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계의 만휴정

서수용/한국고문헌연구소 소장

묵계의 만휴정(38.0×55.0cm)                                                  Oil on Canson Paper

'청백리의 표상, 만휴정 주인'에다 더해 안동 김씨의 상징적 역사 인물이기도한 이가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 1431, 세종13~1517, 중종12)이다. 그는 청백(淸白)과 공근(恭謹)을 평생 실천한 이다.

안동 영천간 국도변으로 길안면 소재지를 지나 얼마 쯤 가면 길안면 묵계1리가 나온다. 그곳에는 보백당 김계행 선생의 종택과 그 옆으로 보백당을 제향한 묵계서원(默溪書院), 그리고 신도비와 비각이 아름답게 서 있다.

종택 맞은편에 있는 시내를 건너면 솔숲이 우거지고 석벽으로 둘러싸인 틈새로 폭포수가 그림같이 떨어지는 동부(洞府)가 나오는데, 오래전부터 송암(松巖)이라고 불렀다. 날아오를 듯 경쾌한 정자 건물은 물론 곡간수(谷澗水)가 알맞은 높이로 떨어지며 내는 물소리와 물보라도 일품이다.

만휴정(晩休亭,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73호)은 송암 계곡 그 초입에서 살짝 그 모습을 드러낸다. 만휴정 뒤로는 계명산, 앞으로는 금학산과 황학산이 겹겹으로 둘러싸고 길안천(吉安川) 명경지수(明鏡止水)까지 유유히 흘러 세상의 한 점 티끌로 없는 듯한 신선세계를 펼친다.

만휴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와가로 되어 있다. 정자 앞쪽 3칸은 세면이 개방된 누마루 형식으로 누각 주위 3면으로는 계자각난간을 둘렀다. 지붕은 홑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처마선이 날렵하여 정자의 맛을 한껏 살리고 있다.

'내 집에는 보물이 없다.(吾家無寶物), 다만 있다면 청백이 있을 뿐(寶物惟淸白)' 일찍이 보백당 김계행 선생이 읊은 시구의 일부다. 선생은 진작부터 보백당이라고 자호한 뒤 날마다 조용히 그곳에서 성현의 학문을 탐구하고 가문의 앞날을 준비함과 아울러 후진을 양성하며 만년을 보냈다. 선생이 이곳에 터전을 마련한 것은 30대부터의 일로, 이는 학문을 좋아하고 자연을 벗하고자하는 선생의 지향을 드러낸 것임에 분명하다.

선생이 자손들에게 줄곧 경계한 내용을 보면, '청백(淸白)을 집안에 전하고, 공근(恭謹)을 대대로 지킬 것이며, 효우(孝友)와 돈목(敦睦)은 조상들의 가르침이니라.'라는 것이다. 이것은 선생 자신이 평생 수양을 통해 터득한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한 실천 덕목이었다. 후손들도 그 뜻을 기려 이러한 내용들을 현판에 새겨 정자 마루에 높이 걸어두었다.

선생은 세종13년(1431) 인재가 울흥하던 시절에 안동시 풍산읍 소산(素山)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공부를 시작했고, 14살 때는 부친(始祖 9世, 金三近)이 비안현감이 되자 그곳 향교에서 중용(中庸)을 배웠다. 문리가 크게 생겨 16살에 생원시, 그리고 이듬해 봄에 생원 회시에 모두 합격하니 당시 비안고을의 경사였다 한다.

세종29년(1447) 정묘(丁卯) 식년(式年) 생원시에 합격하니 2등 15위의 성적이었다. 이 해에 이천 서씨와 결혼했으나 5년 뒤 사별했다. 서씨가 낳은 두 딸 중 한사람은 찰방 박눌(朴訥, 함양 박씨)에게 시집가 그가 낳은 아들 5형제인 거린(巨鱗), 형린(亨鱗), 홍린(洪鱗), 붕린(鵬鱗), 종린(從鱗) 모두 문과에 오르는 광영이 있었다.

