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계의 풍광에 녹아든 그림 속 두 사람은 늦가을 정취에 취해 어디론가 걸어가고 있다.

시간은 고요히 멈춰져 있고, 오솔길 옆 시리도록 푸른 강물은 제 얼굴빛을 바꿔가며 길가는 나그네를 유혹하고 있다. 모처럼 속진의 번거로움을 벗어버린 몸짓에서 한가로움이 묻어난다. 저 위, 분강 어디쯤 배를 띄워놓고 일행들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가다가 풍경을 보고 시를 짓는 두 사람의 호젓함이 궁금증을 자아낸다. 언뜻 보면 풍류객일진대 도란도란, 정답게 주고받는 말들이 부자(父子) 같기도 하고, 친구요 도반이라고 해도 영락없는 한 폭의 그림이다.

"농암과 퇴계시더, 다른 것은 임거래(任去來)¹⁾고 견이취지(見以取之)²⁾시더 알지요."

헉, 아니나, 다를까, 요즘 이 최성달 골탕 먹이는 재미로 살아가는 우리의 위대하신 권준화백님은 연재 전날 밤, 그림 슬쩍 한번 보여주고 '농암과 퇴계'라는 한마디를 하고는 그걸로 끝이시다.

이건 숫제, 원고 보내라며, 피 말리는 피중찬 편집인보다 몇 갑절 더 악질(?)이다.  맨 바닥에 헤딩해가며 공부해도 모자랄 판인데, 전혀 문제없다는 눈치다. 하기야, 지난날 내가 너무 잘 난체 해서 생긴 업보이니 누굴 나무랄 처지도 못된다.

정색해서 당신 55년 인생에 이 최성달이가 비로소 나타난 최고의 지성이란다.

다짜고짜 망년지우(忘年之友)³⁾하자는 박장대소에 마음이 혹해, 지금껏 시키는 대로만 하고 있다.  망년지우라는 말이 나왔으니 하는 말이다. 그림 속 두 사람은 틀림없이 망형우(忘形友)⁴⁾의 정을 나누고 있다.

통하면 열리는 법, 나이가 무슨 대수일까? 서로를 알아보았기에 이미 격조를 물린지 오래다. 오직 학문하는 벗으로서 더불어 걸어가고 있음이라……아, 아뿔싸! 그런데 실로 걱정이다. 아들과 아버지뻘(실제 두 분의 나이 차이는 34년임)되는 퇴계와 농암을 친구라고 했으니 예법 따지기 좋아하는 유자(儒者)들이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면 어떡하랴.

허나 유자들이여 너무 흥분하지 말라. 난, 보이는 대로 말했을 뿐이로다. 견이취지라 했으니 그림은 자기가 꼴리는 대로 느끼는 것이다. 정녕, 속유(俗儒)⁵⁾가 아닌 통유(通儒)⁶⁾라면 말꼬리 붙잡고 늘어지는 추잡한 짓거리로 서생이 말하려는 바를 꺾으려 들지 말지다.

지금 나, 그림 속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가 한없이 부럽도다. 미치도록 그 누군가가 그리울 따름이로다. 날은 저무는데 갈 길은 바쁘고 학문의 길은 더 더욱 멀도다.

농암을 밟고 퇴계는 갔도다. 농암이 기꺼이 깔아준 거름과 멍석은 길이 되었도다. 학문으로 일가(一家)⁷⁾를 이루려는 자는 보리라. 진리와 현현하려는 자는 알 수 있으리라.

위대한 스승 없이 빛나는 제자가 없음을. 한낱, 무지랭이 어부에 불과했던 베드로는 예수를 만나, 교회의 반석이 되었고, 예수는 세례자 요한이 있었기에 신이 바라는 바를 지상에 실현하는 도구가 되었다. 아난은 세존을 알았기에 불법(佛法)을 세상에 전파했으며,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로부터 지식과 통찰력을 얻어 철학의 아버지가 될 수 있었음이라.

