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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견화가 권준 선생이 '퇴계오솔길'의 사계절을 가을부터 익년 여름까지 이어가며 주변풍경을 화폭에 담고, 매월당문학상 시나리오 부문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작가 최성달이 권화백의 그림을 글로 야심차게 표현한다. 이번 기획연재는 2009년 1월에 시작하여 매달 초순과 보름에 연재되며, 1년간 계속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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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겨울산행을 다녀왔다. 권준화백이 지난해 산록(山綠)이 무성할 때 그려놓은 가을청량산을 이번호에 내고 싶은 원(願)을 들어주겠노라며 양껏 선심을 썼지만 속마음은 겨울 청량산이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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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cm×56cm) Oil on canson paper |
목적지와 가려는 의도를 숨긴 채 떠나려는 전 날 밤, 벗에게 시간이 되는지를 물었다. 영문도 모른 채 세 사람(오수현 고경호 김진오)이 전화를 받았다. 두 벗은 내일 일에 대해서 말했고, 낮 시간은 비워 있는 수현 형이 가겠노라고 했다. 그런데 동행이 너무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이럴 땐, 바쁜 양반들 제쳐두고 걸림 없는 스님들하고 가는 것이 제격이다. 곧 바로 학가산인 청담스님에게 전화를 넣었다. 수화기 저쪽에서 흘러나오는 소리가 풍류 도인답다.
"한판 어울리자 이겁니까?"
가는 길에 불현듯 문천초등학교로 핸들을 돌렸다. 정용운 스님과 배수봉(서양화가)을 데려갈 요량이었다. 시절인연이 좋으니 때(時)를 시험하고픈 어줍잖은 호기가 발동했기 때문이다. 에라, 그런데 약속이 잡혀 있었다. "약속시간 이후라면 몰라도......", "아이고 스님, 그럼 다음에......" 권화백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용수사로 차를 몰았다. 예정도 없고, 계획도 없이 무작정 차는 앞으로 나가갔다. 드디어 용수사. 청담스님과 권화백은 나의 대책 없는 놀음을 지그시 즐길 뿐이었다.
용수사의 오전은 사람들로 북적댔다. 그중에는 더러 아는 얼굴도 보였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날이 정월대보름이었다. 우리 일행은 지체 않고 신발들이 수북이 쌓여있는 주지(정외)스님 방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앉기가 무섭게 10여명의 무리들이 자리를 비워주어 소담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청량산 산행에 함께 가자고 말할 명분이 없었다. 오·유월 자다가 봉창 두드리는 것도 아니고 하필이면 이 바쁜 날, 들이닥쳐 산에 가자고 말한다면 미친놈 취급받기 딱 십상이었다. 그런데 죽으라는 법은 없는 모양이었다. 앞 전에 일어서려는 일행 중 임동걸 사장만은 못 일어서게 붙들었는데 글쎄 그 양반이 우리가 하고 싶은 말을 대신 해주었다. 물론, 그 전에 내가 도산을 지날 적마다 용수사에 들러 눈도장 찍어놓은 효력이 영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무작정 놀러가자고 할 형편은 못 되었다. 더구나 첫 만남의 악몽을 그때까지도 다 씻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무리 괴팍해도 그렇지, 지난 가을 농암종택을 다녀오다 들른 길에 주지스님에게 한다는 첫인사가 "참 고집 세게 생겼다."고 말해놓고도 거북해하지 않던 권화백이었다. 참으로 느닷없는 소리였다. 거두절미하고 한 말이어서 듣기에 따라 심한 거북함을 느낄 만 했다. 일순(一瞬)1), 내 눈은 오로지 스님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다음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스님은 아무 말씀이 없으셨고, 얼굴빛도 그대로였다. 그때 권화백으로부터 치명적인 한방이 더 날아왔다.
"아이고 아깝다 아까워."
