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견화가 권준 선생이 '퇴계오솔길'의 사계절을 가을부터 익년 여름까지 이어가며 주변풍경을 화폭에 담고, 매월당문학상 시나리오 부문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작가 최성달이 권화백의 그림을 글로 야심차게 표현한다. 이번 기획연재는 2009년 1월에 시작하여 매달 초순과 보름에 연재되며, 1년간 계속된다.

유청량산록은 4,5,6,7편 연작으로 되어 있다. 아래에 그간의 일정을 간략하게나마 밝힌다.

2월9일
정왜, 청담 두 스님을 모시고 권준화백, 오수현 형과 청량산 유람을 떠나다.
2월10일
청량산 유람을 이어가다
2월 11일
오전에 권준화백 피중찬 편집인과 한국국학진흥원에 참고문헌을 구하러 갔다가 반병목 처장과 식사를 하고 퇴계학파 인물시리즈 전질 10권과 국학교양총서 전질 5권을 얻어오다. 저녁 식사를 안동시 풍산읍에서 손중열 형 내외와 함께 하다. 돌아오는 길에 청담스님과 축서사에서 비구니 스님에게 차를 얻어 마시다.
2월 12일
권화백과 용수사에 가다. 정왜, 상운 스님에게 용수사 내력에 대해 이야기를 듣다. 용수사와 관련하여 유불 역사의 특이성을 발견하다.
2월13~14일
양일간 유청량산록 5편을 쓰다.
2월15일
글을 올리다.
2월16일
권준화백과 함께 안동시내에서 정왜 스님과 저녁을 먹다.
2월17일
친구 정오진과 학봉 김성일, 백죽당 배상지의 묘소를 둘러보고 진성이씨 두류종가, 퇴계종택을 둘러보고 용수사에 들러 차를 마시다. 청량산 일대를 둘러보고 돌아오다.
2월18일
김형국 경북바이오센터 전 소장을 만나 미래 안동시 디자인에 대해 고견을 듣다. 
2월19일
오전 11시에 안동문화원 회의에 참석했다가 오후에는 권준화백과 용수사에 가다.
2월 20일
절친한 벗 김진오, 권준화백과 청량산에 다녀오다.
2월21일
권화백과 이동수 선생, 정왜 스님이 공동대표가 되어 추진하고 있는 '도산9곡 문화연대' 창립 준비 모임의 장소인 오천 군자리를 다녀오다.

청량산 유람기 4,5,6,7편은 연작의 그림을 사상적으로 해석한 시리즈다. 그림이 한 눈에 들어오도록 정리하면 이렇다. 유청량산록 4편에는 그림이 석장 들어갔다. 선비 세 명이 앞장서고 스님 두 분이 바랑을 걸머지고 청량산 유람을 떠나는 장면이 첫 그림으로 올라와 있고, 축융봉에서 바라본 청량사의 원경이 두 번째 그림으로 떠 있다. 그리고 맨 아래에 오산당과 주위 풍광이 스케치되어 있다.

5편에는 선비들을 맞이하고 있는 스님들이 그려져 있는 용수사 전경을 필두로, 안심당이 그 다음에, 유리보전, 영은암 가는 길의 순서로 그림이 배치되어 있다. 영은암으로 홀로 걸어가는 퇴계의 전신을 제외하곤 하나 같이 선비들 앞에 스님들이 허리를 숙이고 있다.

살아난 영은암 (35cm×56cm)                                                                       Oil on canson paper

그리고 이번 6편의 그림들인데 맨 먼저 지금은 사라져 옛터만이 남아 있는 영은암이 그림으로 복원되어 있다. 두 번째는 퇴계 이황과 신재 주세붕이 청량사를 올라가고 있는 전경이다.

