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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작성일시 - 2009-03-31 18:46:06
'우리의 미래를 위하여'
권준, 퇴계오솔길 한(韓)문화 기획전(7)
 

중견화가 권준 선생이 '퇴계오솔길'의 사계절을 가을부터 익년 여름까지 이어가며 주변풍경을 화폭에 담고, 매월당문학상 시나리오 부문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작가 최성달이 권화백의 그림을 글로 야심차게 표현한다. 이번 기획연재는 2009년 1월에 시작하여 매달 초순과 보름에 연재되며, 1년간 계속된다.


 

  '화해' (38cm×55cm)                                                                                Oil on canson paper      

그림을 한번보자. 이 그림의 배경은 오천군자리 후조당에서 유림대표들과 스님들이 만나는 장면이다. 일곱 사람이 등장하고 있으나 실은 이날 많은 분들이 왔다. 퇴계 선생이 지은 도산9곡과 연관된 종손과 주손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이날 배포한 자료집을 보니까 치암고택 구지, 고산정, 청량사, 용수사 등 관련된 유적지가 47군데나 되었다. 참석한 분들이 다행히 낯익은 분들이 많아 불청객이면서 불편함이 없었다. 특히 발기인 공동대표에 선임된 이동수 선생이나 정왜 스님, 집주인 김준식 문화원장님은 평소 존경하는 분들이어서 한결 마음이 편했다.

우리가 청량산 유람을 시작하면서 일관되게 머릿속에 그린 것은 ‘화합’이었다. 퇴계 선생이 걸어간 길을 구경 가는 단순한 답습이 아니라 그 속에서 변하지 않은 가치를 발견하고자 했다. 그것을 시대정신과 접목하는 방안이 무엇인지 고민하면서 이 길을 걸었다.

멀어지고 소원해 졌던 유교와 불교가 철학과 사상으로 교류하고, 스님과 유림이 지난날을 반추하여 내일을 이야기하고, 불자와 유자가 만나 두둥실 부둥켜안고 춤추는 그날을 꿈꾸며 이 길을 걷고 걸었다.

2월21일 오천군자리에서 열린 ‘도산9곡 문화연대’창립 모임의 발기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불교와 유교의 상호교류와 만남을 통하여 종교와 사상을 초월하고 상호이해와 화해 협력으로 통합을........"

권준은 이 순간의 엄숙함과 진지함을 그림 속으로 옮겨 놓았다. 한복저고리에 조끼를 걸친 백발의 어른이 스님들에게 뭔가를 말하고 있고, 그 옆에는 무름을 공손히 포갠 청년이 이들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다. 둘레에서 한 곳으로 응시하는 사람들의 표정에도 비장함이 묻어난다. 하나 같이 격식을 갖춘 곡진한 자세에서 존중이라는 형식이 배어나온다. 뒷모습만 비친 스님의 얼굴도 읽혀진다. 몸짓에서, 보이지 않은 얼굴이 무얼 말하고 있는지 확연히 보여준다.

이 그림은 또 하나 색다른 맛이 있다. 지금까지의 그림이 실경을 담아내는데 초점을 맞춘 나머지 인물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었다. 반면 이 그림에서는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헤아릴 수 있는 자유를 맘껏 누릴 수 있다. 몸짓과 얼굴, 동선에서 면면들은 말한다. 화해와 포용을, 풍요로운 내일을 향해 함께 달리가자고 손짓한다. 이 확대경 같은 한 장의 인물화에서 우리는 이 시대가 간절히 원하고 찾는 정신과 자세를 발견한다.

마주 앉은 대상들은 이심전심으로 이래야 조선민중이 산다고 말한다. 이걸 진작 못하는 바람에 사단이 나고 불란(不亂)이 일어났다고 고백한다. 인류사에서 종교사에서 조선 역사에서 수백만이 죄 없이 억울하게 죽어간 연유가 모두 여기에 있었음을 자각한다. 인류문명의 개화의 진척과 민주주의 창달과 인권신장의 역사가 이러한 열린 자세에서 신세계를 출현시켰음을 서로의 눈빛으로 선언하고 있다.

