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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작성일시 - 2011-08-03 20:07:32
<기획연재> 삼구정(三龜亭)
조상의 얼이 숨 쉬는 곳 [안동 김씨의 발자취(2)]
 

삼구정(三龜亭)

서수용/한국고문헌연구소 소장

삼구정은 안동 김씨의 본향인 안동 풍산 소산(素山)을 대표하는 정자로 현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2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삼구정(55.0×38.0cm)                                                                                     Oil on Canson Paper

이 정자는 그 유래가 오래일 뿐 아니라 정자를 지은 이의 뜻이 매우 시의에 맞지 않나 생각된다. 정자에서 바라보거나 정자를 바라 볼 때의 풍광이 모두 일품이다.

일반적으로 안동의 정자는 학구적인 측면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안동 선비의 수양과 후진 양성의 소중한 공간이 바로 정자였다. 안동 선비의 정자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 효용을 잘 설명할 수 있는 곳으로, 이전한 안동터미널 맞은편인 풍산 막곡리에 있는 '졸루정(拙陋亭)'을 들 수 있다.

그 규모가 작고 질박한 모습에 더욱 마음이 가는 정자다. 이 정자의 주인은 학봉 김성일과 서애 류성룡의 제자로서 안동 최고의 역사서인 영가지(永嘉誌)를 편찬한 용만(龍巒) 권기(權紀)다. 이름에서 풍기듯 매우 작고 소박한 수양의 공간이다.

조사자들에 의하면 안동에는 서원이 62개소, 정자가 356개소이고, 지금도 원우(院宇)가 28개, 정자가 200개소가 남아 있다 한다. 이는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최고 수준이다.

삼구정은 안동 지방의 일반적인 정자와는 그 기본 설계부터 다르다. 일반적으로 안동의 정자는 풍광을 심각하게 염두에 두지 않았다. 그저 자신과 인연이 닿거나 처소 주변의 아담한 공간을 정자 부지로 잡았다. 그리고 한 두 칸의 온돌방을 넣고 초가로 지붕을 이어 비바람을 피했고, 조그마한 마루를 넣었다. 그리고 형편이 나으면 정자 앞에 작은 연못을 팠다. 좌우에다 도서를 마련하고 그곳에 거쳐하며 학문과 수양을 하기에 불편함이 없도록 만들었다. 정자 명칭을 자신의 아호로 사용하기도 했다.

그에 비해 삼구정은 그 가구(架構)가 예사롭지 않고 일견에도 그 풍광이 아주 빼어난 곳에 터를 잡았다는 생각이다. 정자 뜰에는 질박한 형태의 자연암석 세 기가 놓여 있다. 그리고 삼구정이라는 해서체 현판에다 기문을 비롯한 시판들이 즐비하다. 시판은 정자를 지은 장령공 김영수의 맏아들인 삼당(三塘) 김영(金瑛) 원운(原韻)을 필두로 20인이 넘는 후손과 당시를 대표한 관인이나 문장가들의 차운시(次韻詩)가 걸렸다. 물론 후손인 청음 김상헌 선생의 시판도 게판되어 눈을 즐겁게 해주고 있다.

여기서 떠오르는 천고에 이어지는 고전 명구가 있다. 소동파의 적벽부다.

"惟江上之淸風과 與山間之明月은 耳得之而爲聲하고 目遇之而成色하여 取之無禁하고 用之不竭하니 是는 造物者之無盡藏也요 而吾與子之所共樂이니라."

"오직 저 강가에서 불어오는 맑은 바람과 산위에 떠오르는 밝은 달만은, 귀로 들으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눈으로 보면 그 빛깔을 볼 수 있어서, 이를 취함에 막는 이가 없을 것이요, 이것을 써도 다 쓰지 못할 것이니, 이것은 바로 조물주의 무진장으로 이는 그대와 내가 함께 즐길 수 있는 것이다.."

이 정자에 올라 소동파의 적벽부 구절을 읊조려 보는 것도 감상에 도움이 될 것이다. 정자는 안동지방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온돌방을 넣은 구조가 아니다. 탁 트인 정자는 마치 시를 읊조리며 음악 가락이 그 사이로 흐르는 호남 지방의 정자를 보는 듯하다.