고집 센 얼굴로 스님 하기가 아깝다는 말이었다. 그 얼굴로 세속에 있었으면 돈을 벌든 명예를 구하든 큰일을 할 얼굴이라는 말이다. 그렇다고 어찌 스님 면전에 대놓고 관상을 본단 말인가. 존경하옵는 권준화백님 아니면 아무도 못할 일이다. 이날의 해프닝은 스님의 한마디로 정리가 되었다.
"뭐 때문에 시시비비 속에서 사는가."
<2> 유산(遊山)은 곧 독서다
임동걸 사장의 구원의 말은 우리 일행에 대한 그럴듯한 자랑이었을 것이다. 남 자랑 제대로 해주려면 원래 말이 보태어지는 법이다. 고서지(故書誌)를 다루는 분이니 그림은 등기창을 넘어섰고, 글은 사마천에 견줄만하다고 했는지 모른다. 아무튼 일행 중 청담스님이 끼여 있어 우리를 곱게 봐주신 것 같았다. 잠깐 담배 한 개 피 피워 물고 몇 마디 나누고 있는 사이 청량산 가자며 차에 오르신다. 황송하게도 정신없을 것 같은 일감은 총무스님에게 일임했단다. 속인 가는 길을 스님 두 분이 기꺼이 안내해 주시겠다고 하니 이런 호사가 어디 있으랴. 호의(好意)를 의아해하며 물었더니 이런게 중생구제란다.
첫날은 점심을 먹고 올라가 시간이 촉박한 탓에 청량사 아래까지 차를 몰고 갔다. 정외스님이 청량사 왼편의 자락을 가리키며 우공묘(牛公墓)가 있던 자리를 알려준다. 사연인즉, 연대사(청량사의 옛 이름)를 짓기 위해 어느 스님이 죽은 후, 뿔이 세 개 달린 소가되어 재물을 실어 나르다가 너무 고생하여 절 밑에서 죽어 사람들이 돌무덤을 만들어주었다고 한다. 우공묘 있던 자리 바로 옆에 오층석탑이 신축되어 있었다. 오층석탑 마루에 정외, 청담 두 스님을 따라 결가부좌를 틀고 아래를 한 참이나 내려다보았다. 등성이를 마주 댄 세 겹의 산들이 장엄하게 펼쳐놓은 깊은 골속에서 끝없이 운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청담스님 말씀이 이런 날, 비가오고 번개가 치면 용이 승천하기 딱 좋은 날이란다. 그 말이 헛사나 예사롭게 들리지 않은 까닭은 스님의 이력 때문이다. 묵언수행하기로 작정하고 이빨을 석불에 다 갈아버린 다음 오로지 일념으로 아미타불과 옴마니반메훔만 외웠던 스님이었다. 그러기를 스물 하루째 되던 날 검은 구름 사이로 달마대사가 홀연히 나타났다. 스님말씀에 의하면 친견을 한 것인데 몸속으로 달마대사가 확 빨려 들어오더라는 것이다. 그 길로 학가산을 내려가려는데 갑자기 어치(새) 한 마리가 스님 머리 위로 날아와 앉았다. 순간 묘한 도력을 느꼈다고 한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택시를 타고 안동 시내를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동안에도 새가 날아가지를 않았다고 한다. 목성동에 있는 대원사에도 가고, 시장도 들리면서 볼일을 봤지만 새는 스님 곁을 떠나지 않았다. 그렇게 온 종일 돌아다니다가 저녁 10시 무렵이 되어 예림 사진관 앞을 지나갔다고 한다. 우연히 사진관 사장님에게 발견되어 기념으로 사진 한 컷을 찍었다. 언제가 나는 이 일이 자꾸만 허황된 것으로 여겨져 스님 몰래 슬쩍 한번 확인해 본 적이 있었다. 예림 사진관 사장은 그때의 일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스님 말씀은 사실이었다. 동네 주민들에게 확인해본 결과도 마찬가지였다.
