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지의 미학

권준의 이번 호 3편의 연작 그림을 보는 순간 두 가지가 겹치면서 떠올랐다. 하나는 편지라는 이미지이고 다른 하나는 스승과 제자라는 관념의 관계였다.

얼마 전 다큐멘터리를 찍는다고 영상팀을 데리고 농암종택에 간 적이 있다. 그날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의 낙동강 생태탐사 길에 문화답사가 신정일씨가 함께 왔는데 특강에서 황동규시인의 '즐거운 편지'를 낭송하는 걸 보았다.

'도산서당의 봄' (38cm×55cm)                                   Oil on canson paper

편지하면 왠지 정감이 묻어난다. 우리 어릴 때만 해도 걸어서 혹은 자전거로 우체부는 슬픔과 기쁨 그리고 일상의 안부들을 실어 날랐다. 요즘처럼 인쇄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일일이 손으로 써야만 했기에 정성은 필수로 담겼다.

혼과 열정과 통찰이 담긴 서간문(편지)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역사를 바꾸고 창조하기도 한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기술하지 못한 부분을 임소경과의 편지로 남겨놓았고, 릴케는 젊은 시인 지망생 카푸스에게 사랑과 고독 그리고 예술과 죽음에 관한 자신의 생각을 편지로 써서 보냈다. 릴케의 응집 되고 정제된 정서는 젊은 시인에게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사랑을 듬뿍 담은 연인 간에 주고받은 편지도 감성이 메마른 세상의 우리를 눈물나게 한다. 내가 알고 있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간문은 수도자인 아벨라르와 엘로이즈가 주고받았던 왕복 편지다.

당시 아벨라르는 제자 5천을 거느린 중세 최고의 철인이며 영적 지도자였다. 그런 그가 엘로이즈를 만났을 때는 39세의 중년으로 그녀는 겨우 17세의 소녀였다.

"로마황제의 황후가 되기보다는 당신의 아내가 되기를 갈망하며 심지어 당신의 창녀가 되는 일이라고 해도 그것은 황제의 영화로운 황후가 되기보다 몇 배 나를 기쁘게 했을 것입니다."

이 고백은 훗날 엘로이즈가 수녀원장이 되고난 뒤 수도사인 아벨라르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이다. 심정의 절절함은 계속 이어진다. "우리가 나눈 사랑의 환락은 너무나 달콤하여 그걸 뉘우칠 수도 기억에서 지울 수도 없습니다. 내가 저지른 죄를 슬퍼하여야 함에도 도리어 아주 맹렬하게 잃어버린 것을 그리워합니다."

이 내용이 수도자 간의 왕복 서신이라고 하여도 아무도 우리는 그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나란히 묻힌 그들의 무덤에는 지금도 추모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아 사랑의 애절함은 시공을 초월하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문학작품 가운데 빠지지 않은 것이 칼릴 지브란의 책이다. 그의 시며 명상의 세계가 표현된 수상록은 우리나라에서도 고정 독자층을 두텁게 유지할 만큼 매혹적이다. 그의 문학 세계는 전적인 이해의 동반자였던 매리 헤스겔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우리가 칼릴에게 가장 감동하는 글도 이들이 주고받았던 동지적 서간문이다. 한 여인의 헌신이 불멸의 문학을 탄생시키고 그 과정을 환락으로 받아들이는 여인의 내밀한 감정에서 읽는 이들이 눈시울을 훔치게 한다.

시대별 역사를 보는 견해가 수정되거나 적어도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예는 정조대왕이 정적인 심환지에 보낸 편지의 발견이었다. 한 달 전인가 정조가 정치적 반대파의 우두머리였던 심환지에게 보낸 몇 백통의 편지가 뭉치로 발견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이 쏠렸다. 정조독살의 배후세력으로 간주하였던 심환지와의 내밀한 대화는 그동안 역사를 보는 좁은 폭의 눈을 확대시켜놓은 것만은 틀림없어 보인다.

(2)스승과 제자의 편지

편지를 매개체로 스승과 제자가 인류사 세계관을 뒤바꾸어 놓은 일대 사건은 다윈이 그의 스승 존 스티븐스 헨슬로(1796~1861)에게 보낸 서신이다.

