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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작성일시 - 2009-02-28 19:30:04
'유청량산록'
권준, 퇴계오솔길 한(韓)문화 기획전(5)
 

중견화가 권준 선생이 '퇴계오솔길'의 사계절을 가을부터 익년 여름까지 이어가며 주변풍경을 화폭에 담고, 매월당문학상 시나리오 부문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작가 최성달이 권화백의 그림을 글로 야심차게 표현한다. 이번 기획연재는 2009년 1월에 시작하여 매달 초순과 보름에 연재되며, 1년간 계속된다.


2월9일 첫날, 청량산 유람에서 오는 여독(旅毒)을 용수사에서 풀었다. 정갈히 차려진 저녁상을 물린 권준화백, 수현 형과 나는 정왜, 청담, 상운 세 스님과 그림을 화제 삼아 밤 이슥하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날 우리는 권준화백이 연필로 스케치한 '선비 뒤를 스님 둘이 바랑을 걸머지고 따라가는 그림'을 두고 유사 이래의 불교사와, 조선 5백년의 유불선을 논하며 불꽃 튀는 거대담론을 주고받았다.

평소 같으면 저녁 9시에 잠자리에 드는 스님들이 속세간 상대하느라 10시를 넘겼다. 밤늦게 볼일이 생긴 수현 형 또한 급하게 산을 내려가야 했다. 미안한 마음을 안고 잠자리로 돌아오는데 공양주보살이 우리가 자려는 방을 가리켜 일전에 실력자 한 분이 하룻밤 묵고 갔다고 알려준다. 나는 이 사람이 용수사에 왜 왔는지 알 것 같았다. 당시 걷잡을 수 없이 불붙은 불교계의 반정부적 반발과 시각을 다독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촛불시위주도자들이 조계사에 몸을 의탁하고 있다는 것을 빌미로 경찰이 지관총무원장을 검문하자 불교계가 그동안 쌓인 감정이 폭발한 것이다. 법치주의 국가에서 경찰의 당연한 공무를 핑계 삼아 경찰총수 퇴진과 대통령의 사과를 요구하는 일면을 이해하려면 그 이면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이건 하나의 사안에 정체성 회복이라는 본질이 개입된 전형적인 예다.

내가 생각하기로 한국불교는 아직 약자의 처지다. 약자이다 보니 강하게 나오는 것이다. 조선 5백년에서 질적 축적이 제도적으로 배제된 영향이 아직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4,5,6편의 권준 그림을 보면 알겠지만 내용이 좀 이상해 보일 것이다. 거룩한 스님들이 전부 종처럼 심부름꾼으로 전락해 있다. 이건 픽션이 아니다. 역사적 사실을 문제의식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다.

고려 때는 스님들이 지배계급이었지만 조선조 5백년은 종으로 살았다. 계급적으로 천민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지금까지도 암묵적으로 이어지고 있다고 보는 사람이다. 스님들을 바라보는 사회적 눈이 많이 개선되었다고는 하나, 제도적 접근에서는 아직 걸음마 수준을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문화재의 80%가 불교에서 나오는 나라에서 정식 불교대학의 인가가 언제 났다고 생각하는가? 조선조 5백년간 불교대학은 존재하지 않았고, 해방되어서도 한참이나 불교대학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근 현대 통틀어서 정식으로 인가가 난 불교대학은 노태우 정부시절 개원한 중앙승가대학 달랑 하나 뿐이다. 신학대학이 지천으로 널려 있는 나라에서 뼈대 있는 중이 되려고 해도 될 방도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인지하고 권준이 그려놓은 작품들을 감상해 보라. 연작의 그림들 속에서 굴절의 역사가 한 눈으로 들어올 것이다. 난 이 그림을 보고 나서 몇 번이나 눈물을 훔쳤다. 잘못된 제도운영의 흠결이 이리도 큰 가 싶어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의 분통이 쌓여 자꾸만 눈물이 흘렀다. 생각 있는 자(스님)에게 가해지는 무지의 폭력이 얼마나 크고 깊었으며 그들은 5백년을 종으로 살았단 말인가?

  용수사 일우 (35cm×56cm)                                                                           Oil on canson paper

그런데 여기서 간과해서 안 되는 부분이 있다. 연작의 권준 그림이 주는 메시지는 과거형이 아니다. 현재를 직시하고 있으며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 생각 있는 사람들이라면 불교계가 정부를 향해 선전포고를 해놓고 경찰청장이 사과를 했다 해서 언제 그랬느냐는 식으로 슬그머니 꽁지를 내리는 모습을 보고 비애를 느꼈을 것이다.

그때 불교계는 정부의 조바심을 무기로 산적한 불교계의 난제들을 해결하는 방편으로 삼았어야 했다. 승가대학의 수를 신학대학에 근접하도록 요구하고, 서울대학 등에 산스크리트 (범어)학과의 설치를 주장했어야 했다. 그리고 도올의 주장처럼 동국대학에 불교음악과와 불교역사학과의 인가를 요청했어야 했다. 미술은 아예 단과대 수준으로 격상시켜 여기에다. 단청학과 불상학과 불탑학과 불교건축과 탱화학과 등의 개설을 밀고 나가서야 옳았다.