오층석탑과 청량사 우측에 있는 청량정사(오산당)에 들리려고 했으나 산 꾼의 집에 문이 닫혀 있었다. 청담스님이 이 집 주인인 이대실씨에게 전화를 했다. 근방에 있으면 따뜻한 차나 한잔 나누어 마실 것을 권했으나 서울 가는 중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겨울이라 오고가는 사람이 드물어 산에 붙어 있기가 적적했겠으나 주인의 기예를 볼 수 없음은 섭섭함이 아닐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우리 일행은 닫혀 진 문을 열고 오산당을 둘러봤다. 그러는 동안 권준화백은 오산당 전경을 스케치했고, 정외스님은 안내판을 열심히 읽었는데 뭔가 못마땅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스님말씀이 유산(遊山)2)이라는 단어가 오산당의 의미를 말아먹고 있다는 것이다. 안내판에는 퇴계 선생의 유산을 기념하여 후학들이 순조 연간에 이 오산당을 건립했다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의미를 제대로 살리려면 퇴계선생이 늘 강조했고 실천했던 독서를 통한 학문수양에 초점이 맞춰져야 청량산 유산이 일반인들에게 바르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유산이 독서라는 의미로 구체적으로 파악되기 위해서는 독서여유산(讀書如遊山)이 되어야 한다. 언뜻 살펴보아도 퇴계는 실제로 13세 때 숙부 송재공이 여서(女壻)3)와 자질(子姪)4)을 청량산에 보내 독서공부를 시킬 때 참여한 것을 시작으로, 15세 때는 숙부, 형 옹계공과, 25세 때는 보문암에서 독서했으며, 28세 때는 청량산백운암기를 지었다. 그리고 33세 때는 처남 허사렴과, 55세 때는 손자 안도를 데리고 한 달간 입산하여 김생암과 연대사에서 독서를 했다는 기록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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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6cm×75cm) Oil on canson paper |
<3>봉화여, 청량산을 불가(佛家)의 산으로 복원하라.
우리 일행은 다시 발걸음을 옮겨 고운이 12살 때 마셔 총명해졌다는 총명수를 지나고, 응진전을 돌아 나와 어중대로 올랐다. 오르면서 어제 국학진흥원 임노직 선생이 구해다 읽어보라고 권유한 '옛 선비들의 청량산 유람록'(청량산 박물관 발간)의 여러 구절들이 떠올랐다. 하나 같이 수려한 문장이었다. 기록문화를 인식한 바탕 위의 글들이었다. 청량산 일대를 고증하는데 많은 도움이 될 만한 책이었다. 내가 청량산박물관 여직원에게 빌려온 책에는 봉우리의 이름과 사라진 사찰과 암자들의 명칭에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이 또한 역사의식이다. 이걸 바탕으로 봉화군에서 사라진 27개의 절과 암자들을 복원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해야 한다. 산 곳곳 가는 곳마다 거기에 암자들이 있다고 상상해 보라. 청량산 전체가 불교문화를 꽃피우는 산실이 되는 것이다. 불교의 성지가 되는 것이다. 불교박물관을 만들고, 전시관을 세우고, 학술서적을 간행하고, 산재한 종단의 본부(총무원)를 봉화로 이전해오는 작업을 병행하라. 100년 후에도 봉화가 먹고 사는 길이 거기에 있다. 옆집(안동시)이 유교를 주창하여 생산을 유발하는 전략을 쓴다고 따라 해본 들 별로 득볼게 없다. 안동은 유교, 봉화는 유불이 혼재한 가운데 불교가 얼굴이 되도록 해야 한다. 그것이 옆집 앞집(봉화군)이 공히 다 같이 사는 길이다. 봉화여, 뛰어라. 청량산에 해답이 있다.
