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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화가 권준 선생이 '퇴계오솔길'의 사계절을 가을부터 익년 여름까지 이어가며 주변풍경을 화폭에 담고, 매월당문학상 시나리오 부문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작가 최성달이 권화백의 그림을 글로 야심차게 표현한다. 이번 기획연재는 2009년 1월에 시작하여 매달 초순과 보름에 연재되며, 1년간 계속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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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매화이야기
오늘은 스승의 날이다. 스승이란 가르치는 위치에 있는 사람을 말한다. 단순히 지식만 전달하는 수준에 머무는 선생은 작은 스승일 것이다. 큰 스승이란 험난한 인생의 항로에 등불과 같은 진리를 전수하는 사람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큰 스승이 드문 세상이다. 입시한파에 그 무슨 배부른 소리냐고 항변하는 사람이 있을지 몰라도 이 말은 결코 배부른 소리가 아니라 배고픈 소리다.
인생의 항로는 학창시절에 결정이 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아직 세상이 가득 들어차지 않아 풍성하게 열려있는 감성은 모범적인 모델에 따라 자신의 미래상을 정립하려는 경향을 갖는다. 대게 이 시기에 자신의 정신을 지배하고 결정하는 그 무엇을 만나기 마련이다.
누군가의 한마디가 뇌리에 박혀서, 또는 한 줄의 글귀가 인생을 결정하기도 하지만 대다수의 청소년은 가까이서 접하는 선생님에게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는다.
그들의 여린 눈과 귀와 마음은 품성과 사명감이 남다른 선생님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도록 프로그램화 되어 있다. 다만, 그것이 바로 드러나지 않은 것은 오성 안에 있는 이성이 아직 완전한 발현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잠복기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나이가 들면 인식이 확대되어 학생시절 받았던 느낌이 더욱 확연해진다.
이것을 최성달 유의 개똥철학으로 말하면 잊지 못하는 선생님이란 감성의 시기에 제자가 가슴으로 받아들인 현상이 나이가 들면서 이성의 발현으로 고착화되는 것을 말한다. 모든 확실한 증표는 이 감성을 거쳐 이성으로 확인을 받았을 때 진실성이 담보된다.
이 말을 환원하면 지각이 개입된 상태를 완전성에 더 가깝다고 본 것이다. 물론, 이 말은 맞지 않을 것이다. 감성은 이성보다 순수성이 훨씬 더 많은 내포된 개념이므로 지각이 아직 싹트지 않은 시기에 느낀 감정이 오히려 더 진실하고 깨끗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감성과 이성을 가만히 생각하여 보면 발현의 횟수, 발현되고 난 뒤 이성에게 제압당하는 시간의 길고 짧음의 차이가 나이와 연관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성향의 차이는 존재할지언정 나이든 사람도 감성에 빠질 때가 있으나 이성으로 회복되는 시간이 통계학적으로 젊은 사람보다 빠르다.
내가 서두에 이 말을 장황하게 한 것은 학문하는 자세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학문에 방도와 요체가 있을 수 없겠으나 해석하고 창조하는 영역에 종사하는 이라면 아이의 마음(감성)으로 사물을 보고 이치를 궁구하는 것은 어른의 마음(이성)으로 하라고 권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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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화나무 아래서'(38cm×55cm) Oil on canson pape |
그림을 보면 도산서당 앞 매화나무에 꽃이 흐드러지게 피어있다. 스승과 제자는 매화꽃 향기를 맡고 취했을 것이다. 매화, 난초, 국화, 대나무, 소나무는 선비의 상징이었다. 문인화와 시문의 대상으로 즐겨 인용된 사군자+소나무는 탈속의 의연함을 즐기는 인격의 투영물로 인식되었다.
이 중 특히 매화는 퇴계와 깊은 연관이 있다. 퇴계에게 매화는 단순히 잠시 즐기기 위한 풍류의 여흥거리가 아니었다. 인격적 대상으로 객관화되고 의인화된 지극한 학문의 동반자였다.
퇴계의 심미관에 자리 잡은 매화라는 대상은 기실 학문의 궁극과 연결된 측면이 강하다. 유학자들의 시를 감상하다 보면 멋과 풍류라는 미적 감각 속에 속된 것을 걷어낸 품격이 표현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요즘 일반화된 현대시처럼 감정 표출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탈속 풍류를 바탕에 깔고 하늘과 인간이 하나라는 사상을 담아내려고 했다. 퇴계의 시에도 이러한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매화시 91수만 따로 유묵으로 묶은 ‘매화시첩’에서도 산림처사의 기질이 여실하게 나타나 있다. 그 중 한편을 소개할까 한다.