조선5백년의 억불숭유의 잔재를 털어내고 불교가 새 출발하려면 무얼 해야 되겠는가? 답은 하나다. 인재양성이다. 공부가 덜된 사람을 스님이라고 떠받들어야 하는 이 땅 중생들의 고통이 얼마나 간단치 않은지 이제라도 승가를 이끌어가는 분들은 헤아려야 할 것이다.

내가 이 말을 구구절절하게 하는 데는 이 최성달의 개인사가 크게 한몫했다.

3년 전쯤이었다. 글방을 구하려고 이리저리 백방으로 알아보고 있을 때였다. 마침 얼마 전 경북축구협회장인 된 친구 손호영이 봐 둔 곳이 있다며 빈 한옥으로 나를 안내했다. 새로 지은 70여 평 한옥에 딸린 땅이 2천 평이나 되는 나로서는 만장 같고 대궐 같은 곳이었다. 손호영의 말이 모 스님이 절을 짓기 위해 사둔 땅에 우선 요사만 지어놓았다는 것이다. 그 스님을 잘 알고 있으니 이걸 얻어주겠노라고 했다. 그리곤 며칠이 지났는데 친구 고경호가 열쇠 꾸러미를 손에 쥐어주었다. 스님하고 이야기가 다 되었으니 오늘부터 그냥 여기서 지내면 된다는 것이었다.

좀 황당한 입주이기는 했으나 의리 좋고, 인정 많은 두 친구 덕분에 2년 반을 거기서 보냈다. 그러는 동안 시인과 작가로 등단을 했고, 책이 두 권 나왔으며, 일생의 원이었던 사상의 뼈대를 완성했다. 올해 안에 살을 부쳐 마무리할 계획이지만 사상의 뼈가 이곳에서 완성이 되었으니 내 학문의 뿌리를 생성한 모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호사다마랄까? 행복이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고경호와 함께한 술자리에서 스님을 잘 아는 주인 여자랑 주고받은 말이 화가 되었다. 스님 여자 이야기를 경호와 내가 했다고 그 여자가 일러바친 것이다. 그 길로 스님이 불이 나게 산방으로 쫓아올라왔다.

"어떻게 스님에게 여자가 많다고 말할 수 있어요."

"그 여자가 말을 잘못 전한 거지요."

"그 여자는 거짓말할 여자가 아닙니다."

스님은 화가 나서 말했으나 난 그 말 밖에는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그리고 일주일이 흘렀다. 분을 마저 풀고 싶었던지 스님이 다시 찾아와 또 그 얘길 꺼냈다.

"그 여자는 내가 잘 아는 여잡니다."

"아 예--------"

"우리 절 여성신도회장입니다."

"아, 그렇군요."

말을 받아주지 않자 스님은 싱겁게 되돌아 내려갔다. 원래 풀어야할 일을 싱겁게 끝내면 마음은 더 독해지는 법이다. 이후, 스님의 행적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 전에는 잘 오지 않던 발걸음이 분주해졌다. 올라와서는 이것저것 간섭하기 시작했는데 하루는 비구니 둘을 데리고 와서는 집을 둘러봤다. 방을 둘러보고는 그 중 한 비구니가 물었다.

"거처한지 얼마나 되었나요."

"2년이 넘은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집지을 때 깎아놓은 법당 밑의 나무 조각들이 아직 그대로 있네요."

바라보는 눈이 경멸에 차 있었다. 순간 입 속에서 머리를 깎고도 눈에서 증오를, 입에서는 설화를 다 걷어내지 못했느냐며 쥐어박고 싶었으나 말문을 닫았다. 그 뒤에도 스님은 나무에 전지를 하라느니, 풀을 뽑으라느니, 고장 난 변기통을 고치라느니 성화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 때문에 공사를 몇 번 해야 했지만, 제 풀에 지쳐 분이 풀리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보살봉이 보이는 안심당 (35cm×56cm)                                                         Oil on canson paper

이런 처지를 알게 된 경호는 어떻게든 내가 쫓겨나는 것만은 막아보려고 동분서주했다. 가서 무름을 꿇겠다는 것을 내가 말렸다. 친구 생각하는 마음은 가상하나 잘못 없이 빌게 둘 수는 없었다. 평생 자기 사업 하면서도 돈 써가며 로비할 줄 모르는 놈이 친구 궁지에서 구하려고 인삼 사다가 스님에게 갖다 바쳤다. 그것마저 말릴 수는 없었다.