김생굴과 김생폭포를 바라보는 동안 내가 정외, 청담, 권준화백, 오수현 사장에게 이 이야기를 하니까 네 사람 모두 탁견이라며 박수를 치며 동의를 한다. 특히, 두 분은 스님이라 감회가 남다를 수밖에 없으리라. 그러나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자 하는 바는 통찰에서 오는 정론이기를 늘 소망한다. 이곳저곳 눈치 살피지 않고, 사관의 심정으로, 맑은 눈으로 사안과 사물을 직시하는 자세를 잃지 않으려고 경계하고 있다. 비록 친함이 있다 해도 그것으로 사안의 잣대를 흐릴 만큼 어리석지는 않다. 개인적으로 나는 이 글을 쓰는 동안 유학자들에게 도움을 받고 있다. 모르는 것이 있으면 이동수(치암고택) 선생에게 물음을 구한다. 그리고 이 연재물의 부제이기도 한 '사람의 길을 가다'란 제목은 한국고문헌연구소장인 서수용 선생이 달아 준 것이다. 위에 잠깐 언급했지만 국학진흥원의 선임 연구원인 임노직 선생에게도 원군을 청한다. 고수 세 분의 백그라운드가 있기에 이 글이 나오는 것이다.
그리고 글 쓰는 자세와 관련하여 하나 밝혀둘 것이 있다. 지난 호에 시간이 촉박하여 글을 서두르는 바람에 세심하게 확인 못한 부분을 이동수 선생에게 감수를 부탁했다. 글이 이미 실린 뒤였다. 저녁 때 쯤 연락이 왔는데 조목조목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주셨다. 그런데 내가 일부는 수정하고 일부는 그 다음날까지 그대로 두었다. 이것을 의아하게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학문하는 사람에게는 허물이 아닐 것이다. 크로스체크가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날 임노직 선생에게서 한 번 더 검증을 받고 잘못된 부분에 수정을 가했다. 그런데 확인을 해 보니까 처음 이동수 선생이 지적해 준 부분이 모두 다 옳았다. 그러나 글 쓰는 자는 모름지기 이래야 된다고 믿는다. 선생(이동수)도 기꺼이 칭찬할 것이다.
<4> 권준의 청량산 상상도
김생굴에서 권준화백이 외산을 1시간 가까이 스케치하는 동안 정외, 청담 두 스님과 수현 형은 권준화백과 내가 하고 있는 연재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청담스님은 글에 비해 화폭이 너무 작게 배치되어 있다는 의견을 제시했고, 수현 형은 그 말을 받아 이번호부터는 권화백의 그림이 적어도 3장 이상은 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정외스님 또한, 권화백의 의중을 읽고, 겨울에 보는 가을청량산도 운치가 있을 거라며 거들었다.
"청량산 상상도를 그립시다."
일행의 말을 모두 듣고 뜬금없이 내가 한 말이었지만 이번 청량산 유람에서 얻은 최대의 수확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신라의 김생(711~791)이 10년 동안 이 굴에 틀어박혀 얻고, 구하고 이루려고 한 것이 무엇일까? 그는 글씨(서예)공부만을 위해서 이 험한 청량산에 입산 했을까? 이걸 위해서는 한자문화권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 세계에서 글자가 예술의 반열에 오른 것은 한자가 전무후무하다. 물론, 한글로도 붓글씨를 쓰지만, 선인들은 글씨로 천계(天界)에 다다를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글씨로 하늘의 경지에 닿으려면 수단으로 무엇이 필요하겠는가? 수행(명상)과 독서다. 단순히 매일 글씨 연습만 한다고 글씨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머릿속에 책 만권이 들어있지 않으면 글씨에 기운생동하고, 청고고아(淸高高雅)5)한 서권기와 문자 향, 문기(文氣)를 낼 수 없다고 보았다. 즉 이 말은 속된 기운을 걷어내지 못하면 아무리 붓글씨를 연습해도 글씨에 자신의 품격을 드러낼 수 없다는 말이다. 이 말을 반증하듯 민주화운동하다 억울하게 감옥에서 오래 썩은 신영복(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의 저자), 독립운동한 안중근, 박정희의 글씨가 요즘 최고로 비싼 값에 거래되고 있다. 이들은 여초 김응현, 일중 김충현, 그리고 예천군에서 서예관을 건립해준 초정 권창윤 선생처럼 전문 서예가가 아니다. 그런데도 글씨 값은 당대 최고수들인 이들과 맞먹을 정도다. 반면에 조선말 최고의 서예가인 이완용의 글씨는 아무도 사려는 사람이 없다. (예외로 오원 장승업처럼 먹물향 피우지 못하고도 그림 잘 그리는 사람이 더러 있기는 하다.)