陶山月夜詠梅
獨倚山窓夜色寒/홀로 산창에 기대서니 밤이 차가운데
梅梢月上正團團/매화나무 가지 끝엔 둥근 달이 오르네
不須更喚微風至/구태여 부르지 않아도 산들바람도 이니
自有淸香滿院間/맑은 향기 저절로 뜨락에 가득 차네
2.학문과 삶의 자세
그림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매화 구경을 마친 스승과 제자는 나무를 등지고 도산서당 담 앞에서 안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까?
그 대상이 퇴계와 월천이라면 십중팔구 학문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것이다. 두 사람 모두 책벌레였고, 시간을 허투루 낭비하지 않은 전형적인 선비였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주자대전이나 천명신도, 심경부주의 어느 한 대목을 두고 서로의 의견을 피력하고 있다고 상상하여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이다.
다른 제자에게도 마찬가지겠으나 월천에게 퇴계는 마음으로 받들고 마음으로 받아들인 참스승이었다. 퇴계가 이렇게 제자와 겨레와 인류의 큰 스승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삶에서 사물과 인간을 탐구하는 학문을 대하는 자세가 돈독했기 때문이다. 퇴계의 이러한 성정은 타고난 본성을 올바르게 개발했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다.
남겨져 있는 기록을 살핀 것을 종합하여 보면 퇴계의 됨됨이의 두드러짐을 발견할 수 있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어려운 처지에서도 기상이 높고 깨끗하여 젊을 때부터 사람들의 공경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과거급제 전에도 산사에 모여 놀던 사람들이 노소를 가리지 않고 선생이 오면 뻗은 다리를 모으고 비스듬히 누운 몸을 바로 세웠다는 일화에서도 알 수 있듯 그의 권위는 직위가 아닌 행실에 근원이 있었다.
굳이 남에게 강요하지 않았으나 기백의 정갈함에 타인들이 스스로 두려워했을 뿐이다. 이 같은 몸가짐은 호당의 사가독서를 할 때도 이어졌고, 과문이나 잡서를 베낄 때도 한결 같았다. 흔히 퇴계의 글씨를 '퇴필'이라고 하여, 추사체처럼 높이는 경향이 있는데 이는 글씨에 쓴 사람의 정신이 녹아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어머니 박씨가 아들의 이러한 곧은 성품을 세상이 용납하지 않을 것을 두려워하여 벼슬을 외직인 고을원에서 멈출 것을 당부했다는 일화는 인간 퇴계를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많은 것들을 생각하게 만든다.
퇴계학의 권위자인 고 이상은 박사가 퇴계의 생애를 시기별로 구분한 것을 참조하면 출생에서 33세까지는 수학기, 대과에 급제하는 34부터 풍기군수를 그만두는 49세까지를 출사기, 강학기는 예안으로 돌아온 50세부터 임종까지로 잡고 있다.
퇴계의 중요한 저술은 50세 이후에 대부분 이뤄진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그가 왜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왔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3. 퇴계사상의 요체
퇴계의 사상이란 주자학에 대한 자신의 관점을 정립한 것을 말한다. 그의 사상을 대변할 수 있는 주요저서를 소개하면 53세 때 정지운의 '천명도'를 수정하여 '천명신도'를 그렸고, 이것을 다시 55세 되던 해에 벼슬을 버리고 도산으로 돌아온 후 최종적으로 검토하여 '천명도설'을 지었다. 65세 때는 '인심도심도'를, 66세 때는 조목의 격론에 답하며 ‘심경후론을’완성했다. 그리고 임종하기 두해 전인 68세 때는 자신의 총체적 철학이 집약된 ‘성학십도’를 선조에게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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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스한 날'(38cm×55cm) Oil on canson pape |
그렇다면 그가 평생 심혈을 기울어 세우려고 한 사상의 요체와 체계는 무엇이었을까? 한마디로 언급하면 존덕성에 바탕을 둔 심학(心學)이고, 사서와 오경에 실체를 둔 도문학으로 이루고자 한 성학(聖學)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주자학의 테두리 내에서 세상의 이치를 발견하고 그것으로 도덕적 원리를 구축하고자 했다.