유자여, 세상 사람이여, 저 그림 속 다정함을 보고도 제발, 퇴계에게 스승이 없다 말하지 말지어다. 너그러움과 반듯함은 남이 아니로다. 무형의 원력과 가르침에도 배움이 있으리니 농암의 호방한 운치와 강호처사의 기개는 고스란히 퇴계의 완고함과 반듯함 속에 녹아 있다.

오늘 화실에 가서 권준화백이 그려놓은 그림을 보고는 종일토록 우울했다.

76 × 55(㎝)                                                                            canson on oil color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탄식이 멈추질 않는다. 한때, 나도 그 누구를 그리워했다. 사표가 없던 나를 취하고 통하게 해 줄, 친구와 스승을 간절히 원했다. 원시불교를 전공했다는 조용헌과 향산고택에서 밤늦도록 대작한 인연으로 그를 가까이에 두고 싶은 욕망이 굴뚝같았으나 다 다듬어지지 않은 방자한 혈기 때문에 다가가지 못한 아픔이 아직도 새록새록 하다.

문학을 꿈꾸는 동안 세 번이나 이문열을 우연히 만나고도 일부러 한번 찾아가지 못한 게으름이 그와 나를 갈라놓았다. 이외수를 앞에 두고도 친함을 구하지 못했고, 도올과 임동창을 멀거니 보기만 했을 뿐, 마음처럼 인연을 만들지 못해 세월만 낭비했다.

그렇게 갈망하던 법정스님과 이해인 수녀를 단 한번 대면하지 못했으니 그 어리석음을 말로 다 해서 무얼 하랴.

이로써 나, 최성달의 정신사는 황량하고 비루함을 면치 못했으니 어이 가엾지가 않으리오. 오늘 나, 퇴계와 농암의 망년지우의 비법을 묵수 받으니 가난한 정신에 절로 탄식이 나온다.

오! 내 정신의 친구여, 스승이여! 애절하게 부르노니, 거기 천년만년 서 있으라. 그대로 서서 나를 안아다오! 갓 자라난 나의 정신에 억수같은 비를 뿌려다오. 너와나 피고 질 이 한세상 한번 질퍽하게 살아야 하기에 아직 꿈꾸기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다.  

다시그림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도란도란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는 농암과 퇴계는 이미 풍광과 하나가 되었다. 권준이 캔버스 속 인물을 삽입하는 방식은 단 번에 이뤄진다. 마침 두 사람의 모양이 풍경 속 미점(美點)처럼 보이기도 하듯 신기(神氣-그림을 주관하는 신과의 접신)가 한껏 물오르기 기다렸다가 단한번의 붓질로 끝장내 버린다.

글씨로 치면 일필휘지요, 글로 치면 몰아의 경지에서 뱉어내는 언어와 같다. 때문에 어떤 이에게는 권준의 붓질이 무모하고 미친 짓거리로 보일 수 있으나, 나는 그의 즉흥적인 붓놀림에서 대가의 자질을 발견한다.

직관에 잡힌 대상을 단 번에 뽑아 올릴 수 있는 경지야 말로 최고만이 보여줄 수 있는 차원 높은 정신의 표출행위이다. 구도를 생략하고, 색감으로 깊이를 드러내지 않아도 보는 이에게 자연스러움을 줄 수 있다면 그건 아무나 할 수 있는 세계가 아니다.

우리가 말하는 명화란, 그 명화를 그린 대가들이란 하나 같이 더하거나 뺄 것이 없는 완벽한 기쁨을 누려본 사람들이다. 종합할 수 있는 자만이 뺄 수도 더할 수도 있는 것이다. 매크로(거시)와 마이크로(미시)의 세계를 불문하고 유기적으로 연결할 수 있는 자만이 고수가 될 수 있다.

