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구는 정치와 역사를 변화시키는 힘
월드컵 남북한 동반진출
현장 눈으로 확인하는 기쁨 누려

따르릉~따르릉 벨 소리에 전화를 받으니 걸쭉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렀다.
손호영 경북축구협회 회장이었다.
 
"내일 나하고 서울 상암 축구 경기장에 같이 좀 가자."
"상(喪)중 이어서 곤란한데."
"그전에 약속을 했으니 지켜야지"
"장례에 준비위원장이 빠질 수야 있나...... 꼭 데려가려면 문상은 와야 이야기가 되지."
"알았다. 안 그래도 가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통화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손 회장은 친구 고경호와 함께 경북 안동시 성소병원에 빈소가 차려진 권오을 전 국회의원 모친상 조문을 다녀갔다.

4일장 하는 동안 아침녘을 제외하곤 문상을 하려는 사람들로 긴 줄이 이어져 한 참을 기다려야 조문을 할 수 있었다. 난 심상(心喪)을 해야 할 처지였다. 그동안 권오을 전 국회의원에게 진 마음의 빚을 조금이나마 갚으려면 이 길 밖에 없었다. 그저 오는 사람 안내하고 가는 사람 배웅하는 것이 전부였으나 어려울 때 옆에 있어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이걸 어찌할꼬. 상암으로 가려고 하니 심중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그렇다고 안 가려고 하니 현장을 스케치하고 기록으로 남길 사람을 구하기가 마땅찮았다.

내 임무는 월드컵 7회 연속 출전이라는 역사적 순간을 기록하여 축구협회보와 언론에 글을 싣는 것이었다.

문상을 마친 두 사람은 내일 아침 9시에 경북축구협회 사무실에서 출발한다는 신신당부를 남기고 떠나갔다.

상가에 머무는 시간에도 손 회장의 간곡한 부탁이 내내 귓전을 맴돌아 마음 한 구석이 무거웠다. 결정을 일단 뒤로 미루고 저녁 늦게 장례식장을 빠져나와 문상객 맞느라 고생한 이들과 술잔을 나누었다.

오랜만에 마주앉은 얼굴들이 그지없이 반가웠다. 신심으로 그윽이 상례(喪禮)를 대하는 곡진함이 혜량하기 어려울 만큼 깊어 그 얼굴들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세상인심이 아직 살아 있는 것 같아 마음 한 편에 감동의 아련함이 밀려왔다.
아!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구나! 그 순간  내 마음도 조금은 편안함을 느꼈다. 이들에게 상례를 맡기고 상암으로 가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때가 새벽 5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눈을 조금 붙여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어중간 했다. 하는 수 없이 마지막 술꾼의 호의에 매달려 해장국집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다 7시가 좀 넘은 시간에 친구 고경호에게 전화를 걸었다. 순전히 술기운에서였다.

"어이, 일어났는가? 가야지."

그는 어디론가 가야한다는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다.

"이 새벽에 어딜 가자고."
"월드컵 최종 예선 보러가야지."
"그거 오후 2시다."

친구의 말이 황당하여 그게 무슨 소리냐고 따졌으나 내가 일어나지 못할까봐 일찍 재우려고 그랬다는 말에 더 이상 뭐라 나물랄 수도 없었다. 새벽까지 글 쓰고 아침에 눈을 부치는 내 생활습관을 너무나 잘 아는 두 사람이 뒤탈 없애는 예방 차원에서 취한 조치란다.

뒤통수 한대 얻어맞은 멍한 기분에 그 마음씀씀이를 아무리 가상히 여긴다 하여도 골탕 먹은 분통은 풀리지 않았다. 은근한 화기(火氣)에 장난기가 발동했다.

"복수해야지."

눈 딱 감고 이른 새벽, 손호영 회장 휴대폰으로 전화했으나 아쉽게도 전화기가 꺼져 있었다. 포기하지 않고 집으로 수 없이 벨 소리를 울렸다. 반복되는 전화벨 소리에 잠 깬 목소리는 아직도 잠결이었다. 그 또한 밤늦게까지 과음했으니 숙취를 해소하려면 더 많은 잠이 필요할 것이다. 그 때문에 새벽에 전화질 해대는 인간의 몰상식에 화가 잔뜩 치민 말투가 속으로 고소함을 불렀다.