"헨슬로 선생님, 자연사 분야의 거장이신 선생님께 종(種)에 관한 제 책을 보내드리라고 했습니다. (…) 선생님께서 시간이 되신다면 찬찬히 읽으시고 빈약한 부분과 잘된 부분을 지적해 주십시오. (…) 선생님께서 ‘종이 변하지 않는다.’는 생각에 조금이라도 의문을 가지게 되셨다면, 조금 더 깊게 생각하는 과정에서 그 의문은 점점 더 커질 것입니다. 그 과정이 바로 제 생각이 걸어온 길이기도 합니다." 　 1859년 11월 11일, 찰스 다윈 올림.

다윈이 쓴 '종의 기원'은 알다시피 그동안의 신학적 세계관을 뒤엎고 인류를 진화의 세계로 안내한 엄청난 저작물이었다. 그 때문에 종교계와의 마찰은 불을 보듯 예견된 상황이었다. 다윈이 발견한 종의 진화에 관한 이론이 학계에 받아들여지게 된 것은 헨슬로의 지원 덕분이었다. 다윈은 성직자였던 스승 헨슬로의 믿음에 반하는 자신의 견해가 과학적 이론으로 진정 이해되기를 바랐고 스승은 그런 제자의 소망에 화답하며 종교계의 반발에 부딪혀 사장될 위기에 몰린 ‘종의 기원’을 엄호하고 지켜내는 데 힘을 보탰다. 이처럼 한 통의 호소력 있는 편지는 인류사를 이끌어가는 동력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비슷한 유형으로 오늘날 기독교가 전설처럼 2천년을 이어져 올 수 있었던 배경에는 사도행전으로 성서에 기록된 제자들의 편지가 그 위력을 발휘했다. 예수의 삶과 행적을 몰라 믿음이 흔들렸던 초기 교회의 신앙의 초석을 제자들은 편지로 보완을 했던 것이다.

한국 화단의 풍토를 권준 화백과 토론하다 새롭게 알게 된 인물이 남농 허건이다. 서울대와 홍대 파들이 모두 장악하고 있어 활동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말에서 어떤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

그의 말인즉 유독 전라남도 지역은 독립적 지역으로 인정받고 있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 주자에 남농 허건과 오지호라는 두 거목이 자리 잡고 있다. 나는 권준의 이 말을 경상북도 미술관을 추진하기 위해 발 벗고 뛰었던 그의 흔적과 연결해서 이해했다. 이제 경북화단도 중앙의 예속에서 벗어나 독립을 꿈꿀 때가 되었다는 그의 말은 정확하게는 그의 포부인 것이다. 사실 그윽이 살피면 경북화단인들 왜 오지호와 허건 같은 인물이 없겠는가? 이번 호 권준의 3편 연작 그림이 표현하여 놓은 퇴계와 월천 조목처럼 스승과 제자가 서로 이끌고 밀어주는 끈끈한 사승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이 대답은 그림을 그리는 분들이 스스로 손을 얻고 해답을 구해야 하는 대목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권준이 그려놓은 작품을 감상하여 보자. 그림은 시공간을 연결하기를 주문한다. 퇴계가 먼저 경상 앞에서 쓴 편지를 다래의 제자인 월천조목에게 부치려고 심부름하는 사람에게 전달하는 모습이다. 스승은 제자와의 편지 왕래를 통해 나라의 일을 논하고,  고을 일을 당부하며 스스로 견책하기를 당부한다. 이렇게 스승과 제자 간에 주고받은 109통의 편지 글은 퇴계 사후 '사문수간'이라는 책으로 엮어졌는데 국학진흥원에 7책, 도산서원 옥진각에 1책이 보관되어 있다.

'다래 가는길' (38cm×55cm)                                                                    Oil on canson paper

이 기록은 명종 5년 퇴계 50세 조목 27세부터 시작되어 이후 20년간의 계속된 이황의 서간첩이다.

책의 내용을 좀 더 살피면 자잘한 일상사가 다 표현되어 있다. 스승의 속마음과 바람이 여실하게 드러나 있는데 여기서 우리는 인간 퇴계의 참모습과 월천 조목의 정신적 성장의 단계를 발견할 수 있음은 읽는 이의 즐거움이 아닐 수 없다.

스승은 매번 거르지 않고 편지 부치는 인편에 집안에 있던 일용한 양식을 나누어 준다. 제자가 과거 나가는 비용이 없어 머뭇거리자 함께 고민하는 모습도 적나라하게 표현되어 있다. 어떤 글은 쪽지로 되어 있으나, 사상을 파헤치고 도학 연원을 논할 때는 논문처럼 방대한 글들이 오고 갔다.