직관의 화가 권준은 불현듯 떠오른 영감으로 풍광 속 농암과 퇴계에게 지극히 자연스러움이란 아름다움을 획득시켜주고 있다. 이런 방식은 언제나 신선하다. 이러한 갖춤이 있었기에 뒤에 오는 꾸밈은 캔버스 속에 개별적으로 산재한 대상들을 전체적으로는 하나로 통합하여 그림의 명제를 충실히 담아내는데 성공하고 있는 것이다.

두 사람의 이야기로 다시 돌아가 보자. 그림에 표현된 것처럼 농암과 퇴계의 회우는 기실, 이뤄지기 힘든 측면이 있었다. 한 고향(안동예안) 사람이라고는 하나, 둘 다 관직생활을 한데다 나이차가 무려 서른네 살이나 나기 때문이다.

퇴계가 34세에 과거를 급제할 때, 농암은 68세였다. 보통 사람 같으면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을 시기다. 그나마 두 사람 모두 그 당시나이로는 천수(농암 89세, 퇴계 70세)를 누렸기에 이러한 만남이 가능했다.

농암은 과거보러 떠나는 젊은 이황에게 격려의 시를 지어주었고, 이것으로 두 사람의 본격적인 인연이 시작된다. 공무에도 지나는 길이면 짬을 내었고, 휴가를 받아서는 농암과 강호의 즐거움을 함께 누렸던 이황이었다.

이황에게 생전(生前)의 농암은 나이로도 견수(肩隨)⁸⁾를 훨씬 넘어섰으면 벼슬로도 절석(絶席)⁹⁾에 해당되니 두 사람 간의 친함을 얻는다는 것은 실로 어려움이 따르는 일이었다. 여기서 우리는 농암의 대인다운 기질과 시인다운 풍모를 보게 된다. 젊지만 어진그릇을 곁에 두고 함께 즐거움을 누릴 줄 알았던 농암이야말로 당대 시인묵객들의 진정한 스승이었다.

이와 관련된 일화 한 토막이 기록으로 남아 있어 후학들의 웃음을 자아낸다.

44년간 9개 고을의 수령과 경상도관찰사를 지내고, 형조참판과 뒤이어 주어진 호조참판의 자리를 물러나 임금이 준 금서띠와 비단도포를 입고 제청청에 모인 백관들이 베푼 송별회를 치루고 두 해를 더 한양서 보낸 농암은 이황의 이별 영접을 받고 고향 예안으로 내려온다. 그리고 이듬해 그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때가 농암이 78세, 퇴계가 45세 되던 해였다.

‥‥‥자네 옛적에 이곳에 살며 스스로 영지산인이라 불렀으나 이제 내가 먼저 돌아와 지산와사(至山蝸舍)를 차지하였으니 손님이 주인을 몰아낸 꼴이 아니고 무엇인가. 될 수 있으면 빨리 송사를 하여 찾아가는 것이 마땅할 것이네‥‥‥

아! 이 얼마나 빙그레 미소 짓게 하는 운치 있는 말인가.

농암이 영지산인이라고 말하는 까닭은 고향 토계에 있는 산 이름이 영지산이고, 젊은 시절 퇴계는 이곳에다 지산와사(至山蝸舍)를 지어놓고 글을 읽었기 때문이었다.

퇴계는 벼슬에서 물러나면 이곳으로 돌아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때문에 그때까지 이황의 호는 퇴계가 아니라 영지산에서 따온 지산이었다.

농 섞인 농암의 편지를 받아든 퇴계는 웃음이 절로 나왔을 것이다. 존경하는 어른이 자신을 허물없이 대했으니 어찌 친함이 저절로 생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길로 자신의 호 지산을 농암에게 넘겨드렸다. 호를 주고받았으니 둘은 하나가 된 것이다.

오늘 우리가 감상하고 있는 그림도 그런 두 사람간의 인간사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오랜만에 회우한 둘은 기억의 실타래를 풀어 헤치고 끝없이 지난날로 되돌아가고 있다. 정자를 돌며 경전을 읽은 일이며, 애일당에 올라 시를 주고받았던 지난날이 꿈만 같아 반추할수록 둘은 떨어질 수 없는 한 몸임을 확인한다. 농암은 그날 밤 꿈속에서 다시 한 번 경호(이황의 자)를 불러낸다.