그리고 추석을 지내고 왔을 때였다. 친구 손호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금요일까지 스님이 집을 비우라고 했다는 것이다. 전화를 받는 날이 화요일이었다. 짐 싸고 글쓰기 적당한 거처를 구하기에는 날짜가 너무 촉박했다. 세상에 이런 경우는 없다 싶어 스님에게 전화를 넣었다. 이사 갈 곳을 정하려면 말미가 필요하니 시간적 여유를 좀 달라는 부탁을 드렸다. 그런데 스님말씀이 이사 오려는 저쪽(비구니 세분)하고 약속을 되어 있어서 곤란하다는 것이었다. 무슨 약속을 살고 있는 사람의 의중도 듣지 않고 정할 수 있냐며 따졌더니 추석 전에 손호영에게 말했다는 것이다. 아마 친구가 입장이 곤란해서 제대로 전달하지 않았거나 스님 말씀을 설마하고 들은 터였다. 그렇다고 이런 중요한 말을 직접 하지 않은 스님의 처사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자리에서 입 잘못 놀린 보복(?)을 당한 것이다. 그러나 무조건 사정하고 매달리는 수밖에 없었다.

"스님 얼마간의 여유를 좀 주세요."

"안 됩니다."

그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입에선 육두문자(?)가 거칠게 쏟아졌다.

"이게, 중새끼, 부처새끼가 하는 짓입니까?"

"뭐라고, 니 지금 나보고 새끼라고 말했나?"

"그럼 누구 새낀데요."

"어, 이 새끼 봐라. 새끼라고."

"십팔, 그러면 스님이 중새끼 부처새끼 아니면 누구 새끼입니까?"

"너 거기 꼼짝 말고 있어라. 네 당장 쫓아 올라간다."

"빨리 오세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아차, 싶었지만 한편으론 실컷 골려주고 나니 속이 다 후련했다. 이건 실화다. 한 치의 더함도 뺀 것이 없다. 이 상황을 한번 떠올려보라. 고래고래 고함을 치며 주고받은 대화였다. 전화를 끊고 나니 아찔했다. 화가 치밀어 심장이 벌렁벌렁 거리고 목울대를 세우느라 경황이 없는 상황에서도 육두문자를 품위 있게 했다는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웠는지 모른다. 만약 그 순간 내공이 모자라 X새끼, X새끼 했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이유 불문하고 거적 깔고 몇 날을 석고대죄 해야 했을 것이다.

만약, 그날 스님이 산방으로 올라왔다면 틀림없이 또 물었을 것이다.

"나보고 참 말로 새끼라고 했나."

그러면 난 아주 부드러운 미소와 나근나근한 목소리로 그럼 스님이 중새끼, 부처새끼가 아니면 누구 새끼이오리까, 라며 반문했을 것이다.

그 순간 대오한 스님이 지축이 흔들릴 정도로 파안대소했다면 난 공손히 무름을 끊고 스승의 예를 다했을 것이다.

그러나 벼락같이 달려오겠다는 스님은 툇마루에 결가부좌를 튼 내 두 다리가 저려오도록 오지를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스님이 주석하고 있는 절로 찾아가야만 했다. 스님은 외출하고 없었다. 아마, 분통이 터져 어디서 몸조리하고 있었을 것이다. 전화를 걸었다. 수화기 저쪽에서 들려오는 스님의 첫마디가 또 그것이었다. 아예 각이 터져 라며 이번에는 더 큰 소리로 스님은 중새끼, 부처새끼라고 외쳤다.

"어, 어, 어, 저 새끼가 나보고 또 새끼라 카네."

몇 번이나 중얼거리는 소리가 수화기를 타고 흘렀다. 그리곤 함께 있던 선배가 전화를 이어 받았다.

"봐라, 니, 이라면 안 된다. 스님에게 사과해라."

"스님 모시고 오세요."

선배가 먼저 왔고, 20여분 뒤 스님이 도착했다. 스님 방에 단둘이 앉자말자 마음먹고 할 소리를 다해됐다. 내가 한 말은 술 집 주인이 스님에게 한 말에 대한 해명이었다. 그날 사건의 발단은 내가 사는 글방의 주인이 모모스님이라는 사실을 안 여자들이 입을 함부로 놀리는 바람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가 스님에게 말했다.

"그 여자가 저희들에게 스님 애인이라고 말하는 걸 전하는 것이 옳았겠습니까? 팔방으로 놀러 다녔다는 이야기가 그렇게도 듣고 싶으십니까? 어찌, 가볍게 뱉은 말만 믿고, 무겁게 다문 입은 보지를 못하는 것입니까? 술자리의 분위기가 여자들의 입을 통해 너무나도 확연히 스님에게 여자가 많다는 사실이 기정사실화 된 상황에서 저희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입을 다물거나 변명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와 제가 스님 여자 이야기를 꺼낸 것은 스님도 남자인데 여자가 있으면 무슨 대수냐는 말이었지, 여자 많다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어찌 말이 그렇게 180도 돌려진다 말입니까."