나는 독서를 통해 정신의 확장을 이루고, 나아가 글씨를 써야 한다는 옛 사람들의 충고가 학문하는 자에게는 백번 지당한 말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다. 글에 있어 논지란 글 쓰는 이의 생각과 주장이 반영된 산물이고 보면, 박약(薄弱)6)한 뿌리는 과대 주장이 되거나 편견이 되기 일쑤다. 이는 모름으로 빚어진 것이기는 하나, 타인에게 영향을 미치는 것을 속성으로 갖고 있는 글의 특성상 펜대를 함부로 굴려서는 안 된다. 책 만권을 읽지 않은 자는 모름지기 사설 칼럼 같은 주장이 담긴 글은 쓰지 말아야 한다. 통찰의 미덕 없이 남에게 이래라 저래라, 콩 놓고 밤 놓고를 말할 자격이 있겠는가. 이는 내 말이 아니라 선현이 초지일관으로 하신 말씀이다.
회회도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다. 색감이 풍부하면 형태 또한, 살아난다는 세잔의 회화적 발견 못지않게 그림에 정신을 구현하려는 권준의 여실한 흔적 또한 값진 것이다. 사도 바울이 보이지 않은 것은 보이는 것의 실재라고 한 말을 권준은 지금부터 화두처럼 붙들고 살아야 한다. 그걸 지금 당장 풀어내면 그 또한 도인이 되고 신선이 되리라.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다. 이 말은 진리다. 우리의 청량산 유람이 말씀을 따르고, 진리를 따라간 여행길이 되려면 권준이 완결해야 할 것이 있다.
보이지 않은 청량산을 그릴 것. 운무가 용트림하며 산의 기운이 권준의 신기(神技)를 부르는 날 단번에 청량산 비경을 담아낸다면 틀림없이 불후의 걸작이 되리라.
"대저 보옥으로 만든 차일은 창공에 걸려 너울거리고, 구름 같은 휘장은 색상의 한계를 떠나 그저 황홀하기만 하며. 은다락은 햇빛에 번쩍거리고 노을 같은 주두는 헤매는 속세의 티끌 세계를 벗어났도다."..................(원문생략)
허초희는 실재하지 않은 '광한전백옥루'이라는 전각을 상상하여서 이만한 시를 지었다. 나 또한, 권화백이 보이지 않은 청량산에서 환상적이고 몽환적인 그림을 그려낸다면 시 한 수를 못 지으랴. 권준은 이제 이 길로 보이지 않은 청량산을 그릴 것이다. 발품을 부지런히 팔아 사라져 버린 절집들을 그림 속에 복원해 낼 것이다. '청량산 상상도'라, 한 번 생각해 보라. 청량산 비경에다 봉우리마다 품은 암자들이 지금 우리 눈앞에 살아 숨 쉰다는 것을. 이 얼마나 장엄한 광경인가. 그 그림이 완성되면 어느 날엔가 청량산에는 정말 그 옛날 사라져버린 27개의 절집이 들어설 것이다. 나는 이것이 불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그림으로의 복원은 그 시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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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cm×36cm) Oil on canson paper |
<5> 유람은 대상을 완상(玩賞)으로 볼 줄 아는 것
경일봉를 거쳐 산 정상에 다다른 우리는 신재가 백이와 숙제가 은나라 말에 서 있는 형상을 하고 있다고 이름 붙인 탁립봉을 바라보다가 자운봉 쪽으로 발걸음 옮겼다. 조금 더 가니까 탁립봉과 연적봉이 나왔다. 문제는 이때쯤 되어 날이 어두워지기 시작했는데 산 오르기를 더 할 것인가 아니면 마무리 짓고 하산을 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했다. 내일 다시 못 오는 수현 형은 하늘다리 쪽으로 등반을 좀 더 하다가 내려가자는 주장을 폈다. 그러나 다리가 불편해 보이는 권화백은 내일 또 오자는 말로, 마무리 하고 싶은 심정을 완곡하게 피력했다. 일행 중 체력이 제일 좋은 정외, 청담 두 스님은 아무래도 좋다는 반응이었다. 그래서 내가 수현 형에게 물었다.