주변의 풍광도 일품이다. 특히 북쪽으로 멀리 보이는 학가산은 안동 지방의 진산(鎭山)으로 그 웅장한 자태가 예사롭지 않은데 정자에서 바라보면 한 눈에 들어온다. 학가산은 안동인들에겐 하나의 우상이었다. 그래서 김성일 선생은 '학가산 봉우리'라는 의미로 '학봉(鶴峯)'이라고 호를 했고, 필자의 글 선생님이셨던 김병천 옹께서도 '학가산 아래에 사는 이'라는 의미로 '학하(鶴下)'라는 호를 쓰셨다.

안동 김씨 특히 소산 사람들이 삼구정에 앉아 바라보는 학가산은 여기에 더해 남다른 감회가 있었을 것이다. 바로 청음 김상헌 선생 때문이다. 청음이란 호 자체가 '시원한 그늘'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학가산의 맑고 시원한 그늘이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보다 더 학가산의 남쪽 한 자락인 서미동(西美洞)에 가보면 누구나 이 산의 한과 염원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청음 김상헌 선생이 남한산성에서의 한을 품고 선대의 고향인 안동 소산을 찾은 뒤 삼구정에 올랐고 학가산에 들어가신 역사적 사실이 있기 때문이다.

삼구정은 청음 자신의 고조부인 장령공 김영수의 모친, 즉 청음의 5대 조모인 예천 권씨를 위해 지은 정자라는 인연이 있다.

선생은 1637년(인조15) 68세 1월에, 묘당(廟堂)에서 항복의 뜻을 적은 국서(國書)를 찢고, 임금을 만나 직접 고수(固守)의 계책을 논했으나 그 달 그믐날, 성하지맹(城下之盟, 항복)이 이루어지고 말았다. 이에 앞서 그는 예조판서 직에서 물러났다. 2월 1일, 백형인 김상용(金尙容)이 강화도에서 순절(殉節)했다는 소식을 들었고, 2월 7일, 안동 풍산으로 내려가 학가산 서미동(西美洞)으로 들어갔다. 선생은 이곳에서 3년여를 보냈다.

서미동은 안동 김씨들에게 아주 익숙한 중대사(中臺寺)라는 절이 있었고, 거기에 더해 선생이 평소 존경해 마지않았던 서애 류성룡 선생이 임진왜란이 끝난 뒤 물러나 있다가 세상을 떠났던 농환재(弄幻齋) 옛터가 있던 장소다. 1607년 5월 6일 서애가 서미동 농환재 초당에서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30년 뒤에 청음이 참담함과 지친 몸을 이끌고 서미동을 찾았던 것이다.

그간 삭탈관직의 통보도 이곳에서 받았고, 청나라로 피체된 상태에서 안동에 남아 있던 부인 성주 이씨의 사망 소식도 접하는 등 고심참담한 시간의 연속이었다.

선생은 서미동에서 청나라의 요구에 의해 피체되어 천리 이향인 중국 심양으로 압송되었다. 선생은 한양을 떠나며 지은 시조를 통해 고금을 통털어 절의라는 단어를 아는 이들의 심금을 한없이 울렸다.

가노라 삼각산아 다시보자 한강수야

고국산천을 떠나고자 하랴만은

시절이 하 수상하니 올동말동 하여라.

소산 마을로 이건된 청음 선생의 제택이었던 청원루(淸遠樓) 앞뜰에 조그마하게 세워진 시조비에도 이 시가 적혀 있다.

절의(節義), 대의명분(大義名分)이라는 뚜렷한 행동 준칙을 후세에 남긴 청음 김상헌 선생은 경기도 양주에서 1652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종가와 묘소는 경기도 남양주시 와부읍 덕소리에 있다. 1653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61년 효정의 묘정에 배향었으며 양주의 석실서원(石室書院), 정주의 봉명서원(鳳鳴書院), 안동의 서간사(西磵祠), 광주의 현절사(顯節祠) 등에 제향되었다.

그러나 그 훌륭한 선현에 대한 후대의 기림은 아쉬움이 많다. 석실서원은 서원훼철령으로 사라졌고, 정주의 봉명서원 역시 그러한 운명을 피하지 못했으며, 선생의 유촉지였던 학가산 서미동에 지어진 서간사 역시 사당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형편이다. 다만 남한산성 내의 현절사 만은 동계 정온, 삼학사 등과 함께 모셔져 조촐한 제향을 잇고 있을 뿐이다.