방금 내가 한 그림의 해석은 권준의 마음에 꼭 들었을 것이다. 그가 이번 기획에서 의도하는 바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 사이에는 전혀 이설 있을 것이 없다. 그러나  독자의 입장에서는 다소 뜬구름 잡은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아래의 글은 그래서 나왔다. 그림이 나온 배경이니 만큼 좀 길지만 차근차근 읽어주길 바란다. 그래야 이 그림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가 있다.

조선이 유학을 표방한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서당교육이 아닐까 싶다. 공부를 시작하는 첫 단계로 4자 시로 된 천자문을 익히도록 한 것에서 지혜가 묻어난다. 올바른 품성이 시적 감수성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선조들은 갈파하고 있었다. 사서오경이란 본격적인 인간학을 연마하는 전 단계로 천자문-동몽선습-명심보감-자치통감-소학의 순서로 학문에 임하게 했다.

주자학 일변도의 풍토에서도 조선이 5백년의 사직을 유지한 비결을 '천자문'에서 읽는다면 지나친 비약일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난 이 숨겨진 코드가 진행형이라고 믿고 있다. 아직 인류국가로 넘어서지 못하는 2%로 부족의 그 무엇을 이 속에서 찾을 수 있다고 확언한다.

비록 지금은 그 반대로 가고 있으나 사회적 공론이 모아지면 궤도수정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이니까 우리가 그것을 요구할 수 있는 힘을 먼저 길러야 한다.

대학을 보라. 법학, 행정학, 정치학, 경영학, 무역학 등 전문 직종에 필요한 것들을 너무 일찍 그리고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모든 대학이 거의 공통적으로 이러한 과들이 개설하고 있다. 소수 대학 말고는 학부에서는 인간학 중심으로 가야한다. 역사학, 인류학, 철학, 문학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인간학으로 인식을 넓힌 뒤 전문지식을 배워야 생명력이 길다. 회사 생활에서 진정한 승자는 다양한 독서를 한 사람이다. 이것은 만고불변의 진리다.

어린 시절 천재라고 날뛰는 사람들이 왜 끝까지 천재가 되지 못하는가? 기본소양의 함양 없이 단순한 성과 위주, 기계식 교육으로 나아갔기 때문에 종합능력과 응용 잠재력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내 말이 억지로 들린다면 미국의 아이비리그대학(미국 동부 명문대학)들을 보라. 어디 한 군데라도 문사철을 등한시 하는 곳이 있는가?

인류를 선도하는 미국문명이 그냥 생긴 게 아니다. 우리의 천자문 교육의 위력을 이들 또한 일찌감치 알고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우리는 고루하고 느린 것으로 여겨 버렸다는 것이고, 그들은 금지옥엽 갈고 닦았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내가 늘 아쉬움과 안타까움을 토로하는 것이 있다. 역사에서 가정이 있을 수 없지만 이 기반 위에서 어느 시점 천주학과 불교를 수용하고, 최치원이 말한 풍류도를 계승 발전시켰다면 어떠했을까?
틀림없이 고양된 문화 축적을 물려받은 우리는 지금 엄청난 나라에 살고 있을 것이다.

정이천의 도문학(道問學)만을 중심으로 삼아 격물치지(格物致知), 성즉리(性卽理)를 내세운 주자학만을 신봉하지 않고, 정호의 존덕성(尊德性)철학을 계승한 육산상을 수용하고, 그를 계승한 왕양명의 학문을 받아들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물음도 같은 맥락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조선에서의 양명학과 불교와 선풍을 이단이라 하여 차단한 것은 우리역사에서 엄청 뼈아픈 것이다. 기회가 왔을 때 자주적으로 근대화 할 수 있는 저력을 보유할 축적의 시간을 원천 봉쇄당하는 결과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왕명학이 이탁오에 이르러 인간성을 옹호하는 본능을 긍정하고 남녀평등을 부르짖는 등 사상의 극좌까지도 나아갔다는 점을 상기해보면 나로서는 배가 아플 지경이다.