둘째 딸은 진사 류자온(柳子溫)에게 시집갔는데 이분의 손자인 입암 류중영이 문과에 급제했고, 증손자가 저 유명한 겸암 류운룡과 서애 류성룡 형제다. 박눌은 경북 상주시 이안 지역에 터전을 잡았고, 그 막내아들이 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금당실을 기반으로 지금까지 명문가를 형성하고 있다. 안동 하회마을에 터전을 잡은 풍산 류씨의 국반(國班)으로서의 번성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을 정도다.

17세에 생원시에 합격한 뒤 초취 부인과의 사별과 영양 남씨와의 속현, 그리고 성균관 입학, 5형제 출산, 성주와 충주교수 역임, 부친상, 점필재 김종직과의 교유 등이 있었다. 그간 33년의 세월이 흘렀고, 마침내 성종11년(1480) 경자(庚子) 식년시에 병과(丙科) 21위로 문과에 급제했다. 선생은 곧바로 정6품직인 사헌부 감찰에 임명되었다. 이후 홍문관 수찬, 이조정랑, 사간원 헌납, 사헌부 장령, 의정부 검상, 승정원 동부승지, 예조참의,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1498년(연산군4)에 대사간에 올랐다.

대사간이 되어서는 권간(權奸)을 극론했다. 이어서 홍문관 부제학을 지냈다. 보백당은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한 명망이 높은 관료였다. 그러나 훈구파에 의해 경세제민의 큰 뜻을 펴지 못하게 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안동으로 낙향하였다. 고향인 풍산(豊山) 소산 이웃 마을인 사제(?堤) 위에 조그만 정자를 지어 ‘보백당(寶白堂)’이라 하고 학생을 모아 가르치니 '보백선생(寶白先生)'이라고 불리었다.

보백당이 훈구세력들의 집중적인 견제를 받은 것은 다름아닌 점필재 김종직(金宗直:1431,세종13~1492, 성종23)과의 교유 때문이었다. 이로 말미암아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태형을 받고 5개월여 동안 투옥까지 되었으나 다행히 큰 화는 면하였다.

정동갑인 점필재 김종직과의 만남은 문과 급제 이전인 41세 때부터 시작된다. 선생은 그와 주역(周易)과 근사록(近思錄)을 강론했는데, 이로부터 도의교(道義交)를 맺었다. 점필재는 고려 말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의 학통을 이은 아버지 강호 김숙자로부터 수학하고, 후일 사림(士林)의 조종이 되었다.

그는 문장과 사학에도 두루 능했으며, 절의를 중요시해 조선 시대 도학(道學)의 정맥(正脈)을 이어 가는 중추적 구실을 하였다. 그의 제자들인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김일손(金馹孫) 등의 면면을 보아도 그 위상을 짐작할 수 있는 이다. 

점필재집을 보면 두 분이 막역한 관계였음을 알 수 있다. 점필재의 꿈 속에 보백당이 나타난 내용을 세 수의 시로 읊었다. 이는 점필재가 일찍이 신축년(1481, 51세) 11월 초8일 밤 꿈에 산수(山水) 사이에서 노닐다가, 바로 그 전년인 경자년(성종11)에 50세가 넘어서 급제한 김계행(金係行)을 만났는데, 그가 말하기를 내가 "사헌부 감찰로 있다가 남의 배척을 받아 파면되고 성현도찰방(省峴道察訪)이 되었다."고 하면서 그 일의 시말(始末)을 죽 기록하여 보여 주려고 했다는 내용으로 지은 작품이다.

桂籍非遲暮 과거 급제는 늦은 편이 아니요

烏臺任去留 사헌부 근무는 그 목적인 아닌 걸

人言行或泥 남의 말로 진로가 꺾이기도 하지만

天且子爲謀 하늘이 그대에게 꾀하도록 한 걸세

檄上雲煙動 방판 위에 글씨는 살아 움직이고

驢邊水石幽 나귀에는 수석 가득 실었구려

猶勝茶酒務 오히려 사헌부의 직무보다 나으니

程驛可優遊 역참에서 우유자적할 수 있을 터이니.