당시 청음이 올라서 보았을 학가산은 오늘날 우리가 바라볼 수 있는 풍광과 별반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선생께서 남긴 시가 있어서 우리는 청음 당시로 나아가 정자를 지은 의미와 주변의 풍광 그리고 당시의 서정을 시공(時空)을 초월해 공감할 수 있다. 청음 선생의 문집에 올라 있는 시이다.

「삼구정(三龜亭)에 올랐다가 느낌이 있기에 조카인 김자순(金子醇)에게 써서 보이고 아울러 마을의 여러 친족 어른들께 바치다. 2수. 자순의 이름은 김희맹(金希孟)이다.」

先人遺構此亭存

扶護相傳有子孫

三面江山環遠近

四時鄕黨酌卑尊

流風可繼今爲美

厚誼寧忘古所敦

千里獨來增感慨

白頭登望一傷魂

선인께서 이 정자를 지어 남겨 두셨거니

이를 지켜 전하는 일 자손들 책임 일세

삼면의 강과 산들 원근 간에 감싸 있고

사시사철 고을에 사는 백성 어울려 술 마시네

끼친 유풍 이을 만해 이제 미풍 되었거니

그 옛날에 돈독했던 그 뜻 어찌 잊으리오

천 리 밖서 홀로 와 그 감개 더욱 더하나니

늘그막에 올라봄에 혼이 끊어질 듯 하구나.

이 정자를 지은 뜻은 노모를 즐겁게 모시기 위함에 있었다. 어버이를 즐겁게 모시자면 어버이 주위 분들, 특히 존귀하고 비천함을 뛰어 넘는 대동적(大同的)인 어우러짐이 필요했을 것이다. 원근 간에 같은 고장에 사는 이라면 누구나 초대해 잔치도 베풀었을 것이다. 이것이 하나의 지역적 미풍으로 자리 잡았던 모양이다.

정자를 지을 당시의 효성과 형제간의 우애 그리고 씨족간의 돈독한 그 모습은 남한산성에서의 항복이라는 참담한 현실을 뒤로하고 낙향한 외로운 노신(老臣)에게 더욱 가슴 뭉클하게 다가왔을 것이다. 그래서 미련(尾聯)에서 "천 리 밖서 홀로 와 그 감개 더욱 더하나니 / 늘그막에 올라봄에 혼이 끊어질 듯 하구나."라고 읊었던 것이다. 다음 수는 이렇게 이어진다.

百年喬木老風霜

十畝淸陰擁一堂

從古地靈生此國

至今形勝擅吾鄕

平泉花石猶堪惜

防墓松楸可忍傷

鶴嶠未平江未陸

共看龜算與俱長

백 년 자란 높은 나무 풍상 속에 늙었거니

십 묘 넓이 맑은 그늘이 마루를 둘렀네

예로부터 지령께서 이 지방을 만들었거니

지금 와서 그 형승은 이 마을이 으뜸이네

평천장의 꽃과 돌은 아까워할 만하거니

묘소 가에 자란 소나무 차마 손상시키리오

학가산은 안 무너지고 강은 육지 안 됐거니

거북처럼 오래도록 서 있는 걸 함께 보리.

정자 주변의 아름답고 신령한 풍광, 특히 그곳의 노송(老松)과 교목(喬木)들에 대해 모든 이들이 힘을 다해 잘 가꾸자는 당부와 축원을 담고 있는 작품이다.

정자를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지름길은 그곳에 달려 있는 기문(記文)을 읽어보는 것이다. 삼구정은 기문을 위시해서 무수한 시판들은 마치 가을밤 하늘에 반짝이는 별처럼 빛나고 있는 느낌이다. 그 뜻을 미처 해득하지 못한다 해도 이를 회화적인 측면만으로 본다 해도 아름답다고 느낄 정도다.

정자의 기문은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 1439-1504)이 썼다. 그는 졸기에, "성격이 허심탄회(虛心坦懷)하여 수식(修飾)하지 않으며, 생업을 일삼지 않고 오직 서적을 가지고 놀았다. 문장이 건실 익숙하여 오랫동안 문형(文衡)을 맡았다."고 한 조선 중기의 대표적인 문신이요 문장가 중의 한분이었다.