자! 그럼 이제 이 그림들을 일렬로 연결시켜보자. 권준은 무얼 말하려는 걸까? 불교 탄압, 아니다. 선비들의 호사와 권세, 아니다. 지난 역사의 추악함, 아니다. 조선조 선비와 스님의 생활상, 아니다. 아니다. 권준의 날카로운 붓질은 반목과 멸시의 현장을 포착하고 있되, 분열을 혁파한다. 증오를 분쇄하고 있다. 이 그림의 메시지는 반목이 아니라 화합이다.

유청량산록 연작 그림의 대미는 오천군자리 전경이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가 그렇게 울어대었듯 권준은 스님과 유림들이 손잡고 미래를 걸어가는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그 먼 길을 돌아 돌아서 온 것이다.

1. 권준의 영은암 복원도

그렇다면 이제 이 그림들이 실려 있는 순서대로 하나씩 다가가 보자. 맨 처음 그림은 용수사 영은암이다. 참고로 이 그림은 따로 떼어서 보지 말고 5편의 ‘용수사 일우’ 전경과 오버랩에서 봐주길 바란다. 이번호에 용수사 이야기가 많이 나오는데 이유는 퇴계와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권준이 복원한 용수사 영은암은 정면 3칸, 측면 1칸의 소박하고 단촐한 집 모양이다. 옛 터에 희미하게 남아 있는 흔적들을 보듬어 권준의 손으로 조영(造營)한 영은암. 한참을 넋 잃고 바라본다. 주위 풍광이며 오후의 햇살이 사색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인적이 드물어 고요한 이곳에서 퇴계는 뒷짐을 진채 마지막 돌계단을 올라서고 있다. 맑은 공기로 산책을 하고 난 뒤 방으로 들어가 주역과 씨름할 퇴계가 눈앞에서 살아 숨 쉬는 것 같다.

일순, 생각이 멈춘다. 정지된 자리에서의 영은암이 포근하게 다가온다. 은은하기에 고적하기까지 하다. 3칸 집에 투영된 감각은 그림의 집이 그림처럼 아름다워 황홀하다고 속삭인다.

그런데 참 이상하고도 아쉽다. 감각이 투시로써 피워 올린 감흥을 금방 무엇인가가 빼앗아 간다. 경험과 세뇌(교육)가 직관을 방해한 것이리라. 그리 유쾌하지 않지만 방법이 없다. 우리는 아직 기쁨을 오랜 기간 연장하고 지속시키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했다. 황홀함은 순간이고 우울의 생명력은 길다.

그 속을 의식이 파고든다. 불 지른 놈을 찾아내려고 혈안이다. 이제 심상의 노른자위는 분노가 차지했다. 정신의 천박성을 공격한다. 그러나 아직 완전하지를 않다. 시대상황이 간단치가 않기 때문이다. 이내 의식은 창조와 파괴라는 경계지역을 오락가락 한다.

그러다가 불쑥, 이 집이 실재하지 않다는 것에 생각이 이르자 묘한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그림 속에만 있는 집. 상상 속에서만 존재하는 공간. 비존재의 존재적 표현은 몽환적인 신비로움을 더해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한다.

농암이 학문을 닦던 곳. 퇴계가 주역을 공부했던 방. 금계 황준량과 간재 이덕홍이 수행을 했던 집. 용수사 본전에서 한참 떨어져 있어 한적함이 묻어나는 이곳에서 선현들은 무엇을 꿈꾸었을까?............묻지 말 것. 그대로 고이 잠들게 둘 것. 할 수 있고, 가능만 하다면 영원히 그림 속에서만 존재하기를 바라는 끝없는 욕망을 마음껏 누릴 것.

허나, 그래서는 안 될 것이다. 비존재의 만족감으로 존재감을 언제까지나 대체할 수 있을지 가 의문이다. 아마 힘들 것이다. 실재적 복원이 더 많은 축복을 줄 것이다. 나무의 질감이 주는 따스함과 풍경소리의 정겨움과, 경상 위에 놓인 고서의 향기를 직접 보고 들을 수 있다면 더 풍성한 영감이 우리에게 주어질 것이다.