그의 사상을 일목요연하게 파악하려면 이기론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언급하여야 하지만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다만 그가 고봉과의 사단칠정논변에서 실존의 조건들과의 대입에서 모순과 직면된다는 제자들의 공박 속에서도 끝까지 이기분개론에 대해서 물러서지 않은 까닭은 가치론을 숭상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근원적으로 변하지 않은 땅의 법칙인 도덕과 윤리를 종교적 상태로까지 격상시켜놓은 것이 퇴계 철학의 특징이고 색채다. 이것은 주자가 이치에 따라 이동(理動)과 이정(理靜)을 모두 긍정한 것에서 이동에 방점을 찍은 것으로 현실의 어지러움을 치료하려는 우환의식의 발로였다.
이것을 다시 좀 더 쉽게 설명하면 학문의 궁극적 목표를 인(仁)을 체득하고 이(理)인 바의 본래 근원으로 돌아가는데 두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의 경론(敬論)은 이것을 실천하려는 방편이었다. 천리를 회복하고 인간의 선한 본성을 찾을 수 있는 근거가 바로 경에 있다고 믿었다. 퇴계에 있어 경의 의미는 천리의 인애를 구하고자 하는 삶의 양식이었으며 성인의 학문을 쌓는데 필수적인 마음의 자세였다.
그는 바로 이것을 확인할 수 있는 삶의 여건과 조건들을 최우선으로 두었기에 사색하고 제자 기르는 삶을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두 번째 그림은 하늘과 물이 동색인 푸른색으로 채색되어 있다. 유독 날씨가 청아하여 하늘이 푸르면 물도 더욱 푸르게 보인다. 맑은 날 물은 변함없이 하늘을 자신 안에 담는다. 하늘을 안고 그 색으로 자신을 채색하기에 물이 푸른 것은 당연한 이치다.
그 화창한 어느 날 스승과 제자가 자연을 벗 삼아 사색하고 있다.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길이 무엇인가? 도(道)다. 아침에 도를 깨치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공자가 논어(論語)의 이인편(里仁篇)에서 말한 조문도석사가의(朝聞道夕死可矣) 바로 그 도다.
파자로 도(道)자를 풀면 머리수(首)에 달릴주(走)다. 머리는 정신이고 원류다. 형의상학이다. 반면에 걷는 다리는 질료인 형의하학을 의미한다. 정신으로 사색하여 깨달은 것을 부지런히 실천하는 것이 도가 내포하고 있는 원리인 것이다.
자신이 걸어간 길이 후학에게 이정표가 된다는 것을 철저하게 자각하고 있었던 퇴계였기에 200여권이 넘는 방대한 저술 속에 일관되게 변하지 않는 것, 지고지순한 도덕적 원리를 발견하고자 몸부림을 쳤던 것이다. 그것이 도자의 머리수에 해당한다면 오늘날 우리가 그를 추앙하는 것은 앎으로 체득한 사상의 지속적 실천, 즉 달릴주에 있지 않을까?
4.도산서원과 애제자 조목
서원은 지역의 이름난 유현의 사묘를 세워 그 뜻을 받들어 모시고, 원을 세워 후학을 교육했다. 이 때문에 강학기능을 갖춘 유교식의 학교인 서원에는 반드시 제향 된 인물이 있다. 도산서원은 바로 전형적인 이 두 기능이 조화를 이룬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서원이다. 도산서원에서 퇴계 선생이 길러낸 제자가 367명이나 되었고, 사후 이들에 의해 영남 유림의 학통이 형성되었는데 그전까지는 학단이라는 개념이 없었다.
율곡학파라는 것도 알고 보면 율곡이 기대승의 학설을 지지한 것을 송시열을 필두로 한원진, 김창협으로 이어지는 기호학파가 퇴계의 이기이원론을 비판함으로써 대두된 학파라는 사실이다. 조선 성리학 논쟁이라는 것이 퇴계가 세운 이기론을 기호학파가 고봉과 이이의 관점에서 비판하고 그것을 다시 퇴계학맥이 되받아 비판하는 과정에서 형성된 상호의존성에 바탕을 두고 있다.
퇴계가 이처럼 사후에도 논쟁의 중심에 서게 된 연유는 그가 한국적 주자학의 조종이라는 위치 때문일 것이다. 퇴계는 고려, 조선을 통 털어 최초로 주자학을 완벽하게 이해한 인물이었다. 그전에도 이름난 유학자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퇴계처럼 사상을 정립할 정도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위치 때문에 이황을 두고 유학 도통연원을 중국에서 조선으로 옮겨놓았다는 평가가 제기되는 것이리라.
