에 기반을 둔 삼당공 후예들은 문의(門議)를 거쳐 안동 소산 본향으로 정자를 이건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그 이건의 역사는 그리 순탄치 못했다. 그 결과 소산마을에 조그마한 상태로 재건해 그 명맥만 유지했던 태고정은 다시 후손들에 의해 이웃한 풍산 현애리로 터를 잡아 중건했다. 그 뒤 이와는 별도로 안동 소산에서도 자리를 옮겨 재차 태고정을 건립했는데, 권 화백은 소산 마을에 있는 태고정을 화폭에 옮겼다.

현애리(玄厓里)에 재건된 태고정은 안동김씨 북애공파 종중 종택 건물과 함께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27-2호로 지정되었다. 소산 태고정은 지정되지 못한 상태다. 태고정 중건의 복잡한 그간의 사연을 옮기는 것은 그렇게 유익하지 못할 것 같아 여기서 줄인다.

태고정은 대구 달성군 하빈면 묘리 638에 보물 제554호(達城 太古亭)로 지정된 건물도 있다. 이 건물은 조선 성종10년(1479) 박팽년의 손자인 박일산이 세운 별당 건축이다. 전북 진안군 용담면 수천리 13-14번지에는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02호로 지정된 태고정이 있다. 그 외에도 태고정이 있는데, 다시 안동에 그 역사적 유래를 같이하는 2개의 태고정이 후손들에 의해 건립되어 일반의 혼란이 없지 않다. 

다시 정리하면, 태고정은 선원(仙源) 김상용(金尙容)의 정자다.

이 집은 당초 한양의 순화방 창의동(彰義洞) 청풍계(淸風溪)에 있었다. 태고정(太古亭)과 늠연당(凜然堂)이 있고 선원의 화상을 봉안했다. 후손들이 가까운 마을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세상에서 '창의동 김씨'라고 불렀다. 시내 위에 있는 바위에는 '대명일월 백세청풍(大明日月百世淸風)'이라는 8자를 새겼는데, 지금까지 남아 있다. 이곳에는 정조(正祖)와 순조(純祖)와 익종(翼宗)이 들린 일 역사도 갖고 있다.

본래의 태고정은 이제 사라졌다. 그러나 태고정 주인과 그의 아우인 청음 김상헌(金尙憲, 1570, 선조3-1652, 효종2)이 쓴 시가 남아 당시의 풍광과 정서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태고정에서 짓다(太古亭卽事)

樹密濃陰靜 빽빽한 숲 짖은 그늘 고요한데

亭虛小점凉 텅 빈 정자의 작은 대자리 서늘해

泉鳴階下결 샘물 흘러 계단 아래로 부서지고

荷送枕邊香 베개머리로 연꽃 향기 풍겨오네

手懶抛詩卷 손에 힘 빠져 보던 시집 놓쳐버리고

神昏入睡鄕 정신이 아득해져 낮잠에 빠져드네

山中閑意味 산중에서 느끼는 한가한 이 맛을

偏覺此時長 이제야 진정으로 즐기게 되었는걸.

참 구미에 당기는 작품이다. 1611년(광해군3)에 이 작품을 쓸 당시 필자의 나이는 51세로 한성부 판윤으로 도총관을 겸하고 있었다. 그 26년 뒤, 우의정을 지냈고 영돈녕부사 직에 있던 선원은 77세의 노구를 이끌고 강화도로 묘사(廟社)를 모시고 들어가 오랑캐들에게 항거했다. 그러나 중과부적으로 절망한 채 강화성의 남문(南門) 문루(門樓)에 올라 폭약을 터뜨려 순절(殉節)했다. 그런 절의와 강단이 있던 이가 장년기에 이러한 처사 지향적인 서정시를 남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정도다. 한시의 맛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어떤 정자에 올라가 보면 한여름임에도 그 안이 서늘할 때가 있다. 그것이 또한 정자를 찾는 맛이기도 하다. 주변에서는 물소리와 매미 소리가 들리고 미풍도 이따금 불어온다. 정자 마루 위에 깔린 대나무 자리의 느낌, 바로 그 느낌을 이 시에서 표현하고 있다.

다음 연(聯)은, 정자 주변으로 흐르는 계곡의 물소리를 표현한 것이다. '천명계하결(泉鳴階下?)' '결(?)'이란 글자는 패옥을 말한다. '샘물 흐르는 소리가 섬돌 아래에 결(?)한다'는 시구는 그 해석이 까다롭다.

결은 고리의 한 부분이 이지러진 듯한 모양을 한 것이다. 결과 상대가 되는 옥은 '환(環)'인데, 둥근 고리 모양을 이룬 것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죄를 지은 신하를 3년 동안 변방에 내버려두었다가 다시 조정으로 부를 때에는 환(環)이라는 옥을 보내 주고, 그대로 외지에 둘 경우에는 절연(絶緣)의 의미로 결이라는 옥을 보냈다 한다. 일감으로는, '샘물이 섬돌에 부딪쳐 부서져 흰 포말을 만든다'는 뜻이 아닌가 한다.