그림으로의 복원은 이것을 위한 선행 작업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어느 날 용수사 영은암이 고증을 거쳐 복원이 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는 날 권준은 옷이라도 벗고 춤출 것이다. 

용수사의 어제와 오늘

권준 그림이 웅변하듯 용수사는 수많은 이야기들을 간직하고 있다. 우선 창건에 아픈 사연이 담겨 있다. 고려 18대 왕이었던 의종이 재위 24년 만에 무신들에 의해 폐위된다. 그리고 3년 뒤에는 총애하던 장수 이의민에게 곤원사 연못가에서 술 두어 잔을 마신 뒤에 등뼈가 꺾인 채 수장당하는 비참을 최후를 맞았다.

용수사는 형 의종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동생 명종이 세운 사찰이다. 용수사가 국왕의 원찰이 된 것은 수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 무신들의 눈을 피하기 적당했기 때문인데 창건비문에는 무신의 난이 있은 지 11년 후인 1181년에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비문은 당대 최고의 유학자이었던 최선이 지었다. 최선의 아버지는 유명한 문인이었던 최유청이다. 최유청 집안은 아들 넷이 모두 급제하는 등 당대 최고의 명문가였다. 최선은 그의 넷째 아들이다. 이 기록을 보면 의문이 생길 것이다. 유학자가 사찰 창건의 비문을 지었기 때문인데 퀴즈 하나를 내겠다. 고려의 통치이념이 불교일까? 유교일까?

우리는 막연히 고려를 불교국가였다고 단정하지만 이건 올바른 견해가 아니다. 고려의 정치이념은 유교였다. 유학자들이 다스리는 체제였다는 말이다. 제행무상(諸行無常), 제법무아(諸法無我)를 주창하는 불교 교리에 바탕을 두고 나라를 다스린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고려가 불교국가라는 일반의 인식이 쌓인 것은 종교적으로 불교를 국교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참 아이러니다. 고려는 불교가 정치기반 속으로 급속하게 빨려 들어가면서 민중과 괴리가 되었고, 조선은 유교통치 공고화의 필요성 때문에 집권층으로부터는 멀어졌으나 그 때문에 민중의 삶과는 떨어질 수 없는 애환을 공유했다.

비문에도 의외성이 있다. 최선이 연호를 순희(淳熙)라 쓰지 않고 금나라의 연호인 대정(大定)을 사용하고 있는 점이 흥미롭다. 역사는 대북실리정책이 광해군의 발명품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명분보다 국가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기조는 반도에 발 딛고 서 있는 우리들의 운명이었다. 북방정책이란 누대로부터 축적된 역사의 산물인 셈이다. 그걸 거슬러 삼전도의 치욕을 당한 것뿐이다.

용수사의 변천 과정 중 조선조에 들어와서 거유들과의 만남은 뒤에서 언급하기로 하고 불교사적으로 보면 서산대사와의 인연이 눈에 띈다.
그의 청허당집을 보면 "가슴 속에 품었던 생각을 시험 삼아 세상을 향해 외쳤더니 사람들은 그것에 감동되어 앞 다투어 시주하였다........라는 언급이 나온다.
서산대사는 1578년(선조11) 봄에 용수사 극락전 공사를 시작하여 61세이던 1580년 3월에 완공을 했다.

사명대사와는 임란으로 인연을 맺었다. 1591년(선조24) 임진년에 사명은 승병을 이끌고 용수사에 머물렀다. 그때 용수사 주지로 있던 경운선사(속성 임씨)는 안동지역 승병장이었다. 용수사 일주문 지나면 사명대사와 승병들이 말을 매던 곳에 하마비(下馬碑)가 세워져 있다. 거기서 다리를 건너 조금 더 올라가면 임란당시 의병부장이었던 용담 임흘(1557~1620)의 정자인 취규정이 나온다. 이 취규정에는 사명대사가 친필로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사명대사와 임흘은 일가다.