그는 사후에 갑자사화로 부관참시(剖棺斬屍)까지 당했으나 청백리에 뽑혔을 정도로 깨끗한 인품을 지닌 관인(官人)이었다. 그는 수필집이라 할 수 있는 용재총화(용齋叢話)의 저자이기도 하다. 허백당은 달리 호를 용재(용齋), 부휴자(浮休子), 국오(菊塢)를 쓰기도 했다. 그래서 삼구정 현판을 쓴 동시대 인물인 안동출신 용재(용齋) 이종준(李宗準)과 착오를 일으키기도 했다.

정자를 지은 장령공(掌令公) 김영수(金永銖)는 보백당 김계행의 큰집 막내 조카이다. 허백당 성현이 정자 기문을 쓴 것은 아마도 보백당 김계행과 동료 관인으로서의 인연이 작용하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실록을 보면 성현은 연산군4년에 보백당과 함께 벼슬을 한 관계였다. 또한 이들은 모두 청백리에 녹선되었으며, 사화(士禍)에 연루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삼구정 기문은 당시를 대표했던 문형(文衡)이 쓴 작품으로 글을 읽는 재미를 더해준다. 기문 일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김씨는 우리나라의 큰 벌족(閥族)으로서, 그의 외조(外祖)이신 권상국(權相國) 제평공(齊平公 權孟孫, 1390-1456)께서는 조정에서 높은 명망이 있었다. 권씨(權氏)는 바로 그의 따님인데, 나이가 88세이시다. 그의 아들 영전(永銓)·영추(永錘)·영수(永銖) 등이 다 근읍(近邑)의 수령이 되어서 봉양을 지극히 하며, 또 이 정자를 지어서 조석으로 어머니께서 놀고 쉬는 곳으로 삼았다.

정자에는 바위 셋이 있는데, 그것은 마치 거북이 엎드린 것 같았다. 그래서 '삼구정(三龜亭)'이라고 이름 한 것이다. 항상 좋은 때와 길(吉)한 날을 만나면 어머니의 가마를 메고 정자에 올라가니, 노래자(老萊子) 같은 채색 옷들이 앞뒤에 빛나게 비친다. 뜰에 가득한 자손들이 빽빽하게 늘어서서 모시니, 어머니는 엿(飴)을 입에 물고 즐거워하신다. 그 즐거움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있겠는가.

대개 세상 사람은 집이 있어도 좋은 경치를 얻지 못하고, 좋은 경치가 있다 해도 그 즐거움을 얻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그런데 지금 이 김씨 집안은 터는 그 좋은 곳을 얻고, 사람은 그 어짊을 얻었으며, 어버이는 또 그 장수(長壽)함을 얻었으니, 여러 가지 아름다움이 고루 갖추어졌다.

이것이 어찌 선(善)을 쌓고 경사(慶事)를 기른 때문이 아니겠는가. 생물의 수명은 거북만큼 긴 것이 없고, 물건의 견고함은 돌만한 것이 없다. 자식은 누구나 어버이의 장수가 거북처럼 길고 돌처럼 견고하기를 바란다. 이 뒤로 증손(曾孫)·현손(玄孫)에 이르고, 증손(曾孫)·현손(玄孫)으로부터 잉손(仍孫 7대 손자)·운손(雲孫 8대 손자)의 먼 후손에 이르기까지, 그들로 하여금 각각 자기의 어버이 섬기기를 지금 하는 것처럼 하게 하여 대대로 이를 이어서 바꾸지 않는다면, 곧 고을은 장수하는 고을이 되고 사람은 장수하는 백성이 되어서, 마땅히 청사(靑史)에 그 아름다운 이름을 남길 것이다.