난 솔직히 무료로 집 한 채를 얻고 쓰고 있는 주제라 주인어른인 스님의 여자를 논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더구나 내가 뭐 그리 결백하다고 다른 남자의 아랫도리를 거론한단 말인가. 질투에 찬 여자 하나가 방편을 알아듣지 못해서 일어난 일이거늘 어찌 가사장삼 걸치고 부처와 조사의 말씀을 설하는 승이 이걸 하나 알아듣지를 못한단 말인가.

스님이 그제 서야 말귀를 알아들으시고 다소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돌아서 내려오는데 계단아래에까지 배웅을 해 주었다. 그런데 그 계단 끝머리쯤에서 내 뱉은 스님의 말씀이 압권이다. 방안에서 워낙 여자 이야기가 긴박했던지라 새끼라고 한 말을 깜박 잊고 있던 스님이 기어이 이 말을 꺼내고 말았다.

"우리 클 때는 중새끼라는 말이 아주 큰 욕이었는데......"

"스님, 공자 새끼라고 하는 것이 욕입니까? 훈장 새끼라고 했다고 그게 욕이 됩니까?"

옆에 있던 선배가 한 마디를 거들었다.

"아직 우리 공부가 조금 모자라는 모양입니다."

그 말에 스님은 입을 다물었다. 일의 결말이 이것으로 마무리가 되는가 싶었다. 저녁 늦게 전화한 손호영이 전하기를 스님이 생각이 짧았다며 사과를 하더라는 것이다. 집은 그대로 있어도 될 것 같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런데 웬걸 금요일이 되니까 비구니 세분이 들이닥쳤다. 내가 어디에 있는 분들이냐고 물었더니 어디어디에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공찰인데 왜 스님들이 그 절을 버리고 개인 소유의 사찰에 머물려고 하는지 궁금하여 물어 보았다. 그랬더니 돌아온 대답이 경악할 수준이고 한심할 지경이었다. 그곳은 스레트 지붕이고----뭐라 뭐라고 말하는데 다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말하자면 더 좋은 환경으로 삶의 질을 쫒아 이사를 하겠다는 말이었다. 그럴 바에야 출가는 왜 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희한한 일은 며칠 뒤에 벌어졌다. 분을 이기지 못한 스님이 여기저기에다 대고 이 최성달이가 자기에게 새끼라고 욕을 했다며 떠벌리고 다닌 것이다. 속인에게 욕먹었으면 부끄러워서도 입을 다물어야할 스님이 그걸 사방팔방 광고하고 다녔으니 이걸 어떻게 받아 드려야할지 몰랐다. 그 바람에 오히려 내 쪽에서 해명해야 하는 이상하고도 희한한 일이 발생한 것이다.

  영은암가는길 (35cm×56cm)                                         Oil on canson paper

말하자면 못난 이 사람이 은혜를 베푼 고마운 스님에게 욕을 했다 해서 소위 주먹 형님들이 못마땅하게 여겼다는 것이다.

"가가(최성달), 스님한테 그라 먼 되나. 집주고, 밥 주고, 더러 담배도 사 준 모양인 디, 배은망덕 한 놈 아니여."

이 최성달에게 공덕을 쌓은 스님이 한 가닥 하는 주먹이시라 동료 주먹들이 동병상련을 앓을 만 했다. 그런데 가만히 듣고 있는 주먹 친구 형님이 한마디 했다고 한다.

"마, 치워라. 가가 스님한테 그랬으면 이유가 있을 기다. 생각 있는 사람인데 우리가 나설 일이 아닌 거라."

양아치와 건달과 협객의 차이점이 뭔지를 아나. 배운 놈을 부릴 줄 아는 놈이 건달이고, 지성에게 고개를 숙일 줄 알아야 협객이다. 이도저도 아니면서 그저 힘으로 누르려는 놈들이 양아치다.

선현도 우릴 못보고 우리도 고인을 못 뵈나 안동의 주먹 수준이 이 정도는 된다. 법방이 뭔지를 알고 있는 것이다. 퇴계 선생이 일구고 후학들이 받들어온 유림의 향기가 지금도 골골이 이어져와 그 원력의 향기가 주먹들에게까지 미치고 있음이다.

새벽 잠결 은은한 목탁소리에 눈을 떠보니 3시10분이었다. 노곤함이 다가시지 않았으나 독경소리에 정신이 맑아지니 몸 성가신 줄 몰랐다. 청담스님이 옷을 주섬주섬 입고서는 법당으로 향했다. 다시 눈을 감았다가 인기척에 떠보니 법당 갔던 청담스님이 돌아와 있었다. 5시 10분이었다. 두 시간 동안 정왜 스님이 목탁 치며 불경을 암송하고 청담 상윤 두 스님이 절 공양을 한 모양이었다.

"아이구, 다리야."

"몇 번이나 절을 했습니까?"

"그걸 뭐 헤아리면서 하나."

"기도를 열심히 했는데 다리가 왜 더 아프다고 그러시지?"

"최 거사는 이 청담이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살려나."