자리바위 구경을 경호(퇴계 이황의 자)와 함께 했다. 조그만 배를 타고 귀먹바위(聾巖) 아래로부터 배 줄을 풀어 천천히 흘러가서 사자바위(獅子石)를 지나 코끼리바위(象巖)에 이르러 배를 바위에 묶어 놓고, 풍경을 두루 돌아보고 나서 다 함께 그 위에 올라가 만져보고 놀기를 오래하였다.

그러다가 이윽고 아래로 내려와 바로 자리바위에 이르니, 이때는 비가 새로 개고 먼지와 더러운 것들이 깨끗하게 씻기어 매끄럽기가 마치 구슬 같았다. 다만 웅덩이에 쌓인 물이 돌 사이의 틈새에 끼여 있는데, 이러한 지세를 따라 앉음이 차례가 없고, 조그만 술상을 차렸는데 예를 갖추긴 했으나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이리하여 종일토록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어느덧 날이 저물었다. 구름이 달빛을 가리어 물빛이 흐릿하여 촛불을 켜 밝히니 바위는 분강 한가운데 드리워 있고, 강물은 여기에서 좌우로 나누어져서 흘렀다. 한 줄기는 내가 앉은 자리 곁으로 흐르고, 그 아래는 경호가 앉아 있었다.

내가 취하여 희극을 하는데 술잔에 술을 부어 목금(木禁 : 나무 가지로 엮어 임시로 만든 조그만 뗏목)에 올려 띄우니 경호가 아래에서 웃으면서 받아 마시기를 왕복 서너 차례, 함께 어울린 회재, 중거(황준량), 신재, 모재, 어은, 송강이 이 정경을 보고 모두 부러워했다."           - 농암집 '취시가'를 각색-

이날 강과 달과 배와 술과 시가 풍경과 어우러진 자리에 함께 있었던 인사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회재 이언적(晦齋 李彦迪), 신재 주세붕(愼齋 周世鵬), 금계 황준량(錦溪 黃俊良) 모재 김안국(慕齋 金安國), 송강 조사수(松岡 趙士秀), 어은 임내신(漁隱 任□臣)이 농암, 퇴계와 더불어 낭만적이면서도 탈속적인 한국적 풍류를 즐겼다.

그렇다고 농암과 퇴계가 줄곧 찰떡궁합이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깊은 관계일수록, 상대의 개성을 존중하고 입장을 접어주기도 하지만, 첨예할 때는 뾰족한 것으로 찔러주는 것도 지인의 도리였다. 55세 되던 해, 퇴계(토계로 물러난 다는 의미임)가 벼슬을 버리고 고향 토계로 은거했다는 소식이 들리자 농암은 시 한 수를 부친다.

주목할 점은 이 해가 바로 농암이 89세로 세상을 버리는 해이다. 농암은 세상과의 이별을 앞두고도 돌아온 퇴계가 못내 안타까워 시 한 수를 적어 보냈을 것이다.

- 내 한가롭게 물러나와 한 구렁을 오로지 하였으나/자네는 어찌 젊은 나이에 그리 하였는가/바르지 못한 이론 스스로 알고 비록 말이 있으나/훗날에 다시 그것을 다툴 일이나 없을지/복록을 경영함이 몇 해가 되었던고/산꼭대기 지은 집이 이제 처음이로다./이 사는 것이 모두가 잠깐 동안인데 헛이름 가지고 주인 손님 상관할 것 아니지-

이게 무엇인가? 절집으로 치자면 열반송(涅槃頌)이 아니고 무엇이랴. 구구한 이야기 할 것 없고, 농암을 알려면 이것 하나로 충분하다. 농암의 행적, 삶의 철학, 사상이 모두 이 시에 집약되어 있다. 어떻게 보면 다른 것들은 모두 사족(蛇足)이니, 이 시를 모르고 농암을 알았다고 말하지 말지다.