서애 가문과도 용수사는 인연이 깊다. 류성룡이 국난에 영의정으로서 국정을 지휘하고 있는 동안 형인 겸암은 어머니 등 가솔 100여 사람을 데리고 용수사로 피난 왔다.

오늘의 용수사와 영은암은 회양선문인 봉암사 주지를 역임한 원행스님이 복원하기 전까지는 근 100년간 흙더미 속에서 잠자고 있었다.

을미사변이 일어난 다음해인 병신년(1896)에 절이 불에 탔기 때문이다. 당시 시대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을미년(1895) 3월29일에 녹두장군 전봉준이 처형되었고, 8월20일에는 명성황후가 일본낭인들 손에 시해되었다. 이 때문에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났다. 안동지방에서는 척암 김도화(1825~1912)가 의병을 규합했다. 규합된 의병대장직에는 운산의 손자인 이중린이 임명되었다. 이중린은 1827년(순조27)에 치러진 중광시에서 장원으로 급제한 뒤 호조참의, 한성부부윤을 지낸 운산의 손자다.

영은암도 이때 함께 불에 탔다. 당시 영은암은 농암 집안의 소유였다. 용수사 소유의 영은암이 영천이씨 문중으로 넘어간 데는 사연이 있다. 당시 한성부의 문건을 살펴보면 재미있는 대목이 나온다.

"승도들이 재작년(1890 고종 28년)용수사 성전을 지을 때 공사 간 부채를 갚기 위해서 부득이 이 암자를 매매하였다........문중의 논의를 세워서 450냥으로 매입을 하여서 선조들의 형관지소(亨館之所)를 후손들의 강독지지(講讀之地)로 삼으니 참으로 좋은 일이 아닌가......." 
한성부 기록을 유심히 더 고찰하면 소유는 영천이씨 문중으로 하되, 사용권한은 용수사에 있다는 언급을 하고 있다. 이는 농암문중과 용수사 스님들 간에 사전에 합의된 사항이었을 것이다.

이중린은 용수사와 영은암(?)을 불지르고난 뒤 곤경에 처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의 해명을 들어보자.

"용수사를 불태운 것은 사리사욕으로 한 것이 아니고 나라의 기강을 해이해지니 도적떼들이 생겼다. 그런 장소는 도적이 생기는 곳이라서 청소를 한 것이다. 다만 영은암의 경우는 그곳에 사는 우매한 백성들이 저지른 일로 아는 바가 없다........."

이중린의 이런 해명에도 파문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농암의 14대 종손 낙애(洛厓)공이 경상감영에 송사를 넣었기 때문이다.

용수사가 복구된 것은 1992년의 일이다. 원행스님이 불사를 일으켜 대웅전 44평, 요사채 2동 각 98평을 재건하여 웅장한 옛 모습을 되찾았다.

퇴계와주세붕 유산동행 (35cm×56cm)                                                           Oil on canson paper

2. 문화의 확대재생산

이 그림은 이황과 신재 주세붕이 연대사를 향해 올라가는 모습이다. 오르막길이어서 두 사람은 느릿느릿 걷고 있다. 앞선 퇴계는 몸이 불편해서인지 지팡이를 짚었다. 걸어가는 두 사람 주위로 홍색 연등이 찬란하다. 그림의 배경에 연등이 있으나 부처님 오신 날 같지는 않다. 나무들 사이로 푸른색들이 돋아나지 않은 것으로 보아 겨울철로 보인다. 신도들이 365일 복 받으라고 이 절 주지가 사시사철 연등을 매달아 놓은 것인가 보다.

이황과 주세붕이 어떤 사이 길래 유람을 함께 할까? 기록을 보면 두 사람은 절친했던 것 같다. 신재가 1544년 4월9일 풍기를 떠나 10여 일 간 청량산을 유람하고 18일 날 돌아갔다. 이후 그는 이때의 유람을 기행문으로 남겼는데 그 책의 제목이 '유청량산록'이다. 바로 내가 4편부터 연작물의 제목으로 붙인 이름과 동일하다.