이것이 무얼 의미한다고 생각하는가? 사상의 파급효과다. 생각하여 보라. 생각하는 것이 제약받는 사회가 다양한 문화를 창출할 수 있겠는가? 말 한마디 잘못하면 사문난적으로 몰려 입신양명은 물론이고 생명까지 내놓아야 한다면 모든 방면의 생산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외래문화든 정착되어 있던 문화든 조선 역사는 수용의 미덕과 면역력이 없었다. 이것이 국가적 불행으로 이어진 것이다.
첫 번째 조선의 꿈이 날아간 것은 아버지 인조에 의한 소현세자의 독살이었다. 9년간의 볼모살이를 마치고 귀국한 소현은 새로운 세계관으로 주자학에 함몰되어 있는 조선을 개혁하려고 했다. 그것은 아담 샬을 통해 갖게 된 과학문명에 대한 신뢰와 천주학에 대한 이해였다. 나는 이 시기를 조선이 자주 근대화의 기틀을 다질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고 믿고 있다.
정조와 그의 아들 순조의 치세기에도 이런 기회가 있었다. 천주교와 천주학을 분리하여 볼 줄 아는 눈만 있어도 근대화는 1백년 앞당길 수 있었다. 일본이 천주교 자체는 박해했지만 천주교를 통해 들어온 네덜란드 축성술이나 러시아의 선박기술과 관련된 서적을 보급하고 적극적으로 외래의 기술을 도입한 예와 비교하면 아쉬움이 아닐 수 없다.  

조선이 사상이나 문물의 수용 면역력이 강했다면 미국 배가 통상하자고 왔을 때 쇄국정책을 고수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명성황후의 개방정책을 방해하는 세력들도 미미했을 것을 것이다. 주자학적 세계관으로 사물을 재단하려는 발상은 나라가 망하는 그 순간까지 목숨처럼 귀한 것으로 여겨졌다.

이러한 기회를 차단당한 주자학의 조선은 과하게 표현하면 거의 버려진 상태에서 외세의 강요에 의해 문호를 개방하여야 하는 비극을 맞았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너무나 모르는 것이 너무 많은 민족이 되었고, 역사를 갖게 되었다.

조선역사에서 가장 솜씨 좋았던 대장장이의 이름을 아는가? 그렇다면 춤을 제일 잘 추었던 무용가의 이름은? 경복궁을 책임지고 지은 대목수의 이름은? 대포 전문가? 배 제작 전문가무용가는? 활 명인은? 소리꾼은? 명고는? 공예가? 금속 공예가? 조선백자 최고의 도공은? 막사발 옹기 도공은? 석불과 탑 명인은? 다리의 제작자는?

우리는 쟁이들에 대해서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다. 이중에 내가 아는 거라곤 경복궁을 대원군이 지었다는 것뿐이다. 경회루도 그가 짓고 근정전도 그가 지었다는 것이다. 그런가. 웃기는 소리다. 우리역사에서 일본문화가 들어오기 전까지 건축가(영조 또는 조영)의 개념은 없었다.

이러고도 우리는 이들이 남겨놓은 작품들을 향유하면서 국보-보물-사적-국가중요민속자료-무형문화재-유형문화재로 구분하여 대단한 작품인 냥 받들어 모시고 있다. 물론, 이건 좋은 일이고 그렇게 진작시켜야할 일이다.

내가 말하려는 요점은 창조본질에 관한 것이다. 파스칼의 말처럼 모든 창조는 누군가 자신의 행위의 결과를 본다는 전제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창조는 멈추는 것이다.

권준이 배고픔을 참으로 그림을 왜 그리겠는가? 이 최성달이가 담배 값이 없어 때론, 구걸하고서도 잠 안자고 글 쓰는 동기의 원류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누군가 내 그림을 보고 글을 읽는다는 상호 커뮤니케이션의 시스템이 작동하기 때문에 그리고 쓰는 것이다.