다른 건 몰라도 상관없다. 허나, 농암을 곁에 두려면 필히 이 시만은 알아야 한다. 임종하는 해에 퇴계에게 부친 시(詩)인 까닭에 농암의 89년 철학과 사상이 총체적으로 담겨있다.

비록 고승에게서 볼 수 있는 속박과 번뇌, 미망과 아집에서 벗어나 적멸의 순간을 포착, 실상이 해체된 언어는 아닐지언정, 선승이 깨달음을 얻고 내뱉는 오도송(悟道頌)의 화려한 비유를 단박에 넘어서고 있다.

욕 된통 얻어먹을 각오로 이 시를 까발려서 얘기하면 이렇다. 자기(농암) 말 안 듣고 돌아온 퇴계를 점잖게 타이르고 있음이다. 요즘, 시쳇말로  “니, 왜, 내말 안 듣고 사표 내 뿌렀노” 그 말이다.

계속해서 농암이 하고 싶은 말을 대신 옮기면, 니, 올곧고 반듯한 것 내 알지만 너무 맑은 것만 고집하다가 시속과 시류를 등져 나중에 후회 안 하겠나. 내 봐라, 누가 뭐라 카든 일흔 넘어서도 벼슬살이 안했나. 그래도 이 집 한 칸이 전부다. 언놈이 정권잡고 있으면 뭔 상관이고, 어차피 세상은 이래도 한세상 저래도 한세상 인거라. 니 혼자 도덕 찾고 명예 지키려고 발버둥 쳐봐도 세상은 무심한기라.

먼저 당부하노니, 내가 누굴 폄하하려고 이런다고 곡해하지 마라. 이 시는 그러니까, 방편이다. 아무리 좋은 약이라도 증상에 맞는 곳에 처방해야지 엉뚱한 곳에다 쓰면 독이 되는 것이다.

농암은 벼슬살이에 취미를 붙이지 못하고 자꾸만 은거하려는 퇴계가 걱정스러웠던 것이다. 저, 아까운 사람이 너무 곧기만 해 관직에 적응을 못하고 겉돌기만 하는 것이 못내  속상했던 것이다.

올 곧음이 너무 과하면 백이와 숙제처럼 수양산에서 굶어죽을 수 있으니 그렇게는 되지 말라는 노장의 당부다. 나라는 물론, 퇴계를 위해서도 물러남이 큰 손실이라고 본 농암이 당시 퇴계의 사정에 맞추어서 지은 시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둘 다 허물이 없다할 것이다. 유교적 세계관으로 볼 때 선비가 자신을 알아주는 주인을 위해 세상 속으로 나아간 것은 당시로써는 지극히 보편적 패턴이었다.

그것은 공자가 주유천하하며 세상 속으로 걸어 들어간 이래, 도도하게 흘러오고 이어져온 유교적 선비관이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론, 주자가 신유학인 주자학으로 도학의 연원을 밝힌 이후, 백이와 숙제의 유형, 즉, 오직 도덕과 학문으로 말하는 산림처사의 미덕 또한, 살아 있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이 지점은 나아가 이루려고 한 농암의 세계관과 물러나 지키고자 한 퇴계의 가치관이 정점에서 충돌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특히, 우리는 이 지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세존이 보리수나무 아래에서 깨달은 후, 맨 먼저, 스승에게 달려갔으나 모두 죽은 뒤여서 다시 옛날에 함께 수행했던 도반들을 찾아가 최초로 설법하여 진리의 수레바퀴를 돌렸듯 퇴계 또한, 인류사에 길이 남을 사상과 도학의 수레바퀴를 굴리며 새로운 세상을 태동시키는 해이기 때문이다.