이황은 신재의 유람기를 풍기군수시절에 읽어보았다고 '주경유청량산록발'에서 밝히고 있다. 일종의 감상문인데 발문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여기서 그는 신재의 기행문을 '기이하고 웅장하여 마치 용이나 뱀을 붙잡는 듯, 호랑이와 표범을 때리는 듯 짐작할 수 없으니 실로 내가 미치지 못하는 바이다.'라며 그의 문장에 대한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이황의 호의(好意)에 찬 발문과 '단정하고 엄정하고 상쾌한 것은 비록 작지만 업신여길 수 없는 것으로 오직 청량산이 그러하다.'고 찬탄한 신재 덕분에 예안 고을의 작은 산에 불과했던 청량산은 일거에 전국적인 명산의 반열에 오른다.

이황과 주세붕의 깊은 인연은 나란히 풍기군수를 역임했다는 것에서도 확인이 된다. 신재는 역사적으로 기억될만한 두 가지 큰일을 풍기군수 시절에 했다. 하나는 개경에 가서 인삼 씨를 구해와 가난한 고을을 풍요롭게 만들었다. 다른 하나는 그가 우리나라 최초로 서원(백운동서원)을 만든 인물이라는 사실이다.

이황은 풍기군수시절 신재가 세운 백운동서원을 사액서원으로 만들었다. 이것 또한 최초의 사액서원이었던 만큼 획기적인 일이었다.

이 두 가지 사안으로 볼 때 두 사람은 환상의 찰떡궁합 같다. 신재가 일을 추진하면 퇴계는 마무리를 하는 모습이 손발이 척척 잘 맞아 보인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서는 두 사람 모두 주자학에 철저한 세계관을 공유했다는 점에서는 토를 달 여지가 없다. 특히 퇴계의 경우는 한국적 주자학을 완성시킨 조종이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신재 또한 일관되게 주자학 단일체제의 국가관을 끝까지 고수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체(體)의 구현을 넘어선 용(用)의 쓰임에 있어서는 미묘한 균열이 감지된다. 백운암기를 통해서 두 사람 간의 미묘한 시각차가 확인 된다.
이황은 청량산 백운암이 무너진 것을 스님인 도청이 중수한 뒤 기문(記文)을 요청하자 이에 응한다. 백운암기에도 나오지만 이황은 '고승과 고사가 있어 마치 원공과 도륙(도연명과 육유)의 무리들처럼 결사해서 처할 것인가? 문득 비승과 황백의 도술을 행하는 자가 마치 진도남처럼 문을 닫고 누워 한번 잠자기를 한 달 동안 할 것인가?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도청이 백운암을 중수한 공은 이에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이황은 백운암기를 중종 23년(1528)에 지었는데 그의 나이 28세 때다. 이때라면 그가 진사시에 합격하는 해이다. 후에 그는 관직에 있을 때 이 일로 주세붕으로부터 신랄한 비판을 받는다. 유부지작(幼婦之作) 즉, 어린애의 작품이라 하였으니 이 보다 큰 놀림이 어디 있으랴.

신재의 이 같은 놀림은 이단(불교)에 대한 관점의 차이를 노출한 것이다. 이황의 백운암기는 주세붕의 비판처럼 유부지작이 아니라 백운암의 승경을 유려하고도 아름답게 묘사했다고 평가받는 수작이다. 그런데도 신재가 이 같이 힐난한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불교를 바라보는 퇴계의 시각을 겨냥한 것이다.

이 같은 관점은 용수사와 관련하여 두 사람이 남긴 기록을 대조해 보면 금방 확연히 드러난다.
신재는 청량산 유람의 마지막 날을 용수사에서 보낸다. 그때의 기록이다.
'이 절은 고려시대에 지어진 큰 절로써 회나무와 잣나무가 빽빽하게 우거져 있으며 절은 반쯤 기울어져 있다. 두세 명의 중들이 거처하고 있었는데 추해서 가까이 할 수가 없었다. 다음 날 고려학사 최선이 지은 비문을 읽었다. 그가 유학자로서 임금을 속이고 부처에게 아첨한 악은 바닷물을 다 쓴다 해도 씻기 어려울 것이다. 들불로 태우고 깨뜨려야 마땅할 것이다.'
농암 이현보에게 보낸 시에서도 반감이 드러난다. 시의 일부분이다. 僧亡寺古塔半?(중 없는 고찰에는 탑이 반쯤 기울었도다.)