  '기약' (38cm×55cm)                                                                                   Oil on canson paper

그것이 예술지상주의와 연결되어 있으면 감동의 작품이 나올 것이고, 아무리해도 노동으로 인식이 되면 그저 입에 풀칠하기 위한 일이 될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판단은 작품에 명확히 자신의 이름이 걸리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어마어마한 비중이 차지하는 것이다.

이 말이 예술 창조의 원류고 원천이 틀림없다면 조선시대의 예술품에는 원천적 흠결이 존재한다. 위에 언급했다시피 조선의 창작품에는 대부분이 주인공의 이름이 빠져있다. 문자로 기록된 서적류나 문인화 말고는 모조리 그렇다. 이러한 기반이 뒷받침되지 않은 시대의 작품을 최고라고 칭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희소성으로 평한다면 몰라도 예술 본질의 눈으로도 정말 그런지는 의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는 물어야 한다. 천주교를 박해하고, 천주학(서양학문)을 봉쇄하고, 서양문명을 거부하고, 불교와 선풍을 죽인 주자학은 어디에 있느냐고? 답이 보일 것이다.

기독교는 조선에서 신자수를 가장 많이 보유하는 종교가 되었고, 서양학문은 주류가 되었으며, 우리는 서양문명이 준 혜택을 누리고 있다. 모순이지만 이단이라 외쳤던 주자학은 온데간데없고, 설움 받던 불교와 선풍이 이 땅을 누비고 있다. 이것이 역사의 정칙이다.

모든 걸 사라지게 만들면 대상에서 자양분을 흡수하지 못해 스스로도 자멸하는 것이다. 숲을 축소하면 동물들이 살아갈 공간이 줄어들고, 동물이 살지 못할 땅이 되면 욕심을 채운 인간도 삶을 영위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 아닌가.

자! 이제 알맹이가 다 나왔으니 통찰의 눈으로 이 단락을 정리하여 보자. 요즘 세태가 어떠한가? 개신교가 주자학의 오류를 답습하고 있다는 불안감을 지울 수가 없다. 천박한 전도주의를 앞세워 막무가내로 신을 전파하고 있다.
어떤 광신도는 스님을 마귀로 보고, 죽었다가 3일 만에 부활한 예수를 믿어야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고 강변한다. 이건 막가파나 하는 짓이다. 어느 스님 말마따나 죽었다가 살아나는 것은 잠잘 때 죽었다가 새벽에 불뚝 서는 xx뿐이라는 항변은 오늘날 개신교가 처한 정확한 현실의 반영이다.

종교적 경직이 부른 광적인 기사도 우릴 슬프게 한다. 며칠 전 통일교 문선명 총재의 자서전을 기독출판의 깃발을 내건 김영사의 이름으로 출간했다고 해서 국민일보가 시비를 걸고 나섰다. 문명 천지에 아직도 버젓이 종교적 광신을 강요하는 엘리트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이 나를 분노하고 만든다. 이들이야말로 역사를 거꾸로 돌리고 싶어 하는 마귀집단이다.

왜 예수를 믿으면 이득 본다는 생각만 하고, 인간의 죄를 대속하여 죽은 예수의 고난은 생각지를 못하는지를 모르겠다. 손해 볼 줄 아는 기독교인이 참 기독교인이요, 예수의 모습이다.
봉사로 승부를 걸어야 한다. 희생으로 모범을 보여야 기독교가 부활한다. 생명의 부활로 슬로건을 거는 순간 이 땅 기독교의 성장세는 멈출 것이다.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순혈주의를 표방하는 순간 1천년간 결집된 성서의 통찰은 경직을 견디지 못해 무너질 것이다. 초대교회가 순혈이었다는 자체가 환상이다. 지금의 기독교는 열심당 계열도 아니고 에세네파 계열도 아니다. 당시에는 이단으로 취급받았든 사도바울 계열이었다. 유연한 기독교, 대중적 기독교의 표방이 오늘날 기독교의 원류다.