그 다음 시구도 멋스럽다. '하송침변향(荷送枕邊香)' '베개머리로 연꽃 향기 풍겨오네'. 물소리를 들으며 맡는 연꽃의 그윽한 향기는 어떤 것일까? 흥미로운 것은 이 시에서 베개가 등장한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정자는 대낮에 머물다 가는 곳이다. 그러함에도 베개가 등장하는 것은 '낮잠'을 암시하고 있는 일종의 소품이요 장치다. 독자들로 하여금 다음 회의 전개를 조바심 나게 만든다.

어떤 시 작품마다 그 최고점이 있게 마련이다. 시 작품의 절정(絶頂)은 이어지는 연(聯)이다. '수라포시권(手懶抛詩卷)'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손이 게을러져 시를 적어 엮은 책을 던졌다' 정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해석하면 시의 맛이 확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손에 힘 빠져 보던 시집 놓쳐버리고'라고 해석해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경치 좋은 어떤 장소에서 아무 걱정 없이 한가롭게 누워서 문학 작품을 읽는다는 전제를 필요로 한다. 아마도 좋은 시절에 정자 마루에 편안히 누웠을 테고, 베개를 베었고 다리는 꼰 상태일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누워서는 한 손으로 작고 만만한 책을 쥐고 읽게 된다.

책의 종류는 성현의 말씀을 담은 경전(經傳)이나 선현(先賢)들의 문집(文集) 보다는 시(詩)를 쓴 시집이 편안했을 것이다. 도연명이나 이백, 두보, 또는 맹호연이나 황산곡의 시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자신도 모르게 잠에 폭 빠져들 때가 있다. 그 때 순간적으로 손에 힘이 빠지게 되고, 이어서 '툭'하고 책을 마룻바닥에 떨어뜨리게 된다. 물론 그 이후의 일은 자신도 모른다. 그저 달콤한 잠에 빠져들 뿐이다. 그 다음 싯구가 이를 말해준다. '신혼입수향(神昏入睡鄕)' '정신이 아득해져 낮잠에 빠져드네'가 그것이다.

마지막 미련(尾聯)은 수함경미련(首?頸尾聯, 起承轉結과 같은 의미임)의 시적 정형(定型)을 갖추기 위한 것으로 어떤 면에서는 군더더기라고 느껴질 정도다.

이 시에 화답하기라도 한 작품이 아우인 청음 김상헌의 설교집(雪?集)의 근가십영(近家十詠)에 실려 있다.

淸風溪上太古亭 청풍계의 위에는 태고라는 정자가 있거니

吾家伯氏此經營 우리 집의 큰형님께서 지어서 놓은 게지

林壑依然水墨圖 숲과 골짝은 한 폭의 수묵도와 같거니와

巖崖自成蒼玉屛 바위 절벽은 절로 푸른 옥 병풍을 이루다네

父子兄弟一堂席 우리 부자 형제들이 한 당(堂) 안에 앉아서는

風月琴樽四時樂 바람과 달 거문고와 술 펼쳐 늘 즐겼었지

勝事如今不可追 그 좋던 일 이제 다시 할 수 없거니와

此時此情何人識 이러한 때 이런 마음을 어떤 이가 알아줄지.

청풍계(淸風溪)를 읊은 이 작품을 읽다보면 청음 선생의 회한(悔恨)이 절절해 손에 잡힐 것도 같다. 이 시는 크게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눌 수 있는데, 전반부는 누구나 지을 수 있는 것임에 반해 후반부는 청음이 아니면 얽을 수 없는 경지가 아닌가 한다.

그것은 후반부의 시가 세인들을 놀라게 할 멋진 시어(詩語, 驚句)나 시적 형상을 기묘하게 해서가 아니다. 도리어 시에 사용된 글자나 시어는 지극히 평범할 뿐이다. 부자형제(父子兄弟), 풍월(風月, 아름다운 자연, 시를 지음), 승사(勝事, 좋은 일), 사시(四時, 春夏秋冬), 불가(不可, 할 수 없음) 등이 그것이다.

그런데 그 울림의 파장이 큰 것은 이 시가 70이 넘어 중국 심양 땅으로 압송되었을 때 지은 작품이라는 사실과, 또 평소 형제간의 진한 우애가 있었고, 그래서 나라를 위해 폭사(暴死)한 형님을 애절하게 그리워한 아우의 심경이 시 전반에 잘 드러나 있어서다.

정자라는 현장은 여전히 남아 있지만 형님은 이미 고인이 되었고, 자신은 국왕이 항복한 조선의 외로운 신하로서 오랑캐의 땅인 심양으로 유배된 상태였다.