반면 퇴계에게 용수사는 학문을 시작한 곳이요, 안식처와 같은 곳이다. 일생 내내 그는 용수사에 대한 향수를 간직하며 살았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 용수사와 퇴계 집안과의 연원을 살펴보아야 한다.

퇴계가문과의 인연은 조부인 참판공 계양 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계양은 용수사에서 독서하고 있는 아들 직과 우에게 글을 보내 학문에 전념할 것을 독려하곤 했다. 이러한 노력 덕분에 퇴계의 부친인 직은 진사에 합격을 했고, 중부인 송재 이우는 문과에 급제하여 안동부사 등 여러 벼슬을 거쳤다.

여러 문헌을 고찰해보면 온계를 비롯한 퇴계의 형제들에게 미친 송재 이우의 영향은 대단했던 것 같다. 일찍 세상을 버린 형 직을 대신하여 가학연원을 이들에게 물려주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유청량산록 4편에 보면 권준이 그린 오산당이 있다. 청량사 바로 옆에 있는 건물인데 여기에 송재가 퇴계의 형제들에게 권학을 독려하며 쓴 시가 걸려 있다. 마지막 구절을 소개하면 이렇다.
此去須修遊錄返 이번 걸음에 기행문을 지어오너라/ ?中重欲較前尋 상자 속 내 작품과 견주어 보리라.

매사가 이랬다. 병으로 누워 있으면서도 조카들의 공부가 걱정이 되어 시를 부친 것이다. 이 정도면 '송재 없는 퇴계 없다'는 말을 해도 되지 않을까?
10 살 때 아버지를 잃은 회재 이언적(경주 양동마을)에게 외숙 우재 손중돈(이조판서 역임)이 없었다면 회재가 존재할 수 없었듯 퇴계에게도 중부 송재가 없었다면 오늘날 우리가 우러러 보는 퇴계는 없었을 것이다.

계속해서 용수사와 관련된 기록을 살펴보겠다. 퇴계가 12살 때 중부인 송재와 농암이 용수사에 묵었다. 이 무렵 퇴계는 온계 이해와 종제인 수령과 함께 숙부 송재에게 논어를 배우고 있었다.
24 세 때에도 형 해, 종자형 민시원, 종제 수령, 등과 용수사에서 달구경하며 연구(聯句) 73운을 지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46 세 때는 영주에서 돌아와 4월25일 용수사에 들어왔다. 그해 7월에 다시 들어와 종생질 오수영에게 시를 지어 보냈다. 원문은 생략한다. 내 조용한 산사를 즐겨서 방 한 칸에 근심 없이 누웠어라/푸른 이끼는 절집 문에 가득하고 종일토록 날 찾는 이 없어라/뜰 앞엔 작약 만발하고 담 뒤에는 칡넝쿨 푸르렀다.
55 세, 58세에도 용수사에 머물면서 지은시가 보인다. 66세 때는 손자 안도를 데리고 용수사에서 주자서를 강의했다. 용수사에 관한 마지막 기록은 죽기 3년 전인 67때다. 명종이 승하를 하여 집에 있기가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어 닷새를 머물다 돌아갔다. 그때 남긴 시다.
용수사 산방에서 하룻밤 지내나니 옛날 놀던 자취 완연히 남았도다. 공연히 내리는 새벽 비에 산길 희미한데 산사람이 속세로 떠남을 희롱하는 듯.