도산서원에는 거유 퇴계와 애제자였던 월천 조목이 함께 배향되어 있다. 퇴계의 경우 배향된 서원은 경기도를 제외한 조선7도의 29개 서원에서 봉사(奉祀)되었다. 경기도에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지 못한 것은 그곳이 율곡 이이의 세거지였기 때문으로 추론된다.
조목은 세상을 떠난 지 9년 뒤인 1615년 도산서원 상덕사에 종향되었다. 중앙에는 퇴계의 위패가 그 오른편에 월천의 위판이 봉안되어 있다. 그런 까닭에 사람들은 서애와 학봉, 한강이 제향 되지 않고 제자 중 월천만이 퇴계 곁에 모셨진 배경에 의아해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알다시피 퇴계의 제자 중에 전국적으로 우뚝 솟은 인물이 많았었다.
하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다. 월천은 일찍 벼슬길에 나선 학봉이나 서애와는 달리 산림처사로서 도산서당을 지키며 학문에만 전념했고, 퇴계 사후에는 선생의 가족까지 돌본 고족이었다. 월천이 얼마만큼 스승에 대한 성심을 다했는지는 기록이 그것을 증거한다.
15세에 이황 문하에 입문한 후, 47세 되던 해에 이황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한 결 같이 스승의 곁을 지켰다. 1570년 11월 이황이 병환으로 자리에 눕자, 정성을 다해 간병했으며, 그해 12월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1년 동안 허리띠를 풀지 않았으며, 3년 동안 웃는 자리를 피했다. 1572년 조정에서 동몽교관이라는 벼슬을 제수했으나 스승의 상중이라는 이유로 거절했으며, 1576년 상기를 마치고 출사할 때까지 오로지 스승과 관련된 일들을 매듭짓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상덕사(1574년)를 세우고, 스승의 언행을 모은 ‘퇴계선생언행총록’을 편찬하고, 이황의 저술인 '이학도통'에 발문을 붙여 간행을 했으며, 연보를 정리하고 문집을 교정 편집하는 작업을 선두에서 지휘했다.
봉화현감으로 출사를 한 후에도 매월 두 차례 삭망마다 도산서원에 모여 원생들과 강학을 했다. 65세로 합천군수로 재직 중에는 생전에 스승에게 받은 편지들을 모아 8권의 책으로 엮었다. 83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조목은 오로지 성심으로 스승을 떠받드는 일에 일생을 바쳤다.
이러한 그의 행적 때문에 퇴계의 제자들 중 유일하게 조목만이 그의 사후 퇴계를 모신 상덕사에 위패가 봉안되었다. 당시 월천을 퇴계와 함께 배향하는 문제는 적어도 겉으로는 이견을 표출할 수가 없는 분위기였을 것이다.
물론 일각에서 광해군 시절, 북인정권이 그를 비호했다고 보는 설도 있다. 만년에 조목이 서애를 육산상의 학문을 신봉하여다 하여 '아호이륙'이라 빗대고 '강화오국'의 주범으로 지목하여 반목하였던 반면, 광해군 치세기의 북인정권의 핵심이었던 정인홍과는 절친했기 때문이다.
북인정권하에서 남인이었던 안동 출신들이 대부분 조정에서 밀려나 있었지만, 조목에게서 배웠던 예안 출신 제자들 중 다수가 북인정권에 참여를 했다. 퇴계학맥의 적전이었던 예안학단의 부흥기였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인조반정으로 예안학단이 몰락의 길을 걷는 단초가 되었다. 인종반정으로 이덕홍의 아들 이강은 북인계의 폐모론에 가담했다가 처형되었고, 조목과 금난수의 아들은 유배에 처해지는 불운을 겪어야 했다. 이러한 사정 때문에 정온, 김택룡 같은 이름난 제자가 있었으나 예안학단이 유성룡과 김성일, 정구의 학맥으로 흡수된 것으로 보인다.
조목의 상덕사 배향이 광해군 치세기에 이뤄져 정치적 해석이 개입할 근거를 남겨놓았지만 위 열거의 예에서 보듯 스승 이황과 연관하여 그를 빼놓고 생각할 수 없다는 점에서 월천의 도산서원 배향은 생전은 물론 사후, 그리고 지금까지도 지극히 자연스러운 과정이 결집된 결과였다는 점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2009-05-15 17:53: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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