"그러게요. 제발 오래 사세요."

관절염 있는 청담스님이 아픈 것을 참으며 절하는 모습을 상상하니 웃음이 절로 나와 농으로 한 말이었다. 그러자 스님은 속세간이 승을 놀렸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며 슬그머니 다가와서는 간지럼을 태웠다. 힘주며 간지럼 태우느라 씩씩거리는 스님의 숨소리와 간지럼 참느라 깔깔깔 거리는 내 웃음소리가 새벽 청정한 공기를 갈랐다. 오지게 간지럼을 타고 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기도발이 약해서 관절이 성한 곳이 없다고 놀렸다가 한판 흥건하게 웃고 나니 번쩍 든 정신이 상쾌해졌다. 아! 기분이 너무나 좋았다. 유년시절 따사로운 가을 햇살에 피부를 내놓은 것만으로 젖어들었던 오후의 나른함 같은 행복감을 얼마 만에 누려보는가? 일상으로부터의 단순한 행복을 회복한다는 것. 행복의 영감과 원천인 사람을 곁에 두고 있다는 것이 얼마만큼의 행운이고 행복인가? 고맙고 감사한 마음으로 바라보는 내 눈빛을 청담스님은 알고 있는 걸까?

2월10일. 아침공양을 6시에 하고 산에 올랐다. 전날 시간이 쫓겨 지나쳤던 청량산 초입에서 안심당을 권준화백이 스케치하는 동안 우리 일행은 어제 밤에 산 내려간 수현 형을 기다렸다. 스케치가 끝나도록 수현 형은 오지 않았다. 산중이라 그런지 전화도 불통이었다. 기다리다 지친 정왜 스님이 퇴계 선생의 시 한 수를 읊었다.

烟巒??水溶溶 봉우리는 쫑긋 쫑긋 냇물은 졸졸졸

曙色初分日欲紅 새벽이 밝아오자 붉은 해 솟으려 하네

溪上待洙顯不至 계곡 위에서 (오)수현 기다려도 오지 않으니

擧杖先入畵圖中 지팡이 들고 내 먼저 그림 같은 산 속으로 가려네.

군군(君君)의 글자를 수현(洙顯)으로 바꾸고, 채찍편(鞭)을 지팡이장(丈)으로 바꾸니 영락없는 정왜 스님 모습이었고, 이 때문에 기다리는 심정이 더 절절하게 와 닿았다. 청량사에 도착하니 권준화백은 다시 유리보전을 스케치하기에 바빴다. 어제 한 장을 그렸는데 구도가 성에 차지 않는다며 다시 그리기 시작했다. 그때서야 수현 형이 도착했다.

다시 뭉친 우리 일행은 정왜 스님을 따라 이곳 청량사의 주지인 지현 스님의 '3개의 보물이 있는 방'으로 갔다. 산 아래가 훤히 내려다보이도록 남쪽 벽면에 통유리를 설치해 바깥 풍경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아담한 방이었다. 유리벽면의 사각구도에서 내려다보는 청량산의 정경은 그야말로 비경을 펼쳐놓은 한 폭의 산수화다.

방안에서 두런두런 둘러앉아 차를 마시는 풍경도 산수화를 옮겨 놓은 듯했다. 기이하게도 차 받침대가 하나 같이 깨어진 막사발 조각이었는데 운치가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동형의 배열과 나열에서 옛것의 운치를 발견하도록 배려한 지현스님의 발상이 괴이하면서도 놀라웠다.

저 푸른 산위에 지은 집. 그곳의 방은 고립이 아니라 열려 있다. 닫혀 있되, 닫혀 있지 않고, 떨어져 있되 떨어져 있지 않다. 방이 자연이고 자연이 방이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방에는 보물이 하나 더 있다. 이슬과 감로주가 번뇌를 걷어냈음이라. 해맑아 차라리 해탈승 같은 눈부신 미소가 있다. 청량산 가는 세상 사람들이여! 귀 있으면 듣고, 눈 있으면 가서 보라. 그곳이 극락(방)이다. 불국토(깨어진 막사발)다. 정토(지현스님의 미소)다.

유리보전 바로 앞에 오층석탑이 있는데 지난 호에 이 이야기를 하면서 중요한 것 하나를 빠뜨렸다. 이 오층석탑은 요즘 대박을 터트린 독립영화 '워낭소리'의 오프닝에 나오는 배경이다.

  유리보전 앞에서 (35cm×56cm)                                                                    Oil on canson paper

1억원의 저예산으로 3년간 촬영한 무대의 배경은 봉화군이다. 봉화에 살고 있는 두 노부부와 그 집에서 키운 늙은 소가 주인공이다. 그 주인공 두 부부의 아들 중에 최영두라는 사람이 있다. 이 분은 권준화백과 내가 하고 있는 작업을 후원하는 최고의 든든한 백그라운드다. 1,2,3,4편의 댓글을 확인을 해 보면 알겠지만 단 한 번도 빼놓지 않고 감상평을 올려놓았다. 영주시 모 고등학교에서 미술선생님을 하고 있는데 권준화백과는 대학 동기동창이다.