어째든 농암은 이 시를 퇴계에게 보내고 얼마지 나지 않아 세상과 하직하는데 퇴계는 농암의 일대기를 기록하는 행장에서 "자제와 비복들을 편애하지 않았고, 혼사도 벌열 집안을 희구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이러한 퇴계의 증언은 은퇴한 후, 자연을 벗 삼아 '효빈가', '농암가', '생일가' 같은 단가를 짓거나, 중국의 악부시인 사(詞)에서 유래한 '어부가'를 우리노래인 9장짜리 장가로 재창작하고 기존의 '어부단가'도 5장으로 개작하는 등 강호의 풍류를 진정 즐길 줄 알았던 농암에게는 당연한 상찬이었다.

화산양로연에서 여자와 천민을 가리지 않고 초청한 노구의 농암이 색동저고리를 입고 춤을 추어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릴 수 있는 정신의 원류는 박애다. 그는 단순한 유학자가 아니었고, 젊은 퇴계마저 친구로 삼을 수 있는 통유의 강호처사였다. 갇힌 틀을 무너뜨려야 새 길이 열린다.

격을 무너뜨린 후, 농암은 국문학사에서, 퇴계는 역사에서 빛나고 있다. 역사의 격이 새롭게 창조된 것이다. 지금도 퇴계 오솔길은 농암종택에서 시작되거나 끝맺어진다. 실로 4백년이 지나서까지 가문 간 인연이 이어지고 있으니 신묘함이라할만하다.

권준 그림 속, 농암과 퇴계는 친구다. 망년지우가 오솔길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실로 회화의 격이,문화적 바로되먹임으로 되살아나 불멸로 탄생하려는 찰라다.

注, 1) 任去來 - 그대로 해석하면 오고감에 걸림이 없다는 뜻이다. 그런데 국어, 백과 ,한자사전 어디에도 없는 말이다. 혹시, 이 말이 인용된 원전을 알고 있는 분이 계시면 꼭 알려주길 부탁드린다.

2) 見以取之 - 이것도 마찬가지로 그대로 해석하면 보고 취한다란 의미다. 그러니까, 실지로 보고 안다는 의미를 가진 見而知之와는 반대의 개념을 지닌 것으로 본문에서 사용했다. 그러나 이 또한, 사자성어를 비롯해 국어, 백과, 한자사전에 없는 용어다.

3) 忘年之友 - 나이를 상관 않고 오직 학문과 재주로 사귄다는 뜻이다.

4) 忘形友  - 형편와 용모 지위를 상관 않고 사귄다는 뜻으로 권람, 신숙주, 한명회의 관계를 가리켜 쓰인 말로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나서 차용해 보았다. 이 말도 역시 사전에는 없다. 

5) 俗儒 - 풍속을 잇는 선비라는 뜻이니 의역하면 앞뒤로 다 막혀 새로운 것, 참신한 것, 창조적인 것을 거부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로 해석해도 무방할 것이다.

6) 通儒 - 통유는 속유의 반대개념이다.

7) 一家 - 한 집안 이라는 뜻도 있으나, 여기서는 학문과  예술의 분야에서 독자적인 경지나 체계를 이룬 상태라는 뜻이다.

8) 肩隨 -윗사람과 함께 걸어갈 때에, 예를 갖추는 의미에서, 약간 뒤에 떨어져 따라간다는 뜻인데, (통상 다섯 살 이상 차이가 날 때 지켜야할 예법이었다.)그러나 괄호안의 해석은 사전 어디에도 없다. 그러나 이 해석은 올바르다.

9) 絶席 -그대로 직역하면 자리 사이를 가로막는다는 의미가 된다. 절석이란 중국 漢나라 때, 어사대부나 상서령 같은 고위직은 어느 자리를 가나 전용석을 마련하여 따로 앉지 다른 사람과 같이 않지 않는다는 데서 유래됐다. 그러나 이 말도 사전에는 없는 말이다.

2009-01-15 13:48:07 / UGN 경북뉴스(ugnews@ug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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