자, 이걸 염두에 두고 역사를 한번 되짚어 보자. 그러나 미리 말하건대 위의 글을 읽고 이황을 불교신도로 오해한다던지 정부시책에서 불교를 옹호했다고 오해해서 안 된다. 참고로 말하면 퇴계선생은 고려 조선을 통 털어 주자학을 완벽하게 이해한 최초의 인물이다. 그 힘으로 한국적 주자학을 완성시킨 것이다.

그렇다면 주신재와 퇴계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정서적 유연성의 차이일 것이다. 고려 유학자인 이승로가 '불교는 수신의 근본이고, 유교는 치국의 도다'라고 말한 유연성이 조선에서 제거된 마당에 퇴계와 같은 유학자의 유연성은 불교의 명맥을 유지하고 숨통을 틔우는 역할을 했다.
내가 이 말을 하면 주자학을 깊이 공부한 사람은 의아스럽게 여길 것이다. 이황이 한국적 주자학을 완성한 이후 조선의 사상적 일률성이 배가 되었는데 이 말이 어떻게 된 것이냐고 반문할 것이다. 맞는 말이다. 허나 그건 별개의 접근이 필요하다.

생각하여 보라. 김영삼 정부시절 발생한 IMF의 책임과 원인을 박정희의 개발독재에서 찾는 다면 이것이 올바른 접근방식인가? 이렇게 되면 경제학이론을 잘못 세운 케인즈에게까지 책임이 전가된다. 우리는 경험으로 이 부분의 접근의 잘못됨을 가려낼 수 있다. 박정희에서 김영삼으로 이어진 약 18년이라는 시간은 충분하게 박정희시절에 세운 모델을 시대에 맞게 수정할 수 있는 충분이 여유가 있었다는 점이 참고가 되어야 한다. 이제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지 자명해 졌을 것이다.
그리고 시대별 국가 운영의 방식에 대한 공과 또한 그 시대의 정신과 숙원 등 모든 것을 종합적으로 연결해서 판단해야지 어느 하나를 두고 전체인 것처럼 확대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을뿐더러 재발방지에도 도움을 줄 수가 없다.

이 점을 생각하면서 아래의 글을 읽어주기 바란다. 시대별 개혁하고 혁파하려는 사상이 고갈되었을 때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지 '청량산유람기'가 그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럼 먼저 신재의 글을 언급하면서 이 문제를 풀어가 보자. 신재의 유청량산록에는 청량산 일대의 산봉우리를 유람하면서 일일이 찾아간 암자들의 이름이 거재되어 있고 스님이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어느 한 부분도 호의적인 글이 없다. 거의 욕 수준이다. 그런데 신재의 영향이 컸던지 아니면 시대상의 반영인지 신재 이후 약 100여명의 선비가 청량산 유람기를 남겼다고 한다. 그 중에서 먼저 청량산박물관이 18명의 유람기를 펴냈다. 그런데 살펴 본 결과 동일한 패턴이 이어지고 있다. 스님을 종처럼 부리고, 모욕 준 글을 의도적으로 남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걸 좀 더 알기 쉽게 표현하면 주세붕이 1544년에 청량산을 유람했고, 배유장이 이 책 맨 마지막에 올라와 있는 배유장은 1647년 9월에 청량산을 유람했다. 그렇다면 이 책은 근 100년간의 기록인데 유심히 탐독하면 청량산내의 절집의 변천사를 한 눈에 볼 수 가 있다.

내가 일부러 유람자마다 찾아간 사찰의 이름을 분류를 해 보았다. 분량이 상당하여 일일이 여기에 적을 수는 없고, 정확하게 고증할 여력이 없어 확언할 수는 없지만 사람마다 명칭이 다른 것을 볼 수 있었다. 이것이 중첩인지 각기 다른 암자를 말하는 것인지 뜻을 세워 확인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그래야 청량산 일대의 사찰의 개수를 정확하게 알 수 있을 것이다. 명확히 알아야 복원하여도 그 옛날의 풍취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또 하나 이 대목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시간이 흐를수록 암자가 하나 둘 비기 시작하여 마침내 마지막 유람자가 갔을 때는 연대사 거처하는 몇 명의 스님을 제외하곤 청량산 일대의 절들이 모조리 텅텅 비었다는 사실이다. 지천으로 널려 있던 그 옛날의 절집은 지금 남아 있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누가 왜 이것들을 모조리 청량산에서 흔적도 없기 사라지게 하였단 말인가?