"여보세요."
"어 난데, 경북축구협회 사무실 앞이야. 직원들이 아직 안 나왔네. 오전 9시에 출발하려면  실무진은 2시간 전부터 준비해야 되는 거 아닌가."
 
나는 갑자기 그의 요구에 너무나 성실하고 열정적으로 임하는 사람의 자세가 되어 손 회장을 대했다. 그는 속으로 기가 찼을 것이다.

평소 글 쓰는 일 빼고 게으르기로 지독한 내가 새벽녘에 나와 이런저런 준비를 해야 한다며 어처구니없는 등쌀을 해대었으니 이게 무슨 묘한 조화인가 싶었을 것이다.

"밤새 술 먹었지."
"허허, 일 도와주려고 일부러 잠 덜 자고 나온 사람에게 그 무슨 섭섭한 소리."
"히히, 참말로 거기 나와 있나."

술 먹은 튀 안내려고 또박또박한 발음으로 시치미 뚝 떼고 정색하여 말하자 배꼼 잡는 웃음소리가 귀를 때렸다. 그 순간 내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히히, 잠 다 달아났을 것이니 어지간히 복수를 한 셈이었다.

버스에 올라타기 전까지의 에피소드다.

한 숨 붙이고 오후 2시가 다 되어 경북축구협회(이하 협회)가 있는 안동시공설운동장으로 나갔다. 사람들이 이미 다 모여 있었는데 45명 가운데 42명이 축구 가족이었다.
체면불구하고 좌석에 앉았는데 이방인 3인(정오진-고경호-나)은 모두 손 회장의 친구였다. 축구협회에 있는 동기를 포함해서 4인은 나란히 좌석을 한 곳에 뭉쳐 앉았다. 친구인 회장의 체면을 손상하지 않을까 어지간히 마음 쓰이는 것도 어쩔 수 없었다.
 
대절한 관광버스가 출발하자 손 회장이 일일이 탑승한 사람들 소개를 했고, 나는 내 순서에 인사만 하고 서울까지 거의 골아 떨어져서 올라가야 했다. 술기운에 부족한 잠을 차 안에서 해소해야만 했기 때문인데 다른 일행들은 협회에서 준비한 맛있는 음식에 축구 이야기를 양념 삼아 담소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옆자리에 앉은 친구 경호가 흔들어 깨워 눈을 떠 보니 서울이었다. 서울 가는 상행선이 한 숨 골아 떨어졌다 일어나는 잠시의 순간 같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축구장에 입장하기 전 저녁 식사를 먼저 했다. 손 회장과 친구 간인 경기도 축구협회장인 재선의 민주당 강성종 국회의원이 실무진과 마중을 나와 있었다. 우리 일행은 그들이 정성껏 준비해 놓은 저녁을 고맙고 맛있게 먹었다. 

차가 밀리는 가운데서도 경기 시작 10분전에 상암 경기장에 도착한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었다. 도로에 차들이 끝없이 줄지어 있었다.  난생 처음 와보는 상암 구장. 축구를 좋아하기는 했으나 직접 경기장을 찾은 건 대학시절 이후 처음이었고 시설과 규모가 위용을 자랑할 만했다.

이미 실질적으로 본선행이 확정된 뒤였지만 군데군데 몇 군데의 빈 좌석이 눈에 띄었으나 거의 대부분은 붉은악마와 관전자들이 자리를 채웠고, 열기는 뜨거웠다. 

경기장에서도 옆자리에 앉게 된 경호는 카메라에 얼굴을 잡히려고 긴 생머리를 최대한 이용했으나 앵글은 야속하게도 그런 경호의 몸짓을 발견하지 못했다. 심상을 하고 있는 나로서는 다행이었지만 경호에게는 추억거리 하나를 잃어버린 것이리라.