벗인 보백당이 지방 역을 관장하는 미관말직인 찰방에 임명된 꿈을 꾸고 나서 이를 시로 쓴 것이다. 보백당은 실제로 점필재 자신의 터전이 있던 고령고을의 현감으로 임명되었다.

보백당과 점필재는 닮은 점이 적지 않다. 두 분 모두 도학(道學)에 전념했다는 점과, 깨끗한 인품을 평생 지녀 후일 청백리에 녹선되었다는 점에서다. 이들 두 사람은 모두 일찍이 초시인 생원과 진사시에 16세와 23세로 각각 합격했다. 그러나 보백당의 경우 문과를 50세에 이르러서야 하게 된다.

이에 비해 29세에 문과에 급제해 사헌부 감찰, 홍문관 수찬, 이조좌랑, 예문관 수찬, 함양군수, 선산부사 등 직을 두루 역임한 점필재는 벗의 문과 출신을 고대해마지 않았다. 결국 50세에 이르러 벗이 급제했다는 소식을 들은 점필재는 그 기쁨을 시로 드러냈다.

첫 구절에서, '과거 급제는 늦은 편이 아니요/사헌부 근무는 그 목적이 아닌 걸'이라고 노래했다. 이는 도학자로서 과거 급제의 성취에 앞서 학문과 인품을 높이 산 인물 평가 기준 때문이다. 점필재는 억울한 일로 지방 수령의 직임을 제수받아 낙향하는 벗에게 나귀에 가득 실은 수석을 이야기하며 고을의 풍광을 벗 삼아 유유자적할 수 있는 현실을 즐기라고 권하고 있다.

보백당이 만년에 유유자적했던 만휴정에 가보면 폭포수 위로 드넓은 반석이 있는데 그 위에 '보백당만휴정천석(寶白堂晩休亭泉石)'이라는 암각서가 새겨져 있다. 이는 점필재의 시구에서 나온 '우유(優遊)'하기에 너무나 적합한 공간이 바로 만휴정 주변 자연이라는 사실을  말해주는 증좌(證左)다.

보백당의 고결한 인품은 조선왕조실록에 올라 있는 사신의 평을 통해 제감할 수 있다.

성종24년 계축년(1493, 홍치6) 10월24일(을유)의 기록이다.

사신이 논평하기를, "이 정사(政事)에 김계행(金係行)을 성균관 사성으로 삼았는데, 김계행은 학행(學行)이 있었다. 형(兄)의 아들인 중[僧] 김학조(金學祖)가 일찍이 광묘(光廟)에게 사랑을 받았는데, 김계행에게 말하기를, '아저씨가 만약 벼슬을 얻고자 하시면 마땅히 이를 도모하겠습니다.'라고 하자, 김계행이 노여워하여 매를 쳤으니, 이때 의논이 이를 아름답게 여겼다." 하였다.

史臣曰 是政以金係行爲成均司成 係行有學行 兄子僧學祖嘗得幸光廟 語係行曰 ‘叔若欲官 則當圖之 係行怒杖之 時論多之

당시 보백당은 63세로 고향으로 돌아와 직곡(稷谷)에 있는 선영에 성묘한 뒤 고향인 풍산과 만휴정이 있는 묵계를 오가며 유유자적했다. 실록에 오른 이 일화(逸話)는 본래 30여년 전인 32살 때 일어난 일이었다. 일화는 이러하다.

보백당은 이때 문과에 급제하기 못한 채 성주고을의 교수(敎授) 직에 임명되었다. 그 때 조카인 학조(學祖)가 출가해 국사(國師)로서 세조의 총애를 받고 있었다.