이 양반이 3년간 '워낭소리'를 만드는데 숨은 공로자다. 부모님과 집의 소가 주인공이다 보니 스탭들과 3년간 동고동락했다.

영화가 개봉되고 관객 1백만이 돌파되었을 때 집으로 한통의 전화가 왔다. 대통령이었다. 대통령이 영화에 너무 감동한 나머지 만나고 싶다고 말한 모양이었다. 대통령이 흥분했는지 전화를 받은 최선생의 부친이 정신이 없었는지 하여간 부리나케 소 무덤에 봉분 올리느라 고생을 했다고 한다. 비가 많이 내려 소 무덤이 무너져 내린 것인데 그 바람에 겨울비 맞으며 소 무덤 세우느라 고생한 사람은 최영두 선생이었다.

예나지금이나 높은 사람의 한마디는 아랫사람을 구속하는 힘이 있다(?). 청와대에서 온다고 했으니 노부부와 최선생이 기다린 것이다. 그런데 정확하게 언제 오는지를 못박아주지 않은 바람에 늙은이들이 군대에서 출동대기하며 기다리는 5분 대기조 꼴이 된 것이다. 대통령은 위로한답시고 빈말을 했는지 몰라도 소하고 지극정성 벗하고 산 사람들이다 보니 이 말을 철석같이 믿은 것이다. 우리 같은 평민도 그러할진대 대상이 대통령이다 보니 서운함이 배가 되는 것은 인지상정일터이다.

내가 골이 나는 것은 다름이 아니다. 못 오면 전화라도 해야지 왜 죄 없는 사람들 기다리다 반초죽음 되게 하나. 우라질, 그러다가 권준 최성달의 열혈 팬인 최영두 선생이 병이라도 나면 댓글을 못 달 것인데 그걸 청와대가 책임질 수 있냐는 말이다. 평민은 작은 것에도 목숨을 건다. 무지해서가 아니라 순박해서 잘 믿고 잘 속는다. 높은데 있을수록 말이 가벼우면 골치 거리가 된다. 당부하노니 사랑하고 존경하옵는 임이시여! 제발 민초들에게 골치 거리만은 되지 마소서.

3개의 보물이 있는 지현스님 방을 나온 우리 일행은 어제와는 반대편인 연화봉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연화봉은 청량사의 서쪽에 있고, 봉우리가 연꽃을 닮았다하여 주세붕이 붙인 이름인데 원래는 의상봉이다. 이 산 중턱에 그 옛날 정수암이 있었다. 연화봉 주위에는 향로봉과 병풍바위가 있다. 이곳을 둘러보고 뒷실고개를 타고 한참을 더 올라가니까 지현스님의 표현대로 하늘다리를 마주보고 떠받치고 있는 자란봉과 선학봉이 나왔다. 머리를 들어 위를 보니 하늘이 그제께보다 공중으로 달아나 있었으나 밑이 더 아득하여 더는 위가 없는 천계에 오른 듯싶었다. 가끔 바람이 귀전을 스치면 천상의 음율이 오금을 파고들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운무를 받아 마시니 스님 따라 우리도 부처가 된 듯 하늘로 날아오르는 기분이었다. 그제 서야 정신을 차려 아득한 저 멀리로 눈을 돌리니 삼남을 굽이도는 산봉우리와 강물의 줄기가 가없이 잇닿아 끝 모르는 별나라처럼 아스라하기만 했다.

청량산에서 제일 높다는 장인봉(870m)에 올라서는 각자 준비해온 퇴계의 시를 읆었다. 권준화백이 '約與諸人遊淸凉山馬上作'이라는 시를 독송했다.

居山遊恨未山深 메 속 산이 오히려 덜 깊음이 한이어라

辱食凌晨去更尋 새벽밥을 먹고 가서 다시 찾으련다

滿目群峰迎我喜 뭇 봉우리 눈에 가득 나를 맞아 기뻐하니

騰雲作態助淸昑 구름 속에 얼굴지어 맑은 시를 돕는구나

그러자 수현 형이 '노동'이라는 시로 화답했다.

山農住山城 산중의 농민의 산성이 있어서

沃土耕非緩 좋은 땅이라 갈기를 늦추지 않았다.

如何捨此去 어찌하여 이곳을 버리고 갔느냐

町?荊棘滿 밭고랑이 묵어 있구나

欲反畏里胥 되 오려 해도 아전들 두려워서요

非關生理短 먹고 사는 것이 시원찮은 것이 아니라네.

