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이다. 암자의 산기슭에 알밤이 떨어지기 시작한다. 밤을 주우면서 ‘아. 올해도 추석이 다가오는가보다’하고 생각한다. 추분(9.23) 이틀 뒤가 추석이다.

 올해의 추석에도 햇밤을 주워 차례상을 차릴 수 있겠다. 새벽마다 산책과 운동 삼아 밤을 줍는다. 산기슭의 밤나무 밑을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밤을 줍노라면 저절로 운동이 된다.

 청량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밤을 줍노라면 가을날의 신선한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산에서 돌아와 전기 탐관에 물을 끊인다. 요즘의 전열 기구는 꽤나 발전해서 빨리 물이 끊는다.

 끊인 물을 숙우에 부어 물 온도를 약간 내린다. 그리고 금년 봄, 어떤 차인이 선물한 하동 햇차를 다관에 넣는다. 적당히 식힌 물을 다관에 부우면 여린 차향이 피어오른다. 차향은 삼면에 책으로 가득한 내 방안에 퍼져 나간다.

 알맞게 우려진 찻물을 유리 다해(茶海:찻물을 나누어 마시는 유리 다기)에 붓는다. 다관과 다해에서 피어오른 차향이 내 몸과 온 방안에 가득하다.

차 마시는 이는 이 은은한 차향을 청향(淸香)이라 하여 무척 좋아한다. 그래설까, 종종 지인들의 차실에 가보면 ‘차향천리(茶香千里)’니 ‘차향만당(茶香滿堂)’이라는 글귀가 걸려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들은 곧 잘 전통차를 우려 마시는 것은 시간이 걸려 커피나 티백차를 마신다고 한다. 하지만 배우고 익혀 습관이 되면 커피를 타 마시는거나 차를 우려 마시는 것이 별반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한때 나도 그러했다. 그러나 암자에 기거하면서 불자와 방문객에게 차를 달여 함께 마시면서 점차 커피는 거의 마시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다른 장소에 손님으로 갔을 때는 꼭 전통차만 고집하지 않는다. 녹차가 있으면 다행이지만 커피든 쥬스든 혹은 티백차를 주어도 기꺼이 마신다. 선물로 받은 차와 접빈용 차는 품질과 종류를 가리거나 품평하지 않는 법이다. 더러 뛰어난 특급의 좋은 차를 마시게 되면 ‘오늘은 청복(淸福)이 있군요’ 하면서 기꺼이 한다.

 요즘 사람들은 곧 잘 시간타령을 하면서 인스턴트 음식과 음료수를 먹고 마신다. 그 또한 서구식 간편 주의에 세뇌되어 그러한 것이다.

 차를 다관에 우려 마시듯 한 박자 느리게 사는 것도 마음에 여유가 있고 인생을 음미하면서 산는 방법의 하나이다.

 최근에는 다관을 사용할 필요도 없이 질 좋은 티백차가 꽤 많이 나와 있다. 그리고 차와 여러 가지 재료를 블랜딩한 갖가지 차 음료도 다양하게 나와 있다. 과히 차 음료의 춘추전국시대를 맞고 있는 상황이다.

 티백은 간편한데 맛이 없다거나 싸구려 차라는 것도 예전의 일이다. 요사이는 편리성에 맛과 품질, 다양함까지 갖춘 차 관련 제품이 대형할인점, 편의점, 백화점, 인터넷 쇼핑몰에 많이 나와 있다. 그곳을 이용하면 질 좋고 다양한 티백차를 접할 수 있다.

 예를 들자면, 유기농 마테차, 허브차, 홍차, 귤피차, 뽕잎차, 감잎차 등 정말 갖가지 티백차들이 출시되어 있다.

 마테차는 남미의 전통차로 향긋하고 개운한 맛이 특징이고, 허브차는 레몬, 오렌지, 딸기향 등 여러 종류가 있다.

 홍차도 인도의 다르즐링에서 만든 것과 중국의 기문홍차 같은 품질과 맛이 뛰어나고 가격도 실비인 제품이 여럿 나와 있다. 안동 인근의 예천, 상주 등지에서 건강에 좋은 뽕잎차와 감잎차도 생산되고 있다.

 차는 어려운 것이 아니고 전통차만 고집할 시대도 아니다. 요즘처럼 마실꺼리가 풍성해진 시대에 전통 찻잎으로 만든 잎차와 가루차만 옹송하게 고집할 것이다.

그대의 찻잔에 어떤 종류의 차를 담든 소슬한 바람이 옷깃에 스며드는 이 가을날 따끈한 한 잔의 차를 마시며 자기 자신을 위안하는 것이 바로 인생을 음미하고 살아가는 자의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지족암 주지 : 임혜봉

2007-10-02 11:21:48 / UGN 경북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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