보백당의 형님인 계권(係權)은 한성부(漢城府) 판관(判官)을 지냈다. 그는 아들 다섯을 낳았는데 이름이 학조(學祖), 영전(永銓), 영균(永鈞), 영추(永錘), 영수(永銖)로 모두 안동 김씨의 큰 조상이 된 이들이다.

학조는 맏아들로서 출가를 선택했다. 학조는 세조조(世祖朝)에 신미(信眉)·학열(學悅)과 더불어 '삼화상(三和尙)'이라고 일컬었고, 사찰의 중창, 역경사업 등에 큰 업적을 남겼다.

학조대사는 성주고을을 방문해 숙부를 뵙고자 하였다. 그러자 성주목사가 가로막고 나서면서, "번거롭게 직접 가서 만나시지 마세요." 한 뒤 선생이 와서 만나게 종용했다. 선생이 이를 단호하게 거절하자 부득이 학조 대사가 선생을 찾아 인사를 드렸다. 그 자리에서 선생은 준엄하게 대사를 꾸짖었는데, "네가 국왕의 은총을 믿고 교만한 마음이 있어서 나이든 숙부를 찾아오지 않았느냐. 그러면 나이든 숙부가 도리어 네게 가서 인사를 해야 하느냐?"하면서 회초리로 때려 피가 날 정도였다. 이 때 대사는 "아저씨께서 과거시험에 실패하셨는데, 만약 벼슬에 뜻이 있으시면 제가 힘을 써보겠습니다."라고 청했다. 이에 선생은 더욱 화가 나서, 네 힘으로 벼슬을 얻으면 무슨 낯으로 사람들을 만나겠느냐"라고 성을 내었다 한다.

보백당은 문중의 큰 어른이었다. 선생이 81세 때 내외 종친들이 모여 헌수하는 자리에 내외 자질들 중 대소과에 합격한 이가 모두 10여명이나 되었고, 현직에 있는 이가 7명이었다고 할 정도였다. 이러한 가문의 영광스러운 성취에도 선생은, "너희들이 잇달아 과명(科名)에 오른 것은 퍽 다행한 일이다. 이 고장 사람들이 더러는 나를 복이 많다고도 할게다. 그러나 나는 집안이 번창한 것이 도리어 두려울 따름이다. 너희들은 이를 명심해 스스로의 몸가짐을 삼가고 사람들과 만날 때도 정성을 다해서 경박한 일로서 죽어가는 나에게 욕을 끼치지 말도록 하여라."라는 가르침을 남겼다. 이 말씀은 지금도 '지신근신(持身勤愼), 대인충후(待人忠厚)'라는 여덟 글자로 남아 만휴정에 게판되어 있다.

1706년(숙종32) 지방유생들이 그의 덕망을 추모하여 안동에 묵계서원(默溪書院)을 짓고 향사하였다. 1859년(철종10)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후손들이 병화에 산실된 문적을 모아 보백당실기를 4권 2책으로 펴내고 국역(國譯)까지 했다. 1991년에는 신도비를 건립했다. 시호는 정헌(定獻)이다.

만휴정 일대는 시인 묵객들의 단골 답사 코스가 된지 오래다. 특히 화가들과 사진작가들에게 진작부터 사랑을 받았다.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안동의 원로 사진작가인 임정태씨의 작품과, 만청 권기윤 교수와 그의 제자인 신태수 화백의 한국화 작품을 들 수 있다. 임정태씨의 작품은 안동문화원에서 발간되고 있는 안동(安東)이라는 잡지 표지사진으로 올라 있다.

이번에 중견 서양화가 권준 화백이 그린 만휴정 작품은 서양화가의 시각에서 접근한 작품으로 보다 정이 간다. 이번에 처음으로 시도하는 일련의 안동 김씨 유적지 그림의 서막을 만휴정으로 잡은 권 화백 선택이 흥미롭다. 중견 서양화가에게 흐르는 천석(泉石)을 즐기는 피를 느꼈기 때문이다.

2011-07-27 17:48:55 / UGN 경북뉴스(ugnews@ug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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