"오늘 우리의 산행이 등반입니까, 유람입니까?"
"유람이지"
"그럼 내려갑시다."
두 스님이 먼저 알아듣고 웃으신다. 시간에 쫓기거나 과도하게 몸이 혹사당하는 건 유람이 아니다. 유람의 미학은 느림에 있다. 젊은 날이 대게 그러하듯 오로지 빠름이 목표가 되는 것은 몸의 철학이다. 우직한 청춘은 몸의 미학에 집착한다. 이것이 지나치면 늙어서까지 산을 완상(玩賞)7)의 대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을 잃어버린다. 사물을 단순히 일별(一瞥)8)해 버리는 습에서 벗어나 심안(心眼)으로 대화하는 사람만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주는 삶의 깊이에 매료당한다. 시력을 회복한 후라야 겨울나무 단단한 뿌리에 축복을 보낼 수가 있는 것이다. 매서운 바람에게도 말을 건넬 수가 있다. 바라보는 대상과 비로소 하나가 될 수 있을 때 유람이라 말할 수 있다. 자소봉(구 보살봉 845m)에서 우리 일행은 산림의 정취를 만끽했다. 오래도록 서서 산하를 둘러보니 사방 눈앞으로 이어지는 길이 천리나 되는 듯 했다. 도란도란 옛사람들의 일들을 떠올리니 속계(俗界)의 풍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홀연히 신선이 된 기분이었다. 치원대에서 이곳을 바라보며 9개의 층암을 이룬 푸른 바위의 자소봉이 천길이나 높은 허공으로 치솟아 있다. 한 때, 11개나 되는 절집을 품고 있었을 9층 층암의 비경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그 많던 도량은, 그곳에서 부처가 되고자 염원했던 육신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홀연히 어디선가 사라진 자들이 외웠을 염불소리가 들려오는 듯하다.
정외, 청담 두 스님이 260자의 반야심경을 2번 외우는 동안 자소봉에서 우리 일행은 붓끝을 모아놓은 것 같은 탁필봉(820m)에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옆에는 연적봉(850m)이 탁필봉과 나란히 봉우리를 내밀었고, 그 아래에는 연적고개가 있었다. 이때쯤 깊게 어둠이 몰려올 징조가 역력했다. 겨울산의 밤은 이르다. 걸음을 재촉해야 했다. 빠른 걸음으로 뒷실고개를 타고 내려오는데 멀리서 청량사 유리보전의 불빛이 보였다. 오늘 유람은 여기서 마무리해야 한다. 청량사에 들러 지현스님과 차 한 잔 나누고 떠나려고 했으나 저녁공양과 맞물려 번거로울 것 같아 돌아섰다. 요사에서 은은하게 흘러나오는 불빛이 나그네에게 편안함으로 다가온다. 곧바로 돌아와 정외스님이 주지로 있는 용수사에서 청담스님, 권준화백과 하룻밤을 묵었다.
<6> 그림 속 숨겨진 암호를 발견하라
이번호에는 권화백의 그림이 3점 실린다. 맨 먼저의 그림은 청량산으로 유람을 떠나 오솔길에 접어든 모습이고, 두 번째는 오산당을 둘러싼 주위 풍경이다. 그리고 마지막에 실린 그림은 청량사를 가장 아름답게 조망할 수 있다는 축융봉에서 바라본 풍경이다.