그리고 그 많던 스님들은 또 어디로 갔을까? 달마가 동쪽으로 간 것처럼 갔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서쪽(인도)이 힌두교가 융성하여 불법을 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달마에게 중국은 불법을 광대하게 펼치기 좋은 신천지고 별천지였으나 청량산에 주석하는 스님들은 야심한 밤 몰래 도주를 해야만 했다.

왜 그랬을까? 공역이 죽도록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사흘 멀다하고 선비가 찾아와 하대와 멸시를 하니 견디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공자가 제자를 시켜 꼭 기록해 두라고 당부한 말이 있다. 혹독한 세금은 호랑이 보다 무섭다는 말이다. 여자가 호랑이에게 지아비와 자식이 물려죽어 울고 있으면서도 맹수가 출몰하는 곳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는 그곳에 가혹한 세금이 없기 때문이었다.

당시 상황이 이 정도이면 이런 말이 회자될 만 했다. 가혹한 공역과 멸시는 선비처럼 무섭다. 이렇게 된 연유를 차근차근 풀어보아야 하는데 사실 이것이 참 예민하고 껄끄럽다. 미칠 파장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도 편안하게 살고 싶은 놈이다. 영악하여 괜히 긁어  부스럼내면 손해라는 것도 안다. 비싼 밥 먹고 지난 호처럼  스님 뒷이야기 과하게 쓰면 욕 된통 세게 날아온다는 것을 계산 못할 바보 천치가 아니다.

그런데 어쩌랴. 식자우환(識字憂患)은 글 읽는 놈의 운명 같은 것이다. 성정이 변죽 울리는 것만으론 견디지 못하고 정면으로 가야 직성이 풀리는 것을 어쩌겠는가? 할 말하고 두들겨 맞은 것이 차라리 공부하는 사람의 양심과 부합한다면 그것으로 족한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이러한 견해를 갖고 있다. 조선의 주자학 일변도는 의리와 염치를 일깨우고 사람 사는 도리를 이 땅에 심었다는 불멸의 업적에도 불구하고 필연적 편협성으로 나라와 국민을 위태롭게 하고 체질을 허약하게 만들었다. 나는 나의 이 말이 인류 보편사 측면으로 논구할 때 타당성과 합리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

조선 5백년 지속성의 힘이 주자학에서 나왔다고 가정해도 이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 국난에 분연히 일어설 수 있는 정신이 주자학에서 나왔다고 해서 국난을 초래한 바탕이 주자학이라는 사실이 변할 수는 없는 것이다. 주자학이 과학을 죽이고 사상을 죽이고 다양한 문화를 죽인 주범이 아니라고 누가 자신 있게 말 할 수 있으랴.

덧붙일 말이 있다. 청량산박물관에서 선조들의 유람기 2편을 곧 낸다고 하니 하나 제안을 하겠다. 총평에서는 적어도 유람자들의 축소 지향적 세계관이 불교문화를 퇴색시킨 맹점을 명확하게 지적하길 바란다. 1편도 마찬가지만 내용에서 유학자들의 편향된 세계관과 협소한 인식은 절간의 스님들에 대해 무지막지한 하대로 나타난다. 이걸 반성적 인식 없이 단순하게 해제하는 것으로 만족하여 엮으면 왜곡된 사고가 여과 없이 독자들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이것은 잘못된 방향으로의 문화적 확대재생산을 하는 치명적인 오류가 아닐 수 없다.

<유청량산록은 7편에서도 계속됩니다>

2009-03-16 12:15:31 / UGN 경북뉴스(ugnews@ug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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