金爲朝中巨閥 而其外祖權相國齊平公 十盛名於朝 權氏卽其女也 年八十有八 其子永銓 永錘 永銖等 皆爲近邑守令 極其奉養 又構此亭 以爲晨夕遊憩之所 亭基有三石 形如伏龜 故以三龜名之 每當良辰吉日 扶輿升亭 菜衣彩服 輝映前後 滿亭蘭玉 森森列侍 萱위含飴而悅豫 其爲樂 可勝旣哉 大抵世人 有其居 不得其勝 有其勝 不得其樂 而今則地得其勝 人得其賢 親又得其壽 衆美俱備 豈非積善毓慶之所致 夫生之壽者莫如龜 物之固者莫如石 人子之欲親之壽 如龜之永 如石之固 人人之所願 自玆以後 至于曾玄 自曾玄至于仍雲之遠 使各奉其親 如今之所爲 世世而勿替 則鄕爲壽鄕 人爲壽民 而當留美於靑史矣

성현(成俔)이 쓴 삼구정 기문 일부

 

필자는 이 정자에 몇 번 올라 본 적이 있다. 마을 출신 출향 인사들이 모여 술잔을 나누며 담소하는 자리였다. 마치 삼구정 기문에 적힌 일을 시연이라도 하듯 화기애애한 모습이었다.

고전에 나오는 '열친척지정화(悅親戚之情話)'였다. 그 모임은 어둠이 학가산을 타고 몰려와 그 드넓은 풍산들까지 가득 메우고서도 한참을 이어졌다. 간간히 자동차들이 불을 밝힌채 하회마을 쪽으로 또는 풍산읍 방면으로 무심하게도 오갔다.

등불을 밝히는 수고로움이 없어도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시절이 초여름의 보름 무렵이고, 그곳이 유서 깊은 삼구정 마루였기 때문이었다. 술에 견디기 어려웠는지 연로한 이는 마루 언저리에 자리를 잡고 누운 지 오래였다.

권준의 삼구정 그림은 정자를 찾은 일가들 간에 나누는 여름 한 때의 왁자지껄하고 정겨운 이야기 장면을 상상하게 한다. 그림 색깔은 극성의 신록(新綠)으로 온통 녹색이다.

권 화백은 정자의 출입문인 측면을 그림 구도로 선택했다. 일반에게는 정자의 정면이 익숙하지만 출입문과 건물과 그 빈 공간으로 펼쳐진 환상적인 여름 하늘과 구름이 멋있게 펼쳐졌다. 정자 앞으로 늘어선 세 그루의 노거수들은 금방이라도 옛이야기들을 주저리주저리 풀어놓을 것 같다. 시원한 바람소리와 나무에 붙은 참매미 소리까지 청아하게 들리는 듯하다.

권 화백이 이번에 완성한 삼구정 그림 중에 가장 눈여겨 볼 지점은 정자의 문턱이다. 대문이 활짝 열린 상태였는데, 소위 문지방이라고 하는 곳이 완만한 경사를 이룬 듯했다. 그곳을 통해 무수하게 드나들었을 선비들과 고단한 삶의 짐을 잠시나마 내려놓았을 촌부들의 흔적이 눈에 선해 더욱 마음이 가는 공간이다.

그런데 작은 풀 숲 사이로 완만한 곡선을 그리며 정겹게 나 있을 한 두 갈래의 오솔길이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이 길을 걸었을 많은 사람들 역시 진작 고향을 떠나서 대처로 나가 도심의 대로변을 활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권 화백의 이 그림은 매우 사실적이라 할 수 있겠지만, 감상하는 이로서는 아쉬움이 남는다고나 할까?

사방으로 트여 있는 마루는 우선 그 관리가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 정자는 여전히 깨끗한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아직까지 선대의 가르침을 곧장 저버리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지방자치단체의 담당자나 마을에 남아 계신 유사들, 후손들의 수고가 생각난다.

이 정자는 정자 밖에서 바라보는 풍광도 일품이다. 고송과 아름드리 잡목들이 언덕에 빼곡하다. 특히 고송은 그 나무의 연륜과 고유의 송피(松皮) 때문에 황룡(黃龍)이 하늘로 승천하는 듯한 생동감이 느껴진다. 근자에 이 유서 깊은 언덕에 원인모를 화재가 발생했다.

그 맹렬한 불기운의 일부가 유서 깊은 낙락장송에까지 미쳤다. 큰 후유증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 또한 사나운 바람으로 인해 가지 일부가 꺾이는 변고도 당했다. 청음 선생의 당부처럼 이후에도 노송은 물론 풀 꽃나무 한 그루 바위 하나도 보존하고 가꾸어서 후대에 전해주어야 하겠다.

 

  2011-08-03 20:07:32 / UGN 경북뉴스(ugnews@ug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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