스승은 스승이라는 권위와 말로 제자를 억누르지 않았으며 항상 완곡한 표현과 존댓말로 서로 의견을 주고받았다. 그러나 스승은 자신이 스승이라는 사실을 한 번도 잊은 적이 없었다. 도산급문록에 등재된 제자의 숫자가 3백을 넘어서고, 서애 류성용이나 학봉 김성일, 한강 정구와 같이 나라에서 이름난 제자가 있었으나 월천처럼 지극함에 이르지는 못했다.

이는 월천이 퇴계로부터 나무람(견책)을 가장 많이 받은 제자라는 사실 하나에서도 입증된다. 나 또한 이 글을 쓰면서 한학에 정밀하지 못해 자주 실수를 하는데 그럴 때마다 이동수 선생과 서수용 선생이 아무도 모르게 불러 잘못된 것들을 지적해 준다. 지극함이야 내가 모자라 말할 것이 못 되지만, 그분들의 마음 씀씀이는 그 옛날 스승의 모습을 닮은 까닭에 내 삶에 자양분이 되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퇴계에게 있어 월천은 아들 같은 제자였으나 친구요, 학문을 함께 논하는 벗이었다. 공자에게 안회가, 소크라테스에게 플라톤이 플라톤에게 아리스토텔레스가 있었다면 퇴계에게는 조목이 있었다.

중국 선종의 계보에 5조 홍인의 의발(衣鉢)을 혜능이 전수받았듯 월천은 퇴계의 의발을 전수받은 애제자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그림은 심부름하는 사람이 도산서당에서 편지를 전달받아 길섶을 따라 농암의 터전인 분강(분천)을 지나 다래(월천)로 편지를 전하러 가는 전경이다. 이 길을 월천은 스승을 만나려고 걸었고, 스승은 제자를 보려고 걸었던 길이다. 사상을 꽃피웠던 길이고, 문학과 역사, 문화가 이 길을 따라 만개했다. 도학 1번지요, 대한민국 정신문화의 1번지로 가는 길이었다. 이후 이 길을 따라 퇴계 학단이 형성되었고, 학맥은 지금까지도 유유히 이어져 오고 있다. 

나 또한 변방에 머물러 있으나 권준과 이 길의 정신을 그림과 글, 다큐멘터리 영화로 표현하기 위해 수십 번을 왕래했다. 지난 4월3일에는 농암의 17대 종손인 이성원 박사와 이동수 선생을 모시고 이 길을 걸었다. 그 길에서 우리는 모르고 있었던 많은 역사적 사실을 배웠다. 나는 이러한 사라져 가는 역사의 원형문화를 영상기록으로 남겨놓아야겠다는 열정 하나로 다큐멘터리 제작에 뛰어들었다. 돈도 없고, 세력도 없으나 혼을 안고 밀고 나가면 정신을 이해하는 사람이 있어 반드시 이 일이 성사될 것으로 믿고 있다. 다행히 두 분 선생의 이해만으로 백만 대군을 얻은 기분이다.   

마지막 그림은 조목이 월천서당의 솟을대문 앞까지 나와 스승의 편지를 받는 장면이다. 권준이 방안에서 편지를 받지 않고, 문 앞까지 걸어 나온 조목의 모습을 그려놓은 것은 제자의 지극한 스승에 대한 숭모의 정신을 이런 방식으로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월천서당에서' (38cm×55cm)                                                                  Oil on canson paper

그림의 배경에서는 윗가지와 줄기가 생략되어 월천서당 앞 수령 500년 된 은행나무의 위용을 볼 수가 없지만, 밑 둥 줄기의 우람한 형태에서 대략 그것을 유추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월천서당 우측에는 최근에 지은 겸재(조목의 동생)의 정자가 세워져 있다. 그 앞으로 다래가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그 밤 경치를 월천은 스승에게 자랑했다. 퇴계는 감탄하여 시 한 수를 지어 보이고, 제자는 다시 스승의 시에 화답했다.

(이황)도산서당 달 밝으니 월천서당도 달이 밝고/오늘 밤 바람 맑더니 어제 저녁도 맑았었네/또 달리 한결같이 ‘광풍제월’한 곳 있으리니/ 우리가 어디서 명(明)과 성(誠)을 징험(경험)할까.

(조목)부용봉 푸름은 도산봉 푸름에 접하고/풍월담 맑은 물은 퇴계수에 맑은 물에 잇닿았네/진리의 근원을 찾아 나서기에는 정말 좋은 곳이나/ 마음에 깨달아 '명', '성'을 말하지 못해 부끄럽구나.

<'스승과 제자'는 9편에서도 계속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