정자에 서로 모여 즐겁게 노닐었던 '그 좋던 일'을 다시 할 수 없는 현실, 그 그립고 슬프고 탄식할만한 속내를 누가 알아줄 것인가? 청음이 이 독백과도 같은 물음은 이제 후손들이나 역사를 읽어 옳고 그름에 대해 아는 독지가(篤志家)나 지사(志士)들이 해야 할 차례가 아닌가 한다.

태고정이 감애에 있건 소산마을에 있건, 또 어떤 건물이 문화재로 지정되었고, 먼저 지어졌으며, 더 웅장하건, 그곳의 현판을 한석봉이 썼건,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닌지 모른다. 이제라도 태고정 문을 활짝 열어 그 마루를 말끔하게 닦고서 그곳에 훌륭한 학자나 진정으로 국민과 시민들을 위해 애쓰는 정치가나 창작에 애쓰는 작가, 예술가들을 위한 사랑방으로 만들어야 하지 않을까?

듣기로는, 마을에 뿌리는 두었던 출향인사들 조차 부형들이 작고하고 나면 고향을 찾아도 편히 하룻밤을 보낼 공간조차 마땅하지 않다 한다. 그것은 모순이다. 예전에는 아무리 가난한 집안이라 해도 밥 한 그릇을 남겨 집나간 식구나 손님이 올 것에 대비했다.

태고정을 두 곳에 각기 복원하면서 그러한 대비조차 하지 않고 그저 큰 빗돌을 세워 제막식만 성대하게 하고 태고정이라는 세 글자가 적힌 현판을 걸기위한 것이라면, 선원이나 청음의 이러한 뜻을 진정으로 계승한 것이 아닐지 모른다. 충신(忠臣)의 후예(後裔)들의 향후 선택과 액션이 그래서 주목된다.

태고정의 당시의 격조를 여실히 보여주는 기문 한편을 소개한다. 남인(南人)의 종장(宗匠)으로 다함없는 기림을 받았던 미수(眉?) 허목(許穆, 1595-1682)이 쓴 명문(名文)이라서 보다 사실적이라 생각한다.

산수소기(山水小記) 

영가(永嘉, 安東의 옛 이름) 권상국(勸相國, 이름은 大運)이 지난해 연경(燕京)에 사신으로 갔다가 지금 돌아오는데 근교(近郊)에 왔으므로, 나는 홍참찬(洪參贊 이름은 우원(宇遠)), 민학사(閔學士), 이중승(李中丞)과 함께 마중 나가 홍제원(弘濟院)에서 서로 만났다.

나는 돌아오는 길에 산길로 들어서서 석관음(石觀音)을 지나다가 맑은 물과 흰 돌이 너무 좋아서, 시내의 돌 위로 천천히 걸어 탕춘대(蕩春臺)에 오르니, 마침 정오(正午)가 되어 풀이 햇빛을 담뿍 받아 아지랑이가 일어나고 있었다. 성안으로 들어와 백운동(白雲洞) 입구에서 잠시 다리를 쉬고서 김하보(金夏甫, 金壽弘)를 방문하여 함께 사의정(四宜亭)에 올랐는데, 사의라는 것은 봄에는 꽃이 좋고 여름에는 폭포(瀑布)가 좋고 가을에는 단풍이 좋고 겨울에는 눈이 좋아 모두 아름다운 경치라는 뜻이다.

계속해서 청풍계(淸風溪)로 올라가니 시내 옆에 소오정(嘯傲亭)이 있고 시내 위에 3개의 석지(石池)가 있으며, 못가에 태고정(太古亭)이 있고 태고정 서쪽에 석대(石臺)가 있고 석대 밑 산 가운데에는 석전(石田) 두어 이랑이 있고 밭가에 암벽(巖壁)이 시내를 굽어보고 있었다.

이것은 김상국(金相國) 선원공(仙源公, 金尙容)의 별장(別莊)인데, 지금 상국이 돌아간 지도 벌써 40년이 되어서 나무 하나 돌 하나가 모두 고적(古跡)이 되었다. 병자호란(丙子胡亂) 때에 상국이 나라의 명을 받고 강도(江都, 江華)에 들어갔었는데 군대를 주관하는 사람이 일을 그르쳐 성중(城中)이 소란하자, 상국은 일이 틀린 것을 알고 스스로 화약고(火藥庫)에 들어가 불을 지르고 자폭(自爆)하여 능히 절의를 지키고 죽었으므로 충렬사(忠烈祠)를 세워 제사하였다.

하보는 상국의 친손(親孫)으로 또한 예(禮)를 잘 아는 사람이다. 효종의 국상(國喪) 때에 하보가 당국자(當國者)에게 편지를 보내어 상례(喪禮)의 잘못됨을 강력히 말하다가, 나라에서 하는 일을 비방(誹謗)한다 하여 금폐(禁廢)된 지가 15, 6년이 되었으며 친척들도 모두 끊고 상종하지 않았는데, 금상이 그의 어짊을 알고 특명으로 사농 아경(司農亞卿, 호조 참판)에 발탁(拔擢)하였다.

명구절(鳴鳩節, 음력 3월) 6일 무자에 미수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