청량산 정상에서 출가승과 속세간이 한판 흥건하게 어울렸으니 구경 한 번 볼만했다. 이 그림도 언젠가는 권준의 화폭 속에서 살아날 것이지만 그전에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정왜 스님의 강호처사 기질이었다. 문학에 해박한 스님의 입을 통해 되살아난 시들이 줄 줄 줄 바람을 타고 일부는 계곡으로 흘러들고, 일부는 승천하는 용처럼 하늘로 올라갔다. 이 시는 유청량산록 4편 댓글에 달려있으나 실은 이날 즉석 읆은 것이었다. 여기 옮겨본다.

-청량산을 유람하며-

청량산 기슭을 걸음걸음 오르며 산천을 굽어보니

오내르며 원 세운 길손 굽이굽이 산 탑을 세웠구나

깎아지른 계단 따라 참배객들 구름 밟고 오르고

지팡이 꺾어 허우적허우적 산속을 더듬으니

여기가 신령이 사는 천계인가 싶구나!

구름은 어머니 무명치마마냥 산허리를 휘감고

계곡타고 지르는 바람 소리 천상음악일러라!

숨 고르며 한 계단 한 계단 산사에 오르니

그림 그리는 이는 산 그림자에 빠져 풍새 담기 바쁘고

글 쓰는 이는 산 울음에 취해 글새 담기 바쁘다.

탑 아래 보이는 산경 오후 햇살 머금으니

산허리 절벽 아스라이 마음 찔러라.

유리보전 천정에 중생 소원 주렁이 주렁이 매달려있고

법당 지장보살은 소원 들어주려 한발을 내려놓았다.

주지방 유리창 너머로 보이는 풍경 벗 삼아

승이 내리는 차를 마시니

중생의 것은 계곡 아래로 내려가고

부처의 것은 산경으로 오르는 듯하구나!

골짜기 한가득 매달려있는 연등은 소원 들어주는 등불일진대

내 마음이 분탕 쳐서 부처는 간데없고 산새들만 반긴다.

치원이도 살았고 이황도 찾아온 청량산을 오늘 나도 유람한다!

하룻밤 하루낮 놀다가기는 이 산이 그만일러라!

정왜 스님의 '청량산을 유람하며'라는 시에 답한 것이 아래 '정왜' 라는 제목의 시다.

-정왜-

그대는 필시 요요화상의 화신일지라

비경을 한번 읆으면 달은 호수에 차고

바람은 허공을 가득 채우리니

내 무엇이 부러워 이 산을 내려간단 말인가

그대 주렴 우는 삼경

분강 띄운 배에 올라

백아의 청풍조 한곡을 목 놓아 불러보리라.

내가 정왜 스님을 얼마나 흠모했는지는 이 시에 잘 드러나 있다. 말법 시대에 법을 이어갈 스님을, 문학하는 스님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나는 그를 때론 스승처럼 때론 도반처럼 모시며 한 세상을 살고지고 싶은 욕망으로 가득 차 있다. 빈 말이 결코 아니다. 스님의 법명 정왜(正歪)을 보라. 이것이 무엇을 함축하고 있는지 살펴보라? 동서양 철학의 결정이 이 두 자 속에 모두 투영되어 있다. 正 不 正, 정왜(正歪). 잘 보면 알겠지만 '왜'자를 파자로 하면 아니 불과 바를 정이 합쳐져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을 해석하면 '바름이 아니어야 바름이다'. '바름을 금해야 올바름이다' '갖춰지지 않을 때 바름이 된다' '갖춰지지 않아야 갖춰진 것이다' 뭐 이런 식이 될 것이다. 앞으로 내 호는 심인방이 아니다. 正 不 正, 정왜(正歪)다.

이 말을 듣고 독자 중에 혹여, 헤겔의 정반합을, 니체의 철학을, 노자의 도덕경을, 금강경을, 다윈의 진화론을, 바가바드기타를 떠올렸다면 나는 당신을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업어 줄 용의가 있다. 정왜라는 두 글자 속에는 이러한 철학과 경전이 말하고자 하는 어마어마한 상징이 함축되어 있다.

먼저 이해를 위해서 하나씩 간단하게나마 접근해보자.

금강경 구절 중에 如是滅道無量無數無邊衆生 實無衆生得滅道者. 해석하면 "이와 같이 헤아릴 수 없고, 셀 수도 없고, 가없는 중생들을 멸도 한다고 하였으나 실은 멸도를 얻은 중생은 아무도 없었어라."

이것과 비슷한 것이 성철스님의 열반송이다.生平欺狂男女群/彌天罪業過須彌/活陷阿鼻恨萬端/一輪吐紅掛碧山.

해석하면 일생 동안 남녀의 무리를 속여서 하늘을 넘치는 죄업은 수미산을 지나친다.

산채로 무간지옥에 떨어져서 그 한이 만 갈래나 되는지라. 둥근 한 수레바퀴 붉음을 내뿜으며 푸른 산에 걸렸도다.

무상정등각을 이뤄 더는 오를 수 없는 무상사 위(位)에 오른 세존의 말과 고승으로 해탈했다는 성철스님의 마지막 언어를 우리는 어떻게 받아드려야 할까?