유일신관의 전도주의로 기독교를 팔아먹는 것도 역사와 인류에 죄를 짓는 것이다. 야훼는 유일신이 아니다. 다른 신을 질투하는 많은 신 가운데 하나였을 뿐이다. 이 말은 내가 한 말이 아니고 야훼 자신이 하신 말씀이다. 야훼께서는 말씀 하셨다. '나 이외의 다른 신은 믿지 마라.' 이걸 부인할 참인가?

그리고 이걸 역사적 통찰 없이 액면 그대로 받아드리면 사는 것이 시끄러워 진다. 믿음과 종교 때문에 형제가 싸우고, 며느리와 시아버지가 반목하게 된다. 분열과 반목을 부추기는 종교는 참 종교가 할 짓이 못된다. 참 종교인이라면 시대의 정신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인류 보편적 정신에 종교적 맹신을 귀의(歸依)시킬 줄 알아야 한다.

얼마 전에 선종한 김수환 추기경은 그러한 모범의 전례다. 석굴암을 한 시간 이상이나 넋 잃고 바라보다가 자신의 핏속에 불교적 정서가 있다고 스스럼없이 고백할 수 있었던 열린 종교인이었다.
성균관대학 설립자인 김창숙을 기리는 유림의 최고 권위상인 심산상을 받고서도 그의 묘소에 넙죽 절을 했던 추기경이었다. 맹신자들이 우상숭배라고 몰아붙이자 심산에 가장 합당한 예를 절이라는 형식으로 표현했다고 당당하게 말하던 추기경이었다. 이것이 참 종교인의 모습이다.
종교적 신념이란 스스로의 희생을 전제로 성립되는 당위일 뿐, 그것을 무기로 타인을 해할 수는 없다. 환원하면 믿음을 방해하는 요소에 신의 이름으로 목숨을 걸고 대항할 수는 있어도, 어떤 명목으로도 타인의 자유를 방해할 수는 없다. 이것이 지켜지지 않으면 작게는 집안싸움이 나고 크게는 십자군 전쟁처럼 신의 이름으로 전쟁을 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발생한다.
남을 죽여야 하는 전쟁에서 신의 이름으로 파괴와 살육을 자행한 것이다. 자신이 품은 생각을 실현할 수 있다면 다른 사람의 종교적 신념은 굴복시키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던 상처를 유전으로 물려받은 우리는 종교적 광기에 민감한 존재들이다.

역사를 보라. 광기에는 사상과 도덕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있다면 신의 확연한 광기와 이데올로기의 낭자한 핏자국이 있었을 뿐이다. 광기의 전도주의는 이것의 축소판이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같은 종교를 공유하고 있다면 저렇게 죽자 살자 싸우겠는가? 미국이 침공한 쿠바 피그만, 베트남, 아프카니스탄 이라크의 공통점은 이념과 종교, 국가적 이익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다. 종교전쟁은 문명과 문명이 충돌하는 것이다. 그 만큼 종교적 맹신은 무서운 것이다. 신을 위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왜곡된 생각은 참혹함을 낳는다. 그러니 작은 싸움의 씨앗부터 만들지 말아야 한다.

역사의 정칙은 기독교가 교리의 딜레마에 빠져 좌충우돌하는 동안, 불교가 대중과 함께 하는 고민이 부족할 때, 다시 유교를 부르고 있다. 유교적 자본주의, 유교적 가치가 오늘날 새롭게 조명 받는 이유가 무엇인가? 역사는 돌고 돈다. 주류적 사상의 흐름이 병폐에 직면하면 대체할 사상과 정신을 찾고 요구하는 것은 역사 불변의 진리고 정칙이다. 이것이 권준이 그림으로서 말하고자 하는 요지다.
  '나선 길' (38cm×55cm)                                                                              Oil on canson paper

<8편은 월천서당으로 가니더…>

  2009-03-31 18:46:06 / UGN 경북뉴스(ugnews@ug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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