이걸 스토리텔링의 형식으로 연결시켜 보자. 아름다운 소금강에 머물러 있던 청량산은 주신재가 다녀가고, 퇴계가 독서와 수행의 도량으로 삼은 후, 유가의 성지로 변모됐다. 이후, 후학들은 때가 되면 자신을 다듬고 돌아보기 위해 청량산을 유람하는 일을 관례처럼 여겼다는 식으로 될 것이다.
처음 이 그림(맨 처음 그림)을 보는 순간 뭉크의 '병든 아이'가 불현듯 떠올랐다. 병실을 방문한 친구가 침대에 앉아있는 소녀의 오른 손을 잡고 고개를 숙이고 있다. 기도를 하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어깨 선 사이로 처량함과 숙연함이 흘러내리는 그림이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틀림없이 방문한 소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왼손을 내민 친구의 오른손이 보이지 않고, 병든 소녀의 얼굴이 오히려 평화롭기 그지없다. 병든 소녀가 문병 온 친구를 위로하고 있는 것이다. 감동은 언제나 뒤바뀐 상황에서 최고조에 이른다. 권준의 그림도 앞 뒤 맥락을 제대로 살피지 못하면 감동모드로 읽힐 수 있는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거룩하고 고고하며 청정한 스님이 바랑을 둘러매고 있고, 속인들이 앞장 서 걸어가고 있으니 보살행을 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 숨겨진 암호가 있다. 이 그림을 그렇게 단순하게 해석하기에는 너무나 함축하는 바가 커 보인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밀라노 산타마리아 델레 그라치 수도원식당 벽화에 그려놓은 '최후의 만찬'에서 템플 기사단에 대한 암호(?)를, 그리고 미켈란젤로가 시스티나 성당의 벽화에 유대교의 상징들을 숨겨놓은 것처럼 권준 또한 이 3장의 연작 그림에서 그가 의도하고자 하는 바의 상징이 숨어있다고 보여 진다.
자, 그림을 보자. 권준이 그려놓은 청량의 하늘은 유독 푸르다. 시리도록 푸르다. 시려서 오히려 잔잔한 슬픔이 된다. 이런 날 선비들이 유람을 떠나고 있는 것이다. 앞서 걷는 3명이 선비고 뒤에 봇짐을 메고 따르는 두 사람은 승려다. 그런데 따라가는 두 스님의 머리가 숙여져 있다. 머리가 숙여져 몸의 중심이 앞으로 쏠리고, 그 중심을 두 발 끝에 세우고 있는 듯한 몸짓에서 한 시대의 전경이 눈앞에 파노라마처럼 스쳐간다. 단 한 폭의 그림이 주는 상징의 묘함 때문에 무수한 상상들이 피어오를 만하다. 조선 5백년을 뛰어넘어 고려로, 고려에서 다시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으로 시간은 역순으로 무한정 흘러간다. 그곳에서 지눌을, 의상과 원효을, 팔만대장경을, 도선을 만난다. 그림은 말한다. 역사를, 그 속에서 살다간 자잘한 인간사를, 세상이 돌고 도는 것을 상징으로 보여준다.
<이번호 4편에 이어 유청량산록은 다음호 5편에서도 계속 이어집니다.>
注
1) 일순(一瞬) - 일순간, 아주 짧은 시간
2) 유산(遊山) - 산으로 놀러다님 여기서는 선현들의 발자취를 따라간다는의미로 쓰임
3) 여서(女壻) - 사위
4) 자질(子姪) - 자손(子孫), 혹은 자여질
5) 청고고아(淸高高雅) - 뜻이나 품격 따위가 높고 우아하다
6) 박약(薄弱) - 불충분하거나 모자람
7) 완상(玩賞) - 즐겨 구경함
8) 일별(一瞥) - 한번 흘낏 봄
2009-02-15 17:36: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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