대신 앵글은 경북에서 올라온 45명 일행 가운데 단 한 사람을 잡았다. 본부석 로얄 박스 조중연 한국축구협회회장 바로 뒤에 있던 손호영 회장의 얼굴이 클로우즙 된 것이다.

코를 후비는 장면이었는데 그 순간 안동에서 바리바리 전화벨이 울려 퍼졌다.

"코 좀 후벼 파지 마소."
"...................................."
경기는 전반에 이란 팀에게 선제골을 내주지 전까지 대체적으로 느슨하게 흘렀다. 그러나 텔레비전으로 보는 것 보다 훨씬 박진감이 있어 좋았다.

한국팀의 10번 박주영 선수의 진가는 경기장에서 두드러지게 보였다. 공의 낙화지점 포착이 정확했고, 점프력 또한 탁월했는데 하늘 높이 뛰어다하면 공이 한 번도 그의 머리를 벗어나지 않는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늘 텔레비전 화면 속의 박주영은 최고가 되기에 뭔가 2% 모자라 보였는데 이날 본 박주영은 전혀 새로운 축구스타 박주영이었다. 내겐 이것이 그날의 최고 발견이었다.

얼굴도 처음 보고 이름도 모르는 한국 팀 14번의 수비 실력을 직접 눈으로 보는 것도 솔~솔한 재미였다. 그의 볼 처리 솜씨는 홍명보의 대를 이를 만한 수준이었다. 최종수비수로 낙점하여도 전혀 손색이 없는 실력이었다.

박지성의 놀라운 집중력을 확인하는 기쁨 또한 매우 컸다. 이날 평소보다 기대에 못 미치나 싶었는데 역시 빅 스타는 뭐가 달라도 달랐다. 후반 들어 이란 선수들이 체력이 소진될 쯤 이근호가 만들어 준 찬스를 끝까지 파고들어 골로 연결하는 그의 액션파워는 역시 한국 축구의 대표 얼굴다웠다.

내가 앉은 우측에서 관전한 박기도 심판의 해설도 이날 관전의 백미였다. 양국 선수의 이름부터 특기 등 그의 해박한 축구 상식은 둔감한 나에게 여러모로 도움을 되었다.

경기 결과는 1-1.

이날의 관전 포인트는 남북한 동반 월드컵 본선 진출. 그렇게 하려면 적어도 우리가 비겨주어야 했다. 전반에 한 골 먹고 패색이 짙던 후반 기적적 동점골은 박지성의 왼발로 완성이 되었다. 이로써 남북한 동반 진출의 기회가 열렸고 북한이 사우디와 비기기만 하면 역사적 인 대기록이 세워지는 것이다.

북한 또한 사우디와 0-0으로 비겼다. 남북한 월드컵 본선 동반진출이라는 韓민족 공동의 소망이 이루어 진 것이다. 쾌거가 아닐 수 없었다.

경북축구협회 임원들과 가족들은 그날 축구의 역사적 의미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들은 이것이 발판이 되어 경색된 남북관계에 활로가 열리기를 바랐다. 우선 조업이 중단된 개성공단이 하루빨리 타결되어 남북공동번영이라는 미래의 가치가 훼손되는 일 없이 지속되기를 빌었다.

축구가 단순한 선수와 국가 간의 대항전이 아니라 정치를 변화시키는 힘이 되고, 발판이 될 수 있기를 바랐고, 우리 일행은 그날 그것을 확인했다.

경기를 마치고 내려오는 차 안에서 손호영 회장이 한 말은  실로 가능한 일임을 나는 이 순간에도 굳게 믿고 있다.

"축구를 통해 우리가 한민족, 언제 가는 하나의 공동체로 살아가야 하는 민족구성원이라는 것을 현실에서 축구만큼 여실하게 보여주는 대상은 없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난 2009년 6월17일, 대한민국 축구가 연속 7회 월드컵출전이 확정된 시간에 경북축구협회 임원들과 상암에서 그 역사적인 순간을 함께 했다는 것이 가슴 뿌듯함으로 남아 있다. 이 자리를 빌러 이방인을 가족처럼 따듯하게 대해준 정기수 부회장님, 장찬진 전무님 등 관계자분들의 호의에도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