나는 이 말이 한 인간의 구구절절한 심정에서 나온 진실이라고 믿고 있다. 대다수의 해석론자들이 이 말을 구차하게 역설적으로 해석하고 포장하기를 좋아하지만 이것은 눈속임이다. 왜 사람들은 있는 그대로를 보고 받아드리지 않고 성인과 현자를 우리가 근접할 수 없는 영역으로 밀어 넣을까? 혹시, 환상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만약 성현이 우리가 노력해도 도저히 범접하고 따라갈 수 없는 존재라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이건 참말이지 역겨운 짓이다. 인간적인 그대로의 모습으로도 충분한데 왜 쓸데없이 미화를 한단 말인가? 학문하고 글 쓰는 자라면 흠모하고 존경하되, 맹신하지 않으며, 비판하되 시비하거나 트집 잡지 않은 자세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생각해 보라. 자꾸 그럴 듯하게 꾸미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의 말대로라면 세상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멸망했을 것이다. 세존이 살아서 해탈하고 외친 것 중에 공중으로 나는 것, 땅을 기어 다니는 것, 물속을 헤엄쳐 다니는 것 등을 모조리 해탈하고 적멸하겠다고 했는데 정말 그렇게 되었다면 지구에 어떤 현상이 벌어졌겠는가? 윤회가 끊겨 생명체는 이어짐이라는 생존기반이 와해되어 멸종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하지 않았겠는가?

생지옥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공자가 백성을 모조리 제도했다면 세상은 끝장이 나는 것이다. 싯타르타가 중생을 가리지 않고 적멸했다면, 전지전능한 예수가 어린양들이 불쌍하다고 아버지 품으로 모두 올려 보내면 그건 구원이 아니라 멸망인 것이다.

정왜라는 두 글자 속에는 멸망, 멸종이 아니라 지속성을 담보하는 철학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 헤겔이 정을 이야기 했을 때 그 정은 고정불변 진리의 정이 아니라 모순을 내포한 정이다. 반으로부터 공격당할 수 있는 정이다. 그 반이 있기에 합이 나오는 것이다. 그러나 그 합도 완성을 의미하는 합이 아니다. 다시 정과 반으로 이어지고 넘어가는 합이다. 이러한 역동성이 있어야 지구가 멸망하지 않고 지속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형태는 후일 인간의 삶이 의미 없는 반복의 순환이라고 갈파한 니체 철학으로 전이된다.

바가바드기타의 예도 다르지 않다. 아르주나가 생명을 다치게 하고 사촌을 죽여야 하는 죄의식 때문에 전쟁을 망설이자 화신이고 주님인 크리슈나가 전쟁을 독려한다. 크리슈나는 말한다. 전사로서의 의무와 죄의식이 충돌하는 자아는 영원한 자아가 아니라 육화된 자아이다. 영원한 자아는 행위 하지 않아 살해하지도 살해당하지도 않는다고 말한다. 여기에 동원되는 논리가 변증법인데 서양철학의 영감이 아마 여기서부터 출발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노자의 도덕경 첫머리에 나오는 道可道非常道(도를 도라고 말할 수 있는 도는 이미 도가 아니다)라는 말이나 다윈의 최적자 생존법칙 또한 일정부분 변증법적인 논리 위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이걸 좀 더 쉽게 말하면 이렇다. 正-不-正. 善이 惡 없이 판별이 가능한가를 고민해 보라? 선의 존재가치는 악이 있으므로 가능한 것이다. 애초에 악이 없었다면 그것을 우리가 인식할 수 없다면 선은 선이 아닌 것이다. 선이 선으로써 존재를 부여받을 수 있는 근거는 오로지 악으로서의 상대개념으로써 존립할 수 있는 것이다.

단숨에 쓰고 보니 오늘 글이 읽기에 좀 난해한 부분이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독자들이여 제발 글을 쉽게 써 달라고 조르지 마라. 그건 생떼고 결례다. 내 글쓰기의 목표 중 하나는 학문과 독서의 생활화를 촉진하는 전사로서의 역할이다. 읽다가 어려운 부분이 나오면 찾고 공부해라. 쓰는 놈 보고 자꾸 동화처럼 써 달라고 하는 것은 어른보고 어린애(순수함을 말하는 것이 아님)로 돌아가라는 말과 같다. 걸리고 막힘이 있으면 스스로 공부가 모자라는 것을 한하고 탓할 것이요, 남 탓하지 마라. 내가 참을 수 없는 것은 글 어렵다고 면전에다 대고 나를 나무라는 족속들이다. 참으로 염치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들이다. 언제부터 우리가 모르고도 큰 소리를 치는 세상이 되었는가? 무식은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이 아니다. 무지하기에 당당할 수 있는 것이다. 무지해서 상식에서 벗어나면 그것이 죄가 아니고 무엇인가?

<유청량산록은 6편에서도 계속됩니다.>

  2009-02-28 19:30:04 / UGN 경북뉴스(ugnews@ug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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